19화
##019
시간은 빠르게 흘러 출정 하루 전날이 다가왔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샤로트 베리는 당연하다는 듯 단전을 만들었다. 그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레오폴트도 마나 로드 개통에 성공했다는 것.
-성장이 빠르군. 바로 단전을 만들어도 되겠는데?
녀석들의 빠른 성장에 리안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감추며 심통을 부렸다.
-어차피 이놈은 집에 가면 최고급 마나 심법을 배울 거니까 내버려 두세요.
이거 너무 퍼 주는 거 아닌가 싶네.
정작 필요한 자신은 단전도 서클도 만들지 못했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은 레오폴트조차도 단전을 만들었는데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리안 본인이 본가에서도 외가에서도 내쳐지다시피 한 이
유가 그 때문인 것 같았다.
마나 로드까진 일단 개통했는데, 검도 마법도 재능이 없었기에.
그러다 운 좋게 윗대 형제들이 자신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며 죽는 바람에 후계
자가 되어 버린 거고.
“영약을 더 써야 하나··· 어떻게 합니까? 선장님.”
리안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이들의 성장이 빠른 이유가 있었다.
“아니야. 1,000페니나 썼으면 됐어. 더 써 봐야 똥으로 나올 뿐이라고.”
리안은 눈물을 겨우 참으며 결단을 내렸다.
이미 해적 섬에 있는 중저가의 영약은 죄다 쓸어 담다시피 했다.
세 명의 꼬마가 수련을 하며 전부 먹어 치웠다.
물론 리안은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선장님이 각성을 해야······.”
“배를 그렇게 모는 녀석의 마나 감응도가 왜 이따위인지. 쯧.”
배를 모는 거야 마나 로드만 개통 상태인 유저면 되는 것이고!
세바스뿐만 아니라 말은 저리해도 부선장도 아쉬운 모양.
이들의 안중에는 다른 아이들의 성장 따위는 없었다.
그저 리안의 정령 갑옷과 계약하는 것이 목표였다.
백병전을 벌였을 때 함께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어이없게 죽어 버리는 것을 방
지하기 위해서다.
“됐고. 샤롯! 받아.”
리안은 샤롯 베리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헙!!”
그녀는 던진 물건을 확인하고 놀랐다.
붉은빛이 감도는 큐브.
“도련님··· 이건.”
“계약해. 넌 이제 시녀 겸 호위니까.”
“제가··· 대기사라니···!! 이건 혹시!! 정인에게 준다는....징표?!”
“징표는 무슨. 그냥 넣어 둬. 그리고 우리는 해적이니까 기사는 아니지.”
기사든 전사든 뭐가 중하리.
사실 시녀도 그다지 낮은 계급은 아니다.
하녀가 아닌 시녀는 귀족 계급이니.
그렇다 해도 대전사와 비교할 것이 아니다.
애초에 해적 선장의 시녀 따위를 누가 취급해 주겠는가.
그런데, 정령 갑옷을 입은 대전사는 해적이든 뭐든 어딜 가든 대우받는다.
격을 따지지 않는 영주는 해적도 기사로 영입하기도 했고.
“호위기사로서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도련님.”
샤로트 베리는 한쪽 무릎을 땅에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기사가 아니라 했는데, 호위 기사라 칭하는 걸 보면.
“그래. 그냥 기사 해라. 나도 귀족은 귀족이니까. 레온 백작 주장자 정도가
되려나.”
리안은 평소 패용하고 다니던 검 손잡이를 꺼냈다.
마나를 흘려보내니 칼날이 뿅 하고 나왔다.
레이피어 형태라 무게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음··· 뭐더라. 국교가 없으니 신전을 보호할 필요는 없고··· 땅이 없으니 반
역에 대항할 필요도 없고··· 일단 우리는 해적이니까 약자를 보호할 필요는
더더욱 없고··· 그냥 넌 지금부터 내 기사다. 나 하나만 잘 지켜라. 이상 샤
로트 베리를 내 기사로 임명하는 바이다.”
톡톡톡.
리안은 샤로트 베리의 어깨에 칼등으로 대충 세 번 두들겼다.
“목숨을 바쳐 주군을 수호하겠습니다.”
원래라면 기사에게 봉토를 내려야 하지만, 내어 줄 봉토가 없다.
그래도 정령 갑옷이 어지간한 작은 마을의 몇 년 세입보다 나으니 부끄러워할
정도는 아니다.
“일어나라. 나의 기사 샤롯 베리여.”
어쨌든 즉석으로 기사 서임을 뚝딱 마쳤다.
“증인으로는 신센롬 제국의 이 황자가 있으니 이런 서임식이라도 나쁘지 않을
거다.”
요 근래 잘 먹고 잘 쉬게 했더니 때깔이 좋아 보였다.
유전병이 패시브인 하브스 가문답지 않게 외모가 빛났다.
이상하게 신센롬 제국의 여제 테레지아와 그녀의 자식들은 안면 비대칭의 유
전병에서 자유로웠다.
몸이 병약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테레지아도 한때 율대륙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녀의 막내
딸 앙드네드 하브스가 그 최고의 미녀 타이틀을 이어받았다.
“명예로운 자리에 증인으로 있었음을 평생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나 신센롬
제국의 이 황자 레오폴트 하브스는 샤로트 베리 경의 기사 서임의 증인임을
선언합니다.”
무슨 말만 해도 덜덜 떨던 녀석이 이제는 조금 늠름해졌다.
물론 여전히 리안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지만.
“그래그래. 소문도 내어 줬으면 좋겠어. 천재 소녀 기사 샤로트 베리.”
“본국으로 돌아가면 꼭 그리하겠습니다. 베리 경은 제가 본 재능 중 제일입니
다.”
레오폴트는 고개를 숙이며 약속했다.
사실 증인 따위야 상관없었다.
구매 비용으로 1,000페니를 썼지만, 신센롬 제국의 모든 항구에서 상업 허가
증을 받는다면 몇백 아니, 몇천 배는 이득일 것이다.
“자. 그럼 샤롯은 계약을 해.”
“알겠습니다.”
샤로트 베리의 별명은 매우 많았다.
여자 해적왕인 데다가 외모까지 아름다우니 많은 이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화르르!!
불꽃이 그녀의 전신에서 타오른다.
당연히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홍염의 마녀가 탄생했다.
무수한 적들이 그녀의 앞에서 공포에 떨 것이다.
“좋아. 좋아.”
타오르던 불꽃은 점점 형태를 갖추더니 전신을 붉은 갑옷으로 덮었다.
녀석은 신기한지 양손과 몸을 번갈아 보며 구경했다.
“뜨거운 기운이 전신을 덮었어요. 신기해요. 뭐든지 다 태워 버릴 수 있을 것
만 같아요.”
“그 뭐든지에 나는 좀 빼 줘.”
리안은 부러움에 입맛을 다셨다.
철컥.
그때 밖에서 선원 하나가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집결 명령이 떨어졌수다. 잉글슨-스랑 해전에 참가할 해적단은 앞바다에 다
모이라는뎁쇼.”
그 말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리안에게 쏠렸다.
이왕이면 출전 전에 각성도 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할 것은 없다.
강제로 각성시킬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
“가자.”
***
수백 척의 배들이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장관이 따로 없다.
“도대체 이 많은 해적들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먹고살 수는 있나.”
“우리 선장이 꼬맹이라 잘 모르는군. 바다는 넓어. 해적질할 곳은 많고.”
해적은 돈만 주면 뭐든지 하기에 용병이나 다름이 없다.
물류 수송업, 상업, 호위, 적대 영지 습격, 전쟁, 심지어 관광업까지.
웃기는 것은 해적선은 해적선이 공격을 잘 하지 않는다.
동업자를 존경하는 정신이라나.
그렇기에 은근히 수요가 많다.
오히려 특정 기간에는 공급이 한참이나 달리기도 했다.
“선장님. 이번 전쟁에 다른 바다의 해적들도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숫자가
많지요. 실제로 이곳 서해에서 활동하는 해적은 대략 절반 정도입니다.”
세바스가 차분하게 설명해 줬다.
해적왕은 한 명이 아니다.
북해, 서해, 중해의 해적들이 각자의 바다에서 영향력을 끼쳤다.
만약 샤롯 베리를 영입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후반부에 서해와 북해 두
바다를 통일해 버리지만.
더 귀찮아지는 것은 그걸 해군력으로 만들어 잉글슨 왕국에 바쳐 버린다.
잉글슨 왕국은 제해권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제국의 반열
에 오르게 되고.
그녀는 해적 섬의 창녀에서 제국의 대제독에 오르는 인물이 된다.
‘이제 내 부하 일 호지만.’
끼릭. 끼릭.
전열함 한 척이 고잉미샤호에 접근했다.
워낙 커다란 배이다 보니 주변 물결이 출렁거렸다.
“꼬마 선장!”
“오오. 해적왕 할아버지.”
리안은 위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어 줬다.
“그 배. 쾌속함이었지?”
“이 배가 좀 빠르죠. 훗!”
리안은 뿌듯해했다.
그럴 것이 이 많은 배 중에 철갑선은 몇 척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쇳덩이가 쾌속함이다.
“그럼 정찰을 부탁하지. 적의 집결 위치와 출전 시간은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
만, 정확한 위치는 잡지 못하고 있어.”
“제 배가 좀 빠르지만, 정찰 임무가 썩 안전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해적들은 대개 빠른 배를 선호하지만, 스랑 제국의 정찰선들과 경주를 할 만
큼 빠른 배는 많지 않았다.
만약 정찰을 나간 배들끼리 싸움이 붙는다면 이쪽이 불리했다.
“논공행상에서 유리하단 것은 알려 주지.”
해적들은 절대 선금으로 대금을 전부 지불해선 안 된다.
그렇기에 논공행상이 따로 있는 것이다.
“적 정찰대를 격파하면요?”
“당연히 전투가 유리해지겠지. 아마 큰 보상이 따를 거야.”
“맡겨 주시죠. 해적왕 할아버지.”
“훗! 그래 잘해 보거라.”
해적왕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 참! 전투 중에 해무가 끼면 무조건 저를 따라오세요.”
“갑자기 그건 무슨 말이더냐. 해무가 낀 날에는 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에요. 만약에 전투 중에 해무가 끼면 말이에요.”
“뭐. 알겠다. 그러지.”
해적왕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다가 코트를 펄럭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적 정찰선을 격파한다든지. 전투 중 갑자기 해무가 낀다든지. 그저 어린아이
의 치기나 망상쯤으로 여겼다.
딱 그럴 나이 때이니.
“흐흐. 저를 만난 걸 운이 좋은 줄 아세요.”
리안은 멀어지는 해적왕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품속의 <야누스의 심장>을 만지작거리며.
펑펑!!
예포가 쏘아져 올랐다.
출정을 알리는 신호다.
쏴아아아!!
수백 척의 배들이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거의 한 나라의 해군력에 맞먹을 정도다.
몇 척의 배들이 뭉쳐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정찰대로 뽑힌 배들이다.
“꼬맹이. 이번 전쟁 어떻게 생각해?”
“질 거예요.”
“뭐?!”
리안의 대답에 부선장이 놀라워했다.
“아마 북해에서 참전한 해적들과 우리 해적왕 할아버지의 부하가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느낌?”
“설마. 해적왕의 다섯 부하들은 모두 오래된 부하라고.”
이미 신뢰할 수 있는 자들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스랑 제국이죠. 그리고 그들의 인구수는 징글징글해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걷어진다는 거죠.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어요.
실패한다면 단지 돈이 적었을 뿐이죠.”
역시나 부선장은 못 믿는 눈치다.
“그럼. 큰일 아니야?”
“상관없어요. 해적왕 할아버지만 건재하면 서해의 해적들은 다시 집결할 테니.”
다섯 부하가 아니더라도 해적들은 해적왕을 따를 거다.
물론 다섯 부하 중 배신하지 않은 이들은 다시 합류할 거고.
“적들이 작정하고 해적왕을 물어뜯을 텐데······.”
“걱정은 논노! 정보를 지배하는 자가 바다를 지배한다! 적들의 정탐선만 박살
내면 어찌어찌 될 거예요.”
리안의 말에 부선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운에 맡기다니.”
“운이 아니죠. 전장은 우리가 지배합니다.”
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정찰을 맡기지 않았으면, 자진해서 정찰을 떠날 예정이었다.
***
스랑 제국은 북해, 서해, 중해의 해군들을 모두 끌어모았다.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랑 제국의 영토가 워낙 크다 보니 세 바다 모두로
뻗어 있었다.
제국이 괜히 제국이 아니었다.
“그런 해적 놈들과 손을 잡다니. 우리 대 스랑 제국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
지는군.”
“해적들의 규모가 수백 척에 이르오. 잉글슨 왕국의 해군보다 그놈들이 더 위
험하오.”
서해 제독의 불평에 북해 제독이 점잖게 말했다. 그러던 중 중해 제독이 서해
제독에게 따졌다.
“그런데, 앙드레 제독. 그대가 이번에 해적들에게 최신형 배를 강탈당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흥! 무슨 소리. 그런 일 없소.”
서해 제독 앙드레는 힘을 써서 소문을 무마시켰다.
해군 연구소에도 압력을 넣어서 신형 배를 출하한 기록을 지워 버렸다.
사실 이해 당사자들은 모두 그 사건이 묻히길 바랐다.
서해 제독도 연구소도 신형 전함에 탑승했던 선원들도 커리어에 좋을 것이 없
으니.
“그건 두고 보면 알 일. 이번에 그 배가 참전을 하나 안 하나 보면 되지요.”
중해 제독은 이미 설계도를 입수한 듯 보였다.
“그보다 북해 해적 놈들과 서해 해적왕의 부하가 배신을 하기로 한 것은 확실
하오?”
“그것 때문에 대제독께서 재무부에 아쉬운 소리를 많이 했지.”
“이번 기회에 잉글슨 놈들을 밟아 놔야지. 가뜩이나 이벨 왕국 녀석들이 설치
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사실 대륙에서 가장 많은 군함을 보유한 것은 스랑 제국이 맞지만, 북해에서
는 발할라의 야만인 노르드인들과 상인 연합인 한자 동맹. 서해에서는 이벨
왕국과 잉글슨 왕국에게. 중해에선 베넷 조합과 이교도들에게 밀렸다.
나라의 땅덩이가 너무 큰 탓에 생기는 애환이랄까.
이번에 이를 갈며 어렵게 모인 것이다.
덕분에 전비뿐만 아니라 중해와 북해의 일시적 평화를 위해 지출된 비용도 만
만치 않았다.
해당 지역의 해군이 빠지면 날뛸 놈들이 천지였다.
“급보입니다. 북서쪽에서 정찰대가 격파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세 명의 제독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들보다 가장 유리한 것이 정찰대라 생각했거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