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013
하얀 머리의 소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
멀쩡한 곳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별거 아니야. 이건 신께 바치는 찬양.”
그녀는 웃으면서 얼굴의 상처를 스윽 문질렀다.
그러니 놀랍게도 피가 번지며 상처가 사라졌다.
“어··· 어······.”
샤로트은 놀랐는지 큰 눈을 끔뻑였다.
마치 마술 같았다.
거기에 더해 설산의 눈처럼 하얗던 머리가 점점 칠흑처럼 검게 변해 갔다.
흔하지 않은 백안 때문에 괴기스럽던 눈동자도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놀랄 것 없어. 언니가 이래 봬도 전쟁의 신 탱글 님을 믿는 사제거든. 그것
도 주교야.”
“주교? 어려 보이는데······?”
“내 눈에는 네가 더 어려 보인단다. 놀라워. 그 나이에 그런 움직임. 혹시 우
리 교에 귀의하지 않을래?”
예언에 가까운 예측력에 뛰어난 동체 시력이 합해지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최상의 성기사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건 좀 곤란해. 누님.”
“음······?!”
“그 아이는 미래에 소드 마스터가 될 아이라서.”
초반에야 성기사가 되면 빠르게 강해질지 모르겠지만, 그 한계도 뚜렷할 것이다.
성기사는 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데, 아무리 SR+급 샤로트라 하더라도 무언
가를 믿는 재능이 어떨지는 모른다.
“후훗. 꼬마. 아니. 공자님의 말씀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흑발로 변한 전쟁의 신 주교 세이나는 차분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날뛰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녀는 베리에게 다가가.
“어디 보자. 큰일 날 뻔했구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세이나의 눈동자가 하얗게 변했다가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어··· 어??! 아프지 않아요.”
“후우...”
주교는 제법 힘들어 보였다.
전쟁의 신 탱글은 전투에 관해 특화된 종교라 자신의 몸을 회복하는 것은 곧
잘 하는데, 타인을 치료하는 데엔 그다지 힘을 못 쓰는 신.
“주교 누나. 괜찮아?”
세이나가 살짝 비틀거린다.
전투로 인해 신성력이 이미 밑바닥 근처일 터.
“이 정도는 괜찮아요. 공자님.”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갑판 아래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던 전투 노예들은 이제 모두 쓰러졌다.
상어조차도 기피 한다는 노예들의 푸른 피가 바닥에 흥건하다.
“이거 놔!!”
그때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해적들에 의해 끌려왔다.
그것도 모자라 리안의 앞에 무릎을 꿇렸다.
마총에 맞은 상처가 깊은지 아직 아물지 않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치료에 특화된 태양신의 사제라 해도 마총에 당한 상처는 즉시 회복이
쉽지 않을 거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교국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할 것이다. 이건 종교
탄압이야!”
“종교 탄압은 개뿔.”
리안은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꼬마 놈 말고 선장을 불··· 설마! 너··· 어··· 진짜로······?”
“내가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 맞다니까 그러네. 다시 소개하지. 고잉미샤호의
선장 리안이다. 직업은 해적이지. 흐흐.”
“해··· 해적!”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태양 신의 사제.
그는 주변을 슬쩍 흘겨봤다.
해군치고는 복장이 개판이어도 너무 개판.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모두 꼬마 리안에게 가 있었다.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복종의 의사를 보였다.
“나는 교국의 주교다. 아무리 해적이라 해도 신벌이 두렵지 않더냐. 날 풀어
준다면 면죄부를······.”
“신벌은 개뿔. 진짜 주교 맞아? 무슨 종교쟁이가 전투 노예를 이렇게나 끌고
다녀?”
“이교도들이다. 저기 노예 낙인을 보면 태양 신 쥬 님의 상징이지 않느냐.”
해적들이 살짝 동요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나 미신에 취약한 녀석들.
“아니. 그쪽이야말로 종교 탄압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 믿는 신이 다르다 해
도 이교도라니. 내가 알기로는 태양 신의 주요 교리가 사랑과 평등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대부분의 종교가 사랑과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신 앞에서.
그보다 태양의 신 핵심 교리는 남성우월주의, 정의주의, 신정주의, 세계교회
주의 그런 것들.
“이놈들은 대부분 중해 너머에서 잡혔다. 이교도들이란 말이다. 그들이 사탄
을 믿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도 있더냐?!”
리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가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인 종교들이다.
더 웃긴 것은 신화도 비스무리했다.
신들의 이름만 다를 뿐 신화 자체가 80% 이상 유사했다.
그냥 같은 신 같은 신화라 봐도 무방하다.
“난 멍청해서 그런 건 모르겠고. 사람을 무슨 호문클루스처럼 다루는 건 인정
하지 못하겠어.”
“노예다! 이단이라고 몇 번을······.”
탕!!
리안은 마권총으로 주교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이야기를 계속 섞어 봐야 부하들의 동요만 일으킬 뿐이다.
“사··· 사제를··· 죽였어.”
“우린 신벌을 받을 거야······.”
“설마 진짜로 죽일 줄이야.”
아까 전 기습적인 마총 사격에도 사제가 살 수 있었던 것. 그것은 결코 해적
들의 사격이 허접해서가 아니다.
사제를 노렸던 사수가 최후의 순간 찝찝함 때문에 급소가 아닌 곳을 노렸기
때문.
리안도 그걸 감안해서 여러 명의 마총병에게 일제 사격을 명했던 것이다.
“다들 걱정하지 마. 이놈은 진짜 사제가 아니야. 가짜야! 그러지 않고서야 여
기 전쟁의 신을 믿는 사제를 공격했을 리가 없지 않나.”
리안은 고개를 돌려 전쟁 신 사제 세이나를 바라봤다.
머리가 좋은 그녀는 부상으로 쓰러져 있는 해적에게 다가와 신성력을 일으켰다.
사아아아!
전쟁의 신을 믿는 사제라도 사제는 사제.
눈에 보일 정도로 회복시키는 기적을 보여 줬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 환자였지만, 눈을 번뜩 떴다.
“가··· 감사··· 합······.”
“몸을 일으키지 마세요. 우리 교단은 치료술이 영 신통치가 않아서 시간을 두
고 치료해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해적이 다시 누웠다.
전쟁의 신의 치유는 시원찮기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이분을 의료실로 옮겨 주세요. 그리고 부상을 입은 분들은 저를 찾아오세요.”
그녀의 말에 해적들은 믿음이 생겼다.
신성력으로 치료를 하는 자는 곧 사제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아무리 종교가 달라도 사제가 사제를 공격할 리 없다.
그러니 리안이 죽인 사제는 가짜다.
“그럼 그렇지.”
“우리 선장이 미치지 않고서야 사제를 죽였을 리가.”
“조금 미치긴 했는데······.”
“정상이 아닌 꼬맹이긴 하지.”
‘뭐? 정상이 아닌 꼬맹이? 이것들이 내 뒷담을!!’ 리안은 부글부글 끓어 올랐
지만, 거친 해적을 통솔을 하기에는 ‘착한 꼬마’보다 ‘미친 꼬마’가 나았기에
그대로 뒀다.
만만하게 보이면 기어오르는 것이 패시브인 녀석들이니.
“빨리 부상자를 옮기고. 챙길 건 빨리 챙겨!”
“우오오옷!!!”
리안의 명령에 해적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누가 본다면 군기가 엄정한 정예처럼 보이겠지만, 약탈에 능숙할 뿐이다.
“꼬맹이. 챙길 건 다 챙긴 모양이더군. 여객선 겸 상선인 모양이라 금품이 쏠
쏠하게 나왔어.”
여객선이라고 해서 손님만 태우지 않는다.
바닥에 죽어 있는 수많은 노예들은 상자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것.
“그리고 우리 쪽. 제법 많이 뒈질 줄 알았더니 두 놈밖에 안 죽었어.”
백병전에서 사상자가 없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리안도 이런 사실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그리고.
“운이 좋았네요. 흐흐흣.”
리안은 음흉하게 웃었다.
운이 좋았다는 것은 전쟁 신의 사제 세이나를 보고 말한 것이다.
치사율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의사나 사제가 필요한 가장 큰 이유다.
그녀는 별로 남지도 않은 신성력을 쥐어짜 내 급한 환자들을 돌봤다.
“부선장 아저씨. 다 챙겼으면 격침시켜요.”
“뭐?! 여객선이라도 나포해 가면 제법 받을 텐데?”
배는 돈이 된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해적들이 포격전 대신 부상을 동반하는 백병전을 선호하는 이유다.
“소문이 나 봐야 좋지 않으니까.”
아무리 리안이 게임 속에 떨어져 살짝 맛이 갔다고 해도 가장 큰 교단인 태양
신 주교와 척을 지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의심을 받을 수도 있지만, 증거를 남기는 것은 좋지 않다.
“전쟁 신 사제는 바다에서 건진 걸로 합시다.”
“무슨 말이야? 설마······.”
“설마 증거도 없는데, 지들이 어쩌겠어요. 정황만으로 날 공격하진 못할 거예
요.”
지금은 해적이지만, 나중에 양지로 나갈 생각이니.
그때 가서 의심을 한다 해도 정황만으로 어쩌지 못할 거다.
“진짜 단단히 미친 꼬마구나. 신벌이 무섭지 않아?”
“신께서는 그리 쉽게 신벌을 내리지 않아요. 잘못했다고 신벌을 내린다면, 그
주교는 내 손이 아니라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신벌로 죽었어야 했죠.”
멀쩡한 다른 종교의 주교를 죽이려 했으니.
이미 전쟁 신 주교 이외에 다른 사제들은 죽임을 당했다.
어쩌면 리안의 등장 자체가 신벌일지도······.
“알겠다. 그리하지.”
부선장이 통신으로 무언가를 외치자.
펑!! 펑!!
배 측면에 있던 마나포들이 불을 뿜었다.
콰아아앙!!
상선은 두들겨 맞았고 얼마 가지 않아 격침되었다.
그걸 보던 리안은.
“나이스샷! 아! 그리고 검술을 좀 배워야겠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 꼬맹이. 넌 이미 마나 로드가 개통되어 있으니까 금방 배
울 거다.”
“누구한테 배우면 좋을지 추천 좀 해 줘요.”
“누구긴 누구야. 눈앞에 있잖아.”
부선장은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다.
***
휘리릭!! 휙!!
갑판 위에 무언가가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자세히 보니 남녀 꼬맹이 둘 그리고 건장한 성인 남성 하나.
“힘을 내 봐라! 이것들아.”
두 꼬맹이는 열심히 부선장에게 달려들었으나 어김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으아아악!! 안 해!! 안 할 거야!!”
대자로 뻗은 리안이 신경질을 부렸다.
“아니. 어른이 되어 가지고. 좀 봐줄 수도 있잖아!”
“끈기가 없군. 어린 계집보다 못해.”
여전히 샤로트 베리는 포기하지 않고 부선장에게 달려들었다.
놀랍게도 뒤에서 몰래 접근한 그녀의 공격을 보지도 않고 피한 다음 목덜미를
잡아 패대기쳤다.
“꺄아아악!!”
샤로트는 포기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다시 뛰어들었다.
포기할 줄 몰랐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 가르칠 맛이 나지. 으하하하!”
솔직히 속으로는 상당히 놀랐다.
마나의 축복이라도 받았는지 마나 로드 개통은 겨우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고.
기술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가지가 넘는 방식으로 응용했다.
“어이쿠.”
방금 전에는 공격을 허용할 뻔했다.
그야말로 신이 내린 재능.
살면서 이렇게 빨리 배우는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파바박!!
“꺄아아악!!”
소녀는 다시 저 멀리 튕겨 나갔다.
힘 조절을 했다지만, 여자아이 몸으로 계속해서 덤빈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저 깡다구는 무서울 정도다.
“잠시 쉬었다가 하세요.”
“오오! 우리 군종 사제님.”
부선장이 이 배에서 유일하게 존대를 하는 사람이 사제 세이나였다.
아무리 어려도 사제라서 그런 걸까?
그걸 보고 리안은 저 아저씨가 웬일이래? 라며 놀라기도 했다.
“상처를 오래 두면 좋지 않아요. 아직 연약한 어린 몸들이에요.”
그녀는 멍투성이인 베리에게 다가가 치료를 해 줬다.
리안도 슬며시 다가가.
“누나. 나도.”
“어디 보자··· 별로 다친 데가 없는 것 같은데······.”
“사제님. 치료해 줄 필요 없쑤다. 우리 꼬맹이 선장은 겨우 두 번 넘어져 놓
고 엄살을 부리는 겁니다.”
“힝!! 나 안 해!”
리안은 삐친 얼굴로 터벅터벅 선실을 향해 걸어갔다.
“아이고. 우리 선장. 내가 잘못했어. 어릴 때 배워야지. 크면 몸이 굳어서 배
우기 힘들다고.”
부선장이 웬일로 부드럽게 리안을 다독거렸다.
“정령 갑옷을 입을 때까지만, 배우자. 응? 응?! 엊그제도 위험했었잖아.”
“우씽!! 부선장 아저씨는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다구요!”
“아닌데··· 저 아이를 보면······.”
부선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샤로트 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샤로트 베리의 재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잘 가르치든 못 가르치든 상
관이 없었다.
천재는 알아서 배운다.
“이런··· 알겠어. 다른 놈에게 말해 볼게.”
굳이 부선장에게 배울 필요는 없었다.
아니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는 부선장에게 배우는 건 그리 좋지 않았다.
“이 배에 대전사만 네 놈이 더 있으니까 골라만 잡아!”
신기하게도 그들의 마나 심법이 같았다.
그래서 누가 가르치든 상관 없었다.
땅~! 땅~! 땅~!
그때. 타종 소리가 울렸다.
파수대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
“뭐야?!”
부선장은 전화기를 사용하지 않고 커다란 목청으로 외쳤다.
파수대에서도 고함으로 답했다.
“헤브리디스 제도입니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리안은 부선장에게 명령했다.
“항구로 가기 전에 챙길 게 있으니 다들 준비하세요. 마침 사제도 있겠다. 딱
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