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35화 (235/235)

235화

<히든 루트―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다>

한동안 돌부처마냥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첫 번째 선택지.

그리고 두 번째 선택지. 세 번째 선택지까지.

손가락이 그 앞에서 한 번씩 차례대로 멈춰 섰다.

“후우.”

하염없이 맴돌다가, 결국엔 어떤 선택지도 손가락이 닿지 않았다.

스르륵. 손가락은 다시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으음?”

내 행색을 가만히 지켜보던 화신. 의문에 찬 탄성을 나직이 흘린다.

강수아의 얼굴이 성큼, 내 쪽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뭘 고민하고 있나. 이미 마음을 정한 게 아니었나?”

저 세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분명히 결심했다. 버릴 것과 얻어갈 것을 구분하고 선택했다.

그런데 정작 선택의 순간이 된 지금, 나는 주저하고 있다.

“…….”

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쳤다. 반쯤 감긴 눈으로 화신의 눈동자 안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리고 한참 후. 짤막하게 대답해줬다.

“선택하지 않겠다.”

힘없이, 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내 예상대로 화신은 의문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선택하지 않겠다면. 뭘 어쩌겠다는 거냐.”

“…….”

“입을 닫고 있어도 해결되는 건 없다. 초인. 어서 결말이나 선택해라.”

“…선택.”

화신의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다시 한 번 시선을 아래로 내려봤다. 세 가지 선택지가 적힌 패널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 반쯤 감긴 두 눈이, 다시 화신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선택했잖아. 방금.”

“…으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게 내 선택이다.”

“…허.”

수아의 입술이 쩍 벌어진다. 그 안에서 화신의 일그러진 탄성이 흘러나왔다.

황당하다는 듯이 힘이 풀린 표정이 꽤 볼만하다.

“1033번이다.”

씨익.

내 입꼬리는 천천히 뒤틀리고, 말려 올라갔다.

뭐랄까. 이젠 사실…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었다.

“신물이 난다고. 새끼야.”

“…뭐가 말이냐.”

“네 X대로 끌려다니는 거. 1033번이면… 지긋지긋할 때도 됐지.”

꾸드득.

그때까지 시종일관 미미한 미소가 걸려있던 수아의 얼굴. 거기에 처음으로 미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놈은 약간 딱딱해진 얼굴로 물어왔다.

“그러시군. 그래서 대체 어쩌겠다는 건가?”

“딱히. 어쩌지도 않아.”

“그러면? 이대로 영원히 여기서 나랑 담소나 나눌 텐가? 그런 가장 미련한 선택을 하겠다는 소리인가?”

“설마.”

“그러면……?”

콰아앙!!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눈앞의 시스템 패널을 있는 힘껏, 주먹으로 내리친 것이다.

“으음?!”

화들짝! 수아의 두 어깨가 격하게 움찔거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도 한껏 크게 뜨여 있었다.

아무리 화신이라도 그 돌발행동까진 예측하지 못한 듯하다.

이글거리는 화신의 눈동자가, 날 빤히 쳐다봤다.

“아니. 방금, 무슨……?”

“때려쳐. X발. 전부.”

쾅! 콰앙!! 콰아앙!!!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계속해서 패널을 내려쳤다.

거기까지 행한 시점에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슬쩍 머금었다.

“항상 좀 궁금했다고. 화신.”

“…뭐가 말이냐.”

“던전의 시스템 패널은 당사자만 만질 수 있지. 알고 있냐?”

“모를 리가 있나. 내가 만들었는데.”

“만질 수가 있으면 말이야. 부술 수도 있지 않을까?”

“…으음?”

번득.

광기와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오히려 화신이 몸을 굳혔다.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렇단 말이지.’

정말로 놈은 신이 아니었다.

지금의 모든 상황을 상정하고,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지는 않은가 보다. 적어도 지금 이 상황은 놈의 계산 밖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더 좋다. 내 도박의 성공률이… 조금은 더 올라간 셈이니까.

“이봐. 초인. 대체 왜 그러는 거냐. 그런 짓을 해서, 대체 뭔 이득이 있다고……?!”

화신이 당황한 행색으로 내게 손을 뻗어온다.

터무니없는, 그리고 의미도 없는 짓을 만류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지금의 나는 일생일대의 반골기질을 발휘한 상태다.

“좀 냅둬봐. 화신.”

“뭐라고?”

“닥치고 구경이나 좀 쳐하라고. X발아.”

“…뭣이?”

“사람이 1033번 만에 처음으로. 무력시위 좀 하겠다는데 말이야……!”

콰앙! 콰콰쾅!!

그 뒤로도 셀 수도 없이. 끊임없이 패널을 내려쳤다.

묵직한 충격파가 나를 중심으로 미친 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초인. 멈춰라……!”

쾅! 콰쾅! 콰콰쾅!!

무아지경으로 패널을 내리치는 내 옆.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화신이 나직이 경고했다.

어느새 놈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많이 사라져 있었다.

‘화났냐?’

당연히 화가 나겠지.

화나라고 하고 있는 짓이니까.

당연히 나는 가볍게 무시했고. 계속해서 패널을 내리쳤다.

“시간낭비다. 의미가 없다고! 그걸 부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자네에게 다른 선택지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다!!”

마침내 놈의 언성이 좀 높아졌다.

이해가 안 되니 처음엔 화를 내나 싶더니. 이젠 분노를 넘어 답답한 듯하다.

그러든 말든, 콰콰콰쾅! 나는 의미도 없는 미련한 파괴행위를 계속했다.

“후우, 후… 후우우!”

콰콰쾅! 콰콰콰쾅!!

얼마나 계속해서 패널을 후려쳤지.

잘 모르겠다. 수백 번, 어쩌면 이미 수천 번을 돌파했을지 모른다.

“후우웃……!!”

이젠 세는 것도 무의미할 정도로 긴 시간. 생각하길 완전히 포기한 채, 그저 본능대로 무수히 가격한 결과.

쩌적! 정말로 패널 한 구석에, 이변이 생겼다.

“…깨졌다……!”

시스템 패널에 금이 갔다.

나는 벅찬 마음에 중얼거렸고. 이내 균열이 일어난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콰앙, 콰콰쾅! 내리치는 주먹이 일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크으, 아아아……!!”

양 주먹은 이미 너덜너덜하다.

손을 휘두를 때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격렬한 고통이 손끝에서 등줄기를 타고 치달린다.

그래도 주먹질을 멈추진 않았다.

“아아아아아!!”

쩌적, 쩌저적!

그러자 그 보답의 소음이 들려온다.

균열이 점점 더 커진다. 겉잡을 수 없이, 패널 전체로 퍼져나간다.

‘이걸로…!!’

아마도 이번 일격이 마지막. 나는 혼신의 힘을 담아 오른주먹을 내질렀다.

비명처럼 기합을 토해냈다.

“하아아아아아!!”

콰장창!!

마침내 내 앞에서 패널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다각형의 패널 쪼가리가 빛을 머금은 채 사방으로 비산한다. 대치한 나와 화신을 둘러싸고, 마치 빛의 벚꽃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깨지는구만. 진짜로.”

나는 호기롭게 중얼거렸다. 가설을 몸으로 증명한 걸 자랑하듯이.

흠칫, 불에 덴 듯이 화신의 고개가 내쪽을 향했다.

“그래… 화풀이는 끝났나. 초인.”

이내 화신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싸늘한 시선. 그리고 딱딱한 행색까지. 행동 하나 하나에서 불쾌함이 가득 느껴진다.

내 돌발행동에 시간을 낭비한 게 짜증나는 거겠지.

“그래. 이제 좀 후련하네.”

“크음……!”

“호기심 해결이다. X같은 새꺄.”

그러든 말든. 나는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쌈박하게 대답했다. 치켜든 가운데손가락을 놈에게 까딱거렸다.

그리고 처억! 나는 손가락을 들어 놈의 면상을 가리켰다.

“네가 방금 스스로 말했지. 화신.”

“…뭘 말이냐.”

“네가 허락하지 않는 한. 나한테 다른 선택지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 그건 사실이다.”

“그러면 허락해줘라. 지금 당장.”

“그게, 무슨……?”

당당한 요구에 화신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콰드득! 나는 사방에서 아른거리던 패널 쪼가리 하나를 잡아챘고. 그대로 힘껏 쥐어 으스러뜨렸다.

잘게 부서진 빛의 파편이 내 주위로 흩어진다.

“처음부터. 다시 한번 시작하자.”

번쩍거리는 빛무리 속에서, 나는 조용히 제안했다.

수아의 미간이 한껏 뒤틀려 올라갔다.

“처음부터……?”

“지금 당장 무대를 리셋해라. 다시 한번… 처음부터 도전할 거니까.”

“허.”

슬쩍 벌어진 수아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흘렀다.

허. 허허허. 탄성은 곧 헛웃음이 된다. 놈은 실성한 듯이 광소를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이내 번득, 푹 수그린 고개 너머로 시커먼 안광이 나를 찔렀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나?”

“모를 리가.”

“다시 말해 자네는, 이 계집처럼… 나와 또 다른 계약을 하고 싶다. 그 소리군?”

“그런 거지.”

“1033번이나 반복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걸 처음부터 또 시도하겠다는 건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초인.”

“거 X발. 하라면 하지 말이 많아.”

부탁하는 주제에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나.

화신도 그 점이 어이없었던 것인가. 놈은 어안이 벙벙한 듯 미간을 바짝 찌푸렸다.

“아까부터 뭘 믿고 그리 건방진 거냐. 왜 내가 그딴 막무가내를 들어줄 거라고 확신하지?”

“네가 지금까지 나를 봐왔듯이. 나도 지금까지 봐온 게 있으니까.”

“…….”

“내가 지금까지 봐온 너라면. 이 제의를 안 받을 리가 없으니까.”

“…….”

어떻게 확신하냐고?

확신 못 한다. 신 언저리인 저 새끼 심리를 내가 어떻게 아냐.

안 받아주면 유감인 거다. 어쩔 수 없는 거지.

‘하지만 그래서 뭐.’

제안해서 손해 볼 게 뭐가 있나.

이미 1033번 죽어봤다. 끽해봐야 몇 번 더 죽기밖에 더 하겠냐고.

그런 생각으로 내던진 도박수다.

“얻어걸린 주인공은 지겹다고. 개새끼야.”

저벅저벅.

나는 오히려 화신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껏 참고 참아왔던 말들을, 점점 가까워지는 수아의 면전에 토해냈다.

“새 무대의 주인공은 나다. 화신.”

“……!”

“네가 나를, 지금 당장. 직접 뽑아라. 주인공으로.”

“자네를……?”

“그리고 이번 무대의 최종 보스는, 바로 너다. 의지의 화신.”

“……!!!”

콰드득!

말을 마친 시점엔 서로 주먹이 닿을 거리가 되었고. 나는 득달같이 손을 뻗었다.

수아의 멱살을 쥐어 채, 그대로 내 면상에 바짝 붙였다.

“1033번이나 감상했으면. 슬슬 구경만 하기는 질리지 않냐?”

“…무, 슨.”

“이제 무대 뒤에 숨지 마라. 위로 올라오라고. 나랑 X발, 계급장 떼고 한 판 뜨자.”

“…….”

“네가 직접 이번 무대의 최종 보스가 되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유일한 계약 조건이다.”

이마를 바짝 맞댄 채 한 마디씩 뇌까렸다.

화신의… 수아의 표정은 멍하니 풀렸다. 전신에 미동도 없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하지만 못 들었을 리는 없다. 나는 가만히 반응을 기다렸다.

“…큭.”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득 수아의 입꼬리가 씨익, 기괴하게 말려 올라가나 싶더니.

“푸핫! 카하하하핫!!”

화신의 숨넘어가는 광소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아의 반쯤 감긴 눈꺼풀 안. 시커멓게 질척거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번들거리는 광기가 어느 때보다도 충만하게 넘실거렸다.

“내게 도전하는 건가…! 한낱 살아 있는 고깃덩어리 주제에! 내가 빌려준 알량한 힘을 좀 얻었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가!!!”

바락바락 외쳐대는 의지의 화신.

내뱉는 말만 들어보면 화가 잔뜩 난 듯싶지만. 아니다. 오히려 분위기는 완전히 반대였다.

화신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희열에 휩싸여 있었다.

“아니. 아니군! 그래… 자네는 그 정도까지 멍청하지 않아. 그렇지?!”

“…….”

“자네는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머리로도 본능으로도! 지금 이 순간도! 그 힘의 차이를,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다고!!”

“…….”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목에 칼을 들이미는 것이다! 그런 것이었구나!!!”

콰직!

이번엔 오히려 화신이 내 멱살을 쥐어챘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힘을 발휘해, 나를 공중에 들어 올렸다.

그리고 놈은 내가 했던 것처럼, 이마를 바짝 맞붙여왔다.

“이 한결같은 광기. 나조차 질릴 정도의 의지!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자네를 선택한 건 정답이었어!”

“…그러냐.”

“즐겁다. 지금의 나는 전에 없이 즐겁다! 기대되기 시작했다. 자네가 대체 어떻게, 어디까지 발악해줄지…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가 돼서! 미쳐버릴 것 같다!!”

“그렇다니… 거, 다행이군.”

“아아. 자네는, 내 생에 다시없을 유일무이한 걸작품! 최고의, 극상의, 최강의, 최선의, 최후의 주인공이다! 초인!!”

“거 장광설은 X까고. 내려줘. 숨막힌다.”

벌겋게 상기된 수아의 얼굴이 괴물처럼 뒤틀렸다.

화신의 흥분과 희열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정면에서 마주하는 나로선 아까부터 숨이 자꾸 막혀오는 것 같다.

그것을 애써 숨긴 채 태연을 가장하고 있자니.

“…제반 조건은, 전과 똑같다.”

직후 휘몰아치던 광기가 거짓말처럼 정돈되었다.

화신은 내 멱살을 놓았다. 뒤틀렸던 수아의 얼굴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총 15번의 붕괴를 일으킬 것이다. 자네는 한 달간의 시간을… 영원히 반복한다. 그리고 회차가 끝날 때. 유산을 통해 자네는 점점 힘을 상승시킨다.”

“……!”

“전에도 그랬듯이 2031년 11월 27일부터 시작하고. 12월 27일엔… 내가 직접, 자네의 목숨을 거두러 등장해주겠다.”

전처럼 미미하게 뒤틀린 미소를 머금은 채.

화신의 담담한 설명만이 귓가를 아른거렸다.

“다만 스테이터스의 한계치는 해제해두겠다.”

“한계를… 해제해?”

“전에는 99까지 제한됐던 상한치를 없애버리겠다는 소리다. 최후에 내가 버티고 있는데, 밸런스를 조절할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야.”

“……!!”

“어디 열심히 던전을 격파해서… 내가 빌려주는 힘들을 최대한 흡수해주길 바란다. 나까지 집어삼킬 기세로 말이야.”

콰드드득!

놈이 설명을 마친 그 순간. 머리 위에서 엄청난 흡입력이 느껴진다.

슬쩍 고개를 올려보자, 참칭자의 거대한 심연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

나는 반사적으로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화신이 목청을 높였다.

“얌전히 받아들여라. 초인.”

“……!”

“지금의 네 죽음으로 계약은 활성화된다. 새로운 1회차… 새로운 무대는, 네 죽음으로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점점 거세지는 참칭자의 흡입력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내 죽음을…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였다.

“가능성이 억만분의 일이라도 있으면 도전한다. 그런 건가.”

화신은 이번에도 먼저 중얼거렸다.

내 생각을 앞지르듯이, 그 뒤로도 놈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완전히 미친놈이군. 더없이 매력적이야.”

그리고 짝짝짝.

놈은 여유롭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화신의 지긋한 시선이 날 위아래로 품평하듯 훑어갔다.

“지금의 자네는, 영웅 그 자체로구나. 초인. 흐흐.”

“…….”

“내가 생각했던 자네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서 더더욱… 고결하게 느껴지는군.”

화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마디 덧붙인다.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내 몸은 허공에 붕 떠올랐고, 이내 속절없이 참칭자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 우욱……!!”

콰콰콰콰!!

온몸을 사방에서 잡아뜯는 감각. 영혼이 쥐어짜이는 듯한 격통이 치달린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토해냈다.

“으아아아아아악!!!”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생각한다.

이 선택으로 내가 후회하는 건 뭐가 있을까. 나는 뭘 포기하게 되는 걸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다.

‘…전부.’

내가 나로서 존재했던 모든 것.

1033번의 회귀에서 쌓인 모든 시간. 간신히 살려낸 이세라와 강서윤. 수아와의 추억. 그리고… 나를 영원히 기억해준다고 장담했던, 이브까지.

그러면. 이 선택을 한 뒤의 나는…….

‘남는 게 뭐가 있지.’

스르륵.

감았던 눈을 힘겹게 떴다. 전방을 똑바로 주시했다.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참칭자의 심연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잃은 채 끝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다. 화신을 이길 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능성조차 희박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걸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래. 설령…….’

999번을 재도전한다 해도.

1천 번, 1만 번… 혹은 163417413번을 재도전해야 한다고 해도.

나는 결국,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

“…아.”

상념에 상념을 반복하고 있자니. 문득 온몸에서 격통이 사라졌다.

눈앞에서 어둠이 물러가고, 새하얀 빛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눈이 너무 부시다.

* * *

그리고 지금.

999번째 반복된 2031년 12월 27일.

오후 7시.

“오… 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김없이 한국은 게이트에서 쏟아진 각양각색의 몬스터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강수아는 내 품에 안겨서 어김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걸로 꼬박 999번째 죽음이었다.

“미, 미안… 해요.”

999번의 죽음을 겪는 와중. 강수아는 항상 나한테 사과하며 죽었다.

이번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할 말도 딱히 없고. 사과한 이유도 여전히 잘 모르니까.

그나마 남아 있던 말주변도, 회귀를 반복하다 보니 나날이 일천해졌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서 사실만 간결하게 전달해줬다.

실시간으로 차가워지는 강수아의 손을 슬쩍 쥐었다.

“반드시. 언젠가. 내가 널 구해줄 거니까.”

이렇게 다짐한 것도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는 직후에, 희미한 안도의 미소와 함께 숨을 거둔다.

“…….”

피투성이로 젖은 몸이 중력에 따라 축 늘어졌다.

강수아가 죽고 나서야 실감이 들었다.

‘끝났군.’

붉은 번개가 몰아치는 검은 하늘을 망연히 쳐다봤다.

그리고 주먹을 가만히 쥐락펴락 해봤다.

‘이 이상 돌아가는 게 의미가 있나?’

부정적인 생각들이 뇌리에 들어찬다. 서서히 좀먹듯이 잠식해간다.

그런 내 절망을 포착한 듯이. 내 앞으로 패널이 하나 떠오른다.

[999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0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시공회귀를 통보하는 패널이다.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지긋지긋한 지옥의 한 달을 반복해라.

그런 선고였다.

[회귀까지 남은 시간: 30초]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멍하니 있자 그런 나를 질책하듯 또 다른 패널이 떠올랐다. 패널에 표기된 초시계가 빠르게 삭감되어간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고.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벌써 999번이다. 다음이면 1천 번째…….”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망설임 없이 패널의 버튼을 눌렀다.

[예]라는 버튼이었다.

“…….”

999번이나 반복된… 아니.

1033번에 이어서, 또 다시 999번째 반복된 어리석은 선택을, 나는 이번에도 골랐다.

왜냐고? 잘 모르겠다. 타성에 젖어서 습관적으로 누른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야겠죠?

다만 항상 이맘때가 되면,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까마득한 언젠가. 강수아가 해줬던 말이 떠오르곤 한다.

999번이 아니라 9999번째 회귀가 돼도. 1억번째 회귀가 돼도 절대로 잊지 못할 말.

니체의 ‘영원회귀’에 관한 목소리가 지끈지끈 울린다.

―오늘 저희가 겪는 하루하루가… 오빠에게 영원히 반복될 거니까요.

정말 이번 생이 나의 최선이었을까?

나중에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어쩌면 지금까진 희망 한 톨조차 보이지 않았더라도. 다음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거 아니냐?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쯤이면 됐다.

그냥 그렇게, 혼자 자위하고 있는 거 아니냐?

“돌아가… 돌아간다. 지금 당장.”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천성이 네거티브한 나조차 어쩔 수 없이 예스맨이 된다.

역시 나는 이런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절대로.

피할 수 없으면… 그래.

즐겨야지.

[다음 회차로 계승할 유물을 선택하십시오.]

의문의 시스템도 곧장 다음 단계로 얘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나의 굳건한 의지를 캐치한 듯하다.

‘…유물이라.’

나는 망설임 없이 손에 쥔 붉은 보석을 패널로 가져갔다. 우우웅, 짧은 울림과 함께 패널과 보석이 부르르 공명했다.

우선 상태창부터 봐볼까, 잠깐 떠올렸다가…….

“하.”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볼 이유가 전혀 없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고생 했는데.

이미 이 아이템의 정체 따윈… 전부 알고 있다.

[아이템 ‘하트기어’를 선택합니까?]

“그래.”

나는 패널이 나오자마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 프레이즈도 999번째… 아니. 2032번째 해먹으니, 지겨워 죽겠다.

“한 번 해보자. 누가 이기나.”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 말도 벌써 수천 번째다.

내가 뱉은 말이지만 스스로도 진부하게 느껴졌다.

[좋지. 해보자고. 누가 이기나 말이야.]

그리고 삐빅. 지긋지긋한 패널 생성음이 들려왔다.

999번이나 봐왔던 이번 생 최후의 패널… 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을 잠깐 크게 떴다.

이내 피식, 쓴웃음을 머금었다.

“괜히 말 걸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패널의 주인.

그리고 이 연극의 최종 보스.

의지의 화신은, 내 말에 즉각 반응해왔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 선이 역변합니다.]

파아앗!

시야가 새하얗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히든 엔딩 ― 999번째 로그라이크 히어로]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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