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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31화 (231/235)

231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53)>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했다.

멍한 머리로 화신의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이 계집을 죽여라.”

놈은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

최종 보스를 죽이라고. 최종 보스… 강수아를 내 손으로 죽이라고.

보스를 죽여서, 이 이야기의 막을 내리라고.

“뭘 그리 망설이고 있나? 초인.”

머뭇거리는 나를 놀리듯이. 화신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은 강수아의 여린 목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넘겼다.

“설마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다. 뭐 그런 소리를 할 셈은 아니겠지?”

“그, 그건.”

“마지막 왕의 정체가 이 여자였다. 그러면 당연히 주인공인 자네 손으로 이 여자를 죽여야, 이 이야기가 온전히 끝나겠지?”

“……!”

“그 정돈 진작에 유추해야 하는 부분 아니겠나. 초인.”

그야 당연히 예측은 했다.

나도 그렇게까지 병신은 아니다. 이런 결말이 될 거라곤, 나도 물론 예상하고 있었다.

눈앞의 화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 강수아를. 죽여?’

그땐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이제부터 만날 ‘진짜 강수아’는 내가 모르는 강수아다. 내가 1033번이나 목숨을 버려가며 지키고자 한 강수아는, 오히려 가짜 쪽이다.

그러니 죽여야 한다면 죽이면 된다. 나한테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에 불과하니까.

딱 그 정도로 생각하고 끝냈다.

‘내 손으로?’

분명히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심부에서 끓어오르는 상상 이상의 거부감. 역겨움. 그리고 구토감.

이건 예상을 못 했다.

“…….”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화신을… 아니. 내가 모르는 강수아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내가 아는 강수아와 완전히 똑같은 그녀를.

“그래. 네 손으로. 연극의 마침표를 찍는 거다.”

스륵.

화신이 강수아의 양팔을 힘차게 펼쳤다.

말마따나 연극의 배우처럼 과장스럽고, 또한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자. 계집을 죽여라. 초인.”

그리고 장절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놈의 입가엔 웃음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대신 어딘가 권태에 찌든 나른함이 감돌았다.

“내 시나리오는 그걸로 완전히 끝난다.”

“…….”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서, 나와 관련한 모든 흔적을 말끔하게 지울 것이고. 자네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되겠지.”

놈은 친절하게 차근차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말을 한 번 멈췄다가. 이내 잠깐의 고민 끝에 목소리가 이어진다.

“시간은… 그래. 10년 전. 첫 던전 발생 직전의 시기로 돌아갈 것이다.”

“10년, 전?”

“그 시간선엔 당연히 내가 나타나지 않을 거다. 고로 던전 붕괴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계가 지금까지 그래왔듯, 평화가 보장된 미래가 기다리겠지.”

“……!!”

“이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자네를 포함한 세계 전체가, 이 시간선에서 있었던 지난 10년간의 기억을 모두 소거 당한다.”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됐다.

간신히 이해가 된 뒤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들은 다음. 나는 삼켰던 숨을 일거에 쏟아내야 했다.

“기억을… 잃는다고.”

“정확히는 시간이 10년 전으로 되돌아감에 따라, 애초에 없던 일이 되는 거지. 지금까지 자네의 실패한 회차들이 그러했듯이 말이야.”

“…아아.”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그 새로운 시간선에 이 계집은 없다.”

멍청하게 탄성을 흘리자니. 화신이 지나가듯 한 마디 흘렸다.

도저히 흘려들을 수가 없는 한 마디였다.

“…뭐라고?”

반문하는 내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렸고.

두 눈은, 전에 없이 크게 부릅 뜨였다.

“지금, 뭐라고 했냐.”

“네가 도달할 엔딩 후의 세상. 거기엔 강수아란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초인.”

“왜, 어째서……?”

“자네 손으로 이 계집을 죽이고 만들어낸 결말이잖나.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냐.”

“……!!”

“이 여인은 이미 영혼의 밑바닥까지 던전에 속한 존재가 됐다. 제 발로 내 소유물이 되고자 해서 받아들여 줬지. 내가 이 장난감까지 자네에게 되돌려줄 의무는 없다고. 초인.”

요동치는 시야가 눈앞의 수아를 담았다.

엔딩의 장면 안에 강수아가 없다. 모두가 다 살아 있고 평화를 되찾겠지만, 그 평화 속에 강수아만큼은 절대로 같이 있을 수 없다.

화신은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가짜도, 말이냐?”

나는 꺼져가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쥐어 짜냈다.

그리고 화신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물론. 거기엔 가짜도 진짜도 없다.”

“…아.”

“이 여자의 존재 자체를 제물 삼아서.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 그것이 자네가 고를 수 있는 첫 번째 결말이다.”

“첫… 번째.”

의미심장한 단어 하나에 온몸이 반응했다.

절망적인 추락감에 아득해졌던 시야가 되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퍼뜩 들었고. 화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첫 번째지.”

언제부터였을까.

놈은 나를 향해, 특유의 찐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세상은 받아들이기 싫으냐?”

화신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고.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퍼뜩 온몸을 굳혔다.

“그렇다면 여기에 앉으면 된다. 초인.”

턱턱.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까 생성해낸 칠흑의 옥좌를 손끝으로 두들겼다.

화신의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자네가 이 옥좌에 앉으면. 그때부터 나와의 계약을 받아들인 걸로 간주하겠다.”

“…계약.”

“이건 나와의 직접 계약을 통해 던전 마스터로 탈태하고. 나의 수족으로서 영원히 살아가는 길이다.”

“!!”

“이미 비슷한 전례는 몇 번 경험했겠지? 이거 원, 계약자가 꽤 많아서 예시는 잘 기억이 안 나네만.”

화신의 계약자가 된다.

그 전례. 물론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베르페아노와 무르무르. 그리고 눈앞의 강수아 역시, 그 계약자의 대표적인 예시다.

히죽. 문득 화신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이 피안계를 자네에게 선물하겠다. 초인.”

“……!”

“이 이면 세계가 자네가 앞으로 영원히 살아나갈 거처가 되고. 영원히 싸울 전장이 된다. 던전 마스터가 된 자네에게 어울리는, 유일무이의 <던전>이 되는 것이지.”

“여기가…….”

중얼거린 나는 사위를 멍하니 살폈다.

불타고 그을려 거무죽죽한 대지. 그 위로 성한 곳이 없는 폐허가 된 도시의 풍경.

그리고 지금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까지.

“내… 던전이라고.”

그 끔찍한 풍경.

끔찍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그 풍경.

확실히 이건,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수많은 던전들. 그 자체였다.

“…나는.”

얼마나 주변 풍경에 넋을 놨을까.

정신 차려본 순간. 나는 화신에게 질문을 꺼내고 있었다.

“던전 마스터가 된 나는, 기억을 잃어 버리냐?”

“계약자들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 물론 자네가 잃지 않길 원한다면 말이야.”

“…아.”

“다만.”

거기서 화신은 고민 끝에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약간은 장난스럽게, 놈의 미소가 한껏 비틀려 올라갔다.

“영원은 본디 본질을 갉아 먹는 법이다. 이건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테지.”

“본질을, 갉아 먹는다?”

“내가 일부러 지우지 않아도, 던전 마스터로 살아가다 보면 영겁의 시간이 자네의 기억을 점점 갉아 먹을 것이다. 뭐 그런 소리였다.”

“…….”

그 말에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회귀를 반복해온 지난날의 내가 뇌리 한편에 어른거렸다. 과거의 수많은 내가 저 말들의 산증인이다.

나는 확실히, 영원을 감당할 그릇은 아니다.

“초인. 혹시 이 여인을 잊는 것이나… 그래서 자신을 잃는 것이 두려우냐?”

귀신같은 타이밍에 화신이 물어 왔다.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그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놈이 한결 회유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이 여인만은 절대 잊지 않게 해줄 방도가 있다.”

“…뭐냐. 그게.”

“이 던전에 강수아의 복제품을 만들어주겠다.”

“……!!”

“그러면 잊고 싶어도 절대 잊지 못하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네의 정신이 마멸되는 시간도 훨씬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 육사도가 뇌리에 아른거렸다.

시커먼 까마귀였다. 썩어 문드러져 가던 하얀 머리칼의 여인을 필사적으로 지키던 육사도. <길을 잃은 까마귀>의 형상이 떠오른다.

놈의 시커먼 투구 속에서 문득, 내 얼굴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혹 그것조차 싫으냐?”

상념을 꿰뚫고 화신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나는 지친 눈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화신은 움직였다.

“그렇다면 저기다. 참칭자를 향해 몸을 던져라.”

까딱까딱.

화신은 손가락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고. 장난스럽게 까딱이기 시작했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지금도 무서운 기세로 팽창하고 있는 거대한 심연이 보였다.

“그러면 그 시간부로 이 연극은, 실패의 형태로 끝나게 된다.”

“…실패.”

“자네는 그 지긋지긋한 시간 동결의 저주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대가 자네의 마지막 시간 선으로 확정되겠지.”

실패. 마지막 시간선.

몇 가지 키워드들이 머리맡을 빙빙 맴돈다.

목이 전에 없이 바싹 탄다. 나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그러면. 뭐가, 어떻게 바뀌는 거냐.”

그리고 가까스로 화신에게 질문했다.

그에 대한 화신의 대답은, 으쓱. 가벼운 어깨털이였다.

“자네가 죽기 직전의 1033번째 회차. 거기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아무… 것도, 라니?”

“말 그대로 아무것도다. 이대로 이 이면 세계를 나가서, 이미 멸망 직전까지 간 1033번째 지구를, 아직 살아남은 지인들과 살아나가면 된다. 초인.”

“……!”

세 번째 결말의 실체. 그제야 나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뽑아냈다.

“…현상 유지.”

14차 붕괴로 멸망 직전까지 갔던 1033회차.

그 회차가 최후의 시간선으로 확정된다. 그리고 더 이상의 영원회귀는 없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이미 자네에게 부여된 힘은 빼앗지 않아 주겠다. 기특하고 존경스러운 자네에게 내리는 최소한의 자비다.”

“…….”

“뭐, 아무튼. 이미 전 세계를 집어삼킨 수많은 던전의 몬스터들을 토벌해가며… 열심히 여생을 보내도록 해라.”

“…….”

“아니지. 내가 지금까지 감상해 온 자네라면. 세상이야 망하든 말든, 그냥 은거하며 방관하는 쪽을 택할지도 모르겠군. 푸흐흐.”

“…….”

“자네는 세상 모든 인간을 뼛속까지 혐오하잖나! 자네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야.”

화신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떠벌거렸고.

나는 결국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왜.”

한참 끝에 가까스로 한 마디 뽑아냈다.

더 이상은 증오도 뭣도 없다. 다 타고 남은 잿더미 같은 감정이 목소리에 실렸다.

“너는,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복잡한 의문을 담아 내뱉은 최후의 질문.

생각보다 화신은, 그 대답에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네 의지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초인.”

“의지… 라고?”

“이 여자. 강수아를 구하고자 하는 그 의지. 자네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줬던, 광기에 가까운 의지. 그것이 지금 자네가 느끼는… 그 지독한 절망감마저 이겨낼 것인가?”

“…….”

“자네는 전 인류를 희생해서라도 그녀를 구해낼 건가? 그녀가 자네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아니면 그녀를 외면한 채 세상을 구해낼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전부 포기하고 여생이나 보낼 것이냐?”

“…….”

“나는, 지금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초인……!”

의지의 화신.

이 별명을 붙인 베르페아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설계자’ 같은 딱딱한 명칭보다도 훨씬 찰떡이다. 저놈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소름 돋을 정도로 딱 맞는 별명이었다.

“이래저래. 잡설이 길었구나.”

짝짝. 문득 화신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내 주목을 모은 뒤. 광기가 철철 흐르는 미소를 두른 채.

놈은 내 앞에서 양손을 휘적이기 시작했다.

“지금 머릿속이 꽤 복잡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 이런 것까지 미리 준비해놨다고.”

삐빅.

놈이 휘적인 손끝에서 섬광이 피어났고. 동시에 패널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자연스레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분기점 ― 결말 선택]

[축하합니다. 당신은 무수한 역경을 넘어 최후의 선택의 기로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손으로 직접, 이 이야기의 종극을 선택하십시오.]

던전 시스템 패널.

그 주인이 내게 던지는, 최후의 선택지였다.

[1. 왕을 죽인다.]

[2. 죽어버린 왕의 옥좌를 찬탈한다.]

[3. 참칭자에게 몸을 던진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 세 가지. 그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선택지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한동안 뚫어지게, 하염없이 쳐다만 봤다.

“결정했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신이 넌지시 물어왔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아무래도 내 마음을 읽어냈지 싶다.

“…그래.”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내놓은 결론을, 천천히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

“나는.”

일생일대 최후의 선택.

내 손으로 직접 고른 미래.

이다음에 펼쳐질 것은, 그런 선택의 결과다.

“이거밖에… 없겠지.”

각오를 마치고.

손을 천천히 패널로 가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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