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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30화 (230/235)

230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52)>

“일단 자잘한 전후 사정은 생략하도록 하지.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을 테니.”

화신이 특유의 느릿하고 끈적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 그것을 들었다.

“초인. 한번 생각을 해 보자고.”

툭, 툭.

놈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긴다.

그 손가락이 이내, 나를 정면에서 삿대질한다.

“자네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이유가 뭐겠나?”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냐.”

“아무 대답이나 좋다.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면 된다.”

갑자기 시작된 선문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생각보다 서슴없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시선은 화신의 면상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너. 전부… 너 때문이잖아. 이 개새끼야.”

“아니지.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리고 수아의 고개는 가로로 도리질 쳤다.

생각보다 칼 같은 부정이다. 덕분에 나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뭐?”

“내 탓일 리가 없다. 내가 처음 설계했던 시나리오대로면, 자네는 여기 서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초인.”

“그게 무슨…….”

“옥좌를 담은 그릇으로서 소명을 다하고. 다른 일회용 엑스트라가 그렇듯 진작에 ‘초인’의 손에 죽었겠지. 아직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잖나?”

“…아.”

나도 모르게 짤막한 탄성을 흘렸다.

놈이 왜 그런 질문으로 시작했는지. 어렴풋이 짐작됐다.

“자네가 지금 이 자리에 살아서 서 있고.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순전히 이 계집이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려준 덕택이다. 초인.”

“…….”

“아니지. 자네 입장에선 ‘덕택’이라 하면 불쾌할지 모르겠군? 그 선택 때문에 어마어마한 수모를 겪었으니. 1033번이나 말이야! 카하핫!”

클클클.

수아의 도톰한 입술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문득 나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어쩌다 얽힌 놈의 시선에서, 형용 못 할 악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초인.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나?”

놈이 천천히, 무미건조하게 묻는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 한 덩이가 목구멍을 넘어갔다.

“뭐가, 말이냐.”

“이유. 동기 말이다.”

“…동기?”

“이 여인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갑자기 잘 끝나가던 연극을 질질 끌고, 왕을 자처하고. 진작에 퇴장했어야 할 자네를 무대 위에 다시 불러낸 거냐.”

“……!!”

“그녀와 나만이 알고 있는 이유들. 궁금하지 않냐는 소리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애초에 그걸 알고 싶어서 내가 이러고 있는 거다. 내 질문의 핵심부터가 바로 저거였다.

내 절박한 심정은, 살벌한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진 듯하다.

“이거, 뜸 들였다간 다시 칼부림 나겠군. 표정 좀 펴라고, 초인!”

놈이 손사래를 치며 한껏 비아냥댄다.

꾸드득.

나는 이를 부서질 듯 악물고, 한 대 칠 기세로 주먹을 말아쥐었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상 전체보다 자네가 더 소중했던 거다.”

화신은 정말로 뜸을 들이지 않았다.

뜬금없이 치고 들어온 목소리에 잠깐 벙쪘다. 이내 놈의 말을 한참 동안 곱씹은 뒤, 나는 멍청하게 표정을 풀어헤쳤다.

“…뭐?”

“내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하나?”

“무슨……?”

“원래라면 이 시점에, 자네는 살아 있을 수가 없어.”

“아.”

“그래. 반드시 죽었어야 했지. 자네는 초인도 아닌, 그저 옥좌를 담아놓는 일개 그릇 역할에 불과했거든.”

“……!!”

철컥, 철커덕.

머릿속에서 불쾌한 격철음이 들려온다.

뭔가가 맞아떨어진다. 불길한 가정이 사정없이 머리를 쑤시고 들어온다.

나는 어렵사리, 그것들을 입 밖에 줄줄 내뱉었다.

“설마, 수아가… 왕을 자처한 이유는…….”

“이 연극이 끝나는 것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지.”

“…그 말은.”

“그리고 어떻게든 막으려 한 이유는, 바로 자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다. 초인.”

“……!!!”

스르륵.

턱 주변에서 까딱이던 수아의 손가락이 자기 얼굴을 가리키고. 끝에는 내 얼굴을 가리켰다.

나는 그 손짓에 꿰뚫린 것처럼, 격하게 어깨를 떨었다.

“그러면. 내, 내가… 초인으로 선택된 것도……?”

전신에 싸늘한 오한이 치달린다.

온몸이 떨린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떨린다.

끝내는 시야도 격렬하게 요동친다.

‘하필이면. 내가, 초인이 된 것도?’

내가 반드시 죽는 시나리오를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아예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절대 중간에 죽을 리 없는 역할을 맡겨서, 내 생존을 도모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두 설명이 된다.

“전부, 수아의… 의지였던 거냐?”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시야 속에서.

나는 뒤틀린 미소를 짓는 수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하핫!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초인!”

거기서 별안간 화신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들은 것처럼, 호탕하고 맥 빠지는 너털웃음이었다.

이내 웃음기가 잦아든 화신이 천천히 목소리를 낸다.

“이 여자가 손수 자네를 이런 지옥에 몰아넣었다고? 설마! 자기가 직접 겪어봐서, 그 주인공 역할이 얼마나 괴로운지도 알 텐데 말이야.”

씨익.

문득 수아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짙어졌다.

아주 끈적끈적하고, 비릿한,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광소였다.

“굳이 자네를 고른 건 나야. 초인.”

그리고 그런 말을 내뱉는다.

나는 침몰해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경기를 일으키듯 발작적인 반응이었다.

내 눈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허?”

“내가 수많은 인간 중에서 자네를 골랐다. 대격변한 다음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될 사람은, 자네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그건, 왜… 어째서?”

“재밌어질 것 같았으니까.”

초월적인 대답에 순간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는 미간을 바짝 모은 채. 미미하게 웃음 짓는 놈의 입가를 노려봤다.

“재미, 라고?”

“그래. 모든 진실을 밝히는 바로 이 순간. 초인이 자네일 때… 이야기가 가장 즐거워질 것 같았으니까. 비극성이 제일 강조될 것 같았으니까.”

“…….”

“그게 이유다. 다른 거창한 명분은 없다.”

간신히 따라가나 싶던 이야기의 흐름을 또 놓쳤다.

어이가 없다 못해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선 이걸 확실히 알아둬라. 초인.”

그런 나를 타이르듯이.

화신의 거슬리는 노이즈가 들려온다.

“이 계집이 저질렀던 건 어떤 숭고한 희생이 아니다. 그냥 포기한 거다.”

“…포기.”

“자네가 죽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세상의 명운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는 중압감도 싫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가 싫었다. 전부 싫어서, 그냥 그 현실에서 도망쳤을 뿐이란 소리다.”

“…….”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어서. 급기야는 내게 손을 빌린 거지.”

강수아는 책임감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걸 놓고 도망쳤다. 주인공 자리를 팽개치고 숨어버렸다.

최초의 강수아가 했던 건, 딱 거기까지였다.

멍한 머리로 목소리가 계속해서 파고든다.

“당연히 강수아는, 자네가 다음 세대의 초인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초인.”

“…아.”

“이 계집은 그저 현상 유지를 원했지. 아무도, 그 누구도. 심지어 차세대 초인도. 이 이야기의 끝에서… 최후의 선택에 다다르지 못하길 원했다.”

“……!!”

클클클.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뒷목을 타고 흘렀다.

나는 지친 눈을 들어 화신을 쳐다봤고. 기다렸다는 듯이 놈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집이 원하는 바를 들어줬다.”

“……!”

“다만. 그녀가 가장 바라지 않았을 방식으로 말이야.”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를 골라서. 영원회귀를 시켰어.”

“잘 아는군. 999번의 시간 동결 저주. 그게 계집의 소원을 들어준 결과다.”

“…….”

“초인을 중심으로 시간을 동결시켜서, 시나리오의 진행 자체를 근본적으로 틀어막았지. 이해하겠나?”

그것이 강수아가 내린 극단적인 조치.

그녀는 책임에서 도망치기 위해 세상의 시간을 동결시켰다. 그것을 화신에게 요구했고, 그것은 훌륭하게 실현되었다.

거기서 별안간 화신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나. 왜 영원히 반복되는 게 아니고, 999번째 회차부턴 결국 운명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아가게 설정됐는가?”

화신이 수아의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궁금하지. 궁금하잖아? 은근히 강요하는 듯한 시선이다.

실제로 궁금한 건 사실이라서 혼자 씨근거릴 뿐. 이렇다 할 불만은 내뱉지 못했다.

“…왜냐.”

“사실 별 대단한 이유는 아니야. 부끄럽게도 내 역량 부족이지.”

“역량?”

“나는 신이 아니다.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고.”

“…….”

“영원은 내게도 버거운 개념이다. 초인.”

진짜 쪽팔린 건지 말을 좀 어렵게 돌리는데.

한 마디로 본인의 능력상, 무의미하게 반복시킬 수 있는 회차가 최대 999회차까지였다. 그런 소리가 되겠다.

속으로만 납득의 탄성을 흘리고 있자니.

“그리고 자네는. 내게도 버거운 그걸… 보란 듯이 견뎌버렸지. 한낱 살아 있는 인간 주제에 말이야!”

화신이 짐짓 대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놈의 진득한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마치 품평하듯이.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존경해 마지않는다. 초인. 이건 지극히 순수한 나의 진심이다.”

“…개소리. X까.”

“알아서 생각하도록 해라. 어차피 중요한 건 자네의 감상도, 내 감상도 아니니까.”

“…….”

“종언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초인.”

쿠르륵!

문득 발아래서 미미한 땅울림이 느껴졌다.

진원지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쳐졌던 두 눈이 한껏 부풀었다.

“이젠… 자네의 선택만이 남았다.”

콰콰콰콰!

세상을 집어삼켰던 불꽃들이 한곳에 모여 들었다. 그리고 시커먼 화염에 휩싸인, 거대한 옥좌의 형상을 빚어냈다.

나는 그 익숙한 모양새에 탄성을 흘렸다.

“…왕의 옥좌.”

“정답이다. 오랫동안 한솥밥 먹던 사이라서 그런가, 바로 알아보는군?”

화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득하게 웃었다.

놈이 천천히 걸어가 옥좌로 다가간다. 그리고 옥좌의 등받이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넘겼다.

나는 그 행태를 가만히 살피다,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그건 뭐하러 꺼낸 거냐.”

“이건 선택지다. 초인.”

“선택지?”

“그래. 최후의 선택이지. 자네가 고를 수 있는 결말의 형태 중 하나다.”

“결말의… 선택.”

그건 또 익숙한 소리였다.

에티와 무르무르의 목소리들이 새삼 귓전을 때렸다.

머릿속을 휘젓는 의문에 정신이 어지럽다. 나는 관자놀이를 쥐어 싸맸다.

“그 선택이라는 건… 대체 뭐냐.”

“말 그대로다. 자네의 손으로 이 이야기의 결말을 선택하는 거야. 초인.”

“결말을, 내 손으로……?”

“그래. 고생한 자네를 위해서… 내가 여러 가지 결말을 준비해 놨다.”

마지막 선택이라는 건 결말을 말하는 듯하다.

지금부터 놈이 내게 어떤 선택지를 준다. 그러면 내가 그것 중 하나를 선택하겠지.

그에 따라… 앞으로의 내 미래가 결정되는 듯하다.

“뭐, 그럼. 서로 할 말도 이제 끝이군.”

문득 수아… 화신은 양팔을 넓게 펼쳤다.

놈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성자처럼. 짐짓 거룩한 몸짓으로 가슴을 활짝 편다.

“이제 승리를 쟁취할 시간이다. 초인.”

그리고 나를 향해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소가 가득한 목소리가, 천천히 귓가를 파고든다.

“죽여라. 왕을.”

그 말이 귓전을 때렸고.

사고가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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