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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29화 (229/235)

229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51)>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뭐, 뭐?”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놈이 애석하다는 행색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듣지 못한 건가? 그 맹인 암컷한테 분명히, 내 전언을 전달하도록 강한 사념을 주입해놨는데.”

“맹인, 암컷이라고……?”

“그 암컷이 분명 전해주지 않았나? 이것이 자네가 맞이할… 종언의 풍경이라고.”

“……!!”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직후에 깨달았다.

탁! 화신은 수아의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고. 그것으로 이변은 시작되었다.

쿠구구구구!!

격렬한 지진이 사방천지를 뒤흔들기 시작한다.

“무, 무슨!”

콰콰콰콰!!

수아를 중심으로 거대한 파동이 퍼져나간다.

마치 물들어가듯이, 파동에 휩쓸린 풍경이 대격변 하기 시작했다.

“아. 아아.”

멀쩡하던 건물은 낡고 무너진 폐건물이 되었다.

도처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한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죽죽 갈라진 도로 위로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이게, 대체……!!”

당연히 우리 집은 진작에 무너졌다.

나와 화신은 어느새, 폭삭 무너진 건물더미 위에 서 있는 형국이 되었다.

―꺄아아아악!!

―아악! 끄아아아악!!

그리고 들려 오는 비명.

이제는 익숙할 정도인 처절한 비명이, 치솟은 불길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 나머지 중얼거렸다.

“피안… 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옥좌를 죽이고 피안계에서 벗어났다 싶었더니. 화신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또다시 여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그그그그그……!!!

특유의 소름 끼치는 굉음도 들려왔다.

나는 순간 온몸을 바짝 굳혔고. 설마설마 하면서도, 떨리는 고개를 천천히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쩍 벌렸다.

―그그그그그그그그!!!

참칭자가 등장했다.

직경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하고 시커먼 무언가. 공허 그 자체.

그것이 내 위에서… 닥치는 대로 온 세상을 삼키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꿈을 꾸는 건가?’

혼란스러운 머리가 자동적으로 떠올렸다.

사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 회귀 직후에 늘상 취하던 낮잠에 빠져버린 것 같다.

그게 아니고선, 눈앞의 조화를 도저히 이해력이 따라갈 수가 없다.

“뭘 그리 놀라고 있나.”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강수아가 귓가에 중얼거렸다.

퍼뜩! 깜짝 놀라서 파바박 뒷걸음질 쳤다.

“후흐흐.”

강수아… 화신은, 그런 내 행색이 귀엽다는 듯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리고 처척, 놈이 하늘 위의 참칭자를 가리켰다.

“갑자기 이것저것 튀어나오니 놀란 거냐? 초인.”

“…말이라고.”

“미안하다. 설명을 깜빡했군. 우선 여기는 네가 알던 그 세상이 아니다.”

“…아니라고?”

“저기, 저거. 보이나?”

문득 화신이 수아의 손가락을 위로 까딱였다.

자연스레 내 시선도 위로 향했다. 그 손가락 끝에는,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로 팽창하는, 참칭자가 있었다.

“여길 좀 설명해주자면. 저 시커먼 것의 내부공간이다. 초인.”

흠칫. 시선이 다시 수아의 얼굴로 박혔다.

화신은 그녀의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 신랄하게 웃고 있었다.

“최종 국면에 맞는 무대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 심혈을 기울여서, 따로 준비해놨지.”

“…무대.”

“그래. 혹시 이곳의 정체는, 이미 누군가에게 들었나?”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여기가 내가 생각하는 그곳이 맞다면.

아마도 나는, 이곳의 정체를 알고 있다.

“…피안계.”

그 정체를 천천히 입에 담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가장 먼저 멸망한, 1회차의 지구… 랬던가.”

“반은 정답. 정확히는 그 회차의 지구를 본떠 만든 틈새의 세계지. 내가 만들어낸 아공간이다.”

화신이 끼어들어 내 말을 정정해줬다.

수아의 입가에 빙글빙글 떠 있는 미미한 미소. 아까부터 거슬리기 짝이 없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놈의 설명은 이어졌다.

“저건 입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출구이기도 하다.”

“…어디로 이어지는?”

“어디겠나. 지구와 이 틈새의 세계를 잇는 문이지.”

“……!!”

“지구의 떨거지들이 흔히 쓰는 말로… 그래. 게이트. 좀 특이한 던전 게이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새삼스레 참칭자를 올려다봤다.

시커멓고 거대한 게이트. 그 설명 역시, 내가 전에 들었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육사도 <목 잘린 붉은 용>은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폐허밖에 안 보이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당신이 강수아 씨와 대화하고 있더군요.”

아아.

나는 뒤늦은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머리를 팽팽 굴리던 와중. 뇌리의 한구석을 스치는 목소리를 떠올린 것이다.

‘맹인 여자… 이세라.’

꽤 지난 이야기다.

그래서 떠올리는 게 좀 늦었다.

몇 회차나 전의 언젠가, 이세라가 내게 이런 기묘한 얘기를 했었다.

“정용 씨는 뭔가를 필사적으로 고민하고 있었어요. 강수아 씨는… 그런 당신을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죠.”

이세라는 이 광경을 봤던 거다.

정확히는 화신에 의해 강제로 보게 됐다. 나에게 이 장면을 예고하기 위해서. 텅 빈 눈에서 피를 왕창 쏟아가며 희생당했다.

침음을 흘리며 그 사실을 곱씹고 있자니.

“이 격리 세계는 <왕>을 보호하기 위한 견고한 성벽이다. 동시에 왕을 가둬놓기 위한… 단단한 우리이기도 하지.”

왕을 가두는 우리.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화신의 외형을 찬찬히,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래. 놈은 지금 무슨 형상을 하고 있던가. 무려 수아의 탈을 쓰고 있었다.

“…전부.”

저 새끼만 없었으면.

던전 붕괴도, 영원회귀도, 내가 겪어온 정신이 아찔해지는 세월과 고통도. 진짜 수아와 가짜 수아도. 수아의 수도 없이 반복된 죽음도.

전부, 저 새끼만 없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인데.

“너만… 너만.”

저벅, 그리고 저벅.

나는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수아에게… 왕에게 한 걸음씩 옮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너만, 뒤져버리며어어언!”

투하악!

수아를 향하던 마지막 한 걸음. 전력을 다해 내디뎠다.

콰콰콰콱!!

손을 있는 힘껏 뻗어 찌르기를 가했다. 생각보다도 몸이 먼저 나가버린 불시의 일격이었다.

“감정이 앞서는구나. 초인.”

수아의 탈을 쓴 화신이 한 마디 지껄였다.

스윽. 놈이 검지를 쫙 펴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손끝을 내가 휘두른 칼끝으로 향했다.

“초인. 네가 가진 모든 힘의 출처는 나다.”

춤추듯이 자연스러운 동작.

그러나 나조차 경악할 정도로 신속하다.

놈의 그 부드러운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적하게 뇌리에 입력되었다.

“왜 공격이 통할 거라 생각하는 게냐?”

카아아앙!!!

가공할 금속음과 폭발의 충격파. 화신의 손가락 하나와 내 단검이 만난 결과물이다.

여유만만한 놈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헛숨을 한껏 들이켰다.

“허?”

막아냈다.

화신은 내 전력이 담긴 일격을, 고작 손가락 하나로 막아냈다.

황당과 당황이 뒤섞여 순간 몸이 굳어버린다.

“일단은 머리를 좀 식혀보지.”

화신의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작적으로 시선을 들었다. 깨물어 죽여 버릴 것처럼 시선을 벼린 채, 눈앞의 화신을 한껏 노려봤다.

“대체 뭘 그리 초조해하고 있나? 초인.”

놈은 그런 나를 쳐다보며 피식, 대차게 웃었고.

수아의 어깨를 으쓱이며… 이런 말을 한다.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이미 자네의 승리가 확정되었는데 말이야.”

별안간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껄이는 화신.

키리릭, 키릭!

놈의 손가락에 단검을 붙잡혀 꼼짝도 못 하던 와중, 나는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놈을 노려봤다.

내 시선엔 의문이 가득했다.

“…내가 이겼다고?”

“그래. 그러니 그렇게 안달복달할 이유가 없어.”

“무슨…….”

“일단 미리 축하부터 해주겠다. 무려 1033번의 죽음마저 돌파하여, 기어이 여기까지 찾아온 자네를! 나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경외한다. 초인.”

짝짝짝.

화신이 거만한 행색으로 박수를 쳐댄다.

수아의 얼굴이 나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 부조화가 만연한 광경을 망연히 쳐다보다가, 이내 미간을 바짝 모았다.

“너는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흐음. 이해가 잘 안 되나?”

내가 연신 고개를 모로 꼬자, 화신은 곤란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그가 침음과 함께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여인. 강수아는 왕이다. 원래라면 자네가 싸워야 할 최후의 던전 마스터지. 이해했나?”

“…알아. 그래서.”

“하나 방금 자네도 직접 봤겠지만. 이 계집은 자네와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오히려 자네에게 한량없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아.”

“즉 여기까지 도달한 시점에서, 자네의 승리는 이미 확정되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그 말은 전에도 분명 들어 봤던 말이다.

분명 무르무르가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놈이 알고 있던 진짜 강수아는 나와 싸울 마음이 없어서, 사실상 자기가 마지막 관문이라고 했었지.

‘그것도 전부, 사실이었나.’

물론 이전에 옥좌와의 전투가 있긴 했다.

하지만 놈과의 전투도 결국 시답잖게 몇 번을 치고받았을 뿐. 놈의 자진 항복이라는 싱거운 결말로 끝을 맺었다.

‘무르무르가 그것까지 예측한 건가.’

아니면 단순히 계산을 빼먹은 건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놈의 말은 분명 대부분 사실이었다는 거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신이 침음을 슬쩍 삼켰다. 그리고 수아의 두 눈을 한껏 크게 부풀렸다.

“으음. 뭐, 하긴. 그럴 테지. 그럴 만도 하지.”

놈은 의문스럽게 날 쳐다보다가, 이내 납득한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활짝, 양팔을 넓게 펼쳤다.

“무려 1033번의 회귀를 경험한 육신이 아닌가! 그 몸에 쌓인 궁금증이 분명 많을 것이다.”

화신은 짐짓 비장한 목소리로 떠벌거렸다.

연극의 한 장면처럼 작위적이다. 누가 봐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쯧.”

등줄기를 긁는 목소리에 미묘하게 수아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다.

다른 것보다도, 그것이 상당히 불쾌했다.

“그래. 어디 말해봐라. 초인.”

그리고 놈은 짐짓 자비를 베풀 듯,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엔 여전히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다.

“오늘의 나는 굉장히 기분이 좋다. 이 지리멸렬한 연극이 드디어! 이제야 자네 덕에 끝나게 됐으니까.”

“그러십니까.”

“그러니 내 은사라고 할 수 있는 자네에겐, 좀 관대해질까 한다.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선 흔쾌히 대답해줄지도 모르겠군.”

“…거 고맙구나.”

스르륵.

그 대답까지 들은 순간. 나는 아예 단검을 쥔 손에서 힘을 빼 버렸다.

내 손을 떠난 블라이스의 단검이, 수아의 손가락 사이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어차피… 저 새끼와의 전투는, 성립 자체가 안 된다.’

방금의 한 합으로 그것을 뼛속까지 새겼다.

공격이 막혔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완전히 무효화 됐다는 느낌이었지.

이 특유의 이질적인 감각.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다.

‘스킬… 그리고 공격 무효화.’

화신이 직접 이브에게 걸어놓았고. 또한 광대의 피안계에도 걸려 있던 그것.

놈은 그 기술을 숨 쉬듯이 쓰고 있었다.

‘무효화라기보단, 그래. 회수.’

단순히 막아내는 게 아니다.

이능의 힘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힘. 당연히 있어야 할 곳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에 가깝다.

이건 힘의 원래 주인… 화신만이 가능한 불가해의 기적이다.

‘저놈은 말하자면, 신이다.’

아니지. 진짜 신은 아니라고 했던가.

어쨌든 일개 사람 새끼인 나한테는 신에 준하는 무언가다. 사실상 신이라고 봐도 된다.

던전에 관련한 모든 힘들이 근본을 따지고 올라가면 저 새끼의 소유물. 그건 내가 가진 힘도 분명 마찬가지였다.

‘지금 나한테 대항할 수단은…….’

없다.

인정할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없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저놈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니까. 정보라도 뽑아낸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평소와 다를 게 없다.

전력을 다해 부딪친다. 그럼에도 이길 각이 안 나온다면, 질문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시도해서, 한 톨이라도 정보를 더 캐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나의 몬스터 대처 매뉴얼이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어쨌든 나는 서두를 뗐다.

영원회귀가 시작된 1회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시도 빠지지 않고 나를 계속해서 괴롭혀왔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물어볼 건… 처음부터, 이것뿐이었어.”

궁금한 건 분명 산더미처럼 많다.

하지만 내가 놈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은… 결국, 모두 이 질문으로 귀결된다.

“왜. 나였던 거냐.”

이건 화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고.

또한 지금 화신이 뒤집어쓰고 있는 껍데기. 진짜 강수아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대체, 왜. 내가. 선택된 거냐고……!”

절박함을 가득 담아 수아를 본다.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화신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근본부터 파헤치겠다는 건가.”

화신의 대답은 그것이었다.

놈이 뒷머리를 태평하게 긁적이나 싶더니. 반쯤 흘겨 뜬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초인.”

화신은 가벼운 조소를 머금었다.

직후, 놈이 손가락에 힘을 풀어 내 단검을 팽개쳤다.

탱그랑!

블라이스의 단검이 바닥을 나뒹군다.

“뭐, 이제 자네도 대충 짐작은 하겠지?”

그 청명한 소리가 시발점이었다.

놈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자기 얼굴… 수아의 얼굴을 똑바로 가리켰다.

“모든 발단은 바로 이 여자… 강수아다. 초인.”

그리고 처음부터 하나씩.

전말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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