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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28화 (228/235)

228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50)>

“아. 아아……!”

벅찬 마음과 의구심. 혼란과 기쁨.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제대로 말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그저 연신 탄성만 터져나올 뿐이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34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넋을 잃은 와중에도 회귀는 착실히 진행된다.

주위는 여전히 불꽃에 휩싸여 밝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인지부조화가 온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그런 와중에 패널이 내게 물어온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이 이야기의 끝을 써 내려가기 위해서. 패널의 물음에 긍정한 것이다.

[다음 회차로 계승할 유물을 선택하십시오.]

…계승할 유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하도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황급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알림: 계승불가]

[칭호 <찬탈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이템을 계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괜한 고민이었다.

별안간 삐빅, 평소와는 약간 다른 패널음이 울렸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패널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왕의 옥좌에 앉아, 자격을 증명해 주십시오.]

당연히, 이런 것도 처음 보는 패널이다.

쿠르륵! 쿠륵!

내가 넋 놓은 사이 눈앞의 어둠이 한 곳으로 뭉쳤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거대한 의자의 형상이 되었다.

“…이건.”

왕의 옥좌.

상황상 눈앞의 이것은, 분명 패널이 말하는 ‘옥좌’일 것이다.

“대체, 지금부터. 무슨 일이.”

1033회차까지 와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나올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 X발… 진짜.”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나는, 앞으로 어떤 전개가 날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요만큼도, 일말의 짐작도 되지 않는다.

저벅저벅. 나는 천천히 전진했다.

“후. 후우……!”

억지로 심호흡으로 호흡을 가다듬었고. 강제로 발을 놀렸다.

그렇게 나는, 금세 칠흑의 옥좌 앞에 우뚝 섰다.

“…….”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해야 하는지. 그건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모른다고 해서 도망치는 짓은, 이제 와서 하고 싶지 않았다.

“간다……!!”

될 대로 돼라.

이를 악물고, 털썩. 나는 옥좌에 걸터앉았다.

한순간 싸늘한 적막이 이명처럼 고막에 맴돌았고.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삐빅.

새로운 패널들이 눈앞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최종 단계로 이행합니다.]

[무대를 이동합니다.]

최종 단계로의 이행.

그것까지 보고 나서야 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찔하게 몰려오는 현기증 속에서. 나는 가만히 이를 악물었다.

‘찬탈자. 그게 조건인 거였나……!’

찬탈자.

마지막 육사도까지 살해하고 나서 얻은 칭호다.

그것을 얻어낸 지금, 드디어 이 거지 같은 회귀 생활의… 엔딩을 볼 자격이 생긴 것이다.

‘이번이. 정말로!’

진짜 끝이다.

다음이 최후의 회차다.

그것을 시스템이 공인해줬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쿠우웅!

그리고 마침내 익숙한 전개가 시작되었다.

뒷목을 후려치는 아찔한 현기증. 뇌를 쥐어짜는 듯한 감각. 눈앞이 아지랑이처럼 이지러지는 느낌이 엄습한다.

“끄……!!”

다만 한 가지. 평소보다 현기증이 훨씬 심하다.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그그그그그……!

그리고 정신을 잃기 직전. 나는 그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그그그그그그그!!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내 정면에 그것… 참칭자가 있었다. 놈이 거대한 심연을 한껏 부풀린 채, 내게 그 거체를 쏜살같이 들이밀었다.

“무, 슨!”

내가 채 뭐라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콰콰콰콰!

내 몸은 참칭자의 심연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과 육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격통이 온몸으로 쏟아진다.

[현재 시간 선: 2031년 12월 23일. 오전 3시]

[현재 시간 선: 2031년 12월 16일. 오후 2시]

[현재 시간 선: 2031년 12월 8일. 오후 2시]

…….

…….

째깍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어지럽게 정신을 지배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어딘가로 내 몸이 한없이 끌려간다.

아찔해지는 정신. 눈앞이 하얗게 명멸했다가, 이내 시커멓게 암전된다.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2시]

그리고 어느 순간.

현기증이 거짓말처럼 싹 가셨다.

“…….”

짹짹, 째잭!

귓가를 자극하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등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침대의 촉감까지.

나는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긴.”

눈앞의 광경을 목격한 순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복잡한 심경이 뒤섞인 한 마디였다.

“똑같다고?”

뭔가라도 변화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이럴… 리가.”

1034번째 반복된 똑같은 광경. 똑같은 냄새.

손끝에서 느껴지는 침대의 촉감과, 미지근한 겨울 오후의 햇살. 그리고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흐릿한 새소리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전과 같다.

“이럴 리가!”

쿠당탕!

나는 침대를 박차듯이 벌떡 일어났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며, 뭐라도 좋으니 바뀐 부분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어, 아빠아……?”

우뚝. 부산스럽던 내 움직임이 단숨에 멈췄다.

뚜둑뚜둑, 고개가 목각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브가 거기에 있었다.

“…….”

“…….”

한동안 멍하니 시선이 오갔다.

이내 그녀가 갸웃,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아빠, 일어나자마자 뭐해?”

“어, 음.”

“뭐라도 찾는 거야? 되게 급해 보여.”

“아니. 그게.”

태연하게 물어오는 이브였다.

평범하게 묻는 그녀의 모습조차, 내가 알던 이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변화가 없다. 그 사실이 나를 초조와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잠깐. 확인 좀……!”

의문스럽게 쳐다보는 이브를 반쯤 무시해버렸다.

덜컹! 자리를 박차고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그리고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나는 흠칫, 온몸을 굳혀야 했다.

“… 수아.”

문앞의 복도에 수아가 서 있었다.

우두커니. 그 말이 그렇게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아니. 어, 어떻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지금.

이 귀신같은 타이밍에 수아가 날 찾아왔을까.

“…….”

그녀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입을 닫고 있다.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가 않다는 건, 눈치가 없는 나라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 수아야.”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려고 했건만. 물어보는 내 목소리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아는 그 물음에 반응해주지 않았다.

“…….”

여전히 미동도 없다.

죽은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나는 그 이상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고. 이내 덜컥, 숨을 삼켰다.

“…수아, 야.”

평소 같지 않은 수아.

내가 모르는 강수아. 그 한 문장이 뇌리에 박혀든다.

그 순간 온몸의 신경에 긴장이 치달린다.

“너. 누구냐.”

강수아와 똑같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

말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그 설명에 부합하는 존재. 분명 얼마 전에 하나 알게 됐었지.

퍼뜩,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왕이냐……!!”

물어보긴 했지만 반쯤은 확신하고 있었다.

눈앞의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수상쩍은 분위기. 아니, 수상한 걸 넘어서… 본능이 소리치는 위협적인 무언가.

그것도 이놈이 왕이라면, 전부 설명되니까.

“…….”

그리고 내가 ‘왕’을 언급한 순간, 수아는 드디어 반응해줬다.

스르륵.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들리기 시작한다.

“…오빠.”

왕은 희미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내가 익히 아는 수아의 목소리. 그 자체였다.

‘이런, X발.’

내가 아는 수아와 같은 어조, 말투, 억양.

특유의 울먹이는 목소리는, 혹시 지금 내가 착각해서 개짓거리 하는 거 아닌가… 하는 희망 고문까지 시켰다.

그리고 퍼뜩, 왕은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정말 미안해요. 오빠.”

그녀가 내게 별안간 미안하다고 한다.

수그린 얼굴 아래. 투명한 물방울이 연신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나는 그 광경을 망연히 쳐다봤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정말이에요……!”

어안이 벙벙해진다.

반쯤 넋이 나간 눈이 수아를 주시한다. 처량하게 떨리는 가녀린 어깨와, 수아의 흑단 같은 긴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온다.

지금 왕은, 오열하며 내게 사죄하고 있다.

‘이거. 꿈인가?’

지난 꿈속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 꿈과 소름 돋을 정도로 비슷한 구도였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선잠에 빠져 백일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런 의심에 사로잡혀야 했다.

“수아… 아니.”

놈을 ‘수아’라고 부르려다 덜컥, 말문이 막혔다.

저건 아마도 내가 아는 수아가 아니다. 수아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너.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

그래서 용건만 간단히 물어봤다.

꿈속에서 나왔던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았었다. 애초에 뭘 물어보기도 전에 꿈에서 깨버렸지.

하지만 꿈이 아니라면. 그녀는, 내 질문에 무조건 대답해야 한다.

“말해. 빨리.”

파지직!

내 왼손에선 시퍼런 번개 줄기가 치달렸고, 오른손은 허공을 파고들어 날이 시퍼런 단검을 뽑아냈다.

나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왕의 면전으로 들이밀었다.

“…말하라고요?”

스르륵.

다시금 왕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된 수아… 왕의 얼굴이 나를 빤히 마주했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칼날과 벼락을 괴로운 듯이 쳐다보더니. 이내 처절한 표정으로 히죽거렸다.

“제가, 오빠한테요? 말하라고요? 뭐가 미안한지를……?”

왕은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양.

“아니. 못해……!”

도리도리도리.

이내 그녀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세차게 젓기 시작했다.

“나는… 못해요. 싫어요. 도저히, 그럴 순… 없어요!!”

혼자 중얼거리다, 빽 소리친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잠깐 그녀의 행색을 잠자코 관망했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이내 그녀는 퍼뜩, 허공의 어딘가를 빤히 주시했다.

“너. 너어어!! 모른 척 그만해! 진작부터 다 보고 있었잖아?!”

그리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저 분노의 대상은 내가 아니다. 그녀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나와. 빨리, 나오라고…! 당장!! 이 개자식아! 나오란 말이야!!”

“……?”

나는 숨을 삼키는 한편, 그녀의 떨리는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겨봤다.

당연하게도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도… 오빠를 끌어들인 것도!! 전부, 네가 꾸민 거잖아!! 빨리 나와! 나와서… 전부! 네 입으로 설명하라고!!”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광인의 행색.

수아의 면상을 달고 저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슬슬 그녀를 말리기 위해 천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에게 손이 닿을 거리까지, 한 걸음 정도 남았을 때쯤.

“여기까지 와서도 도망치는 거냐.”

수아의 고개가 돌연 푹 꺾였다. 그리고 머리칼에 가려진 얼굴 너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름 끼치게 이지러진 목소리가 말이다.

“애초에 내가 권하기야 했다만. 그대는 예나 지금이나, 심성이 참으로 한심하고 저열하구나.”

분명 전에 한 번 들어봤다.

그래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

쿠우웅!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지는 듯하다.

시간이 얼어붙어 버린 듯했다. 귀가 먹먹하다. 온통 적막에 휩싸인 세상에서, 수아의 머리칼만이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고 있었다.

“어, 커헉……!”

아니. 시간이 멈춘 듯한 게 아니었다.

진짜로 멈췄다. 주위의 사물들이 모두 완전히 움직임을 멈춰 있었다.

이건… 절대, 기분 탓일 수가 없었다.

‘이, 이브!!’

어렵사리 숨을 몰아쉬며, 퍼뜩 등 뒤를 돌아봤다.

숨죽인 고요에 휩싸인 집 안, 돌부처처럼 바싹 굳어 있는 이브가 보였다.

일말의 미동도 없다. 사람이 아니라 무생물 같았다.

“거 보라고. 초인.”

그리고 그 순간.

수아… 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화들짝 시선을 원위치했다. 그러자 놈의 게슴츠레한 시선이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너, 너.”

의지의 화신이다.

저 특유의 분위기. 주변의 무거운 공기. 남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뒤에서 비웃는, 저 특유의 표정까지.

이미 한 번 겪어본 내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너. 이 새끼……!!”

마른침을 어렵사리 삼켰다. 목소리가 절로 떨린다.

씨익.

화신은 그런 나를 보며… 입꼬리를 한껏 비틀어 올렸다.

“결국엔 전부. 내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구나.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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