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49)>
채앵! 채채챙!
한동안 드높은 금속음이 어지럽게 이어졌다.
일렁이는 화염에 삼켜지듯이. 우리의 신형은 화마 속에서 얽히고설키며, 서로의 목숨을 끊임없이 탐했다.
“큭. 크흐. 푸흐흐.”
눈앞의 나… 옥좌는 연신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려댔다.
놈의 미소가 순식간에 지척까지 접근해 세 번의 연격을 뿜어낸다. 나는 그에 맞춰 재빨리 오른손을 놀렸다.
카카캉!
또다시 세 번의 금속음. 놈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간다.
“뭘 자꾸 빠개는데.”
투하악!
그러면 이번엔 내 쪽에서 공격한다.
똑같은 삼연격. 그러나 궤도는 놈과 사뭇 달랐다. 측면에서 시작한 궤도는 놈의 목을 노리며 쇄도해갔고, 최후엔 복부를 찔렀다.
“아아. 미안하게 됐군.”
채채챙!
그리고 어김없이 모두 막혀버렸다.
타박. 유유자적하게 백스텝을 밟는 옥좌. 놈이 사뿐히 지면에 착지해 태세를 가다듬는다.
놈의… 나의 날카로운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네 안에 숨어 있는 동안 나도 많이 찌들었구만. 그런 생각을 잠깐 했느니라.”
“…그게 무슨 말이냐.”
“생각하는 수준이 비슷해졌달까. 내가 많이 단순해졌음을 실감한다.”
저 새끼 지금 나보고 단순하다고 맥이는 것 같은데.
불쾌감에 인상을 슬쩍 찌푸리자니. 문득 놈은 블라이스의 단검을 들어 나를 겨누었다.
“네 다음 공격 패턴을 말해줘 볼까.”
스르릉.
청명한 칼날의 끝이 내 미간을 정확히 노렸다.
“지금까지 측면의 기습으로 공세를 시작했지. 세 번째는 아닐 거라고 짐작하는 내 심리를 역으로 찌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측면의 기습공격으로 서문을 열 것이다.”
“…….”
“다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후방의 기습. 익숙해진 공세의 흐름에 순간적으로 변칙수를 섞어 변수를 유발한다.”
“…….”
“그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그래. 목을 노리고 참격을 가할 것 같군.”
“…….”
“이건 딱히 아무런 근거가 없어. 그냥 내 감이니라. 직감이지.”
주절주절 잘도 떠드는 옥좌 새끼.
본새는 띠껍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존나 기분 나쁜, X발년.”
나는 극찬을 내뱉었다.
놈의 추측이 전부 옳았음을 실토한 꼴이다.
아무튼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내 생각을 남에게 전부 읽힌다는 건 죽음에 비견될 정도로 불쾌한 일이다.
“말했잖나. 생각하는 수준이 너무 비슷해졌다니까.”
그리고 그런 내 반응을 정확히 해석한 건지, 옥좌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내 면상이 히죽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연발하기 시작한다.
“껍데기여. 네놈은 자기 자신과 가위바위보를 해본 적이 있나?”
그런 와중에도 특유의 서슬 퍼런 저 시선.
거기에 도사린 서늘한 날카로움만은 여전하다.
나와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그 부분이, 더더욱 소름 끼치게 다가온다.
“뭔 개소리냐.”
덕분에 대답하는 내 얼굴은 불쾌감에 한껏 찌그러졌다.
옥좌는 아랑곳 않고 자기 할 말을 지껄여댔다.
“지금 우리의 싸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니라.”
“…허.”
“네놈은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나?”
“…….”
안 느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위화감… 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히는 숨 막힐 정도의 동질감을 느꼈다.
놈의 공격패턴은, 뭐랄까. 지나치게 나한테 익숙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했던 총 24번의 공격. 모두 네놈이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공격의 패턴이었다. 설마 눈치채지 못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딱히 의식하고 따라한 건 아니다. 그저 몸이 그렇게 움직였을 뿐이니라.”
“…….”
“거의 본능에 가까운… 그래. 육체에 단단히 각인된 습관에 따라서 말이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놈의 의도가 가늠되지 않았다.
아니지. 가늠은 됐는데. 내가 이해한 그게 맞는지 갈수록 의심된다.
“이래서야 뭐, 결착까지 한 세월이겠군. 그렇지 않나?”
마지막에 옥좌가 그런 말을 꺼낸 순간.
나는 짐작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그냥 관두지. 이쯤에서.”
탱그랑!
옥좌는 청백색 단검을 미련없이 내팽개쳤다.
“실로 무의미한 싸움이었도다. 시간이 다 아깝군.”
항복 선언.
정확히는 휴전 선언.
놈은 내가 짐작한 대로, 별안간 싸움의 끝을 고해버렸다.
“아니… 무슨.”
개전 때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종전이다.
나는 한껏 당황한 나머지 잠깐 어버버거렸다.
“그냥 네가 이긴 걸로 하거라. 자비로운 이 몸이 아량을 베풀겠다.”
피식.
옥좌는 나를 비웃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거 X발 내 면상이지만, 진짜 볼 때마다 개띠껍게 생겼다.
아무튼 놈의 아가리는 그 뒤로도 쉬지 않았다.
“원래라면 네놈과 이몸의 싸움은, 이 연극을 가장 고조시키는 클라이맥스 구간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
“역할이 이리 꼬여버렸으니 전투는 지루해지지. 흥이 식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
그 말로 약간은 상황이 이해된다.
원래라면 옥좌는 이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 것이다. 나름 최종 보스 직전에 만나는, 일종의 히든 보스 포지션이니까.
‘이것도… 내가 악역이자 주인공이라서. 이렇게 된 건가.’
초인은 최종적으로 <왕의 옥좌>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초인도 나고, 왕의 옥좌가 담겨 있던 그릇도 나다.
덕분에 옥좌는 나를 지나치게 닮게 되었고. 서로를 지나치게 잘 아는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네놈의 해묵은 궁금증이나 풀어주고, 난 미련없이 퇴장하겠다.”
문득 옥좌는 내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놈의 입가에 핀 미소에, 약간은 짓궂은 기색이 깃들기 시작했다.
“네놈의 질문이라면 아직 모두 기억하고 있다. 껍데기여.”
“갑자기 뭐라는 거냐.”
“이 불타는 비명의 세계 말이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던가?”
“……!”
“우선은 그에 대답해 주마. 여기는 이전에 한 번 버려진 무대이니라.”
흠칫. 나는 몸을 굳혔다.
크게 뜬 두 눈이 내 면상을 빤히 쳐다봤다.
놈은 여전히 기분 나쁘게 웃고 있다. 프라키가, 베르페아노가, 그리고 에티와 무르무르가 그랬던 것처럼.
“버려진, 무대?”
“네놈의 기억에서 지워진 첫 번째 무대 말이다. 아니군. 최초의 회차라고 하는 게 이해하기 쉽겠나?”
“……!!”
“정확히는 그 세계의 최후를 본떠 만든 네놈의 심상 공간이지. 실재하진 않는 허상의 세계다. 이른바, 네놈 내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피안(彼岸)의 세계이니라.”
순간 힘이 빠진 나머지 비틀, 다리를 휘청거렸다.
시선이 천천히 움직인다. 힘없이 돌아간 시야가 옥좌에게서 멀어졌다.
“심상의, 세계……?”
뒤룩뒤룩 바쁘게 돌아가는 눈알.
나는 주변의 풍경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꺄악! 캬아아아아악!!
어디로 눈을 돌려도 시뻘건 불길만이 가득하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끔찍한 비명만이 골통을 윙윙 울렸다.
메마른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게?”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 세상의 종말. 그 첫 페이지.
수아가 유기했다는 첫 번째 회차.
“그리고 두 번째. 내가 네놈의 거죽을 둘러쓰고 있는 이유였나?”
쓴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퍼뜩 고개를 돌렸다. 옥좌가 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 웃고 있었다.
자조하는 듯한 미소였다.
“그릇인 네놈에게 영향을 받아 동화된 것도 물론 있지만. 사실 더 큰 원인은 따로 있노라.”
“뭐냐. 그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취향 문제지. 아주 간단하고 원론적인 얘기다.”
“취… 향?”
“이 허상 세계를 자네의 내면에… 그리고 육사도 <광대>에게 박아넣은 자. 현왕(現王)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결과가, 지금 내 형상이라는 게지.”
“…….”
현왕. 혹은 전임 초인.
모두 내가 모르는 강수아를 지칭하는 말이다.
놈이 내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바로 그 강수아의 취향이라고 한다.
“이거야 뭐, 지고지순한 광기로다. 크흐흐.”
옥좌가 흥미를 가득 담아 중얼거린다.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가 입가에서 떠날 생각을 않고 있다.
“더 궁금한 게 있느냐?”
문득 옥좌가 물어왔다.
나는 지친 눈을 들어 놈을 쳐다봤다.
“물론, 있다 해도 더 말해줄 용의는 없다만.”
그에 맞춰 놈은 어깨를 으쓱였다.
말하는 꼬라지 봐라. 사람을 완전히 가지고 노는군. 끝까지 날 엿먹일 심산인 듯하다.
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노려보고 있자니.
“하나만 예언해주도록 하겠노라.”
서걱. 우드득!
옥좌의 손아귀엔 어느새 아까 팽개쳤던 단검이 다시 들려있었고. 그것으로 무미건조하게 자기 목을 썰어내고 있었다.
“이미 꼬일 대로 꼬인 이번 연극이다.”
반쯤 잘린 목에서 핏줄기를 줄줄 쏟아내면서.
놈은 즐겁다는 듯이 킬킬대며, 피 끓는 목소리를 뽑아냈다.
“이 이야기는 왕과 초인이 정해진 그 시점부터. 이미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느니라.”
푸지직, 털썩.
마침내 놈은 자기 손으로 제 목을 잘라내 버렸다.
선혈을 흩뿌리며 머리통이 추락한다.
“이 앞에 희망은 없다. 나의 껍데기여.”
“……!”
흠칫. 나는 발작하듯이 놈의 머리를 내려다봤다.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옥좌의… 내 머리가 시야에 한가득 들어온다.
놈은 눈이 마주치자, 씨익. 가볍게 웃어줬다.
“뭐, 그래도 최소한… 선택의 기회 정도는 있으니. 어디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가능한 만큼 열심히 발악해 보거라.”
“…….”
“네놈도 최대한 덜 불행한 결말이 좋지 않겠느냐. 크크큭.”
화르륵!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듯. 일렁거리던 화마가 득달같이 놈의 시신을 집어삼켰다.
불티와 함께, 시커먼 잿가루가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히든 던전 마스터, ‘죽어버린 왕의 옥좌’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옥좌는 그렇게 죽었다.
그 사실을 삐빅, 눈앞에 나타난 패널이 들이밀었다.
“…….”
어김없이 머리가 멍했다.
주입된 새로운 사실들에 혼란스러운 것도 있고. 상황이 워낙 갑작스럽게 격변해서 이해력이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는 듯하다.
뭐, 육사도를 죽인 후의 나는… 항상 이런 느낌이긴 했다.
[히든 던전 마스터 ‘죽어버린 왕의 옥좌’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보상 패널이 등장한다.
그렇군. 보상이 있었구나. 나는 거기서 미간을 잔뜩 모았다. 그리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곧 그 이유를 육성으로 중얼거렸다.
“이놈의 사냥 보상은… 뭐지?”
검과 방패. 불꽃과 심장. 그리고 갑옷.
토식이에게 들었던 육사도의 유품은 이미 모두 획득했다.
정작 최후의 육사도… 내게 깃들었던 이놈의 사냥 보상은, 전해 들은 기억이 없다.
[칭호 ‘찬탈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의문은 곧 패널이 해결해줬다.
다만 그 패널이 또 다른 의문을 던져줘서 문제였다.
“…칭호?”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보상의 형태였다.
칭호라니. 무슨 벼슬이라도 얹어주겠다는 것인가.
화신이 주는 벼슬 따윈 돈 쥐여줘서라도 피하고 싶다.
고개를 모로 꼬고 있자니.
[1033번째 도전은 성공했습니다.]
삐빅.
문득 익숙하면서도 낯선 패널이 떠올랐다.
그것을 눈에 담은 순간. 머릿속이 백지처럼 순백으로 표백되었다.
“아.”
그저 멍한 머리로 내 탄성만 들려온다.
읽고 또 읽었다. 그래도 도저히 믿기지 않은 나머지, 소리 내서 읽어봤다.
“성… 공.”
1032번 동안 요지부동이었던 패널.
지금 처음으로. 그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