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48)>
―그그그그그그그!!
특유의 소름끼치는 중저음.
하늘 전체를 남김없이 뒤덮어가는, 거대하고 시커먼 무언가.
그것이 1033번째 12월 27일, 오늘. 폐허가 된 서울의 상공에 강림했다.
―그그그그그그그그!!!
콰콰콰콰!
이미 쑥대밭이 된 도시로 매서운 광풍이 몰아닥쳤다. 폭풍에 휘말린 건물의 잔해와 얼어붙은 시체 쪼가리들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돌풍은 갈수록 거세졌고. 그만큼 시커먼 그것… ‘참칭자’의 형체도 거대해졌다.
―그그그그그그그그그……!!!
놈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괴성을 연신 뿜어냈다.
일단 내가 아는 그놈이 확실하다. 그것을 일깨워주는 대목이었다.
―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
강풍은 돌풍이 되고. 폭풍이 된다.
끝내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장엄한 태풍이 되었다.
콰콰콰콰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바람에 휩쓸려 나갔고. 참칭자의 거대한 공허를 향해 남김없이 빨려들어 간다.
“…왔냐.”
복잡한 심경을 담아 한 마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몸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강풍 속에서. 나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봤다.
“흐아아! 바람 엄청 세다! 날아가겠어! 아빠, 나, 나도 날아가 버릴 거 같아! 으햐아아!!”
왼쪽에선 이브가 있었다. 원피스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온갖 오두방정을 떠는 중이다.
이번엔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려봤다.
“흐음. 저게 이번 시나리오에서 생긴… 참칭자인가.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인데.”
토식이가 흥미로운 탄성을 내며 중얼거리고 있다.
다만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한데. 쉼 없이 몰아치는 강풍 덕에, 내 종아리를 온몸으로 부둥켜안아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
덕분에 개그 만화의 한 장면 같은 분위가 풍겼다.
“…음.”
두 사람(?)의 얼굴을 한 번씩 보고 나니. 나도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
키잉! 내 손아귀에선 단검의 시퍼런 칼날이 예광을 뿜고 있었다.
“길었다. 정말로.”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 스르륵. 단검을 든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손이 향하는 곳은, 내 목 언저리였다.
“한 번 까보자고.”
저 시커먼 구체. 그 커다란 뱃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그 말까진 채 내뱉지 못했다.
“후욱……!!”
망설임은 없다.
남아 있던 일말의 주저. 오늘 아침 수아와 대화하면서 전부 털어버리고 왔다.
퍼걱!
싸늘한 고통이 경추를 관통했다.
“끄……!!”
털썩. 그 자리에 쓰러져 온몸을 바들바들 경련했다.
죽음의 위기에 육체가, 세포 하나하나가 경광등을 번쩍인다. 살기 위한 발악을 제 멋대로 마구잡이로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니, 그것도 금방 잠잠해진다.
“으… 으윽. 으우……!”
문득 옆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까스로 시선을 돌려 눈에 힘을 집중해봤다. 흐릿했던 초점이 차츰 맞아가며 하얀 머리칼의 미녀를 비췄다.
이브가 내게서 고개를 돌린 채 인상을 바짝 찌푸리고 있었다.
“…흐.”
내가 죽는 꼬라지를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행색.
참고로 난 여기에 오기 전. 앞으로의 내가 벌일 짓을 이브에게 깔끔하게 이실직고 해 놨다.
그 이유까지 전부 설명해서, 모두 납득시킨 상태다.
‘네가 자초한 거다. 이브.’
그리고 난 분명히 이브에게 선택권도 줬다.
얌전히 여기 앉아서 시간이 돌아오길 기다릴 테냐. 아니면 나와 함께 이번 생의 최후까지 함께하겠느냐.
그 결과가 이거다.
“하핫. 마지막으로 좋은 꿈이나 꿔라. 옥좌야.”
그런 우리의 꼬라지가 퍽 우스웠음인가. 머리 위에서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칭과 특유의 어조가, 안 봐도 토식이였다.
“…….”
그나마도 점점 흐릿해져간다.
손끝에서 감각이 멀어진다. 시각도 청각도 모든 것이 둔중하게 뭉개지다, 이내 말끔하게 사라지며 순수한 적막만이 세상에 가득해진다.
“그, 으.”
익숙한 감각이다.
나는 곧 죽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그래.
대략 5초 정도.
“…아.”
짤막한 탄성이 마지막이었다.
예상대로 정확히 5초 뒤. 의식이 암전되었다.
―그그그그그그그……!!!
어두워지는 시야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뻗어가는, 참칭자의 깊은 심연이었다.
* * *
끝없는 어둠의 한복판이 찾아왔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팔다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지금 진짜로 여기에 있는 건지도 헷갈릴 정도다.
지금까지와 똑같은 프레이즈다. 이 어둠은 익숙하기 그지없다.
‘이거 어떻게 스킵 못 하나.’
조바심에 휩싸인 나는 연신 그런 생각을 했다.
다리가 있었다면 아마 재봉틀마냥 달달 떨었을 거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빨리. 다음 단계로 가자고……!’
어차피 뭔 일이 일어날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이제 내 시야 중앙에 패널이 하나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패널의 내용을 무심하게 읽어주겠지.
거기엔 가장 먼저 이렇게 써 있을 거다.
‘1033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1034번째 다음 도전을 준비해라. 그리고 기억과 유산을 계승해라.
이런 불 보듯 뻔한 진행이 예약되어 있는 것이다.
‘빨리… 빨리.’
때마침 삐빅, 지겨운 알림음.
동시에 눈앞에 패널이 떠올랐다.
‘드디어.’
목 빠지게 기다리던 회귀 프레이즈가 시작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퍼뜩, 패널에 시선을 박았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연히 나와야 하는, 그리고 나올 줄 알았던 패널이 아니었다.
뭔가가 바뀌어 있었다.
‘…어?’
나는 몇 번이고 눈앞에 뜬 패널을 다시 읽었다.
하지만 패널은 변하지 않는다. 이 정체불명의 공간에서 내 의식이 어딘가 고장난 게 아니라면. 눈앞에 떠오른 건 분명…….
[육사도, <죽어버린 왕의 옥좌>가 진정한 모습을 현현합니다.]
그래. 육사도가 등장하는 전조.
바로 저거였다.
“무슨……!”
콰콰콰콰!!
문득 격렬한 진동과 폭음을 느꼈고. 동시에 눈앞의 세상이 격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늦게, 내 목소리가 육성으로 들렸음을 깨달았다.
“뭐, 뭐야.”
쿠르륵, 쿠르륵!
아지랑이처럼 시야 전체가 이지러졌다.
세상을 집어삼켰던 어둠이 빠르게 물러가고, 그 빈자리로 세상의 형체가 점점 구체화 되어가기 시작했다.
삼라만상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재구성되어간다.
“아.”
잠깐 탄성을 흘리는 순간. 내 팔다리가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전신도 어느새 재구성을 마친 것이다.
“…이건.”
뒤바뀐 세상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는 분명, 여기와 비슷한 광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피안계……?”
화르르륵!
도처에서 타오르는 화마가 눈앞을 온통 빨갛게 물들였다.
불꽃을 향해 손을 뻗어봤다. 손끝이 불을 통과했지만, 역시나 작열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꺄아아아아악!
―끄아아악! 키아아악!!
그리고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소리. 그리고 폐허가 된 건물만이 을씨년스럽게 방치된 서울의 풍경까지.
나는 별안간, 피안계의 한복판에 소환되어 있었다.
“이 세상을 기억하느냐.”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비명 사이를 파고든 음울하고 선명한 목소리. 나는 그쪽으로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마 기억하지 못할 테지.”
저벅저벅.
두터운 불의 장벽 너머. 누군가의 실루엣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은 이리 재회하게 됐구나.”
심장 언저리를 박박 긁는 듯한 목소리다.
서릿발처럼 차갑고, 시체처럼 무미건조하다.
그런데 거기에 담긴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글대는 것이 똑똑히 느껴진다.
“다시 보니 제법 반갑도다. 나의 껍데기여.”
나의 껍데기.
마지막에 들려온 그 호칭. 그건 분명 나를 부르는 말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고, 그냥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날 저렇게 부른다는 건, 저 목소리의 주인은 아마…….
“…너. 옥좌구나.”
스르릉!
손을 재빨리 허공에 쑤셔 박았고. 꺼냈을 때는 블라이스의 단검이 들려나왔다.
키잉! 그것을 점차 가까워지는 시커먼 실루엣에 겨누었다.
“…….”
내 직설적인 물음에 실루엣은 침묵했다. 다가오던 발걸음도 일순간 멈췄다.
그러나 이내 저벅저벅, 한층 빠르게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말이 너무 많았군. 쓸데없이.”
무미건조한 한 마디.
이렇다 할 전조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말이 들려온 순간. 난 황급히 지면을 박차고 그 자리를 이탈했다.
“여전히 육감은 쓸 만하구나.”
푸화아악!!
직후 눈앞의 화염장막이 좌우로 갈라진다. 반대편에서 기습적으로 쏟아진 참격 때문이었다.
콰자작!
화염을 휘감은 검기가 내가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 새끼.”
일언반구도 없는 습격.
견제가 아니다. 위력을 봤을 때 명백히 나를 죽이려는 일격이었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체를 하며 비아냥거렸다.
“남의 몸에 세 들어 사는 새끼가. 상도덕도 없네.”
화르르르!
타이밍 좋게, 반으로 갈라진 불꽃이 춤추듯 어지럽게 일렁거린다. 놈의 실루엣과 얼굴이 그 사이로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눈에 힘을 바짝 넣었고. 놈의 얼굴을 재빨리 스캔했다.
“어.”
그리고 당황의 탄성을 흘렸다.
화르륵!
때마침 놈이 조금 더 이쪽에 접근해왔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불의 장막을 뚫고, 놈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내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
다가온 괴한은 나였다.
정확히는, 내 모습을 똑같이 배낀 누군가였다.
비슷하거나 닮았다 수준이 아니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똑같다.
“이건. 대체…….”
나와 똑같은 외관을 한 사내가, 스르릉!
한 손에는 블라이스의 단검을 든 채. 내게 그것을 겨누고 있었다.
“너. 정체가, 뭐냐.”
나는 띄엄띄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씨익. 눈앞의 내가 기괴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방금 네놈의 입으로 잘 맞췄잖느냐. 다시 묻는 저의는 뭐냐.”
“…뭐?”
“왕의 옥좌. 네 안의 깊은 곳에 깃들어 있던 육사도이니라.”
“……!”
“이름은… 딱히 정해진 게 없는데. 그래. 대충 어둠의 한정용이라 불러주겠나? 크흐.”
어둠의 한정용은 X발, X같은 소리. 놈은 지금 당황하는 나를 한껏 조롱하고 있었다.
이를 악무는 한 편, 눈을 가늘게 뜨며 놈에게 묻기 시작했다.
“왜 그런 꼬라지를 하고 있는 거냐.”
“그런 꼬라지라니. 네놈과 똑같은 외형 말이냐?”
“그래.”
“꼴보기 싫나?”
“당연한 소릴.”
“하긴. 이 세상의 인류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네놈의 용모는 미형은 아니긴 하다.”
그쯤에서 내 인내심이 바닥났다.
투화악! 지면을 박찬다. 몰아닥친 광풍에 주위의 화염이 크게 일렁거렸다.
그 중심엔 쇄도하는 내 신형이 있다.
“오오, 이런.”
여유작작한 옥좌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콰아앙! 단검과 단검이 허공의 일점에서 맞붙었다. 폭발에 가까운 굉음이 터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옥좌 년아.”
까드득, 까득!
서로의 칼날이 마찰하며 염을 토했다. 나는 새파란 두 자루의 칼날 너머로 한껏 면상을 들이밀었다.
옥좌와 이마를 맞붙일 기세로 대치한다.
“일단 좀 맞자.”
콰앙! 쾅, 콰콰쾅!!
이어지는 것은 내 쪽의 일방적인 연격. 폭풍 같은 칼날의 폭우가 놈의 사지를 찢어발길 기세로 쏟아져 들어갔다.
콰콰콰콰!
현란한 춤사위가 불꽃 속에서 얽혀 들어갔다.
“얘기는 그 다음에. 천천히 하자고.”
생각해보면 이게 항상 정석이었다.
뭐든 거저 주는 새끼가 하나도 없었지. 사소한 정보, 작은 단서 하나를 얻으려 해도 사활을 걸고 목숨을 바쳐가며 투쟁해왔다.
그래. 지금도 결국은, 그것의 연장선이지 싶다.
“그래. 어디 덤벼 보거라. 나의 지긋지긋한 껍데기여.”
옥좌는 처음부터 이 전개를 원했던 듯하다.
즐거운 듯이 가볍게 스텝을 밟았고, 내게서 멀어지더니. 이내 투학! 지면을 힘껏 밟아 내 쪽으로 다시 돌격해온다.
기습적인 반격의 신호탄. 나는 황급히 반응했다.
“흡……!”
콰아아앙!
두 명의 내가 다시 한 번 격돌했다.
백청색 검광들이, 광란의 화마 속으로 한껏 얽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