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42)>
투화악!
왼쪽 측면에서 기습적인 손톱의 습격.
강렬한 파공성이 들리기도 전, 거대한 손아귀가 시커멓게 드리웠다. 음속을 초월하는 가공할 스피드의 기습이다.
“그윽!”
콰콰쾅!!
손톱이 내 몸을 분쇄하기 직전. 가까스로 반응해 지면을 박찼다.
내 몸은 공중으로 대포알처럼 붕 떠올랐고, 무르무르의 손톱은 애꿎은 지면을 후려쳤다. 어김없이 가공할 폭음과 풍압이 온몸으로 쏟아져왔다.
―카하핫! 잘하는구나, 초인!!
무르무르의 유쾌한 웃음이 멀찍이서 들려온다.
그러는 와중에도, 쇄애액! 사방팔방에서 방금과 같은 측면배후의 기습이 쉴 새도 없이 쏟아져왔다.
“그… 으윽!!”
빽빽하게 나를 에워싼 수백 개의 차원문. 그 중 어딘가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오는 손톱의 공격들.
공격에 사각은 없다. 심지어 점점 더 정교해져간다.
―슬슬 나도 익숙해지는군! 어디까지 버티나 보겠다!!
공격. 공격. 그리고 또 공격.
무르무르의 즐거운 고함이 들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어딘가에서 차원문이 열린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손톱이 나를 찢어발기러 들이닥친다.
“크… 하아앗!!”
그러면 회피. 회피. 그리고 또 회피.
나는 필사적으로 그것들을 전부 흘려 넘긴다. 무아지경으로 귀와 눈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고, 온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회피를 이어나갔다.
“크윽!!”
그러나 결국 그것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놈에게 교묘하게 유도당해 허공에 몸이 떠올랐다. 그런 내 전후좌우로 수십에 달하는 공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비약은 이미 5번을 다 사용했다.
블러드스트림을 발동할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결국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무형검을 어검술로 조작해 내 앞으로 겨누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세 무기를 동시에 내리쳤다.
“흐읍!!”
쩌어어엉!!
가공할 폭발이 눈앞에서 터졌다. 섬광과 폭음이 나를 집어삼킬 기세로 쏟아진다.
채채채채챙! 순식간에 모든 방어스킬이 터져나갔고. 갑옷은 순식간에 우그러진다.
“끄… 하악!!”
이대로 압사당하는 게 아닐까 싶은 감각.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유성처럼 하늘을 가르다가, 콰콰콰쾅! 그대로 지면에 충돌해 버렸다.
그야말로, 허공에서 떨어진 운석 꼴이었다.
“크, 허어… 쿨럭!!”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격하게 기침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후두둑.
기침에 시뻘건 선혈이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리, 리스토……!”
가까스로 목소리를 뽑아내, 복원 스킬을 사용하기 직전.
쇄애애액!
질리지도 않고 들려오는 파공음. 나는 그것을 들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치달린다.
[스킬 발동: 텔레포트]
순간적인 판단으로 영창을 변경했다. 조금만 판단이 늦었다면 아마 그대로 1034회차를 시작하게 됐을 것이다.
콰아아앙!
내가 텔레포트로 긴급회피를 시전함과 거의 동시에, 내가 뻗어 있던 자리로 무르무르의 새하얀 주먹이 냅다 꽂혔다.
―크핫. 이번 건 아쉬웠군!!
무르무르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외친다.
콰콰콰콰!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다음 연격이 쏟아진다. 나는 짬짬이 육체를 수복하며 다시금 회피일변도로 돌입했다.
어느 순간, 피이잉! 아찔한 현기증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끄윽!”
마력의 과도한 사용. 한계 이상으로 사용한 후폭풍.
슬슬 라이트닝 헬릭스의 중첩을 유지하는데,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위험하다. 슬슬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내 패배로 끝난다……!
‘어떻게 해야……!’
폭우처럼 쏟아지는 즉사급 공격들을 피하는 와중.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지금 승부를 걸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하나.
‘지켜보다니. 얼마나 더.’
스스로에게 물어본 의문에 답을 내지 못했다.
이대로 시간을 얼마나 벌어본들 뭐가 달라질까. 저 새하얀 재앙덩어리가 지치는 것보단, 내가 리타이어 하는 게 훨씬 빠를 거 같은데.
‘차라리, 그냥 지금 던져버려야 하나?’
반드시 8중첩을 채울 필요는 없다.
7중첩의 라이트닝 헬릭스도 충분히 강하다. 지금껏 이걸 정면에서 맞고 살아남은 던전 마스터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14차 던전 마스터라도. 7중첩이면 반드시 죽었다.
‘14차의… 무르무르라도?’
그리고 결국의 결국엔 그 질문에서 막혔다.
저 미친 괴물 새끼는 평범한 던전 마스터가 아니다. 죽어준다면 천만다행이지만, 만약 조금 모자라서 죽이지 못한다면?
‘죽는 수밖에 없겠지.’
깊게 고민한 것에 비해 답은 단순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결국, 답은 하나뿐이었다.
―무슨 잡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나!!
파파파팍!!
그 순간, 무르무르가 일갈하며 한층 격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쏟아지는 손톱과 주먹의 폭우가 빽빽해진다. 한 치 앞도 분간이 힘든 파상공세에 점점 회피하기도 버거워졌다.
“이… 런……!!”
투콰앙! 콰콰쾅!!
회피 타이밍이 점점 늦어진다. 호흡이 흐트러지며 시야가 일순 무르무르의 공격궤도를 놓쳐버렸다.
위험하다. 전에 없이 경종이 울렸다.
“무형검……!”
나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했고. 사방에 흩어져있던 세 자루의 무형검을 불러들였다.
키리리릭!
세 자루의 날붙이가 내 주위를 맹렬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방어모드. 풀 전개다.’
극한까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회피를 완전히 포기했다. 그 대신 나는 어검술을 이용해 공격들을 공중에서 쳐내기 시작했다.
쉬리릭! 세 자루의 날붙이가 각기 다른 궤도로 교묘하게 진격한다.
“후우우……!!”
태태태탱!!
찌르는 금속음과 폭음이 쉴 새 없이 터져나온다. 충격파가 산발적으로 발생해 내 온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썼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했다.
“크, 학.”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집중력이 일순 흐트러진다. 황급히 정신을 가다듬고 시야를 밝혔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푸화악!
무르무르의 날카로운 손톱이 오른쪽 어깻죽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끄……!”
콰자작!
단박에 혈천갑의 견갑이 으스러졌고. 내부의 살점은 완전히 짓이겨졌다.
박살난 어깨뼈와 핏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 광경이 내 시야 한 구석에,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적하게 흘러간다.
상상을 불허하는 격통이 치달렸지만. 이를 악물고 영창을 계속했다.
[스킬 발동: 리스토레이션]
쿠르르륵!
뜯겨나간 오른팔이 흘러내리기 직전. 순식간에 어깨를 수복한 덕분에 다시 오른팔이 몸통과 연결되었다.
파지지직!
순간적으로 빛을 잃었던 나선의 뇌전이, 다시금 청명하게 빛났다.
‘위험했다.’
가까스로 대위기는 모면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미봉책일 뿐이다.
이대로 방어를 계속해봤자 먼저 집중력이 동나는 건 분명히 나다.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의 정신적 피로도는 비할 바가 못 된다.
“크… 으윽……!!”
태앵! 태태탱!
지금만 해도 그렇다. 내 수비는 점점 타이밍이 어긋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무르무르의 주먹질이 만들어내는 충격파가 점점 가까워진다.
살을 도려낼 것 같은 풍압이, 사방에서 날 시시각각 조여 왔다.
‘돌파한다. 지금 당장!’
이기려면 지금뿐이다.
역습의 타이밍이 늦어질수록 점점 내게 불리해진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지금부터, 속공으로 결착을 내겠다.
[스킬 발동: 피어 블러드]
지금의 나는 양손이 봉해져 있다.
그러니 양손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공격스킬이 필요하다. 체력을 소모해서 마력의 소모를 최소화하는 혈질계 스킬이면 더 좋다.
포문을 여는 건 자연스럽게, 이 스킬로 결정됐다.
“발… 사.”
콰아아앙!
육성으로 발동명령을 내렸고. 붉은 혈류의 광선이 눈앞에서 모여들다가, 이내 전방으로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향은, 내가 쳐다보던 경로를 그대로 추적한다.
―오오, 이런! 위험하잖나!
쿠구구궁!
그새 시커멓게 칠해진 시야 너머. 무르무르의 짤막한 탄성이 들려온다.
크게 당황한 기색은 없다. 물론 고통스러워하는 느낌도 없다. 당연하게도 가볍게 피하거나 막아냈지 싶다.
‘괜찮아.’
예상했다.
어차피 맞아줄 건 기대조차도 안 했다.
아주 잠깐의 당황. 그로 인해 생기는 공격의 중단. 찰나의 유예.
원하던 바는 충분히 달성했다.
‘시야가 돌아오기까지… 앞으로 3초.’
문제는 바로 이 디버프다.
스킬 <피어 블러드>의 백래쉬로 발생하는 시야 차단. 무르무르의 공격을 잠깐 멈춘 건 좋지만, 그걸로 나까지 시간을 뺏긴다면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이 행동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대로 계속 움직인다.’
여기서 어떻게든 격차를 좁혀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무리를 해서라도 도박수를 감행하는 수밖에 없다.
“후우우……!”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풀가동한다.
피부로 느껴지는 매서운 바람과 살기. 그리고 공기를 찢어발기는 폭음이 한층 선명하게 다가왔다.
쿠웅, 쿠웅! 무르무르의 발소리가 얼마나 내게 가까워졌는지. 새삼 실감되었다.
―하핫. 설마 방금 그게 최후의 발악인가!
암흑 속에서 머리통을 울려오는 무르무르의 소름끼치는 목소리란.
뭐랄까. 상상 이상으로 공포스러운 무언가였다.
―정말 그게 마지막이라면. 이대로 압살해주겠다, 초인!!
직후, 쇄애액! 재차 사방에서 파공음이 앞다투며 쇄도해왔다.
무르무르가 공세를 재개한 듯하다.
[스킬 발동: 히어로 센스]
[스킬 발동: 제3의 눈]
…….
….
없는 마력과 정신력을 쥐어짜 스킬을 발동했다.
반사 신경이나 감각의 민감도를 올려주는 강화계 스킬이었다. 최대한 육감과 오감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막아내야 한다.’
이번 한 번.
압도적으로 불리한 지금 이 순간. 놈의 이번 공세를 막아낼 수 있는가 없는가. 거기서 승패는 갈릴 것이다.
여기가, 이번 승부의 분수령이다.
―그 무지막지한 마법을, 완성하게 둘 수야 없지!!
무르무르는 내 전략을 진작에 간파한 상태다.
사실 모르는 게 이상하긴 하다. 서울을 일거에 날려버릴 막대한 에너지체가, 대놓고 내 양손에 꿈틀대고 있으니까.
서로 깔 거 다 까놓고. 진정한 의미에서 전력으로 맞붙는 거다.
―카하아아아앗!!
일발의 포효. 그것을 신호삼아 본격적인 격돌이 시작되었다.
콰콰콰콰콰!! 어지럽게 쏟아지는 공격들을, 가용한 모든 감각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회피해나간다.
“후우, 후욱, 후웃……!”
1초. 또 1초.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느리게 간다.
―카하하핫! 뭐하고 있는 겐가, 초인!
짐짓 유쾌하게 외치고 있지만. 무르무르의 목소리에서 전과 같은 여유는 느껴지지 않는다.
놈도 지금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그 다음엔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대로면 자네는! 허무하게 죽는다고!!
그래서 놈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바로 지금. 기회가 있을 때 죽여 버리기 위해서.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고 필사적으로, 혼신의 연격을 쏟아낸다.
―카아아아앗!!
콰자작! 빠드득!!
슬슬 한계다. 반사 신경이 매서운 공세를 따라가지 못한다.
신체 말단이 공격에 스치며 속절없이 터져나간다. 손가락과 발목, 옆구리 일부분이 분쇄되어 흩어진다.
“그으윽!”
꽤 심대한 타격이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회피기동을 계속했다.
이젠 리스토레이션을 쓸 여유조차 없다. 앞으로 조금만 더.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
“하아아……!”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마지막 1초가 지났다.
“됐다……!!”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탁 트인 폐허와 그 한복판에 서 있는 무르무르. 그리고 나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권격의 폭풍.
시야가 차단되기 전과 다를 게 없는 풍경이다.
“이제…….”
진짜 끝장을 보자.
그 사이 꽤나 가까이 접근해온 무르무르를 노려봤고. 나는 마지막 하나의 퍼즐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쉬리릭!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공음이 귓가를 찌른다.
―…아니?
퍼퍼퍽!
무르무르가 별안간 당혹성을 터뜨렸고. 직후에 파육음이 터졌다.
어느새 무르무르의 후방을 노리고 쇄도한, 세 자루의 무형검이 내는 소리였다.
―…이건.
펄션은 왼쪽 어깨. 소드브레이커는 오른쪽 팔뚝.
그리고 손도끼는 뒷목 언저리에 깊숙이 박혀 있다.
정신없는 무르무르의 공격을 피하고. 스킬의 캐스팅을 유지하고 영창하고.
그러는 와중에 어검술을 사용해 꽂아 넣은, 내 회심의 반격이었다.
“쿨럭! 크후……!”
주르륵. 코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투구 밖으로 질질 샜다.
극한까지 육체를 몰아붙인 3초의 대가였다.
“하아. 하… 하앗.”
물론 나도 안다. 당연히 무르무르가 저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
그래도 놈의 공세를 잠깐 틀어막는 정도는, 충분하고도 남을 수준이다.
―대체… 어느 틈에.
무르무르는 팔뚝에 박힌 무형검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고통은 차치하고 어이가 없다는 느낌이다. 데미지는 크지 않지만 불의의 기습을 허용했다는 점이 황당한 듯하다.
―크… 이런.
콰직!
놈이 불쾌함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고. 서둘러 양팔의 무형검을 뽑아냈다.
충분하다.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훌륭한 리액션이다.
“…한눈을 팔면. 안 되지.”
그 찰나가 최후의 유효타로 작용했다.
마침내 마지막 한 줄기의 번개를 영창한다.
양쪽 손아귀에 휘몰아치는 16개의 벼락. 모두 충전이 끝났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파지지지지직!!
하얗게 명멸하는 세상 속에서. 나는 일언반구도 없이, 양손을 무르무르의 방향으로 냅다 뻗었다.
“크그… 아아아아!”
발사했다는 느낌이 아니다. 놓친 것에 가까웠다.
더는 팔을 들어 올릴 힘도 남지 않은 거다.
“죽어어……!!”
콰아아아앙!!
장중한 폭음. 새하얀 번개의 격류가 노도처럼 진격한다.
시야의 온 세상을, 남김없이 살라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