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41)>
당연히 뻔히 보이는 공격을 맞아주진 않았다.
무르무르가 혼자 넋두리를 꿍얼거리는 그 기나긴 순간 동안. 나는 그저 병신같이 넋을 놓고 있었을까?
천만에. 일단 내 딴에 할 일은 다 했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
…….
빠지직! 비직!!
일단 될 수 있는 한 스킬 스택을 쌓았다.
놈이 유예를 오래 줘서 무려 3스택이나 더 쌓을 수 있었다. 이제 내 손아귀엔 각각 6개씩, 12개의 벼락이 장전되어 있다.
[스킬 발동: 텔레포트]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마지막엔 순간이동도 캐스팅 했다.
애초에 피했으니까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다.
“…후우.”
나는 길게 숨을 내뱉는 한 편.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무심결에 벌어졌던 입이 콱 다물렸다.
“…….”
방금의 일격은 무르무르도 꽤 진심이 담긴 듯했다.
서울의 지도가 바뀌었다는 표현. 이건 과장이 1%도, 0.1%도 섞이지 않았다.
“이게, X발.”
직경은 대충 수십 킬로.
깊이는 가늠조차 안 되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발아래 펼쳐졌다.
그리고 그게 끝.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말이 되냐.”
사람은 물론이고 건물까지 깔끔하게 말살. 인간은 고사하고 어떤 생물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하얀 괴물은, 혼자서도 능히 이 세상을 찜 쪄 먹을 놈이었다.
이제 와서는 그냥 한없이 경악스럽다.
‘전생까지 놈이 보여줬던 무력은… 페이크였어.’
정확히는 바닥까지 다 끌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래 지하실이 있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마지막 1악장이 더 있었던 거다.
“…망할.”
덕분에 내가 타이트하게 짜놨던 체력 안배. 그 외의 수많은 빌드업이 전부 무용지물이 됐다.
14차 붕괴에서 무르무르의 공격을 견딜 만한 체력으로 만들어놨는데. 이건…….
‘이건 맞으면. 무조건 즉사다.’
안 맞아 봤어도 그 정돈 알 수 있다.
알 수밖에 없는 위력이었다.
‘그러면 답은…….’
안 맞고 죽이는 수밖에.
노 히트 클리어. 저 하얀 괴물을 상대로 해내는 수밖에 없다.
돌파구라면 분명히 있다. 지금도 내 손아귀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는 여섯 줄기의 벼락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만 직격을 먹이면… 어떻게든 될지도 몰라.’
그래서 사실, 관건은 지금부터다.
스킬의 중첩 공격이 어려운 건 단순히 다중 캐스팅이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다중 캐스팅을 유지하는 동안 소비되는 심대한 마력 때문이기도 하다.
‘6중첩부턴 소모량이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부턴 속도전으로 가야 한다.
무르무르의 방해를 이겨내고 8중첩의 나선벼락을 완성시키느냐. 아니면 그 전에 내 마력이 바닥나서, 죽도 밥도 못 된 채 기권 패를 당하느냐.
승부는 그것으로 결정된다.
‘문제는…….’
저 규격 외의 괴물을 상대로 거기까지 버틸 방법.
그게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정도.
‘괴물을, 상대하려면.’
그러려면 나도 뭔가 변해야 한다. 진화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상식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뭔가가 되어야 한다.
“나도. 압도적인… 괴물이 돼야겠지.”
스르륵.
뭔가 번득인 나는, 인벤토리를 열고 다급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바로 쓰게 됐네. 이거.”
꺼내든 것은 세차게 맥동하는 용의 석상. 프라키의 유산이었다.
효과는 대충 알지만, 어디까지나 글로 읽은 게 전부다. 때문에 석상을 든 나는 긴장한 나머지 마른 침을 삼켰다.
‘괜찮을까?’
‘심장을 용의 심장으로 대체한다.’라고는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변한다는 건지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변신한 뒤에 찾아온다는 리스크의 정체도 모른다.
‘리스크나 적었으면 좋겠군……!’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곧 몸으로 알게 될 부분이니까.
지금 찬밥과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아이템… 발동.”
아이템의 사용법은 입수한 순간 자동적으로 뇌에 입력되었다.
프라키의 작은 배려가 아닐까 싶은데. 덕분에 나는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이미 확실히 알고 있었다.
콰자작! 손아귀에 힘을 줘 석상을 부숴버렸다.
[아이템 발동: 미완의 심장]
삐빅. 예상대로 발동 패널이 솟아났다.
그리고, 콰르르륵! 박살난 석상들의 파편이 내 몸 주위를 휘몰아쳤고. 이내 검붉은 광휘를 내뿜으며 내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욱……!!”
콰콰콰콰!
온몸의 피부를 타고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동시에 아찔한 고양감이 온몸의 신경을 지져댔다.
뇌가 불타는 듯하다. 온 시야가 새빨갛게 물든다.
“그아… 아아아……!!”
두근, 두근! 두근!!
내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친다.
심장소리는 내 귀에만 들리는 것을 넘어, 북소리처럼 주변 공기를 진동시켰고. 이내 사위의 지면이 요동치는 거대한 폭음이 되었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포효를 내질렀다.
아니. 포효가 아니라 비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카아아아악!!”
콰콰콰콰콰!!
내가 내지른 함성에 반응하듯, 붉은 기운은 나를 감싸고 미친 듯이 휘몰아쳤다. 그 기세가 갈수록 더욱 거세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커헉… 헉. 크윽……!!”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격렬하게 호흡을 이어나가던 와중. 나는 멀쩡해진 시야로 뒤늦게 손발을 돌려가며, 내 몸의 변화를 살펴봤다.
“뭐야.”
눈에 띄는 외형적 변화는 없었다.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얼떨떨하게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이내 단 하나의 변화를 깨달았다.
‘이건… 문신인가?’
온몸의 피부를 타고 흐르는 시뻘건 빛무리. 그것이 문신처럼 피부에 착 달라붙은 채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에 맞춰 붉은 빛을 점멸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아이템은 정상 발동됐다.
변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리.
[아이템 ‘미완의 심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드래곤의 혈액이 전신을 타고 흐릅니다. 모든 스탯이 대폭 향상됩니다.]
[드래곤의 심장과 마력회로가 연결됩니다. 스킬의 위력과 효율이 대폭 향상됩니다.]
역시나. 떠오른 패널이 내 짐작을 확신시켜줬다.
꾸드득. 나는 주먹을 힘껏 말아 쥐고, 지친 눈을 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아아. 이제 끝났나?
지루한 표정으로 변신 매너를 지켜주던 무르무르가 보인다.
쿠르륵! 놈이 웅크렸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태산 같은 거구 위, 붉은 외눈의 안광이 다시 한번 하늘 높이 우뚝 선다.
나는 없는 여유를 쥐어짜내 피식, 입매를 비틀었다.
“와라.”
―좋다. 아주 좋아!!
콰아앙!
장중한 폭음이 울린다. 무르무르가 지면을 박차는 소리였다.
기다리는 동안 어지간히 몸이 근질근질해진 것인가. 내가 대답하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후우……!”
심기일전. 호흡과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한다.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방금까지 눈으로 쫓기조차 버거웠던 무르무르의 움직임. 지금은 확실히 보인다.
놈의 주먹이 흐르는 궤도, 그리고 앞으로 흐를 궤도까지도.
‘일단, 피해야……!’
상상도 못한 동체시력의 폭증. 그리고 예지에 가까운 정보의 장악력에 경악하기도 잠시.
나는 서둘러 회피를 준비했고, 그대로 행했다.
“후우!”
투콰아앙!!
나는 가볍게 지면을 박찼고. 그것만으로도 로켓처럼 하늘높이 솟아올랐다.
속도는, 모든 이동계 스킬을 전부 사용한 것과 비슷한 수준.
“아니……!”
상정 외의 폭발적인 스피드에 내가 다 경악했다.
콰아앙! 그런 와중에 무르무르의 주먹이 지면에 꽂혔다. 아까처럼 초신성이 폭발한 듯한 섬광이 터졌고,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일대의 모든 것을 살라먹는다.
―호오. 움직임이 한 차원 달라졌군……!
내 스피드에 놀란 건 무르무르도 마찬가지였다.
콰드드득! 예상했던 지점과 한참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막대한 속도 덕에, 한참이나 지면을 긁은 뒤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좋다, 초인! 피가 끓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 거대한 발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고개를 들자, 저돌맹진 하는 무르무르의 거체가 벌써 눈앞까지 와있다.
“크윽!!”
―카하아아앗!!
콰아앙! 콰콰콰쾅!!
무르무르는 아까처럼 계속해서 주먹을 내질렀고. 그러면 나는 아까처럼 회피했다.
우리가 지나가는 곳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초토화의 현장만이 남았다.
‘이건…….’
그렇게 10초가량이 지난 시점.
무르무르의 공격을 100번 하고도 23번이나 더 피한 그 순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조심스럽게 머금었다.
어렴풋이, 승리의 돌파구가 보였기 때문이다.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10초나 버텼다.
10초를 버텼다는 건 우연으로 피한 게 아니라는 거고. 놈의 공격에 대응할 충분한 스펙을 갖췄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론상으론 1분도 10분도 버틸 수 있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파자자작!!
무르무르의 무자비한 난격이 이어지는 와중. 나는 이제 틈을 봐서 벼락의 스택을 쌓아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쇄애애액! 합류된 벼락줄기가 맹렬하게 손아귀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벼락이 춤추는 손아귀에 시선을 뒀다.
지금까지와는 뭔가 느낌이 달랐기 때문이다.
‘느낌만이 아니다.’
손에서 춤추는 일곱 가닥의 번개줄기를 직접 눈에 담은 순간. 나는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방금 쌓은 한 줄기의 번개만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
‘드래곤 하트의 효과로, 스킬이 증폭된 거군.’
마지막에 쌓일 두 개의 나선벼락은 드래곤 하트로 강화된, 이른바 <강화 라이트닝 헬릭스>였다.
평소의 번개보다 아득히 강하다. 어림잡은 느낌상으론 최소 5배 이상.
그걸 앞으로 한 번 더 중첩시킨다면……?
―그 손의 엄청난 에너지. 그건 좀 위험하군.
아무래도 무르무르는 나와 같은 결론을 도출한 듯하다.
내가 마지막 라이트닝 헬릭스를 시전하는 순간. 그게 자신의 최후라는 결론을 말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투하악!
놈의 거체가 일순간 전방으로 쏠렸다. 지금까지보다 한 꺼풀 더 흉포해진 기세로, 손톱이 득달같이 내 목을 노린다.
쉬익, 쉬쉬쉭! 나는 노련하게 그것들을 하나씩 대응해나갔다.
―카아아아앗!!
포효가 온몸의 피부를 찢어발길 듯이 쏟아진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무르무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오른손 측면 휩쓸기.’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져 패턴이 학습된 상태.
발끝으로 슬쩍 지면을 차올렸다.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공격궤도를 피하기 위해, 신속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학! 쏜살같이 날아간 신형이 놈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이 정도면…….’
안정권까지 벌어진 뒤. 살짝 안심하는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무르무르의 손톱 끝에서 푸른 마력의 스파크가 일어난다.
―거기인가!!!
거의 본능적인 영역이었다.
마력 스파크를 본 순간 무형검을 변형시켰다. 대포의 형상으로 변형시킨 그것을 전방으로 사출했고, 동시에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피어 블러드]
콰콰콰앙!!
연쇄적인 폭발의 향연. 사출된 투사체들의 반발력이 나를 후방으로 한껏 밀어냈다.
그리고, 콰자자작!! 무르무르의 손톱이 내 콧잔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하하하핫!! 이걸 피해냈군!!!
퍼뜩!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르무르는 여전히 멀찍이 서 있다. 다만 놈이 휘두른 오른발 앞으로 공간이 시퍼렇게 찢어져 있었고. 발톱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있다.
“…블레이드 아크.”
공간을 도약해 상대에게 참격을 가하는, 무르무르의 고유스킬. 직전의 푸른 마력 스파크는 그것의 발동 전조였다.
무르무르가… 단순했던 공격에 스킬을 섞기 시작했다.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초인.
쿠웅, 쿠웅!
무르무르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허공에 대고 손톱을 스윽 그었다.
―최후의 공방이 되겠군. 시작해볼까!!
빠직! 파지지직!
허공에 수십, 수백 개의 균열이 동시에 찢어져 나간다. 내 주위에서도 그에 대응하듯 균열이 생성되었다.
저건 입구와 출구구나. 직감한 난 아연실색해졌다.
“이런, 미친……!”
수백 개에 달하는 균열.
이 중 어딘가에서. 지금부터 무차별적으로 공격이 쏟아져 나온다.
목숨을 건 두더지잡기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