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17화 (217/235)

217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39)>

무르무르와의 싸움은 익숙하다.

익숙하다 못해 진저리가 난다. 아마 상대인 무르무르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놈은 나와의 전투를, 나처럼 모두 기억하니까.

―으하하하하!!

무르무르의 호탕한 웃음소리.

쿠르르륵! 놈의 양쪽 앞발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즐겁군. 즐겁기 그지없다, 초인!!

초반은 가벼운 탐색전으로 시작했다. 지금까지 해온 전투와 비슷한 수순이다.

채채채챙! 거대하고 날카로운 손톱들을 차근차근 튕겨냈다.

―크핫! 으하하핫!!

콰콰콰콰쾅!!

사복검과 손톱이 맞부딪칠 때마다 가공할 충격파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하아아앗!!

“후웃……!”

쿠구구구구!!!

매서운 검기가 지면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반파된 건물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일대는 빠르게 풀 한 포기 못 자라는 폐허로 변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놈의 공격을 모두 어렵지 않게 방어해낸 뒤. 무르무르는 흥이 더욱 올랐는지, 흥분한 어조로 제 혼자 중얼거렸다.

투학! 놈의 거대한 신형이 하늘 높이 도약했다.

―이것도 한 번 받아보게나!!

도약 공격.

놈이 전투를 다음 페이즈로 이행하는 신호탄이다.

전초전은 끝이다. 지리멸렬하게 몇 시간이나 이어진 전투는 초반을 넘어, 중반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앗!!

무르무르의 거체가 순식간에 내게 가까워졌다.

사방이 시커먼 그림자에 휩싸이나 싶더니. 이내 놈의 거대한 포효소리가 숨 막히는 파공음에 묻혔다.

콰아앙!! 압도적인 폭음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스킬 발동: 텔레포트]

물론 내가 그걸 가만히 관망하고 있을 리가 없다.

쉬쉭!

텔레포트를 사용해 순식간에 공중으로 신형을 이동시켰고. 이어질 후폭풍을 대비해 온갖 방어 스킬을 신체에 덕지덕지 둘렀다.

[스킬 발동: 아이언 스킨]

[스킬 발동: 안티 노멀 리플렉터]

[스킬 발동: 씰 배리어]

모든 과정을 마치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콰콰콰콰!! 무르무르가 지면을 타격하며 발생한 압도적인 충격파가 쏟아졌고.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분쇄해 나갔다.

순수한 파괴와 죽음의 파동이, 이내 내 몸을 강타했다.

“크욱……!”

콰작! 꾸드득!!

안티 노멀 리플렉터는 순식간에 박살나 버렸다.

그 뒤로도 겹겹이 쌓아놨던 방어막들이 차례차례 분쇄 당한다. 내 육체는 점점 더 큰 충격으로 사정없이 뒤흔들렸다.

“…살벌한데.”

한숨과 함께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새 눈앞이 확 트였다. 시야에 들어 있던 모든 건물이, 한 채도 남김없이 전부. 지금 일격으로 쓸려나갔기 때문이다.

“허.”

숨을 한껏 크게 머금고, 그대로 내뱉지 못했다.

지금까지와는 위력의 차원이 다르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카하하하핫!!

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무르무르의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콰콰콰콰! 가공할 파공음이 발밑에서 가까워진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이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메운다.

속도는, 내 상상을 아득히 상회한다.

“크읏……!”

회피는 이미 늦었다.

텔레포트를 캐스팅하기 전에 놈의 앞발에 산산조각 날 것이다.

키리릭!

황급히 사복검을 단단히 합쳤다. 그리고 정면 방향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힘껏 찔러 넣었다.

[스킬 발동: 인챈트―번개의 분노]

카카카칵!

장검으로 뭉친 사복검이 무르무르의 손톱과 마찰했다. 쇄도해왔던 손톱은 검과의 마찰로 궤도가 살짝 빗겨나갔다.

“그… 으!”

키기기기기긱!!

귀를 찌르는 금속음이 쏟아졌고, 눈앞에서 눈부신 불똥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후웃!!”

놈의 거대한 팔뚝이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나는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영창은 완료되었다.

[스킬 발동: 텔레포트]

쉬쉭!

순식간에 격변하는 시야. 눈앞에 새하얀 털 뭉치가 가득해진다.

드디어 배후를 잡았다. 그것도 내 검이 닿을 법한, 상당히 가까운 곳이었다.

“죽어……!”

죽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외쳤다. 그냥 습관 같은 거다.

나는 있는 힘껏, 사복검을 전방에 휘둘러 쳤다.

―어림도 없지!!

그러나 다음 수를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쉬리릭!

무르무르가 순식간에 상체를 회전시켰다. 거대한 육체가 핑글 돌며,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여기구나아아아!

호탕한 고함소리에 뇌가 쿵쿵 울린다.

눈도 뜨기 힘든 폭풍 속에서.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손톱을 봤다.

“아.”

이것도 내 상상을 한 꺼풀 뛰어넘은 속도.

거기서 강렬한 의문을 느끼면서도, 죽기는 싫으니 황급히 대책부터 강구한다.

“이 정돈……!”

아까처럼 검으로 빗겨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 정도로 예리한 패링을 하기엔, 이미 놈의 앞발이 너무 가까워진 상태.

현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정면에서 쳐낸다.’

쉬리릭!

풀어헤쳤던 사복검을 다시 회수. 장검 형태로 단단하게 뭉친 뒤 있는 힘껏 휘둘렀다.

방향은, 쇄도하는 무르무르의 앞발. 그 정면이었다.

[스킬 발동: 비약]

동시에 투학! 허공을 박차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고, 동시에 놈의 공격방향에 순응해 힘을 분산시키려는 선택. 순간적인 판단으로 내린 행동이었다.

“크읏!”

숨을 기합처럼 내뱉었다.

그리고 장검과 손톱이 허공의 일점에서 격돌했다.

쿠구구구! 원자폭탄이라도 터진 듯, 장대한 에너지가 그곳을 중심으로 폭발했다.

“크헉!”

온몸의 장기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충격.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끄, 허어!”

잠깐 꺼졌던 정신이 팟, 하고 돌아온다.

가까스로 정신 줄을 다시 붙잡았을 때. 나는 유성처럼 허공을 가르며 쏜살같이 튕겨나가는 중이었다.

“이런. 미친……!”

대체 얼마나 멀리 튕겨나고 있는 거지.

어느새 무르무르의 거체가 콩알처럼 아득하게 보이고 있다.

‘멈춰야……!’

부리나케 제동을 잡아보지만, 약간 늦었다.

내가 날아가는 궤도 앞으로 어느새 수많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나는 쓸데없이 저항하는 대신, 온몸을 바싹 웅크려 충격에 대비했다.

“컥.”

콰앙! 콰콰콰쾅!!

건물 하나를 그대로 관통해 반대편으로 솟아나온다.

그래도 날아가는 기세가 죽지 않는다. 다음 건물, 그 다음 건물까지 관통하고. 무려 네 번째 건물에 처박혀 간신히 멈췄다.

“크… 으!”

실시간으로 오락가락하는 정신 줄을 간신히 붙잡았다.

우수수! 온몸에 잔뜩 묻은 돌가루를 털어냈다. 그리고 콘크리트 벽에 깊숙이 박힌 몸을 천천히 빼냈다.

쿠구구구!

내가 관통한 건물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광경이, 시야에 얼핏 들어온다.

“쿨럭!”

후두둑.

동시에 나는 격하게 기침했고. 투구 너머로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전신이 아프다. 내상을 입은 듯하다.

[스킬 발동: 리스토레이션]

물 흐르듯 복원 스킬을 사용. 순식간에 신체를 정상 범위로 복구시켰다.

온몸의 피부를 잘게 썰어내듯이 괴롭지만, 태평하게 괴로워하고 있을 틈은 없다.

―카하하하하핫!!

쩌렁쩌렁한 웃음소리.

그리고 머리 위로 드리우는 아득한 그림자까지.

순식간에 접근해오는 감각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당장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

[스킬 발동: 텔레포트]

그림자의 주인이 나를 짓뭉개기 직전. 나는 스킬을 영창해 순간이동을 감행했다.

쉬쉭! 다시 한 번 시야가 격변했다.

―아쉽… 군!

쿠과과광!!

거의 동시에 무르무르의 거체가 쏜살같이 추락했고. 방금까지 내가 처박혀 있던 건물에 내리꽂혔다.

놈의 오른발을 기점으로 장대한 폭발이 일대를 메웠다.

―거 꽤 튼튼해졌구만, 초인.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 너머. 시뻘건 안광이 어른거리며 목소리가 들려온다.

쿠웅, 쿠웅!

발소리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직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자네는 이 일격을 버티지 못했을 거다.

듣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오는 위압감 서린 목소리. 거기에 심각할 정도로 매치가 안 되는 유유자적한 어조.

내가 아는 무르무르, 그 자체였다.

―그게 분명… 보자. 한 30회차 전이었던가? 응?

푸화악!

일순간에 일대의 흙먼지가 반으로 갈라졌다. 무르무르가 오른발을 가볍게 휘두른 결과였다.

확보된 시야 한 가운데. 하얀 야차는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성장세로군 그래. 크크큭.

꾸드득! 우드드득!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고. 동시에 무르무르의 외형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기괴하게 솟아나고 쪼그라들길 반복하다,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온몸이 뒤틀려 간다.

―그러니까… 이번엔 좀 빠르게, 클라이맥스로 가도 되겠지? 초인.

뿌드드득!

어깨는 양 옆으로 넓어진다.

둥글게 굽었던 척추와 경추는 반듯이 펴졌다.

앞다리는 상대적으로 짧아졌고, 반면에 뒷다리는 눈에 띄게 길어진다. 기괴하게 뒤틀린 뒷다리는 역관절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자네도 이제 그만 숨기게나.

거의 인간에 가깝게 변한 골격.

그 엄청난 변화에 따라, 벌떡. 무르무르는 두 발로 일어서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했다.

놈의 기괴한 미소가 하늘 저 너머, 아득한 곳까지 솟아오른다.

―얼른. 서로 전력으로 붙어보자고. 초인.

수백 미터에 달하는 체장이 하늘 쪽으로 치솟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짐승 형태일 때와는 압박감의 차원이 달랐다.

“…환장하겠네.”

나는 변신한 무르무르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투구에 흥건한 피를 닦아내는 한 편. 골치가 아파져 이를 슬쩍 악물었다.

“벌써 그걸 시작하냐.”

인간 형태로의 변신.

12차 붕괴 이후로만 추가되는 무르무르의 최종병기다.

어느 한쪽이 너무 불리하면 변신하지 않는다. 서로가 비슷한 힘을 가졌고, 본인이 전력을 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때. 그 때만 놈은 변신한다.

‘덕분에 데이터도 적지.’

나는 무르무르에게서 최종형태를 끌어내본 적도 거의 없다.

하물며 이겨본 적? 한 번도 없다. 지금부터 내가 맞닥뜨려야 할 무르무르는… 거의 미지의 영역에 가까운 무언가다.

‘확실한 건 하나.’

지금까지의 강력한 무르무르보다도, 한 꺼풀 더 강하다는 것.

아무튼 무지막지하게 강력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인정해주는 건 기쁘긴 한데.’

내 생각보다 변신이 훨씬 빠르다.

무르무르의 평소 템포와는 완전히 다르다. 간 보기가 일체 생략됐다.

나와 전력으로 붙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이다.

“그래… 해보자, 한 번.”

물론 나도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다.

비장의 한 발. 아까부터 나도 준비 중이었다.

‘이게 막히면 난 죽는다.’

반대로 먹히기만 하면 이긴다.

승패의 방향과 내 목숨까지. 모든 것을 걸고.

단 한 방의 반격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다.

“해준다. 전력 전투.”

놈이 전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도 더 이상 간만 보고 있을 순 없다. 더 큰 그림 그리다간 도화지 찢어지게 생겼다.

스르륵. 나는 양팔을 최대한 넓게 펼쳤다.

‘무형검 발동.’

토식이는 진즉에 사복검에 흡수해 놨다.

전투의 초반에는 꺼낼 필요를 못 느꼈고. 중반에는 미처 꺼낼 틈조차 없었다.

“후우우……!”

그리고 전투가 명백히 종반에 가까워진 지금.

놈이 대놓고 변신매너를 지켜주고 있으니. 내가 그걸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원하는 형태는…….’

눈을 감고, 원하는 무형검의 형태를 빚어낸다.

이것도 익숙해지니 연상까지 금방이다. 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흐.”

피식. 회심의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내가 원하던 형태를 그대로 구현한 무형검. 그것을 눈에 담았기 때문이다.

“일단 성공.”

쉬쉬쉭!

경쾌한 파공음과 함께, 세 자루의 날붙이가 나를 호위하듯 맴돌았다.

가장 긴 리치를 자랑하는 양손검. 적당한 길이에 넓은 날폭이 특징인 펄션. 그리고 묵직한 날붙이가 인상적인 핏빛의 손도끼까지.

“이게 나의…….”

구현해낸 건, 암부장 장수혁의 무기들.

정확히는 놈의 주 무장을 카피한, 내 나름의 레플리카.

“전력이다.”

거기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검술 기능이 자체적으로 달려 있는’, 장수혁의 주 무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