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37)>
갑자기 센티멘탈 모드에 돌입하자, 다들 잠깐 정신을 못 차렸다.
수아와 서윤, 그리고 이세라가 멀찍이서 수근댄다. 예민해진 청력으로 엿듣자니, 역시나 핫 토픽은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한 나였다.
“언니. 쟤 왜 저래요? 뭐 잘못 처먹고 왔나?”
“그, 글쎄요. 저도 잘…….”
어쨌든 시간은 흘러간다.
회차가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적들의 힘은 눈에 띄게 강해지고, 그만큼 나 역시 전투시간과 들이는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아빠아. 또 자?”
“…그래. 잔다.”
“뭔 맨날 잠만 자. 그렇게 피곤해?”
“4시간 내내 전력으로 싸웠는데… 피곤할 만도 하지.”
“으음. 그런가아? 하긴!”
당연히 피로는 누적되고. 그만큼 휴식에 소모하는 시간도 갈수록 늘어난다.
휴식을 취하는 사이, 하루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아, 정용 씨. 오늘은 기분 좀 괜찮아 보이네요?”
“그래. 좀 낫다.”
“후후. 다행이에요. 어제는 왜 그렇게 꽁했던 거예요?”
“그냥 좀.”
“아핫. 이브가 맨날 그 말만 한다더니. 정말 맨날 하시네요? 그거.”
“…….”
그리고 시간만큼 해묵은 감정을 빨리 마멸시키는 것도 없다.
한숨 푹 자고 다음날 일어났을 때. 이미 직전의 던전에서 받았던 우울한 감정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오래 꽁해봐야 나만 손해지. 까마득한 회차를 겪으며 체득한 깨알 같은 지혜다.
“그래서. 다음 던전은?”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태연하게 물어봤다.
웃고 있던 이세라가 흠칫, 발을 물렸다. 정곡을 찔렸다는 행색이었다.
“…….”
“…….”
잠깐 동안 이세라와 나, 둘 사이에 알싸한 침묵이 흘렀다.
이내 그녀가 난처한 듯이 볼을 긁적였다.
“아하하. 이미 다 알고 계셨구나.”
“뒤에 뭔가가 꼭 있더라고. 네가 실없는 소리로 말을 걸면.”
“으음, 좀 복잡한 기분이네요.”
“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용 씨한테 생각을 읽히다니. 뭔가 엄청 비참해졌어요. 오늘 점심밥이 제대로 안 넘어갈지도 몰라요. 후우…….”
“…….”
나한테 마음을 읽힌 게 그렇게 충격적인가. 대체 저 여자 안에서 나란 새끼의 인식은 얼마나 시궁창으로 박혀 있는 걸까.
하도 똥 씹은 표정을 짓길래 좀 물어볼까 싶었는데.
“이번에도 2시간 정도 뒤. 이번엔… 응. 부산 벡스코인 것 같아요.”
이세라가 내 생각을 읽은 양 선수쳤다.
생각을 읽은 양은 무슨. 미래를 읽고 선수친 거겠지. 질문은 사절이다 이 소리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인.”
“바로 가시나요?”
“여기 있어도 딱히 할 것도 없잖아.”
“제발 조심하세요. 다쳐서 오면, 저한테도 얻어맞을 줄 알아요.”
“가차없구만.”
상처 악화가 무서워서라도 다치면 안 되겠네.
실없는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는 손을 휘적이며 주점을 나섰다.
* * *
부산 벡스코 현장에서 열린 것은 제1던전이었다.
<현자의 빼앗긴 서고>라는 이름의 비선형 던전. 문자 그대로 엄청난 크기의 원형 대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이번 회차는 비선형 던전이 많군.’
아무튼 이 던전은 클리어 메커니즘이 꽤 독특하다.
던전 마스터인 <그릇된 지혜의 단탈리언>은, 찾아온 손님에게 세 개의 퀴즈를 낸다. 이 퀴즈의 결과로 던전의 클리어 여부가 결정된다.
‘던전 마스터를 죽이지 않아도 던전이 닫히는… 유일한 던전이었지.’
단탈리언의 세 문제를 모두 맞추면 대서고를 빼앗긴 현자, <현자 루드비히>라는 인물과 만날 수 있다. 이 놈이 던전을 닫는 열쇠가 된다.
그러나 하나라도 못 맞추면. 단탈리언이 그대로 내 목을 썰어서 죽인다.
“끼게게게겍! 정답, 또 정답이니라!”
슈르륵!
눈앞에서 시커먼 형상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검고 추레한 거적때기를 둘러쓴 해골바가지.
전형적인 사신의 이미지를 만화처럼 귀엽게 비벼놓으면 저런 형상일까 싶다.
“아주 자알 맞추는구나 인간! 즐겁군, 즐거워! 키게겍!”
저 놈이 바로 단탈리언.
상태창에 표기된 정식 명칭은 <그릇된 지혜의 단탈리언>이다.
단탈리언은 수다를 좋아하는 귀찮은 놈이다. 놈은 아까부터 내 주위를 얼쩡거리며 문제를 냈고, 수다스럽게 입을 놀리고 있었다.
“키게겍. 어디 그럼, 곧바로 다음 문제를……!”
그리고 난 이미 첫 번째 문제를 맞춘 상태.
단탈리언이 해골 속 안광을 번쩍이며 앙상한 손을 비볐고.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정답. 양을 죽이고 대신 늑대와 악마가 나룻배를 탄다.”
“으엥?! 아, 아직 문제도 안 말했는데?! 근데 진짜 정답일세?!”
“다음 정답도 지금 말해줄까.”
“…….”
눈앞에 둥둥 떠 있던 앙증맞은 사신이 해골을 긁적였다.
그러더니 스르륵, 시커먼 거적때기를 휘날리며 성준의 앞까지 날아왔다. 그가 내미는 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끼게겍. 인간. 아무래도 자네는, 내가 모르는 불가사의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
“끼게게게! 뭐어, 자네 정체에 대해 아아아주 구미가 당기지만.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 이걸 받게나!”
“오냐.”
나는 사신 단탈리언의 손에서 낡은 열쇠를 낚아챘다. 그리고 단탈리언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서고를 가로질렀다.
이윽고 등장한 것은, 거대한 철창으로 이루어진 짐승용 우리였다.
―퀘아아악! 그아아악!
그 안에서 발광하는 집채만 한 괴물이 있었다.
시뻘건 눈에 온몸은 지저분한 갈색 털로 뒤덮였고. 등에는 뾰족한 가시 같은 게 돋아 있다.
손발은 비정상적으로 컸는데, 그 엄청난 손발로 연신 철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현자의 눈.”
나는 시동어를 외쳤고, 곧 괴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몬스터 정보]
[명칭: 현자 루드비히]
[체력: 137 마력: 65]
[힘: 81 민첩: 76 지능: 58]
[상세: 제1던전 ‘현자의 빼앗긴 서고’의 레귤러 몬스터. 수중도시 알레바란의 대서고를 관장하던 대현자. 악마의 지혜를 탐내어 금단의 거래를 시행했고, 그대로 영혼을 빼앗겨 괴수가 되었다.]
“끼게게게겍! 수상한 인간. 나는 인간이 좋아.”
멍하니 상태창과 철창 안의 괴물을 번갈아 쳐다보자니. 옆에서 특유의 기분 나쁜 비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껏 안광을 번득이는 단탈리언이 보였다.
“다들 너무 각양각색이지 않나. 자네도 그렇고, 저 치도 그렇고.”
“…….”
“자기가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믿었던 자가, 지혜라곤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괴수가 되어 날뛰는 모습이란. 즐겁군. 골계로다! 끼게겍. 끼게게게겍!”
앙증맞은 사신은 붉은 안광을 연신 희번득거리며 기괴하게 웃어댔다. 마치 눈앞에서 포효하고 발광하는 전(前) 현자를 조롱하듯이.
나는 힘없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할 말은 없네.”
철그럭.
말을 마치기 무섭게 철창에 열쇠를 가져갔다. 철커덕. 열쇠가 맞물리며 격철음이 났다.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얼어 젖혔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끼기기긱!
오랫동안 열지 않았는지, 귀를 찌르는 마찰음과 함께 철창문이 활짝 열렸다.
이제 현자(였던 것)과 내 사이의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다.
“오호.”
가만히 지켜보던 단탈리언이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스르륵, 천천히 형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다.
“그럼 나의 역작과 즐거운 시간 보내게, 기이한 인간이여! 크게게! 케게게게겍!!”
애초에 이 던전은 그냥 단탈리언의 퀴즈만 맞추면 끝나는 던전이 아니다.
빼앗긴 서고의 본주인. 현자 루드비히를 퇴치하고 안식을 부여해야 닫히는 던전이다.
“현자씩이나 돼서. 과유불급이란 말도 몰랐냐.”
―퀘아아아악! 케에엑!!
“지식이든 뭐든. 적당히 탐을 냈어야지.”
철창 안으로 탄식에 겨운 몇 마디를 날렸고. 그러든 말든, 루드비히는 침을 질질 흘리며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피식. 재차 힘없는 조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후딱 끝내자.”
스르릉!
곧장 사복검을 휘둘러 채찍처럼 늘어뜨렸다.
비지지직.
번개가 사납게 춤을 추며 검날을 치달렸다. 직후 지면을 박찬 나와, 현자였던 괴수가 격돌하기 시작했다.
“글레이프니르……!”
―크에에에엑!
공방은 의외로 싱겁게 끝을 맺었다.
글레이프니르로 순식간에 거체를 속박. 그 위에 라이트닝 헬릭스로 약점을 몇 번 지져줬다.
루드비히는 금세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내질렀다.
―키익, 키이이이……!
“아가리.”
콰드드득!
아가리가 벌어진 빈틈 사이. 쉴 새 없이 사복검이 날아가 꽂혔다.
―카에에에에엑!!
쿠구구구!
물론 그 상태가 되어서도 루드비히의 반격은 심심찮게 치고 들어왔다.
글레이프니르의 사슬은 지속시간이 짧다. 천라로 이어서 구속을 시도했지만, 루드비히는 어렵지 않게 빛의 그물을 찢어발겼다.
―크레레레레렉!!
콰광, 콰콰쾅!!
그러나 지성이 제거된 루드비히의 공격은 지극히 단순했다.
힘도 민첩도 이미 루드비히를 웃도는 나다. 전략이 없다면 질 이유가 전혀 없다.
“욕봤다.”
퍼억!
사복검을 순간적으로 합치고. 바닥에 엎어진 루드비히의 머리통을 찍어 눌렀다.
단박에 놈의 두개골이 쪼개진다.
―켁… 큭… 쿠아…….
푸쉬익! 거대한 머리통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루드비히는 경이로운 생명력으로 한참을 파들파들 떨다가, 곧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두둥, 던전 시스템 특유의 경쾌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이 던전의 특징으로는, 던전 마스터인 단탈리언의 퀴즈를 맞춘 보상과 루드비히의 퇴치 보상이 따로 나온다는 점이다.
다만 퀴즈 보상은 정해져 있다. 철창의 문을 열었던 열쇠가 바로 그것이다.
[아이템 정보]
[명칭: 악마의 만능열쇠 (B급)]
[타입: 소모형/보조]
[효과: 잠금장치를 개방한다.]
[효력범위: 던전의 물품에 한한다.]
[상세: 그릇된 지혜의 악마 단탈리언이 특수 제작 한 만능열쇠. 어떤 형식의 잠금장치든 갖다 대는 순간 개방된다. 특수한 마력처리를 거친 물품은 열지 못할 때도 있다.]
루드비히의 퇴치 보상으로도 <전추한 지식의 팔찌>라는 팔찌를 얻었다.
그러나 이 팔찌는 스킬 공격력을 대폭 강화하는 대신. 체력과 마력이 대폭 삭감되는 양날의 검이었다.
체력치의 최적화를 끝내놓은 내겐 사실상 쓸모가 없었다.
‘차라리 쓸모가 있으면, 열쇠 쪽이겠네.’
어떤 정교한 잠금장치도 풀 수 있게 해주는 만능의 열쇠.
어떤 던전, 어떤 잠금장치를 막론하고 무조건 풀린다. 이게 생각보다 의외의 장소에서 굉장히 유용할 때가 많았다.
‘지금은 이제…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뭐 당연히,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겠지.
파직! 나는 인벤토리에 열쇠를 대충 처박아뒀다.
[단탈리언이 대서고에서 퇴장했습니다.]
[대서고를 유지하던 술식이 붕괴됩니다. 금단의 도서관은 곧 알레바란의 저주로 수몰될 것입니다. 조속히 탈출하십시오.]
삐빅, 삐빅. 연신 패널이 눈앞을 가려왔다.
경고 패널이었다. 지금 당장 안 나가면 뒤진다고 난리도 아니다.
“나간다, 나가.”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곧장 도서관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파짓! 어느새 도서관의 입구 부근에 생긴 텔레포트 게이트. 그 너머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한 순간 상하좌우가 반전되는 듯한 메스꺼움이 일어났고.
“…….”
쉬쉭!
내 신형은 발끝부터 머리까지 순식간에 사라진다.
―키게게겍, 키게게게겍!
단탈리언의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쿠르르륵! 을씨년스러운 도서관의 벽이 허물어졌고. 그 너머에서 순식간에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후우.”
파지지직!
대서고와 이어진 게이트를 탈출한 직후. 나는 언제나처럼 한숨을 흘렸다.
일을 끝내고 나면 습관적으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번 던전이 붕괴한 성남의 판교역 상공. 그 아래 펼쳐진 까마득한 망망대해.
순식간에 쏟아진 대량의 물에 수장돼버린 도시의 풍경이 보였고. 수평선을 향해 시선이 천천히 멀어진다.
“많이도, 죽었겠군.”
성남시는 시작에 불과하다.
위로는 강남. 아래로 광주와 수원시까지. 하루아침에 전부 수몰되었다.
수장된 인구를 다 합치면 대충 얼마쯤 되려나.
‘…모르겠다.’
일일이 생각하기도 귀찮다. 아무튼 존나게 죽었겠지.
이제 그렇게 생각하고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