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35)>
그렇게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나는 이번에도 소파에 누운 채 시간을 죽였다. 돌부처마냥 천장만 멀거니 쳐다보며, 하염없이 마력과 체력이나 회복했다.
수아가 옆에서 연신 안절부절 하는 게 얼핏 보였다.
“…….”
그 장면도 멍하니 관망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듯하면서도 깔끔하다. 멍한 정신, 백지가 된 머리 위로 오만가지 상념이 나룻배처럼 둥둥 떠다닌다.
흘러가는 tv광고 보듯, 그것들을 하나씩 재생시켜 봤다.
―강수아는 이미 죽었네. 도전자.
가장 먼저 들려오는 것은 베르페아노의 목소리.
놈의 이죽거리는 늙수그레한 얼굴. 황금일색 큐브의 풍경. 덜컹거리는 기계음과 격철음.
그때의 숨 막히는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이 떠올랐다.
―평범한 엑스트라는 아니야. 높은 확률로 요주인물 중 하나다. 그거는 확실해.
다음은 토식이가 해줬던 경고도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이미 그때, 반쯤 이런 진상을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슴 한 편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지.
―이제 진짜 왕을 영접하러 가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직전의 일이었다.
새빨갛게 흩날리는 오경태의 선혈. 솟구치는 머리통. 그 면상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뒤틀린 미소를 짓는 프라키까지.
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뇌리를 후려친다.
―지리멸렬한 연극의, 막을 내릴 시간이다.
진짜 왕.
죽어 버린 전대 왕의 유해. 그 뒤편의 어딘가에 숨어 있는 강수아.
지금도 내 옆에서 눈치를 살살 보는 가짜가 아니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마 앞으로도 기억날 일이 절대로 없는, 진짜 강수아.
“막을 내린다고.”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흠칫, 옆에서 수아가 깜짝 놀라서 쳐다본다.
나는 그걸 눈치챘지만, 대충 무시한 채 상념을 계속 이어나갔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억지로 팽팽 굴렸다.
“나는… 뭘 해야 하지.”
최종적으로는 그런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초인이다. 초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육사도인 ‘옥좌’를 봉인해 놓은 그릇이기도 했다.
‘육사도가 모두 모이면 왕이 강림한다며.’
하지만 모든 육사도의 힘이 내게 모인 지금.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대격변이 없다.
‘뭔가 해야 하는 거다. 내가.’
그렇다면 난 뭘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내 안의 <옥좌>가 깨어날까.
사실 생각을 깊게 할 것도 없었다. 몇 번이나 비슷하게 겪어본 상황이니까. 제일 먼저 조건반사적으로 생각나는 행동이 하나 있다.
‘나를… 죽여야 하나.’
그릇의 죽음으로 육사도는 이 세상에 현현한다.
다만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하고. 정확한 순서를 맞춰야 하는 게 전제조건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나 외의 육사도를 모두 모았다.’
다시 말하면, 옥좌가 깨어날 조건을 모두 달성한 상태.
지금 내가 죽으면. 평소의 영원회귀와는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이게 아니면?’
당연하게도 일말의 불안이 뇌리를 스쳤다.
약간 습관 같은 거다. 뭔가 도전하기 전엔 항상 최악의 상황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게 세상이 날 길들였고, 실제로 대부분은 그렇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니.’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휘저었다.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는 시선에선 점차 흔들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지금도 점점 확고해지는 결심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틀렸으면. 한 번 더 하는 거지.”
1033번이나 반복해왔다.
이제 와서 1트 추가된다고 대수로울 것도 없긴 하다.
“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퍼뜩,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파지지직!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어젖혔다.
“토식아. 나와 봐라.”
통보에 가까운 호출. 나는 균열 안으로 손을 헤집어 토식이를 끄집어냈다.
쑤욱. 왼쪽 발을 붙잡힌 토식이가 잘 익은 무처럼 뽑혀 나왔다.
“으음. 응? 오오. 오랜만이다?”
토식이는 나 때문에 잠에서 깬 듯하다.
눈을 연신 부비며 멍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그러다 이내 짐짓 반가운 체를 하며, 손을 슬쩍 흔들어 인사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냐? 면상은 왜 그리 심각하고.”
토식이가 나른한 어조로 물어온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는 한 편. 곧장 본론을 들이밀었다.
“육사도를 다 모았다.”
“오오, 그래? 거 축하한다, 야!”
“이제 난… 뭘 하면 되냐.”
“마지막? 네 차례지. 당연한 걸.”
토식이는 신랄하게 피식 웃었고. 앙증맞은 털복숭이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놈의 시뻘건 눈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제 네 차례야. 네 안에 있는 옥좌를 꺼내면 돼.”
“그러니까 어떻게.”
“당연히 한 번 뒤져야지. 네가 초인이라고 뭐, 거기까지 특별대우 해줄 줄 알았냐?”
“…….”
“다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그러니 자살은 보류해둬.”
거기서 갑자기 토식이는 입맛을 다셨다.
자살할 생각이 충천했던 나는 덜컥 행동을 멈췄다.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던 손을 천천히 빼냈다.
나는 얼떨떨하게, 차근차근 물어봤다.
“시기… 상조?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 타이밍이 안 맞아. 지금은 자살해도 아무 의미가 없어.”
“그러면. 언제 해야 하는데.”
“당연히 14차 붕괴까지 모두 막아낸 다음이지. 최후의 순간이 오기 직전 말이야.”
그 말에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아.”
벌어진 입에서 한숨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토식이가 얼빠진 나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참칭자에 대한 건 전부 들었냐? 붉은 용한테?”
그리고 태연하게 그런 걸 물어온다.
나는 부릅뜬 눈을 퍼뜩 놈에게 향했다. 손등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가까스로 입을 움직였다.
“너도, 참칭자에 대해… 알고 있었냐.”
“그 정돈 알았지. 당연히.”
“…….”
토식이는 담뱃갑 끝단을 툭툭 털며 말했다.
나는 그 태연한 행색에 숨을 삼켰고. 토식이가 내 행색을 훑어보더니, 황급히 첨언했다.
“아아, 물론 난 그놈의 정확한 정체까진 몰라. 난 그 용가리 새끼처럼 정체모를 기억이 남아 있는 게 아니니까. 거짓말로 모른 척했던 건 아니라고.”
“그러면……!”
“하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섞여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네가 그놈의 정체를 좀 착각하고 있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고.”
전율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전율은 곧 고요한 분노로 바뀌었다.
“왜. 지금껏 아가리 닫고 있었는데.”
“물어보질 않았으니까.”
“…허?”
“나는 너를 올바른 방향으로 계도해 줄 의무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딱 거기까지야.”
“…….”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내가 그 이상까지 일일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었다는 거지.”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은 부분을 일부러 말해주진 않았다.
토식이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듯하다.
“…틀린 말은, 아니네. 그래.”
나는 삐걱대는 고개를 간신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금껏 내가 지랄하고 고민하는 걸 보며 퍽이나 우스웠겠어. 여러모로 부아가 치밀었지만 일단은 불문에 두기로 했다.
지금은… 그래. 내가 언제나 그랬듯이. 실리를 찾을 타이밍이다.
“그러면 지금 이건. 반드시 말해줘야 할 부분이라 말해주는 건가.”
“뭐, 그렇지. 안 그러면 무턱대고 지금 자살했을 거잖냐? 너.”
“…그야.”
“지금은 네가 자살해봐야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 장담하는데, 옥좌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일 거다.”
“…….”
거기서 토식이는 갑자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길게 한 숨 내뱉더니. 흩어지는 담배연기 사이로 담뱃대를 들어올렸다.
붉게 타오르는 담배 끝단이 날 가리켰다.
“괜히 전처럼 시간만 줄창 돌아갈 거고. 너는 또 처음부터 끝까지 이 지랄을 반복하겠지. 지금까지 네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
“아니면 하염없이 자살을 반복할 수도 있겠구만. 아무튼 뭐라도 바뀔 때까지 말이야. 안 그러냐?”
정답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안 되면 될 때까지 무식하게 박아왔다. 놈은 그런 내 방식을 꿰뚫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그 무의미한 반복을 막으려면. 내가 말해줄 수밖에 없지 않겠냐?”
나는 결국 아무 말도 못했고. 토식이는 거봐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어깨를 으쓱이며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우선은 14차 붕괴까지 막아 내. 그리고 참칭자를 맞이해라.”
“…….”
“그리고 그 앞에서 마지막 육사도를 이 세상에 꺼내. 다시 말하면… 자살해라.”
“…….”
“다음 회차에 눈을 뜨면. 넌 왕을 만날 수 있을 거다.”
짝짝.
별안간 토식이가 박수를 치며 내게 눈짓했다.
인벤토리 열라는 제스처. 할 말 다 했으니, 한 시라도 빨리 퇴근하고 싶다는 듯하다.
“…….”
나는 힘없이 손을 들었다.
파지직! 귀신 들린 사람처럼 허공을 휘적여 인벤토리를 열었다. 토식이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일언반구 없이 균열로 몸을 들이밀었다.
“뭐, 힘내봐라. 옥좌야.”
균열을 닫으려는 순간. 불쑥 머리를 내민 토식이가 한 마디 남겼다.
멍하니 쳐다보는 내 앞에서 서서히 닫히는 아공간. 토식이의 연민에 찬 비웃음이 빠르게 오그라들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응.”
슈르륵.
그 목소리를 끝으로 인벤토리는 닫혔다.
한동안 인벤토리가 열렸던 허공을 빤히 응시했다. 무아지경의 기세로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저… 오, 오, 오빠?”
급기야 걱정이 된 수아가 나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나는 계속 그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시간을 슬쩍 확인했다.
약 30분. 생각보다 많이 흘러서 놀랐다.
“오, 오빠. 괜찮… 아요?”
수아가 연신 안부를 물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멍하니 시야에 담았다.
관찰자 시점의 독립영화. CCTV의 한 장면처럼 뭔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왜.”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입을 열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뭐라 형언하기 어렵다. 온갖 들끓는 부정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무슨, 잘못을 한 거냐. 나는. 너한테…….”
덥석!
그리고 난, 급기야 수아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그녀의 어깨. 혹은 내 손아귀가 찌뿌듯한 신음을 토했다.
꾸드득! 수아의 얼굴이 격통으로 일그러졌다.
“아아악! 오, 오빠! 왜, 왜 이래요?!”
“왜.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수아야……?”
“예? 오빠.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왜… 내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대체 왜…! 왜.”
“아, 아악! 오빠! 아파! 아파요!! 팔 좀……!”
파박!
수아가 나를 거칠게 밀쳤다. 허겁지겁 내게서 물러나 양팔을 감싸 쥐었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오빠 미쳤어요?! 대체 왜 그래요! 장난이 좀 심한… 거 아녜요?!!”
그렇다.
그녀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눈앞의 수아는 세상에 차고 넘치는 재해의 피해자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여기엔 가해자가 없다. 피해자만 둘이었다.
“…왜. 네가 오히려. 그런 표정을…….”
내게 이유도 없이 윽박을 듣고. 양팔을 붙들린 채 힘으로 휘둘렸다.
그래서 나를 향해 공포에 찬 시선을 쏘아대는… 한없이 무고한 피해자.
그게 눈앞의 강수아다.
“왜, 왜 울어요. 오빠.”
수아의 당황에 찬 목소리 덕에 깨달았다.
나는 숨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눈물을 철철 쏟아내고 있었다.
“지, 지금 울고 싶은 게 누군데. 예? 왜, 왜 우냐고요!”
“…….”
“왜… 왜 그렇게, 슬픈 얼굴로…! 진짜, 뭐냐구요, 대체!!”
수아도 여간 혼란스러웠는지 빽 소리쳐 버렸다.
콰당!
수아가 눈물을 훔치며 현관으로 달려갔고. 현관문은 그녀를 삼킨 뒤 거칠게 용트림했다.
“…….”
그리고 후일담.
수아에게 사정을 설명하느라 하루를 꼴딱 썼다.
“내가 요즘, 멘탈이 좀 안 좋다.”
잠깐 정신착란이 온 걸로 했다.
요즘 붕괴를 막으며 끔찍하고 처참한 광경을 하도 많이 봤다. 그래서 내 정신이 약간 맛이 가버린 걸로 해명했다.
실제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말하는 데 망설임도 없다.
“아, 앞으로는… 조, 조심, 해주세요.”
수아는 딱히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반신반의였다.
나에 대한 공포로 가득한 눈동자가 보인다. 수아의 실감나는 그 표정을 한동안 빤히 직시했다.
그러자 나도, 내가 좀 무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