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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09화 (209/235)

209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31)>

전에도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다.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 한꺼번에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와서 생기는 현기증.

토할 것 같은 메슥거림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크윽.”

내가 굳게 믿던 상식이 뒤집히는 감각.

그렇게 칭해도 될 것이다. 그게 가장 정확하지 싶다.

“그게… 그 시커먼 게, 던전 게이트였다고?”

―정확히는 좀 다르지만. 대충 비슷한 느낌이라네.

“비슷한 느낌?”

―그것이 진짜로 던전 게이트라는 건 아닐세. 다만 그 존재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없애버리면. 진짜 최종보스가 숨어 있는 공간에 진입할 수 있게 되지.

“진짜 최종보스가… 있는 곳.”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는 던전 게이트라고 한 걸세. 음.

태연하게 긍정하는 프라키.

나는 여유롭게 이죽거리는 놈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모래를 씹는 듯 입 안이 까끌거린다. 애써 무시하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아주 잘 알았어.”

솔직히 납득이 안 됐지만 일단 알아들은 시늉을 했다. 아직 이야기는 본론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니까.

이제 시작인데 벌써 막히면 답도 없다.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네가 설명한 게… 내가 잊어버린 전생이랑, 관련이 있나?”

―있지. 아주 상관이 많지.

“무슨 상관.”

―자네가 잊어버린 전생이 뭐겠나? 자네가 초인이 되기 전의 회차를 말하는 걸세.

“내가… 초인이기 전… 이라면.”

―가장 최초의 회차. 자네 이전의 초인이 이 연극의 주인공이었던 그 시점 말이다.

“…아.”

내가 초인이 아니던 시절.

순수하게 <죽어 버린 왕의 옥좌>를 담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바로 그 부분. 아마도 그 회차를 뜻하는 것 같다.

새로운 사실에 고개를 얼떨떨하게 끄덕이자니.

―그거 아나? 설계자가 원래 구상했던 시나리오는, 참칭자 같은 건 없었네.

“뭐라고?”

―그 시커먼 존재 자체가 말이야. 자네가 주인공으로 급하게 변경되면서 튀어나온… 일종의 불순물 덩어리라는 걸세.

“…….”

그 ‘참칭자’라는 게 내가 잊어버린 회차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몰라도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면 궁금하지 않나? 대체 뭐가 바뀌어서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우리는 정신없이 걷다 보니 교회 1층까지 도달했고. 무너져가는 출입구를 목전에 뒀다.

덜컹! 프라키는 교회 출입구를 빠져나가며, 짐짓 유쾌하게 외쳤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네로 바뀌면서… 대체 뭐가 같이 바뀌었길래. 그 살아 있는 던전 게이트가 새롭게 탄생한 걸까. 혹시 짐작 가는 게 있나?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하핫. 하긴, 알았으면 자네가 나한테 이렇게 빌빌대지 않겠지?

“당연한 소리.”

나도 놈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어둑한 실내에서 빠져나오자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다. 살을 에는 듯한 바깥바람도 볼을 거칠게 할퀴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적응시키자니, 프라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보자. 크게 세 가지가 바뀌었구만?

맑아진 시야에 프라키가 들어왔다.

놈은 내 쪽을 바라보며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가락 끝부분을 가만히 주시했고. 타이밍 좋게 프라키는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우선 하나. 자네도 이미 알겠지만, 역할이 뒤섞였지.

우선은 거기부터 시작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까지 이해한 바를 늘어놓았다.

“원래 초인으로 선택받았던 누군가가 초인이길 포기했고. 그 자리를 내가 이어받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악역인 <옥좌>의 그릇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인 <초인>이기도 하다. 이거였던가.”

―거 요약을 쌈박하게 잘하는구만. 바로 그거일세.

프라키는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같잖은 행색에 코웃음을 치는 한 편. 나는 손을 슬쩍 들어 올려 프라키의 이목을 모았다.

아까부터 머리맡을 맴돌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얘기가 좀 이상하지 않냐.”

―음? 뭐가 말인가.

“초인이 주인공 역할을 포기했을 때.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계승하는 게 아니고… 초인은 던전 마스터로 전락한다고 들었어. 둘 중에 뭐가 맞는 거냐.”

―오호. 그건 또 누가 말해줬나.

“토식… 보팔이 알려줬다.”

‘토식이’가 너무 입에 붙어서 급하게 정정했다.

그리고 이세계 만렙 토끼의 이름을 대자, 프라키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틀린 말은 아닐세. 원래라면 그게 정석이지.

“원래라면?”

―다시 말하면 이번 상황은 실로 이례적인 상황. 예외의 경우라는 걸세.

“예외… 라.”

그렇다면 왜.

의지의 화신은 왜? 그런 예외 사항을 허락해 준 걸까.

프라키는 내 의문을 짐작한 듯하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냈다.

―설계자가 허락한 이유가 궁금한가?

“…그야, 뭐. 당연히.”

―최초의 초인은 모든 육사도를 모으는 데 성공했고. 이 땅에 왕을 한 번 강림시켰다. 그리고 그 왕을 죽여 버리는 것까지 성공했어.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

―그러나 최후의 순간.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사명을 팽개쳤다. 그리고 설계자와 직접 대면해서… 거래를 했지.

전임 초인은 모든 걸 끝낼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엔딩을 목전에 둔 순간. 갑자기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한다.

“뭐… 아니. 대체, 왜…….”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만 연신 갸웃거렸다.

그런 나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던 프라키. 별안간 어깨를 으쓱거리며, 걷는 속도를 한껏 높였다.

내 의문을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다.

―그 자가 설계자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

모를 리가 없다. 지금까지 그 얘기만 줄곧 하고 있었으니까.

모르면 이상한 거다.

―한 마디로 요약해주자면. 최초의 초인은 엔딩을 강제로 틀어막았네.

“…엔딩을 막았다?”

―그래. 자기가 죽여 버린 왕 대신 스스로 ‘왕’을 자처해, 연극을 강제로 늘어뜨렸지. 덕분에 공석이 돼버린 주인공의 자리에… 설계자는, 자네를 끼워 넣었다. ‘왕의 옥좌’라는 막중한 역할을 이미 가지고 있던 자네를 말이야.

“…….”

―설계자는 그 흥미로운 선택을 존중했다. 무수한 희생 끝에 간신히 쌓아 올린 엔딩 직전에,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망치는 그 선택에서 막대한 즐거움을 느꼈지.

“…….”

―그래서 쾌히 거래에 응했다. 그 결과가 작금의 사태다. 옥좌.

그리고 그 순간. 별안간이었다.

처척! 프라키가 힘차게 펴든 손가락을 내 앞에 까딱거렸다.

―그리고 그게 바로 두 번째 변경점일세.

“…변경점.”

―역할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그에 따라… 설계자가 준비했던 시나리오도 대폭 변경되었지. 그렇지 않겠나?

그야 당연히 그렇다.

구성하는 사람이 바뀌었으니 환경도 바뀐다. 설계자… 의지의 화신은 당연히 바뀐 환경에 맞는 시나리오를 재구축했을 거다.

그 급조된 시나리오를, 현 주인공인 내가 체험하고 있는 거고.

―둘의 거래가 성사된 순간을 기점으로 이 세계는 완전히 재구축되었다. 왕과 초인이 다른 이로 교체되었고. 육사도들은 완전히 무작위한 위치로 재배치되었고. 당연히 시간 또한, 특정 시점으로 완전히 되돌아 가버렸지.

“시간이… 돌아갔다고.”

―그래. 그 정확한 시점이 언제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힌트는 딱히 없다. 하지만 알겠다.

나만큼은 알 수밖에 없다.

“…내 영원회귀의 시작점.”

―음, 영원회귀? 그건 모르겠고. 자네의 저주가 시작되는 시점을 말하는 거라면, 정답일세.

역시나 프라키는 내 말에 긍정했다.

나는 더없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고. 프라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새로운 시나리오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되돌아가고 뒤섞였다는 걸세. 옥좌의 그릇이었던 자네를 제외하고 말이야.

“…나는 왜 예외인데.”

―자네는 이미 초인으로 선택 받았잖나. 나도 정확한 사정까진 모르겠다만,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이유가 뭔가 있었겠지.

“그… 그, 그 말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는 어느새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지러운 머리로, 어떻게든 말을 만들어 나갔다.

“역할이 겹치는, 비정상적인 사태를 감수해서라도. 초인의 자리를 계승하는 건 꼭… 나일 필요가, 있었다는 거냐?”

―있었네. 자네일 수밖에 없었겠지.

“왜. 대체 왜, 하필 내가…….”

―아마도 적합자가 온 세상 통틀어서 자네뿐이었을 게야. 새롭게 바뀐 왕과, 새로운 시나리오의 주인공에 걸맞는 인간이 말이야.

“…X발.”

전 세계에 나뿐이라네.

그렇다면 할 말은 없다. 할 말은 없는데 짜증은 난다.

그래서 쌍욕이나 시원하게 한 번 박았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마지막 변경점. 난이도일세.

프라키는 그 자리에 별안간 멈춰 섰다.

주의를 환기하듯 박수를 짝짝, 몇 번 치더니.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내 앞까지 한 달음에 들이닥쳤다.

불쑥! 광기로 번득이는 눈알 두 개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왕의 옥좌. 혹시 이것도 벌써 알고 있나?

“…뭘.”

―자네가 시간동결의 저주에 걸려서, 반복되는 시간선을 999번이나 표류하게 만든 건. 설계자가 아니라 새로운 왕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였다.

“…….”

―그리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네는 알고 있나?

나는 힘겹게 눈을 들어 프라키를 마주봤다.

놈의 눈동자 안. 숨 막히는 광기와 직면한다. 숨이 잠깐 덜컥 멎었다.

이내 난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의미냐.”

―본래의 초인은 시간 동결의 저주도 걸려 있지 않았다는 걸세.

“…그렇군.”

―그때는 999번이나 시간을 되돌린 뒤에야 육사도가 모이기 시작하는… 이런 정신 나간 트리거도 없었다는 게지. 뭔 소린지 알겠는가?

“대충은.”

지금의 나처럼 토악질 나오는 난이도. 그리고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조건으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한 마디로.

프라키는 짐짓 선생이라도 된 양, 헛기침과 함께 덧붙였다.

―원래의 시나리오는 훨씬 더 간단명료했네. 옥좌.

“…어떤 식이었지.”

―우선 10년간의 유예 후, 한 달 동안의 클라이맥스. 이 큰 줄기는 자네도 똑같던가?

“똑같다.”

―그래. 그래서 그걸 막아 내면 초인의 승리. 막아 내지 못하면 초인의 패배로 던전 마스터화. 그냥 그뿐이었네.

허. 나도 모르게 헛숨이 튀어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그랬다.

“…단순하네. 정말로.”

―단순하지. 설계자는 원래 복잡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 이게 정상일세.

“그러면. 지금의 내가 비정상인 거냐.”

―비정상이지. 자네처럼 실패해도 시간이 처음으로 돌아간다니. 이런 사기적인 능력을 부여해버리면,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지 않겠나?

그 뒤로도 프라키의 설명은 한참을 이어졌다.

가만히 듣자하니. 원래의 초인은 말 그대로 ‘초인’이었다. 설계자… 의지의 화신에게, 초인적인 무력을 초장부터 부여받고 최종붕괴를 시작했다고 한다.

―설계자의 예상보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 너무나도 나약했거든.

“…그러냐.”

―그래. 유예기간 10년 동안, 전체적인 성장치가 설계자가 예상한 것의 발톱만치도 못 미쳤다.

“…그렇군.”

―그건 초인이 될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였어. 심지어 전임 초인은 일반인에 한없이 가까운 상태였다. 아니, 사실 그냥 일반인 그 자체였지.

그래서 화신은 어쩔 수 없이 ‘주인공 버프’를 허락했다.

덕분에 프라키가 기억하는 전임 초인은, 최소한 지금의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무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1033번이나 회귀한 나와 비슷한 무력을 말이다.

―초인에게 어드밴티지를 주지 않으면, 너무 일방적인 패배가 될 게 뻔했다. 밸런스 조정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고 보면 되겠어.

“…이해했다.”

듣고 보니 최초의 초인은 주인공 그 자체였다.

으레 이세계물 주인공이 그렇듯. 그냥 신이 처음부터 치트 능력을 부여해주고 시작한 것이다.

듣다 보니 솔직히 좀 억울해졌다.

“사기급 무력… 난 받은 적 없는데.”

―그야 자네는 급조된 초인이니까. 땜빵이라 어쩔 수 없어.

“…X발…….”

―다 설계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네. 아까도 말했지? 설계자는 신에 가깝지만, 마냥 만능은 또 아니거든.

“…….”

―설계자가 자네에게 시간동결 저주를 허락한 건, 아마 그런 이유도 있었을 걸세. 밸런스 조정 말이야.

그렇군. 무한 코인.

어떤 의미에선 나도 최고의 사기 능력을 부여 받았긴 하지.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능력을 부여한 주체가 화신이 아니라… 전임 초인이라는 거다.

“새로운 왕은… 왜 나한테 이런 저주를 걸었냐.”

―좀 정정하자면 저주를 건 것은 설계자일세. 그걸 부탁한 것이 새로운 왕인 거고.

“자잘한 건 됐어. 묻는 말에나 대답해.”

―낸들 알겠나? 그건 거래의 당사자인 설계자와 왕, 둘 밖에 모르겠지.

“…쓰읍.”

의도 부분이 가장 궁금했는데. 중요한 부분에서 정보가 끊겼다.

이내 피식, 내 입가엔 병든 비웃음이 짙게 걸렸다.

“화신… 설계자도 웃기는 새끼군. 연극의 감독씩이나 돼서, 등장인물들한테 휘둘리고, 놀아나기나 하다니.”

―감독이라. 설계자가 말인가? 그건 좀 틀린 비유지! 클클.

프라키는 내 말에 즉각 반응했다. 놈의 입꼬리가 한계까지 말려 올라간다.

비웃기보다는… 안타까워하는 듯한 쓴웃음이었다.

―그자는 극장 주인이다. 왕의 옥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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