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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03화 (203/235)

203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25)>

이세라한테 가오를 오지게 잡으며 주점을 나왔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일렀다.

아직 9차 게이트 붕괴까지, 1시간도 넘게 남았다.

‘다시 기어들어가긴 좀… 가오가 상하는데.’

그래서 급하게 시간 때울 일을 찾기로 했다.

나는 대전역에 도착하자마자, 역사 내에 있는 성신당을 찾아가봤다.

“역시 대전 하면, 성신당이지.”

이유는 그냥 그것이다. 별 거 없다.

그렇게 나름 부푼 기대를 품고 찾아갔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다 부서졌네. 역시.”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미 9차 붕괴가 임박한 시점이니 성신당은 성치 못했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 을씨년스럽게 방치된 상태.

저벅저벅. 나는 쑥대밭이 된 가게를 비집고 들어갔다.

“음.”

부스럭.

바닥에 널브러진 빵 봉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터져서 짓이겨진 부추빵 봉지였다. 빵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서 날벌레와 구더기가 드글거렸다.

나는 벌레들을 대충 손끝으로 털어냈고.

[스킬 발동: 리스토레이션]

파아앙!

만신창이가 된 빵을 ‘원상태’로 복구하기 시작했다.

우드득, 꾸르륵!

짓무른 빵이 이리저리 뒤틀린다. 상한 부분이 거짓말 같이 사라지며, 납작하게 짓이겨졌던 외형도 다시 탐스럽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됐네.”

이내 내 손에는 먹음직스러운 성신당표 부추빵이 완성되었다.

으적.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맛도 좋고.”

그리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 때문에 차갑고 딱딱해진 것만 빼면 훌륭하다. 나무랄 데가 없는 맛이었다.

구태여 성신당 찾아온 값은 하는구만.

“으웨엑! 아빠아! 그, 그걸 먹어?!”

그리고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이브가 기겁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브는 경악에 찬 얼굴로 나와 부추빵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뭐가 문제냐.”

“버, 버, 벌레! 상한 거잖아! 끔찍한 몰골이었다구!!”

“벌레 털었어. 상한 건 없앴고.”

“그, 그래도! 그, 그걸 보고도 어떻게, 그걸! 입에 넣을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너도 나처럼 살아봐라. 이렇게 안 되나.”

어차피 한 달짜리 시한부 인생.

X되지 않는 선에서 X대로 살다 가면 된다.

지금의 난 벌레 좀 끓었던 음식이라고 기피할 만큼, 일반인 감성이 남아 있지도 않다.

“맛만 있구만.”

우걱우걱.

나는 보란 듯이 부추빵을 씹어 삼켰고. 이내 한 봉지를 깔끔하게 비웠다.

게걸스럽게 먹는 광경을 빤히 쳐다보던 이브는 곧…….

“그… 마, 맛있어?”

츄릅. 입맛을 다시며 그렇게 물어온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그나마 성한 부추빵을 즉각 집어 들었다.

파아앙! 재차 리스토레이션 스킬을 발동했다.

“먹어봐라.”

휙. 말끔해진 부추빵을 이브에게 던졌다.

이브는 어렵지 않게 받아냈고, 단번에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그녀가 한동안 눈을 감고, 빵을 음미하듯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오오…….”

이내 이브의 눈과 입이 동시에 열렸다. 그리고 벌어진 입술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타이밍을 맞춰 물었다.

“어떠냐.”

“막 천상의 맛까진 아닌데. 그냥 맛있네?”

“그렇더라.”

“아빠. 딸기우유 있어?”

“있지.”

휙! 인벤토리를 열어 그녀에게 딸기우유 한 팩을 던졌다.

이번에도 이브는 능숙하게 받아냈다. 싱글벙글한 그녀가 부추빵을 한 입, 그리고 딸기우유를 쭉 빨아들였다.

이내 그녀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행복에 겨워했다.

“으음, 그렇지. 이거야! 이제 완벽해졌어!”

성신당 뒷광고 찍는 줄 알겠네.

피식 웃은 나도 이브의 옆에 앉아, 딸기우유를 마시며 바싹 마른 목이나 축였다.

배가 불러진 이브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으음, 아빠. 나 좀 졸린데…….”

“눈 좀 붙여.”

“으응. 미안, 아빠.”

“미안할 건 없고. 아직 시간 허벌창 많다.”

나는 이브와 함께 벽에 등을 기댄 채 쭈그려 앉았다.

이브는 내 어깨에 머리를 폭신 기댔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더니. 이내 무서운 기세로 수마에 빠져들었다.

“으음, 음냐…….”

을씨년스러운 역사에 간간히 이브의 잠꼬대가 울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체감상 30분이 좀 안 지났을 무렵.

툭툭. 고개를 꾸벅거리던 이브를 슬쩍 깨웠다.

“일어나 봐. 이브.”

“응헤? 아. 으, 응!”

이브는 반사적으로 두리번거렸고, 이내 나를 눈에 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품을 늘어지게 한 번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으우우! 아으. 졸려어.”

그제야 잠이 좀 깬 듯한 이브.

눈을 연신 비비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한다.

“왜 불렀어? 벌써 일할 시간이야?”

“앞에.”

“…응?”

“저기.”

나는 대답 대신 전방으로 슬쩍 턱짓했다.

그런 내 행동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우리의 주변으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개떼처럼 모여들었다.

“어, 으응?!”

당황한 이브가 다리를 움츠렸다. 그리고 파바박, 내 쪽으로 한껏 상체를 밀착해왔다.

그녀의 경계 어린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크흐흐.”

“으흐흐흐……!”

이브의 눈에는 우락부락한 사내새끼들 수십 명이 포착됐을 거다.

음흉하고 기분 나쁜 웃음을 연신 흘리며, 이브의 온몸을 핥듯이 쳐다보고 있겠지.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고 있다. 뭐 설마 다른 게 보이려고.

“용건이 뭐냐.”

이미 대충 짐작은 됐지만. 혹시 모르니 툭 물었다.

그러자 스륵, 놈들 가운데서 한 놈이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왔다.

“옆에 허연 년 냅두고. 10초 안에 꺼져. 뒤지기 싫으면.”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는 요구를 해왔다.

그 와중에 예상이 빗나간 점. 날 죽이려 들 줄 알았는데 그냥 보내준단다. 내 생각보단 신사적인 세기말 도적떼였다.

‘니들이 X발. 그러면 그렇지.’

한숨 쉬기도 아까워서 콧방귀를 뀌었다.

이내 리더로 보이는 사내의 면상을 유심히 훑었다.

“뭘 야려 X발아. X발련이 뒤지고 싶냐?”

산만한 덩치와 그에 걸맞는 험상궂은 얼굴. 그리고 지금도 쉴 새 없이 욕을 내뱉는, 굵고 두툼한 입술이 인상적이다.

생긴 것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왔다.

‘시정잡배네.’

법과 질서가 무너진 지금. 세상은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진짜 위험한 놈들은 저런 풍선근육으로 덩치만 빠방한 놈들이 아니다. 저런 부류는 보이는 게 전부라서 내재한 위험도가 낮은 편이다.

‘얇은 놈들이 리더인 게 더 위험하지.’

전투에 필요한 실전근육만 보유한 피지컬계 고위헌터들. 그도 아니면 공격스킬을 사용하는 캐스터계 헌터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런 놈이 리더로 있는 조직은 좀 골치가 아프다. 대개 리더가 헌터면 부하들도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나 혼자면 상관없겠지만…….’

누굴 지키는 전투가 되면 좀 빡세진다.

특히 수아 같은 개복치를 지키는 입장에선, 더더욱 그런 편이다.

“아, 아빠아. 어, 어떡해? 어떡할… 거야?”

이브가 울상이 되어서 물어온다.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둘러싸서 겁박해오니, 잔뜩 겁을 먹은 듯하다.

‘아니. 아니구나.’

이브의 행색을 자세히 보니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혹시 아빠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가진 않을까. ‘줄 건 줘’ 시전하고 손절치지 않으려나.

그런 불안도 분명히 내 눈에 보였다.

‘아직도 이렇게 신뢰를 못 받아서야.’

이브의 반응에 솔직히 좀 충격을 받았다.

그만큼 내가 이브에게 충분한 신뢰도를 주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건 좀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었다.

지금껏 그녀에게 받아온 게 꽤 많았는데. 감사표현이 좀 약했나 싶다.

“이브. 내가 누구냐.”

나는 목소리를 냈다.

둘러싼 사내들은 물론이고. 이브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런 이브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한 번. 똑같이 물었다.

“내가 누구냐.”

“어……?”

“나는 네게 있어서 뭐냐. 이브.”

“아, 아빠는… 아빠는, 그냥 내 아빠잖아……?”

“맞아.”

그 대답이면 됐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딸을 버리는 아빠는 없다. 난 너를 버리지 않는다.”

“아……!”

“미안하다. 말도 안 되는 걸로 걱정시켜서.”

“아, 아니. 난…….”

이브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 나는 주머니에서 빼낸 100원짜리 동전을 튕겼다.

콰아아앙! 어떤 회귀자의 초전자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난다.

“…어?”

“으, 어…….”

괴한들은 한동안 넋이 빠져 있었다.

이내 하나같이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고. 미친 듯이 떨렸다.

그들의 시선은, 미간에서 뒤통수까지 고속도로가 개통된 보스에게 향해 있었다.

“흐아아악!!”

“으, 으아아아!!”

털퍼덕!

때마침 보스의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자기가 뒤졌다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그리고 펑, 퍼펑! 나는 주머니에 남아 있던 짤짤이들을 사방으로 난사하기 시작했다.

“크억!”

“칵……!”

투학! 퍼버벅!

원샷 원킬.

양손의 엄지를 튕길 때마다 섬광이 번득였고, 똘마니들의 육체 어딘가에 거대한 구멍이 숭숭 뚫렸다.

핏줄기가 성신당 내부를 새빨갛게 물들여갔다.

“씨, X발……!”

“방금 건, X발 저건 대체 뭔데!!”

아직 살아 있는 친구들은 슬슬 대가리가 봉합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하나 남은 500원짜리 동전을 엄지 위로 장전했다. 그것을 놈들의 면상 앞으로 스윽 훑어 내려갔다.

흠칫! 놈들은 동전이 자길 겨눌 때마다 몸을 바싹 굳혔다.

“맞고 싶은 놈 거수.”

일단 신청을 한 번 받아보기로 했다.

당연히 거수하는 놈은 없다. 그저 동전의 사선(射線)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발악할 뿐.

주춤주춤. 놈들이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스크럼이 붕괴했고.

“이, 이 X발! 도망쳐!”

“평범한 새끼가 아니었잖아! 이 새끼 고위헌터야!!”

“흐아아아악!!”

직후 일제히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타타탓! 놈들의 요란한 발소리가 폐허가 된 역사에 요란하게 울렸다.

“…쯧.”

딱히 쫒지 않았다.

회차 중후반부 쯤에 이 정도 시비 털리는 건 일상다반사다. 저런 잡배들까지 일일이 척살하다간 한도 끝도 없다.

어차피 저 짓거리 하는 것도 얼마 못 간다.

‘며칠 내로 차별 없이 다 뒤질 거니까.’

그러니 며칠만 참자.

한 12차 붕괴까지 넘기고 나면. 슬슬 서울에 생존자 자체가 극히 드물어져서, 시비를 털리고 싶어도 털릴 수가 없다.

쯧, 혀를 가볍게 차고. 하나 남은 동전을 다시 주머니로 회수했다.

“…아빠.”

“어.”

문득 잠자코 있던 이브가 날 불렀고.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흘깃 던졌다.

이브는 홀린 듯이 멍한 시선으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아빠는… 날, 버리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당연하지.”

“그, 그렇구나.”

이브가 뭔가 벅찬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눈을 전에 없이 반짝이며,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내게 향했다.

“나, 나도…! 아빠랑, 영원히 같이 있을게!”

“……?”

이브는 결심한 듯이 또박또박 선언했다.

뭐라 할까. 분명 겉으로는 훈훈한 대화가 오간 것 같은데. 나는 이브의 행색에서 미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영원히 말이냐.”

“응. 영원히!”

“…….”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도 계속. 나는, 아빠랑, 영원히 같이 있을 거야…! 꼭!”

맹목적으로 나를 향한 흔들림 없는 시선. 발갛게 상기된 뺨.

‘영원히’를 유난히 강조하는 확신에 찬 목소리.

거기서 뜻 모를 광기를 감지했다.

‘그건 좀… 사양하고 싶은데.’

애초에 내게는 얼토당토않은 소리기도 하다.

이브가 영원히 내 옆에 있는다? 그건 영원회귀가 앞으로도 영원 무궁히 계속된다는 소리다. 그딴 끔찍한 미래는 0.1초도 상상하기 싫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히, 같은 건 좀 곤란하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 정도는 환영이지.’

던전 붕괴가 종식되고 영원회귀가 끊어지는 순간. 나는 일말의 미련 없이 자살해버릴 예정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죽을 땐. 너도 함께다. 이브.’

내 목숨을 바쳐서… 아니.

목숨을 1032번 넘게 버려서 만들어낼 평화다. 그 해피엔딩의 미래에는 일말의 불안요소도 남겨놓을 생각이 없다.

종말의 이브는, 회귀자 한정용에 버금가는 불안요소지.

‘내 손으로 이브를 죽여 버리고. 나도 죽는다.’

완벽한 해피엔딩은 그것으로 완성된다.

‘강수아를 구해낸다’라는 유일한 목적의식도 희박해진 지금. 내게 남은 건… 이젠 정말, 그것뿐이니까.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이제 뭐라도 감수하겠다.

“…슬슬, 시간이 됐구만.”

상념을 떠올리는 사이 예정된 붕괴가 찾아왔다.

파지지직! 대전역 동광장 한 가운데서 허공이 찢어졌고. 여느 때처럼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워어어어어!

―취이이익!

―우!! 우!!!

이번에 붕괴한 것은 21던전. <은빛늑대 주둔지>.

오크족장 케샤쿠와 그 휘하의 오크군대로 이루어진, 닳고 닳은 던전이었다.

“가자. 이브.”

“아, 응!!”

나는 즉각 이브를 변신시켰고. 오크군대와 정면에서 격돌했다.

콰자작!

붉은 칼날 폭풍이 진형을 속절없이 와해시킨다.

―크아아아악!

―키엑! 크라라락!!

9차 붕괴쯤 되니 오크 병사의 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게 수천에 달하는 오크군세를 일점으로 돌파하고.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던전 마스터 케샤쿠의 모가지를 썰어버릴 때까지.

정확하진 않지만, 약 2시간쯤 걸렸지 싶다.

[던전 마스터 ‘은빛 늑대 족장 케샤쿠’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아이템 ‘은빛 늑대의 글레이브’를 획득하셨습니다.]

사냥 보상은 어김없이 쓰레기였다.

딱히 기대를 안 해서 그런가. 이번엔 딱히 실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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