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01화 (201/235)

201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23)>

푸스스!

한동안 혼란한 머리를 추슬렀고. 진정된 다음엔 곧장 무형검부터 해제했다.

모여든 연기들이 토식이의 형태로 빠르게 뭉쳐졌다.

“아아, 죽겠다. 진짜로.”

토식이는 언제나처럼 푸념을 늘어놓았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에 약간의 안심을 느꼈다. 나는 쓴웃음을 슬쩍 머금으며 혈천갑의 변신도 풀어버리려 했다.

그런데 툭툭, 토식이가 갑자기 날 불렀다.

“근데 있잖냐. 옥좌야.”

“왜.”

“네가 마지막에 썼던 무형검. 왜 굳이 그런 비효율적인 형태로 만든 거냐?”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인상을 약간 찌푸린 채 토식이를 내려다봤다.

나도 모르게 약간 굳은 목소리가 나왔다.

“…비효율?”

“그래. 솔직히 학살용 무기를 만들 거면, 더 효율적인 형태가 얼마든지 있잖냐.”

“예를 들면.”

“예를 들 것까지 있나? 화염방사기 같은 것만 만들어도 훨씬 쉽게 조졌겠네.”

“…….”

화염방사기. 토식이치곤 나쁘진 않은 생각이다.

다만 투사체가 ‘마탄’으로 고정이니까 화염을 구현하진 못한다. 하지만 마력을 입자포처럼 발사하는 ‘레이저 바주카’ 같은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사실 조무래기 처리할 용도라면야. 폭탄을 만들어서 난사하는 게 제일 낫지 않아? 시간적으로나 효율적으로나.”

“…그야, 뭐.”

“왜 굳이 비효율적이게 중화기를 만드냐?”

토식이가 비겁하게 팩트를 들이밀며 승부해왔다.

할 말은 궁색하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효율이 아니야. 낭만이라는 거다.”

“…허?”

“개틀링건은 남자의 로망이다. 족간지가 난다고.”

“아니. 음. 어.”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지랄났네 아주…….”

내 당당한 개소리에 토식이는 고개를 슬슬 저었다.

그러나 더 이상 딴지를 걸어 오지는 않았다. 논리와 상식이 안 통하니, 말 섞어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할 말은 그 정도냐.”

파지직!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토식이에게 슬쩍 턱짓했다.

할 말 다 했으면 그만 쉬어라. 그런 의미였다.

“뭐… 그래. 그렇다면야 할 말은 없네.”

토식이는 다만 쯧, 혀를 한 번 찼다.

그가 허공의 균열에 어기적거리며 몸을 집어넣기 시작했고.

“놀 수 있을 때 많이 놀아 놔. 어차피 이 지랄도 곧 끝날 것 같으니. 좋을 때구만.”

완전히 들어가기 직전.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나 남겼다.

스르륵. 나는 닫혀버린 인벤토리의 균열을 한동안 멍하니 쳐다봐야 했다.

“…….”

틀린 말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숨 돌리기. 어쩌면 현실도피일지도 모르겠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데가 필요했다. 요즘 머리가 하도 복잡해서, 평소의 나답게 좀 단순해지고 싶었다.

“…소용은 없었네.”

시원하게 개틀링건이라도 쏴 갈기면 기분이 좀 상쾌해질까 했는데, 여전히 머리는 복잡하고 가슴은 갑갑하다.

그런 와중에 삐빅, 눈치 없이 패널은 떠올랐다.

[던전 마스터 ‘진격의 발트레드’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아이템 ‘순례자의 증표’를 획득하셨습니다.]

8차 게이트 붕괴를 성공적으로 막았다는 표식이었다.

딱히 기쁘진 않았다.

“또 중복이냐.”

이미 있는 아이템이라 그렇다.

사실 이젠 뭐, 없는 아이템 찾기가 더 빡세긴 하지.

당연한 일이라 감흥도 없다.

‘…마무리나 하자.’

나는 지친 시선을 슬쩍 들어올렸다.

키잉! 눈동자에 마력광이 깃들며 시야가 확장된다. 새가 바라보듯 아득히 넓어지는 시야에, 일대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아. 여신. 우리의 여신이여…….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부름에 답해다오……!

발트레드는 죽었다.

게이트도 진작에 닫혀버렸다.

그런 지금도 ‘순례’를 계속하는 필그림들이 보인다.

―영도자는 이제 없다.

―하지만, 계속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순례는… 계속, 되어야 한다……!

삼삼오오 점조직처럼 모인 필그림들이 비척비척 걸어간다.

마치 바이러스가 퍼지듯 시내의 거리를 정처 없이 마구잡이로 걷는다.

그리고 앞을 막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척살했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줘… 괴, 괴물이다!!”

“카학! 끄힉… 끼아아악!!”

필그림의 잔당들이 일대의 거리를 초토화시키고 있다. 비명과 절규가 멀찍이 떨어진 여기까지 들려온다.

파지직! 나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번개를 인챈트했다.

“…드가자.”

평소처럼 스스로 북돋았다.

다만 어조는, 어딘가 모호하고 매가리가 없었다.

* * *

12월 13일. 다음날.

오늘은 휴일이다.

“…….”

나는 주점 구석에 나뒹굴던 소파에 누워 있었고, 느릿하게 돌아가는 천장의 선풍기를 멍하니 구경하는 중이었다.

아침에 눈뜨고 지금까지.

대략 5시간 가까이 계속 이랬다.

“…….”

15차에 이르는 던전 붕괴도 벌써 절반 넘게 꺾였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대로, 이미 한국은 멸망직전까지 개박살 났다.

피해 지역은 여전히 서울에 집약돼 있었지만… 사실 뭐, 서울에 우리나라 인구 5분의 1이 사는데, 서울 망하면 한국 망한 것과 다름없다.

“…….”

연이은 던전 붕괴로 사법, 행정 시스템이 기반부터 뿌리 뽑혔고,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줄 헌터협회도 궤멸한지 오래.

그 결과, 던전이 붕괴할 때마다 민간인 학살 속도도 가속되는 중이다.

“…….”

세상은 여느 때처럼 요지경 디스토피아가 돼버렸다.

법이 없어진 세상엔 어김없이 야만이 도래했다. 지금 바깥세상은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원시인들의 전성시대다.

늘 있던 일이라 놀라울 건 없었다.

“…….”

그러면 예정대로 레드스컬도 창단됐을까.

더 궁금한 건 던전교의 동향이다. 애덤 크로스에게서 광대의 힘이 빠져나온 지금, 던전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창단됐을까.

아니지. 애초에 애덤 크로스는… 이 회차에서, 존재하긴 할까?

육사도가 빠져나온 뒤. 놈을 담았던 그릇은 어떻게 되는 걸까.

“…쓰읍.”

모르겠다.

솔직히 엄청나게 알고 싶은 것도 아니고. 슬슬 생각하기도 피곤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슬쩍 돌아누웠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으려는 그 순간.

“저기, 아빠.”

불쑥.

시야 끄트머리에서 새하얀 머리칼이 치고 들어왔다.

눈동자만 슬쩍 돌렸다. 이브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왜.”

메마른 입술을 어렵게 열었다.

심하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흠칫, 이브가 어깨를 떨었다.

“아니. 그게… 혹시 무슨 일 있었어?”

나는 이브를 한 번 흘겨봤고. 이내 눈알을 굴려 주점 내부를 스윽 훑었다.

이제 보니 이브뿐만이 아니다. 수아와 서윤이, 이세라까지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빤히 주시하고 있다.

한 마디도 없이 누워만 있었던 게 문제였나 보다.

‘걱정을 끼쳐 버렸군.’

이브도 어느새 여성진 멤버에 당당히 합류한 건가. 그녀가 여성진 대표로 내 안부를 물어보러 온 듯하다.

나는 누워 있는 채로 고개를 슬슬 저었다.

“딱히 아무 일도 없었어.”

“근데 왜 그렇게 죽상이야?”

“나 원래 죽상이야.”

“그, 그건 맞긴 한데… 그래서, 무슨 일인데?”

“…….”

전에도 한 번 써먹었던 레퍼토리라 그런가.

역시 이브는 속지도 않았다. 그러려니 넘어가주지도 않았다.

“응? 무슨 일인데? 으응?”

깜빡깜빡. 그녀의 커다란 적색 눈동자가 부담스럽게 나를 주시한다.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다분히 느껴졌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나는 결국 버티다 못해 상체를 벌떡 일으켰고. 한 번 더 강조했다.

진짜 아무 일 없었던 게 사실이다. 다만…….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다.”

“생각할 거? 뭔데. 나도 알려줘!”

“그냥 좀…….”

“아이 씨! 그냥 좀 금지라니까! 이제 또 그러면 때릴 거야?!”

“…….”

투닥투닥!

이브가 입을 댓발 내놓고 내 어깨를 두들겨 팼다. 또 그러면 때린다더니, 이미 두들겨 패는 부분이 관전 포인트다.

나는 볼을 잔뜩 부풀린 이브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

“…왜, 왜. 뭐!”

이브도 물러설 생각을 않는다. 한동안 시선이 교차한다.

한껏 요염하고 성숙해진 그녀의 외관이 이목을 사로잡는다. 감탄이 절로 나올 법한, 조각상 같은 백발 적안의 미녀가 눈앞에 있다.

“으음.”

그래서 무심결에 탄성을 흘렸다.

외관은 저렇게나 격변했는데 하는 짓은 전처럼 철부지 같다니. 보고 있자면 약간 인지부조화가 오는 것 같다.

그리고 이브는 퍼뜩, 내 감탄사에 귀신같이 반응했다.

“응? 또 뭐야? 방금 그 으음~은?”

“그냥…….”

“그냥! 좀! 금!! 지!!!”

투닥투닥투닥.

어깨를 때리는 손이 살짝 더 매워졌다.

퇴로를 원천 봉쇄당했다. 나는 결국 한숨과 함께 이실직고했다.

“…많이 예뻐졌다고 생각했다.”

“응? 누가?”

“네가.”

“…어? 나, 나??”

“그래. 너.”

시선은 정면.

서로 간의 얼굴의 거리는, 여전히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깝다.

사르르. 이브의 얼굴이 빠르게 붉어진다. 그녀가 황급히 얼굴을 떼고, 내게서 후다닥 거리를 벌렸다.

“으엥?! 가, 갑자기 뭔 소리래! 아빠! 미, 미쳤어?”

“…물어봐서 대답한 거잖아.”

“그,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지!!”

투닥투닥투닥투닥!

내 어깨를 두들기는 손놀림이 한층 격렬해진다. 흡사 인간 드럼이 된 느낌이다.

다른 건 모르겠고, 지금 이브의 반응은 좀 이해가 안 간다.

“뭘 오바 치냐. 평소엔 네 쪽에서 유혹하더니.”

“유… 유혹이라니! 그, 그건, 그건 당연히 장난이었지!”

역시 지금까지 해오던 건 장난이 맞았나 보다.

아무튼 이 전개는 차라리 잘됐다.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끊을 타이밍이 나왔으니까.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녀에게서 돌아누웠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 크게 신경 쓰지 마.”

“이, 이런 걸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쁜 법이지. 아버지가 딸을 예쁘게 보는 건 당연한 거야.”

“아니, 근데! 아빠는 진짜 내 아빠가 아니니까 문제잖아……!”

한동안 볼멘소리가 투덜투덜 지랄지랄. 하지만 내가 반응을 안 해주자, 점점 수그러든다.

이제야 좀 조용하다. 나는 안심하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저기, 있잖아.”

그러자니 꾸욱. 꾹.

별안간 이브가 내 등을 잡아당겼다.

아무렴 그러시겠지. 2페이즈 시작하는가. 혀를 차며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왜. 또 뭐냐.”

“아빠는 진심으로… 내, 내가 예쁘다고 생각해?”

우물쭈물 물어오는 이브였다.

잔뜩 상기된 얼굴에서 느껴지는 건 약간의 기대감. 그리고 숨기지 못한 기쁨이었다.

“음?”

그녀는 나조차 금방 눈치챌 정도로 흥분한 상태.

갑작스런 상황에 약간 의아했지만, 일단 사실대로 대답해줬다.

“그렇긴 한데. 갑자기 왜.”

“그러면 아빠는… 나를, 좋아하는 거야?”

개뜬금 급발진 질문이 이어진다.

점입가경이군. 이건 또 뭔 질문이야.

나는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정확히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냐.”

“나… 아빠가 진짜로 원하면! 겨, 결혼해줄 수도 있는데?”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여성진들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 듯하다. ‘저게 X발 갑자기 뭔 소리야?’ 싶은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뜬다.

물론 눈깔을 터질 듯이 부릅뜬 건 나도 마찬가지다.

“…진심이냐?”

“지, 지, 진심인데?!”

이브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콰직. 나는 아릿하게 저려오는 골을 부여잡았다.

“그런 말을 하려면. 우선 아빠라고 부르는 것부터 관둬야지 않겠냐.”

“아아! 내가 아빠라고 부르는 게 문제야? 이제부턴 오빠라고 부를까? 응? 오빠앙?”

화색이 되어서 퍼뜩 제안하는 이브.

당연히 빈정댄 거다. 진짜 호칭이 문제라는 소리가 아니지.

됐다, 그래. 이브한테 비아냥이 통하길 바란 내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바꾸지 마. 오빠는 무슨. 징그럽다.”

“징그럽다니! 그, 그건 좀 심하지 않아?!”

“안하던 짓 하지 마라. 그러다 탈난다.”

“치. 말 돌리긴…! 엄마가 부르는 건 잘만 받아들이면서! 너무해! 차별이야!!”

내가 대화를 피하는 것을 이브도 눈치챘다. 그녀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꿍얼거렸다.

그러다 별안간 갸웃,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근데… 으음. 이상하네.”

뭔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어딘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아빠를 오빠라고 부르는 거. 왠지 나 좀… 익숙한 느낌인데.”

벌떡!

상체를 오뚝이 마냥 퍼뜩 일으켰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이브를 쳐다봤다.

유난스런 반응에 이브가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오… 아빠. 왜, 왜 그래?”

“방금 그건 뭔 소리냐. 이브.”

“응? 뭐, 뭐가.”

“익숙하다니.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게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소리냐.”

“으응? 내, 내가 방금 그랬었던가?”

“…….”

“으으음, 근데 그냥 착각 아니야? 어쩌다 그런 느낌이 들었나보지, 뭐!”

어리둥절한 이브를 보자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는다.

나는 다시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냥, 그런 걸로 하자.”

더 이상 골머리 썩힐 의문점 좀 늘리지 마라. 제발.

머리가 너무 아프다. 수아도 이브도 더는 생각하기 싫다.

지금의 나한텐 선택과 집중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브가 못 듣도록 조용히 중얼거렸다.

“빨리… 2주나 지났으면.”

프라키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머릿속을 맴도는 이 빌어먹을 의문들이, 최대한 해소됐으면 좋겠다.

이젠 정말 그 생각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