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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00화 (200/235)

200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22)>

얼마나 많은 필그림들을 학살했을까.

전투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던 어느 순간. 나는 사복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푸스스! 사복검의 형태가 희뿌연 안개와 함께 흩어졌다.

―크르륵?!

―쿠헥!

필그림들이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웅크렸다.

그리고 파다닥! 팔다리를 바쁘게 놀려 허겁지겁 도망간다. 내가 뿜어내는 연기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르르르……!

―그르릉!

필그림들이 나를 둘러싼 채 위협적인 그로울링을 쏟아냈다.

이미 인간의 말조차 잊어버린 모습이다.

“발동 해제.”

그러든 말든. 나는 무형검의 발동 해제 영창을 마쳤다.

중요하니 두 번 말한다. 발동 영창이 아니라, 발동 해제 영창이었다.

“다음은 뭘로 조져줄까.”

토식이는 진작에 무형검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겉으로 보이던 사복검은 무형검이 실체화한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가장 기본적인 무형검의 상태… ‘비가시 사복검’ 모드로 되돌아간 것이다.

‘나도 놀지만은 않았다 이거야.’

나는 휴일마다 무형검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 토식이를 혹사시켰다.

그 성과가 지금의 형국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실체화가 가능해진 건 크지.’

투명한 칼날이란 건 장점이 곧 단점이다.

상대에게 보이지 않아서 기습의 효과를 노릴 수 있지만. 반대로 내게도 보이지 않기에 제대로 공격하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론, 기습효과를 포기하더라도 제대로 패는 게 더 좋다.

‘무형검 발동.’

형태도 없이 흐느적거리는 무형검에 정신을 집중했고. 잠시 눈을 감았다.

칠흑으로 덧씌워지는 시야와 뇌리. 나는 시커먼 도화지 위로 무형검의 이미지를 빠르게 구축해 써내려갔다.

이제 속도는, 가히 일필휘지였다.

―키에에에에!!

―케아아악!!

위협을 느낀 필그림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모여든 안개는 이미 무형검의 새로운 형태를 구축해냈다.

철커덕! 나는 완성된 그것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내가 공부 좀 해왔다. 너희 같은 새끼들을 위해서.”

개틀링건이었다.

정확히는 그 발전형인 현대식 발칸포. 그리고 그것을 개인화기 사이즈로 줄인, 소위 말하는 ‘미니건’이다.

발사되는 구조 알아낸다고 고생 깨나 했다.

“숫자도 딱 좋을 만큼 남았고.”

살아 있는 필그림은 최초의 절반 정도.

이 중화기형 무형검의 마력 소모량. 상대의 스펙. 그리고 간간히 들어오는 발트레드의 견제와, 놈과 벌일 1대1 최종전까지.

모두 계산한 끝에. 바로 지금이 이것을 사용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간다.”

선두에서 달려드는 필그림에게 총신을 향했다. 그리고 방아쇠를 힘껏 쥐었다.

키이이잉! 둥글게 나열된 총신이 맹렬하게 회전하나 싶더니.

“죽어보자.”

투두두두두!!

약실에 한계까지 응축돼있던 마력이 일제히 폭발. 수많은 총신이 대량의 마탄들을 일제히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퍼런 섬광의 불꽃이 연신 시야를 어지럽혔다.

“죽어. 죽어. 죽어…….”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계속해서 온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무지성으로 개틀링건을 사방팔방에 난사해댈 뿐이었다.

그러자 나를 중심으로, 시퍼런 꽃이 피어나듯 총알이 계속 뿜어져 나왔다.

―기에에에엑!!

―크에아아아악!!!

투학! 푸화악!!

총신이 향하는 곳마다 비명과 파육음이 울렸다.

마탄세례가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나면, 어김없이 그곳엔 시뻘건 피와 너덜거리는 필그림들의 살점들만 남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한 발짝 뒤에서 사태를 주시하던 발트레드. 상상 이상으로 막대한 무형검의 위용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탄성을 흘렸다.

휘리릭! 나는 그 발트레드의 대가리에도 총신을 겨누었다.

“돼.”

투두두두!!

총구가 연신 불꽃을 뿜는다. 시퍼런 마탄의 폭우가 발트레드에게 일직선으로 쏟아졌다.

발트레드는 황급히 몸을 굳혔고, 곧장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으음……!

놈은 대검을 곧게 세웠고. 그 넓은 폭 뒤로 자기 몸을 빈틈없이 가렸다.

티티티팅!! 마탄은 칼날을 꿰뚫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불똥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진다.

씨익.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발트레드에게 유효타를 넣을 정도는 아닌가.’

이 정돈 예상했던 바다.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니 실망보단 오히려 만족스럽다. 그게 설령 부정적인 결과라 할지라도 말이다.

휘리릭! 나는 곧장 총구를 발트레드에게서 돌려버렸다.

“거기서 얌전히, 잠깐 구경이나 하라고.”

그리고 투두두두!!

그새 내 코앞까지 닥쳐온 필그림들을 다시 벌집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구에아아악!!

―키야아아아악!!

내 몸이 미친 듯이 회전하고. 총알은 사방으로 흩날린다.

빽빽하게 드글거리던 필그림은, 분당 수천 발에 이르는 압도적인 마탄의 화력에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키리리릭!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총신의 회전이 드디어 멈췄다.

“후우.”

발포가 중지되었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총신을 슬쩍 쳐다봤다. 한계까지 과열된 총신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직후 주변 상황을 하나씩 눈에 담기 시작했다.

“대충 정리는 끝났고.”

피에 젖은 로브조각과 살점 쪼가리, 걸레짝이 된 필그림의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제 살아 있는 놈들의 숫자를 육안으로 셀 수 있을 정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아아… 여, 영도자… 영도자시여……!!

―비, 빛을… 우리에게, 인도의 빛으으을……!!

설상가상으로 발트레드의 버프스킬마저 효력이 다했다.

필그림들이 바닥을 빌빌대며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워록>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났다는 부동의 증거였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필그림은 아웃이겠고.’

광폭화 계열 스킬이 대부분 그렇지.

한계 이상의 파워를 쥐어짜는 대신. 사용한 뒤에는 백래쉬가 오지게 큰 법이다.

앞으로 최소 10분. 광폭화 했던 필그림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한다.

“주변도 정리됐겠다.”

파스스!

무형검의 개틀링건 형태를 허물어뜨렸다.

아스라이 퍼져나가는 잿빛 연기 속에서. 나는 다시금 검의 형상을 재구축했다.

“이제 둘만 남았구나. 던전 마스터.”

심플 이즈 굿의 대명사. 든든한 국밥 중에서도 수육국밥.

새빨갛게 흐늘거리는 붉은 뱀, 사복검이었다.

“이제… 좀 맞자.”

스르릉!

형태까지 완벽하게 구현해낸 사복검을 합쳤고. 발트레드를 향해 겨누었다.

흠칫, 발트레드가 불에 덴 듯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순례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제 발트레드의 몸짓에선 공포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놈은 결국 대검을 훌쩍 들어 올렸고. 그것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한껏 공격태세를 취한 채, 키잉! 복잡하게 빛나는 안광을 내게 고정했다.

―설령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순례는, 계속되리라……!

그것이 발트레드의 유언이었다.

투화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허공의 일점에서 교차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났을 때. 놈과 나는 위치가 뒤바뀌어 있었다.

―…컥.

푸화악!

한 템포 뒤늦게, 놈의 회백색 갑주가 대각선으로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시뻘건 핏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토막 난 상체가 절단면을 타고 미끄러져, 털썩. 바닥에 볼품없이 널브러졌다.

―아… 아아. 여신이여.

발트레드가 잘려나간 팔뚝을 하늘로 뻗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뭔가를 찾아내듯 휘적거렸다.

그는 이번 생 최후의 지지리 궁상을 펼치고 있다.

―그대는, 정녕… 있는가.

치지직. 투구 속 안광이,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희미해진다.

절찬리에 죽어가는 중이다.

“뒤지면 곤란해. 던전 마스터.”

덥석!

그런 발트레드의 상체를, 내가 별안간 집어 들었다.

멱살을 쥐어 채고 내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안광을 빤히 마주봤다.

‘시간이 많지는 않다.’

발트레드의 HP가 빠르게 0에 가까워지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 8차 붕괴의 발트레드 상대로 손대중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목숨이라도 붙어 있게 조절한 게 최선이었다.

나는 발트레드의 토막 난 상체를 내 쪽으로 한껏 가져왔다.

“던전 마스터. 너는 의지의 화신을 기억하냐.”

―화… 신. 여, 여신… 말인가……?

이런. 불찰이다.

생각해 보니 ‘의지의 화신’이라는 호칭은 베르페아노가 붙인 가명이다. 그놈의 진명은 발트레드도 나도, 세상 아무도 알지 못한다.

놈의 존재에 대해 묻는 건 의미가 없다. 빨리 질문을 바꿔야 한다.

“던전 마스터. 네가 살아 왔던… 목적은 뭐냐.”

잠깐 머리가 터져라 고민했고. 튀어나온 질문은 그것이었다.

두루뭉술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것 외엔 물어볼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이놈이 화신을 만난 이유.’

알고 싶은 건 그것이다.

던전 마스터는 모두 실패자들이다. 뭔가를 열심히 도전했다가 실패한 놈들.

그것도 화신이 매력을 느끼고 자기 연극의 ‘주인공’으로 선정할 만큼, 광기에 가까운 의지를 가졌던 사람들인 것이다.

“네가 화신에게 붙잡혔던 이유는, 뭐냐……!”

죽어 가는 발트레드의 어깨를 마구 뒤흔들었다. 그리고 필사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문득, 놈이 희미한 목소리를 냈다.

―모르… 겠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퍼뜩.

온 신경을 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투구 안에서 안광이 꺼져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 나는. 순례를… 계속해야… 한다. 순례…를…… 나는.

푸스스!

끝내 대답은 완성되지 못했다.

발트레드의 온몸은 시커먼 잿더미가 되었고. 내 손아귀 위로 허망하게 흩어져 버렸다.

“…….”

대화는 분명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래서 얻은 건 많지 않다.

그러나 알고 싶던 부분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하던 짓을, 되풀이하는 건가.”

내가 실패했을 때. 던전 마스터로 전락한 뒤의 말로.

그 윤곽이 조금은 선명해졌다.

“기억도 잃고.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맹목적으로… 되풀이하는 거군.”

던전 마스터가 된 나를 떠올려봤다.

이건 예언에 가까운 확신인데, 아마도 그 던전엔 반드시 수아가 있을 거다.

진짜 수아일지 화신이 만들어낸 짝퉁일지. 그것까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 수아를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다.’

수아에 대한 기억도 전부 잃고, 자기가 왜 지키려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맹목적으로 그녀를 지키다, 다른 세계의 사냥꾼에게 사냥 당하고, 화신이 부르면 다시 되살아나서, 또 다시 사냥 당하고.

그것을 영원히. 끊임없이 반복하는 거다.

“너도… 그런 부류였냐?”

화르륵.

문득 사복검에 <멸망의 화염>을 발동시켰고.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일렁이는 불꽃 안에서, 시커먼 까마귀 갑주의 사내가 얼핏 보이는 듯하다.

―아무도. 절대로. 해치지 못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몇 번. 몇 십 번. 몇 백 번을 바쳐서라도……!

<길을 잃은 까마귀>가 광기에 절어 중얼거리던 말들이 머리맡을 맴돈다.

이내 맴돌다 못해, 뒤통수를 연신 후려쳤다.

“허.”

한참을 무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어째 너무 잘 떠오른다 싶더라니.’

나는 상상력이 빈약한 편이다.

그런 내가 왜 이리 쉽게 내 말로를 추측하고, 연상했나 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모범답안이 육사도 중에 있었던 것이다.

“나도… 그렇게 되는구만.”

선홍색 불꽃을 휘두르던 시커먼 까마귀.

던전 마스터가 된 나는 분명… 그놈을 닮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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