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93화 (193/235)
  • 193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15)>

    나는 토식이에게 사정을 대강 설명했다.

    토식이는 꾸벅꾸벅 조는 와중에 내 설명을 들었다. 다 들은 뒤엔 찢어진 귀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튼 요약하면. 이 새끼가 육사도인지 확인해보면 된다, 이거 아냐?”

    “그거 맞지.”

    “그럼 그거만 말하라고. 피곤해 뒤지겠구만, 무슨 서론이 X발…….”

    토식이가 투덜대며 아장아장 걸어간다.

    이내 처척. 그가 오경태의 앞에 당당하게 섰다. 오경태는 바짝 쫄아 있다가, 토식이가 코앞까지 다가오고서야 퍼뜩 반응했다.

    “으헛!”

    자지러지는 신음.

    그리고 파바박! 황급히 뒤로 물러선다.

    “얼씨구.”

    토식이가 유난스런 리액션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내 그가 내 쪽을 흘깃 쳐다봤다. 그리고 턱짓으로 오경태를 가리켰다.

    “저건 안 묶어도 되냐?”

    “…왜. 묶어줄까.”

    “확인 작업 하는 동안 나한테 꼬장 부리는 거 아냐? 괜히 얻어터질까봐 좀 무서운데.”

    “하긴.”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파지직! 빠져나온 손에는 눈처럼 창백한 사슬이 들려 있었다.

    “으어?! 무, 묶다니… 저, 저요? 저 말하는 거였어요, 지금?!”

    오경태가 뒤늦게 자기 면상을 가리키며 연신 물었다.

    이거 굳이 대답해줘야 할까. 솔직히 문답에 큰 의미는 못 느끼겠다.

    “뭐, 그렇게 됐다.”

    대답 대신 아이템을 발동했다.

    촤르르륵! 속박 아이템, <바실라스의 안개>가 오경태를 향해 날아갔다. 살아 있는 하얀 뱀처럼 뻗어나간 사슬이 놈의 사지를 둘둘 말았다.

    “끄학! 뭐, 뭐야! 이거!!”

    털퍼덕!

    바닥에 널브러진 오경태가 온몸을 버둥거렸다. 사슬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는 듯하지만, 사슬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무렴 B급 헌터인 박현우도 못 풀었다. 고작 D급따리 오경태가 풀 리가…….

    “디, 디, 디, 디스펠!!”

    파아앙!

    그런 내 생각을 배신하듯. 놈의 몸에서 찬란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빛무리는 곧장 바실라스의 안개에 스며들었고. 오경태를 묶고 있던 힘이 서서히 약해지더니, 이내 맥없이 속박이 풀려버렸다.

    “…이걸 푸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고. 나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체 어떻게 사슬을 풀어냈는가. 그 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방금 건 디스펠 스킬이었어.’

    디스펠 스킬은 나름 B급의 고급스킬이다.

    물론 <바실라스의 안개>가 아이템 스킬이기에, 오경태의 마력이 나보다 높을 필요까진 없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모되는 마력이 D급 헌터가 감당할 레벨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뭔가 다른 마력원이 있다는 소리겠지.

    추론한 끝에 스슥, 오경태의 가슴팍에 시선이 향했다.

    “거기구나.”

    오경태의 상의 앞섶 쪽. 빛무리는 분명 그곳에서 흘러나왔다.

    파팍! 나는 오경태의 멱살을 거칠게 쥐어 챘다.

    “끼야악!!”

    오경태는 17세 소녀새끼 같은 비명을 질렀다.

    왜 이러냐. 징그럽게.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놈의 옷깃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오경태가 격하게 저항한다. 내 손길을 피해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런데 곁들인 대사는 좀 가관이다.

    “90년대 유괴 대처 매뉴얼이냐.”

    이 정도면 이 새끼가 드립을 치는 건지 진심인 건지 헷갈린다.

    물론 그 순간에도 내 손은 오경태에게 다가가고 있다.

    “가슴. 가슴을 보자.”

    “으아악! 왜, 왜 이러십니까, 형님! 하지 마세요! 제, 제가 뭔 잘못을 했다고 이러십니까아!!”

    “저항하지 마라. 난폭한 수단까진 쓰고 싶지 않아.”

    “안 돼. 더, 더럽혀진다! 으아아악!!”

    “뭔…….”

    이쯤 되면 저 새끼, 사실 즐기고 있는 거 아니냐?

    의심이야 어쨌든 나는 놈의 상의 안쪽을 마구 헤집었고. 이내 목에 걸려있던 펜던트를 거칠게 쥐어뜯었다.

    파삭! 얇은 쇠줄이 내 아귀힘을 못 이기고 바스러졌다.

    “이거군.”

    펜던트의 중앙에 시퍼런 보석이 박혀 있다.

    마력석이다. 지금도 디스펠 스킬 특유의 마력 간섭파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몰라보기가 힘들 수준이다.

    삐빅.

    내가 빤히 주시하자 알아서 패널이 튀어나왔다.

    [아이템 정보]

    [명칭: 자애의 현현 (A급)]

    [타입: 장신구/보조]

    [효과: 해주 스킬 <디스펠>을 쾌속 발동한다.]

    [효력 범위: 본인 신체에 한함.]

    [상세: 제8917던전 레귤러 몬스터 ‘아이언크라드’의 사냥 보상. 대폭 줄어든 마력으로, 사용자가 익히지 않았어도 해주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아이언크라드를 옭아매는 기적의 현현으로, 재사용 대기시간은 10분이다.]

    “A급…….”

    나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디스펠 스킬을 D급헌터 따위가 쓸 수 있게 해주는 개사기템. 대강 짐작은 했다만, 오경태가 찬 펜던트는 무려 A급의 던전 아티팩트였다.

    ‘A급이면, 최소가 50억부터 시작할 텐데.’

    직접 많이 팔아봐서 안다.

    던전 아이템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비싸진다. B급 장비만 해도 수억을 호가하는데, A급은 말할 것도 없다.

    수 배는 기본이고 수십 배도 우습게 웃돈다.

    “돈이 좋긴 좋아. 응?”

    나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고. 이내 피식 웃었다.

    분명 전생에도 오경태를 보고 이 말을 똑같이 중얼거렸지. 그 때의 기억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그것도 벌써 한참 전이네.’

    자살 런 덕분에 무려 수십 회차 전. 단순 일수 계산으론 몇 개월 이상의 기간이다.

    그 새 약간 어렴풋해진 기억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경태야.”

    디스펠의 비밀도 풀어냈겠다. 나는 나름 젠틀하게 놈을 불렀다.

    오경태는 한층 경계심 떡상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네, 네. 왜… 그러십니까.”

    “이 사슬은 쿨타임이 꽤 길다. 재사용에 10분은 걸려.”

    “그렇습니까……?”

    “그래. 그래서 앞으로 10분은 못 쓴단 말이지.”

    “그, 그렇군요.”

    오경태는 그 말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일단 최소한 10분 동안은 <바실라스의 안개>에 속박될 일이 없다는 거니까.

    하지만 이내 퍼뜩, 어깨를 굳히며 나를 쳐다봤다.

    “그, 그런데. 그걸 왜 갑자기 저한테……?”

    “네가 선택해봐라.”

    “뭐, 뭘요?”

    “맞고 가만히 있을래.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을래.”

    “…….”

    오경태가 합죽이가 되었다.

    안색이 파리해지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고. 내가 순도 100퍼센트 진심인 것을 깨달았는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그, 그냥. 가만히 있겠습니다.”

    이내 고개를 푹 떨구며 중얼거린다.

    현명한 선택이다. 나는 옆에 대기하던 토식이에게 곧장 눈짓했다.

    “그러시단다.”

    “쓰읍. 급조한 구두계약은 믿을 게 못 되는데.”

    토식이는 연신 혀를 찼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천천히 오경태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오경태는 전에 없이 울상이 되었다.

    “저… 혀, 혀, 형님?”

    “왜.”

    “뭐, 뭘 하시려고… 저, 저 괴물… 아, 아니. 애완생물이요. 이, 이제부터 저한테, 뭘 하는… 겁니까?”

    “확인 작업.”

    “화, 확인……?”

    나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해줬고. 오경태는 홀린 듯이 그 말을 되뇌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좀 뜨뜻할 거다.”

    “뜨뜻……?”

    기습적이었다.

    천천히 다가가던 토식이가 어느 순간 펄쩍 뛰었다. 한 순간에 오경태의 코앞까지 솟아오른 토식이는, 담배 끝을 놈의 미간에 맞붙였다.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다.

    “끄앗?!”

    오경태가 양손을 허우적거렸고. 이내 철푸덕! 그 자리에 나자빠졌다.

    어지간히 놀란 건지,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숨도 상당히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헉, 허억… 바, 방금. 뭐, 뭐, 뭔 일이?!”

    오경태가 이마를 연신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마에는 선명하게 불도장이 찍혀 있었다. 담배로 슬쩍 지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든, 새빨갛고 눈부신 빛깔이었다.

    “오?”

    그리고 그것을 본 토식이가 탄성을 흘렸다.

    놈은 놀라고 있었다. 의외라는 표정이 만면에 가득했다.

    “야… 야 이, 개, 개새끼야!!”

    그리고 우당탕!

    단숨에 달려온 오경태가 토식이를 덥석 붙잡았다.

    “이 X발놈아! 너! 너 X발! 방금 나한테 뭔 짓한 거야!!”

    꾸드득!

    오경태가 양손으로 토식이의 작은 몸을 힘껏 붙들었다.

    이내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린 뒤, 전후좌우 사방팔방 미친 듯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가! 너도 날 물로 보냐? 그런 거지!!”

    “으아악! 이, 이 새끼 왜 이래! 갑자기! 뒤지고 싶어?!”

    “X발 나도 이제 몰라! 죽여! 죽여 봐 X발! 이제 이판사판이야! 너 죽고 나 뒤져봐?! 앙?!”

    “오, 옥좌야! 살려, 살려줘!!”

    결국 토식이는 울먹이며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감스럽게도 난 그것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내 신경은 온갖 지랄을 다 피우고 있는 오경태에게 가있었다.

    나는 한참 후,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거부 반응. 없군.”

    박현우 때와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오경태는 멀쩡하다. 박현우가 보여줬던 ‘거부 반응’이, 그에게선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이걸 다시 말하면.

    “진짜… 육사도라고?”

    이게 왜 진짜냐.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 현실이 됐다. 그런 뜻이 아닌가.

    ‘아니. 잠깐. 아직이야.’

    진정해야 한다.

    일단 좀 진정해봐라. 한정용.

    짜아악!

    나는 흥분으로 달아오르는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방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는 찰진 소리에, 오경태의 시선도 퍼뜩 내 쪽으로 향했다.

    “후우.”

    고개를 세차게 휘젓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내 기행으로 발광이 멈춰버린 오경태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얼얼한 볼을 쓰다듬었고.

    “토식아.”

    최종 판결을 내려줄 판사님을 불렀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그리고 육사도는 육사도에게.

    “어… 그, 그래! 왜!”

    토식이는 오경태의 아귀심이 약해진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놈이 내 지척까지 후다닥 달려왔고, 내 다리 뒤로 숨어 오경태를 한껏 경계한다.

    퍽 귀여운 모습이지만, 나는 지금 일말의 웃음도 지어줄 여유가 없다.

    “저 놈. 육사도냐.”

    척. 오경태의 면전을 삿대질하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토식이의 대답은.

    “어. 맞아. 확실해!”

    그냥 확인 정도가 아니고. ‘확실하다’라는 낙인까지 찍어줬다.

    그리고 직후, 토식이의 입가에 위태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옥좌야 준비해라. 곧 기어 나올 거다.”

    “나온다니. 뭐가.”

    “뭐겠냐. 육사도 당첨이면, 당연히 육사도가 오겠지!”

    “……!!”

    그 말에 나는 새삼 오경태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오경태.”

    정신이 없어서 깨닫는 것이 늦었다. 이변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오경태는 갑자기, 지나치게 조용해져 있었다.

    “괜찮, 냐.”

    고개를 푹 수그린 오경태를 불렀다. 그리고 안부를 슬쩍 물었다.

    그러자 스르륵, 놈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래. 덕분에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오경태… 아니.

    절대 오경태가 아닌 무언가.

    우중충하고 웅혼한 목소리가 오경태 대신 대답을 해왔다.

    ―재회는 오랜만이군. 토끼와 옥좌.

    “……!”

    ―아니지. 왜 이리 늦었냐고 화를 내야 하는 건가? 하핫.

    옥좌. 그 익숙한 호칭이 나온 순간 확정되었다.

    놈의 정체는 <목 잘린 붉은 용>.

    마지막 육사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