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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92화 (192/235)

192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14)>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꾸드드득!

하늘이 용트림하며 거대한 균열이 천천히 메워지기 시작했다. 찢어진 옷을 억지로 기우는 듯한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1033번째 4차 게이트 붕괴가 성공적으로 저지된 것이다.

[던전 마스터 ‘아공의 반야’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아이템 ‘반야의 식신’을 획득하셨습니다.]

사냥보상은 스테레오 타입을 획득했다.

반야가 2페이즈 때 사용하는 그 식신이었다. 내가 이미 하나 가지고 있고, 특수상황 한정으로 꽤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기도 하다.

“무난하네.”

내 짧은 감상은 그것이었다.

어차피 반야에게 이 이상 좋은 보상은 딱히 기대할 수 없다. 반야의 대검인 흑야검은 이미 가지고 있고, 손에서 불꽃을 발사하는 ‘백염천’이라는 스킬도 보유중이다.

현 시점에선 둘 다 쓸 일이 전혀 없다.

‘그러면 이제…….’

파스스! 우선 무형검의 발동부터 해제했다.

칼날을 둘러싸고 연기가 휘몰아쳤고. 꿈틀거리며 모여들어 토식이의 형상을 이룬다.

“아이고. 뒤지겠다. 토 나오네 이거.”

토식이는 죽상을 한 채 앓는 소리부터 냈다. 안색이 파리한 것이 딱 봐도 힘들어 보이긴 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를 가만히 놔두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걸 물어봐야지.’

토식이는 광대가 몸 담았던 세계, ‘피안계’를 알고 있는가.

나는 지금 그것이 궁금했다.

“토식아.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아아. 나중에, 나중에. 나 진짜 뒤질 거 같아. 졸려 뒤져.”

“아니. 좀 급한데.”

“내가 더 급해. 나 잠 좀 자자 새꺄, 잠 좀.”

“…….”

“뭔 잠도 못 자게 하냐? 이 마귀 같은 옥좌 새끼야. 이거 학대야. 착취라고.”

“음.”

이렇게까지 완고하니 어떻게 저지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인벤토리를 열었고. 토식이는 어기적거리며 찢어진 공간의 틈바구니로 몸을 욱여넣었다.

이젠 인벤토리를 제집처럼 여기는 모습이다.

“…나중에 할까.”

결국 나는 한숨과 함께 단념했다.

인벤토리를 닫기 전에 아이템 <반야의 식신>을 집어넣었고, 토식이의 인사 겸 축객령을 마지막으로 인벤토리를 닫았다.

용건은 끝났다. 이제 베이스로 귀환할 일만 남았다.

“…….”

유일하게 미련이 좀 있다면.

놈에게 이것을 물어보지 못한 점이다.

‘이 새끼는… 뭘 실패했지?’

오랜만에 그나마 사람 말 지껄이는 던전 마스터였다.

혹시나 그것을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지만 막연한 기대를 좀 품고 있었다.

“그것도… 다음 기회에 해야겠네.”

깊은 한숨 한 번.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쉬움을 곱게 접었다.

어차피 앞으로 기회는 많다. 이제 고작 4차 붕괴를 막았을 뿐이니까.

‘남은 건 10번.’

최종 붕괴의 그놈.

그 정체불명의 칠흑색 무저갱을 빼면, 앞으로 격파할 던전 마스터는 딱 10명이 남았다.

‘10연차인데. 설마.’

앞으로 최소한 한 번은 말 통하는 던전 마스터가 나오겠지. 지성을 가진 인간형 던전 마스터가 적은 것도 아니니까.

전체적으로, 마음을 좀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가까운 것부터. 하나씩 천천히.”

달리 말하면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지금은 내 영원회귀에 있어서 전에 없이 중요한 최종국면. 자고로 중요한 국면일수록 신중하고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다른 건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내 시선은 한참 전부터, 기절한 채 널브러져 있는 오경태에게 가있었다.

* * *

꽤 오랜만에 내 집에 돌아왔다.

내가 반복해온 루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데. 집 떠난지 엄청 오래된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진다.

최근 루프 동안 꽤 많은 사건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흐음.”

삐거덕.

나는 의자를 하나 빼서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그리고 침대 위와 방바닥. 양쪽에 널브러져 있는 두 생물을 번갈아 주시했다.

“누가 먼저 깨려나.”

침대 위에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토식이. 그리고 방바닥엔 납치해 온 오경태가 대자로 뻗어 있다.

오경태는 슬립 스킬로 내가 재워놓은 상태다.

‘토식이 쪽이 먼저면 좋겠는데.’

까놓고 오경태는 안 깨어나는 게 형편이 좋다.

전생에 몇 번이나 만났던 놈이라 잘 안다. 이 놈이 위기상황에 닥치면 얼마나 지랄 맞게 징징대는지 말이다.

깨어나 봐야 요절복통 시트콤 찍는 그림 밖에 안 나온다.

“꼴에 D급 헌터니까… 수아보단 마력내성이 좋을 건데.”

그래서 애석하게도 오경태 쪽이 빨리 깨어날 확률은 높다.

그렇다고 슬립 스킬을 연속으로 사용하는 건 마력중독 위험이 있다. 두 번까진 웬만하면 괜찮겠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무시했다가 사달이 나면 곤란하다.

‘실수해서 실패하면. 처음부터 또 다시야.’

내가 뒤지는 건 딱히 상관없다.

하지만 이 X같은 한 달을 또 반복해야 한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싫은 거다.

그러니 아니꼽더라도, 오경태는 금이야 옥이야 소중히 다뤄주는 수밖에 없다.

“으, 으으윽……!”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먼저 괴로운 신음을 흘리는 건 오경태였다.

나는 방바닥 뚫리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그러는 와중에도 오경태는 온몸을 꿈틀꿈틀 경련했고. 이내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놈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 여, 여긴……?”

“깨어났냐.”

“으어어! 씨, X발! 깜짝이야!!”

나는 불쑥 대가리를 들이밀었고. 오경태는 소스라치게 놀라 사지를 펄떡거렸다.

파바박! 그가 바닥을 필사적으로 기어 내게서 멀어졌다.

“뭐, 뭐야. 뭐, 뭔데요?! 누구야 당신! 여, 여기 어딘데?!”

오경태는 심장을 부여잡고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나를 향해 의혹과 경계에 찬 시선을 줄기차게 쏘아보냈다.

차라리 익숙한 반응이라 좋다. 나는 그 끈덕진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질문하려면 하나씩 해라. 대답해주지.”

“뭐, 뭔 개소리야! 당신 뭐냐고! 여기 어디냐고 묻잖아!”

“여긴 우리 집이고. 난 한정용이라고 한다.”

“허, 허어……?!”

“네 소개는 됐어. 이미 알만큼은 아니까.”

내가 연신 태연하게 대꾸해서 그런가, 오경태의 표정이 해괴하게 뒤틀려갔다.

공포와 경계가 살짝 옅어지고, 그 대신 의혹과 의문이 짙어진다.

“다, 다, 당신. 허, 헌터… 예요?”

“헌터 맞아. 너랑 똑같은 D급 헌터지.”

“나, 나를, 왜 납치한 겁니까!”

“왜냐면…….”

“하. 보, 보나마나 뻔하지. 돈이겠죠?!”

“…음?”

내가 대답해주기도 전에 오경태가 선수를 쳤다.

놈의 입가에 알 만하다는 듯이 쓴웃음이 걸려 있다.

“어, 어디서, 내가 오창선 회장 아들인 거 주워들은 거잖아. 안 그래요?”

“어… 아니.”

“시치미 뗄 거 없수다! 이, 이미 비슷한 경험 많이 해봤으니까!”

오경태는 자기 뇌피셜을 이미 반쯤 진실로 단정 짓고 있었다. 나는 이미 몸값을 노리고 놈을 납치한 인질범으로 확정된 듯하다.

다른 것보다도, 일단 이 점이 좀 놀라웠다.

‘이 새끼. 오창선 아들이었냐?’

전생에 오경태의 소지품을 뒤진 적이 있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초고가의 B급 장비를 주렁주렁 걸치고 있던 건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부잣집 자제일 것까진 예상했는데…….

‘던전 운송업 국내 1위. 창선그룹 회장 아들이었냐.’

그 정체가 상상 이상으로 거물이었다.

본인이 술술 불었으니 거짓말은 아닐 것 같은데. 진짜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런 대단한 새끼가. 왜 붕괴현장에 징집돼 있었는데.’

헌터 라이센스야 사업 후계 때문에 명목상으로 땄다고 치자.

하지만 굴지의 대기업 창선그룹이다. 아들내미 강제징집 피할 방법이야 차고 넘치게 많았을 터.

왜 오창선은 아들을 뻔히 보이는 사지로 내몰았을까.

“흐. 소, 소용없어요. 당신! 나 갖고 인질극 해봐야, 다 헛수고라고요!!”

때마침 오경태가 울먹거리며 그 이유를 밝혀주기 시작했다.

놈은 반쯤 하소연하듯이, 내 앞에 넋두리를 주절주절 늘어놨다.

“나, 나는 아버지가 내놓은 자식이야. 쓸모없다고, 사람 구실도 못하는 쓰레기라고… 진작부터 집안에서 반쯤 내쳐진 놈이라고요.”

“…오호.”

“전에도 그랬어. 전에 잡혔을 때도, 아버지는 날 안 구해줬다니까. 그런데 이번이라고… 뭐 다를 것 같아요?”

“그렇군. 대충 사정은 알겠다.”

가려운 곳 시원하게 긁어준 오경태에게 약간 호감이 생긴다. 새끼가 생존본능과 촉 하나는 좋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렇게 말해도 괜찮겠냐. 오경태.”

“아? 그게 무, 무슨……?”

“납치범한테 인질가치가 없다고 실토하면 되겠냐고. 살고 싶지가 않은 거냐?”

“어. 아… 아아아!!”

오경태는 그제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탄식했다.

아차차 싶은 표정이다. 어지간히 알기 쉬운 반응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김칫국도 좀 적당히 빨아야지.”

나는 퍼뜩 손사래를 쳤다.

그새 공포에 하얗게 질린 오경태를 향해 성큼, 한 발짝 다가갔다.

“내가 널 데려온 건 몸값이나 받자고 그런 게 아니다. 오경태.”

“어… 예? 그, 그럼 왜…….”

“네 몸에 확인할 게 좀 있어서.”

“화, 확인……?!”

“그래. 확인.”

나는 오경태의 몸을 위아래로 쓸어봤다.

그런데 그 행동이 대체 어떻게 전해진 건지. 오경태가 자기 양팔을 쓰다듬으며 허겁지겁 내게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으아악! 오, 오지 마! 나, 난 그런 취향 없어요!”

“…말을 말자. X발.”

뭔가 이렇게 될 것 같긴 했다.

전생에도 이런 느낌이었지. 저 새낀 심각한 상황을 귀신같이 시트콤 분위기로 바꿔버리는 기묘한 재주가 있었다.

더 대화해봐야 나만 손해일 것 같으니, 그냥 이쯤만 하기로 했다.

“그… 저. 혀, 형님.”

그렇게 얼마나 침묵을 지켰을까.

오경태가 오히려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납치된 인질에게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형님’이라는 호칭과 함께.

좀 어이가 없어서 반응하는데 좀 걸렸다.

“왜.”

“그… 다, 다른 게, 아니라요.”

“아니라.”

“그러면, 저, 저는. 살려주시는… 겁니까?”

“…….”

그렇군. 하긴, 잡혀온 인질 입장에서 당연히 궁금할 테다.

나는 반쯤 뜬 눈으로 오경태를 빤히 쳐다봤다.

“으, 으윽.”

정면에서 시선을 마주하자 흠칫 몸을 움츠리는 오경태.

놈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다.

“왜, 왜, 왜 그리 쳐다보십니까……?!”

시선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한다. 사냥 당하는 사냥감처럼 처량한 모습.

또한 사냥 당하는 사냥감처럼, 살고자 하는 욕구로 점철된 모습이다.

“…그건. 나도 모른다.”

한동안 홀린 듯이 오경태를 쳐다봤고. 한참 후에 중얼거렸다.

오경태는 내 대답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아니. 예? 모른다니요?”

“확인 작업의 결과에 따라 달라. 넌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그, 그게 무슨……!”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네가 육사도의 모체가 아니길 빌어.

그렇게 말하려다 관뒀다. 내 입장에선 제발 이놈이 육사도의 모체였으면 좋겠으니까. 그 외의 가능성은 입에 담고 싶지 않다.

의미도 재미도 없는 인간 스캔기는… 슬슬 졸업하고 싶으니까.

“끄으응, 개운하다. 후! 좀 살겠네.”

때 마침 침대의 이불이 뒤척거렸고. 비몽사몽 한 토식이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반가운 나머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식이 어서 오고.”

나는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린 토식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오경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거. 뭐, 뭐야. 더, 더, 던전 생물?!”

오경태는 토식이를 눈에 담고 전에 없이 화들짝 놀랐다. 그의 터질 듯이 부릅뜬 시선이 나와 토식이를 번갈아 쳐다본다.

나는 그 강렬한 의문의 시선을 싸그리 무시했다.

“그러면, 이제…….”

패 한 번 까보자.

대망의 확인 작업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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