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
복제품들이 순식간에 내게 접근해왔다.
사방팔방에서 날붙이가 조여온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내 면상이 가득하다.
“몇 번을 봐도, 아… 이건 좀.”
내가 뭐 잘생긴 면상도 아니고. 시야 한 가득 바글거리니 좀 많이 역겹다.
그래도 잘생기지 않아서 한 가지 장점은 있었다.
‘죽이는 데 망설일 일은 없네.’
때 마침 쉬리릭! 전후좌우에서 동시에 쌍단검의 칼날이 쏟아져 온다.
반야의 식신은 혈천갑까지 복사해주진 못했다. 내 고유능력이 아니라 이브에게 빌려온 힘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귀찮은 메커니즘이 여기선 도움이 되는군.’
푸확! 우드드득!
시커먼 먹물들이 핏줄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졌고, 단검을 쥔 내 팔들이 무참히 뜯겨나갔다.
‘내 팔’이라 표현하니 좀 헷갈리나. 정확히는 내 열화 복제품들의 팔뚝이다.
―크읏!
―으우욱……!
끊임없이 전후좌우로 사복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푸득, 우드득! 내 분신들은 여러 갈래로 찢겨나갔다.
임계 이상의 대미지를 받은 인형들은 온몸에서 검은 먹물을 쏟아냈고. 이내 원래의 종이쪼가리 형상으로 되돌아갔다.
―…….
―…….
동료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인형들은 입 한 번 뻥긋하지 않는다.
수백 명의 내가 입술을 꽉 닫은 채 무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한다. 그 시선이 향하는 끝자락에는 어김없이 내가 있었다.
“참… 복잡한 기분이란 말이야.”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상체를 깊이 웅크렸다.
지금껏 열리지 않았던 놈들의 주둥이가, 일제히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라이트닝…….
―…헬릭스.
파지지직!
분신들이 동시에 영창했고, 날카로운 섬광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라이트닝 헬릭스는 기본 대미지 자체가 워낙 강력하다. 아무리 열화 스킬이라지만 저건 좀 위험할 수 있다.
[스킬 발동: 안티 매직 리플렉터]
콰자자작!!
수백 발의 번개가 동시에 방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상상 이상으로 순간 출력이 강력했다. 게다가 놈들이 양손으로 연격을 퍼붓고 있어서, 벼락의 폭우는 쉽사리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이건… 곧 와해된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즉각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나는 방벽을 유지한 채 전방에 손을 뻗었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번개에는, 더 강한 번개다.
“트리플.”
파지지직!
여섯 줄기의 나선 번개가 손아귀를 중심으로 휘몰아친다.
준비가 완료된 직후, 나는 방어막을 해제함과 동시에 벼락 줄기를 내리꽂았다.
‘1차로 정리하고.’
콰콰콰콰!!
발밑에서 뻗어나간 번개가 모든 것을 지져나갔다.
공기도, 맞닿는 번개줄기도, 그 끝에 우글거리던 내 복제품들도. 모두 하얗게 지워졌다.
―그욱……!
―커헉!
한 차례 강렬한 섬광이 휩쓸고 간 뒤. 단말마를 내지르는 내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건 역시 기분 나쁘다. 몇 번을 겪어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당연히 그렇다고 공격을 멈추진 않았지만.
[스킬 발동: 스파이럴 블러드]
방금의 스킬샷으로 일대의 복제품들이 대강 정리되었다. 준비 시간이 약간 더 길지만, 약간 더 강력한 스킬로 2차 정리에 들어가기로 했다.
콰아앙! 혈액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주먹을 힘차게 내질렀다.
―끄윽……!
―……!!
콰콰콰콰!
시뻘건 혈액의 폭풍이 방사되어 전방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다. 거기에 휘말린 분신들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삽시간에 종이쪼가리로 되돌아갔다.
푸스스스! 붉은 혈액과 시커먼 먹물이 뒤섞여 폭우처럼 쏟아진다.
―그 강함엔 한계가 보이지 않는군.
서늘한 목소리에 곧장 허공을 박찼다.
푸화악! 내가 있던 자리로 흑백의 지옥염이 쏟아져 내렸다. 조금만 늦었다면 내 상체를 덮쳤을 궤도였다.
―빌려온 힘으론, 고작 이 정도인가.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해 온 반야가 둥둥 떠있다.
놈의 왼손엔 흑과 백이 뒤섞인 화염이 이글거렸고. 오른손은 그 화염을 정제해 벼려낸 듯한 거대한 대검으로 변화해 있었다.
‘한 따까리 하시겠다?’
먼발치에서 불구경하던 반야가 전투에 합류했다.
본격적인 2페이즈는 사실상 지금부터다.
“…와 봐라.”
스르릉.
인벤토리를 열어 왼손에 청백색 단검을 쥐었다.
짧은 사이 꽤 많이 줄였다지만, 아직 나를 둘러싼 분신은 적게 잡아도 300마리는 돼 보인다.
여전히 수적으로 한참 불리한 싸움. 반격수단은 하나라도 많으면 좋다.
―그 힘의 한계. 몸소 시험해보겠다.
스릉!
반야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고. 놈은 흑백의 대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쉬쉬쉭! 내 분신들이 다시 한번,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라이트닝…….
―…헬릭스.
재차 흐트러지는 시퍼런 섬광의 꽃.
하얗게 명멸하는 시야 속에서, 나는 흑백으로 일렁거리는 대검의 칼날을 포착해냈다.
대검은 내 대가리를 쪼갤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판단을.’
조여 오는 수백 발의 공격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각각의 궤도와 타이밍을 계산했다. 본능에 가까운 속도로 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그대로 행했다.
[스킬 발동: 안티 매직 리플렉터]
기본적인 반격의 골조는 직전과 비슷했다.
콰자자작! 우선 가장 먼저 내게 도달하는 전격을 배리어로 차단. 방어막이 대미지를 흡수해주는 찰나로 캐스팅 시간을 번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방어막이 와해되는 순간. 준비해 놓은 전격을 사방으로 방출한다.
세 줄기로 휘몰아치는 전격이 사방을 휩쓴다.
‘여기까진 똑같고.’
전격의 상쇄까진 똑같다. 지금부터가 달라져야 한다.
이번엔 난입해 온 방해꾼이 하나 있으니까.
“어딜.”
채애앵!
나는 장검 형태의 사복검을 휘둘렀고. 흑백의 대검이 그 앞으로 쇄도해왔다.
날선 칼날들이 맞붙으며 섬뜩한 검광이 번득였다.
―감탄스럽군.
한껏 가까워진 반야의 신형. 놈의 흑백투구 안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키리리릭! 나와 반야는 거의 동시에 검을 물렸다.
―허나 그 한량없는 힘도, 무한하지는 않을 터다.
반야가 왼손을 들어 올려 나를 가리켰다.
푸화악! 손아귀에 맺혀 이글거리던 흑백의 화염이 나를 향해 쏟아져왔다.
―식신의 힘은 미약하나. 무한하다.
투두두두!
일부 분신들이 허공을 박차고 접근해왔다. 놈들의 양손에 들린 적색과 청색의 단검이 내 살점을 탐하려 달려들었다.
그런 돌격조의 뒤로, 일부는 재차 번개폭격을 준비하고 있다.
“꼴에.”
근딜과 원딜. 분신들이 본격적으로 병과를 나눴다.
지성이 심히 떨어지는 종이인형들에게 전략이 추가되었다. 반야가 직접 식신을 조종한 결과물이다.
귀여운 발악에 코웃음을 치는 한편.
“개노잼. 놀아라.”
그사이 한계까지 끌어올린 마력을 일거에 방출시켰다.
쿠르륵! 스킬이 발동되며 시계(視界)가 격변했다.
[스킬 발동: 커튼콜]
매서운 공격들이 내 몸을 찢어발기기 직전, 나는 허공의 일점을 붙들고 비틀 듯이 잡아당겼다.
파지직! 나는 찢어낸 허공의 균열 속으로 성큼 전진했다.
“후우.”
츠츠츠츠!
사방에서 압박해오던 공격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 대신 활활 불타는 세계의 풍경.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감각을 마구 할퀸다.
“온 김에 좀 쉬다 가자.”
잠깐 몸의 긴장을 풀고 기지개를 쭉 폈다.
스킬이 발동된 순간부터 3분간은 이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이 찬스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지 않으면 손해지.
―꺄아아아악!!
―으아악! 크아아아앗!!!
비명소리도 계속 듣다보니 제법 버틸 만하다.
어차피 수아나 내 목소리보다 익숙해진 게 비명소리다. 루프 후반의 일상적인 풍경이 약간 심해진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불도 딱히 뜨거운 것도 아니고.’
눈앞에서 타오르는 맹렬한 불꽃은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다. 뭘 태우긴커녕 만져지거나 열기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유지하는데 마력이 지나치게 빨리는 것만 빼면, 이렇게 좋은 피난처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생각할수록 좀 궁금해지긴 한다.
대체 이 공간, 이 세계. 피안계의 정체는 뭘까.
광대를 위해 화신이 준비해준 공간인가? 그렇다면 여기는 던전의 일종으로 봐야 하나?
‘그리고 내가 여기 있으면. 바깥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느 쪽도 잘 모르겠다.
풀릴 길이 없는 의문이니 떠올려도 의미야 없다. 그래도 의문이 생기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토식아. 나와라.”
슬슬 숨은 돌릴 만큼 돌렸다. 나는 즉각 인벤토리를 열었다.
파지직! 내 손아귀에 뒷덜미를 붙잡힌 토식이가 빤히 쳐다본다. 자다 일어났는지 졸음과 짜증이 얼굴에 잔뜩 끼어 있다.
“아 왜. 뭔데. 왜 자꾸 부르냐.”
토식이는 이지러진 이 세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놈의 졸린 눈이 주변을 슥 훑었으니 못 본 것은 아니다. 확실히 인지했는데 이렇다 할 리액션이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을… 원래 알고 있었나?’
아니면 모르지만 딱히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하자. 칼 내놔.”
“뭐 인마? 그새 또?”
토식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내 흉터가 가득한 놈의 표정이 한층 더 험상궂게 찌그러졌다.
“야. 어차피 지금 네 수준에 4차 붕괴쯤은 간단하지 않냐?”
“그건 맞지.”
“근데 왜 굳이 나까지 쓰는데! 너도 날 쓰고 나면 존나게 힘들잖아?”
“그것도 맞지.”
무형검을 쓰고 나면 마력이 한순간에 임계 직전까지 빨린다. 그러면 그 반동으로 무지막지한 탈력감이 온몸을 짓누르곤 한다.
물론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만, 나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무형검의 사용 숙련도를 더 올려놓고 싶다. 올릴 수 있을 때 극한까지 올릴 거야.”
“너 무형검 빌리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내가 그렇게 쉬워 보여? 엉?!”
“알긴 아네. 내놔.”
“쓰읍…….”
토식이는 연신 씨부렁거리면서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치직! 담배 끝자락이 칼날에 비벼졌다.
“고맙다.”
“알면 나중에 담배 한 보루.”
“봐서.”
짤막한 감사에 토식이가 틱틱댔다. 이제 저것도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다.
푸스스! 토식이의 신형이 탁한 연기가 되어 사복검을 감쌌다.
‘바로 검부터 벼려낸다.’
투명해진 사복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눈을 감고, 일전에 연상해봤던 무형검의 형태를 다시 한번 심상에 구현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손을 내밀었다.
“드가자.”
파지직! 허공을 찢어발겨 몸을 들이밀었다.
세상을 집어삼켰던 불꽃이 시야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고.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비명이 점차 귓가에서 멀어져간다.
그리고 사라졌던 적의 형상들은, 속속들이 다시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지.”
푸화악!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검부터 휘둘렀다.
혼신의 횡베기가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직경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호선이 반월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지금. 무슨, 일…이.
갑작스런 상황.
그리고 돌발적인 필살기의 작렬.
단숨에 허리를 반으로 잘려버린 반야는, 붉은 피를 흩뿌리며 얼빠진 목소리를 연신 흘려내기 바빴다.
―언제. 어디, 서… 어떻게.
반야의 투구는 계속해서 의문을 쏟아낸다.
육하원칙이냐. 다음은 누가, 무엇을, 왜까지 물어볼 기세다.
“알아 뭐 하려고. 뒤질 텐데.”
나는 지친 목소리와 함께 마력 공급을 중단했다.
쉬리릭! 100미터에 육박하던 무형의 검신이 순수한 무(無)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후두두둑. 수많은 내 분신들이 동시에 먹물을 뿜어냈고. 육체가 한순간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으욱…….
―크윽…….
참격에 베인 놈들은 물론이고. 베이지 않은 놈들도 마찬가지다.
놈들은 시커먼 아이스크림처럼 한꺼번에 스러졌다.
[제82던전 ‘무저갱 음양도’의 던전 마스터, ‘아공의 반야’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식신의 발동이 풀렸다. 던전 폐쇄의 패널도 떠올랐다.
모두 반야가 사망했다는 증거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