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2)>
목 잘린 붉은 용.
육사도의 유력 후보가 눈앞에 등장했다.
그 시점에 4차 붕괴의 내용물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일단, 상태창…부터.’
오경태는 아직도 자리에 주저앉아 온몸을 둥글게 말고 있다. 얼굴을 쥐어 싸매고 패닉에 빠져 뭐라 씨부렁거리는데, 슬슬 기분이 나빠질 정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다. 상태창을 확인하려면 지금뿐이다.
‘현자의 눈.’
긴장되는 순간. 나는 조심스럽게 오경태의 정보를 확인했다.
삐빅. 건조한 알림음이 유난히 크게 들린다.
[인물 정보]
[명칭: 오경태]
[별칭: D급 헌터, 악운의 사나이]
[체력: 12 마력: 14 신체 상태: 공포, 무기력]
[힘: 8 민첩: 7 지능: 13 포텐셜: 15]
[최종 전투력: 16]
별칭은 D급 헌터.
그리고… 악운의 사나이.
육사도와 관련 있어 보이는 의미심장한 별칭은, 딱히 없다.
‘뭐야. 아니었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졌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쭉 빠진다.
설마 ‘악운의 사나이’가 육사도의 별칭? 그건 좀 개억지다.
‘하지만, 아직 단정하긴 이르지.’
육사도의 모체는 반드시 특수한 별칭이 있다는 법은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추측한 뇌피셜. 내가 좋을 대로 해석한 행복회로에 불과하다.
‘우선은 접촉해본다.’
확실히 하려면 토식이의 확인 작업이 필수다.
오경태와 접촉해 놈의 신병을 확보한다. 그리고 박현우 때처럼, 토식이를 불러내 확인 작업까지 거쳐보겠다.
“오경태.”
오경태의 지척까지 다가가 조심스럽게 놈을 불렀다.
하지만 정작 오경태는 묵묵부답. 여전히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혼자 헛소리를 중얼거릴 뿐이다.
“끄아아악!!”
“카학! 아아아악!!”
푸확! 뿌드득!!
설상가상으로 주변에선 무자비한 학살극이 현재진행형. 심지어 그 학살의 반경이 점점 좁혀들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히이…! 흐어어엉! 꺼, 꺼져… 살려줘! 엄마아아!! 사, 사, 살려줘요! 엄마아아!!”
그럴 때마다 오경태는 더욱 패닉에 빠졌다. 더더욱 몸을 둥글게 말고, 아까보다 격렬하게 온몸을 덜덜 떤다.
이건 글렀다. 대화는커녕 완전히 정신 줄을 놔버린 모습이다.
“귀찮게… X발.”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짜증을 부렸다.
치지징! 투명화 스킬을 발동했다. 그리고 곧장 시선을 옆으로 흘깃 돌렸다.
“이브. 가자.”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다 이브를 불렀다.
그러자 퍼뜩, 대답이 돌아왔다.
“아, 드디어 내 차례야?”
흐느적. 허공이 일순간 크게 일렁거렸다.
광학미채 슈트를 뒤집어쓴 이브가 움직인 것이다.
그녀는 아까부터 내 옆에 서 있었다. 내 부름이 있을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지.
“우선은 정리부터 해야겠다.”
오경태와 대화하기 위해선 게이트 폐쇄가 먼저였다.
결심과 동시에 콰직! 다가온 이브가 한 입에 내 가슴팍을 베어 물었다.
“그윽.”
참지 못한 얕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이브는 그 반응이 재밌는지 눈꼬리를 실쭉 올렸다.
후두둑. 그녀의 신형이 허물어지고, 시뻘건 갑옷이 내 전신을 두른다.
“후딱 끝내자. 던전 마스터.”
쉬리리릭!
사복검을 늘여 허공에 휘둘렀다. 정확히 수직 방향으로 머리 위를 후려친다.
검격의 궤도 끝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뻔하지.’
하지만 나는 던전 마스터가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게이트가 붕괴하고. 목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이 처음 학살당한 그 순간. 이미 이번에 붕괴한 던전의 정체를 파악했으니까.
“숨지 마.”
푸각!
예상대로 질척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사복검의 참격이 적중한 것이다.
후두둑! 선명한 핏줄기가 내 위로 한 움큼 쏟아진다.
―…무슨.
스르륵.
지금껏 베일에 싸여 있던 몬스터. 놈의 형상이 드디어 눈앞에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백과 흑으로 이루어진 인간 형상의 무언가였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몬스터의 실루엣을 타고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흑염과 백염.
언뜻 흑백의 불꽃을 뒤집어쓴 인간 같기도 하고. 그저 불꽃이 인간 모양으로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가 맞다. 방금 출혈이 일어난 것만 봐도 확연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미물이. 내게 어떻게.
불꽃이 연신 일렁이며 목소리를 뽑아냈다. 짙은 의문에 휩싸인 목소리였다.
나한테 한 대 얻어터진 게 어지간히 분한 듯하다.
“알 거 없어.”
의문을 갖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원래 저 몬스터의 불꽃은 형상만 감추고 끝이 아니다. 대부분의 물리적인 공격에 대한 면역 기능도 달려 있다.
여기서 문제는 ‘대부분’이라는 점이고.
“빨리 뒤져.”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극히 일부 예외를, 내가 이미 안다는 점이다.
쉬리릭! 한 번 더 사복검을 길게 빼내 휘둘렀다.
―으음……!
파스슷!
몬스터를 감싼 흑백염이 촛불처럼 크게 일렁였다. 이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싶은 순간, 내 등 뒤에서 다시 솟아올랐다.
쿠르륵! 놈이 나를 향해 양손을 뻗어왔다.
―두 번은 없다.
콰콰콰콰!!
몬스터의 양손에서 각각 흑염과 백염이 쏟아졌고. 허공의 일점에서 뒤섞여, 나를 잡아먹을 듯이 휘몰아쳐왔다.
압도적인 열기가 등 뒤로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글쎄.”
그러나 놈이 내 공격을 쉽사리 피했듯. 나 역시 기습을 간단히 피해냈다.
화염이 내가 있던 자리를 집어삼키는 그 순간. 나는 이미 하늘 위로 솟구쳐 사복검을 한껏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내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절대라는 건 없던데. 보통.”
콰드득!
오른손을 힘껏 내리쳤고. 사복검은 순식간에 붉은 궤적을 허공에 아로새겼다.
참격은 정확히 몬스터의 몸통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그… 헉.
치지직!
어김없이 신음과 함께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몬스터의 혈액은 화염의 열기로 즉시 증발해버렸지만. 그렇다고 입은 대미지까지 사라지진 않는다.
―이… 이, 건. 이럴, 수는.
몬스터는 방금의 일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상체를 연신 휘청거린다. 부력을 유지할 힘도 없는지, 천천히 고도가 낮아지고 있다.
‘기회다.’
지금껏 내 공격이 통한 건 일종의 버그성 플레이 같은 거다. 지금이 아니면 한 세월 빙빙 돌아가야 놈의 기믹이 파훼된다.
그러니까 한 번에 요단강까지, 좌측 담장으로 넘겨주겠다.
“천라.”
파지직!
육성으로 영창. 즉각 생성된 번개의 그물을 몬스터 정면에 던졌다.
천라의 그물은 정확히 놈의 몸통을 구속해 들어갔다.
―그… 으윽……!
몬스터의 당혹 어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여기까지 왔으면 반쯤은 성공이다. 나는 조용히 쾌재를 부르며 잠깐 멈춰 섰다.
‘이대로 대기한다.’
아직 타이밍이 오지 않았다.
다음 기회가 오는 순간. 저놈의 목을 잘라버릴 예정이었다.
―놓아라. 부질없는 저항은, 그만두어라.
번개그물에 단단히 속박된 화염의 몬스터. 놈이 흑백의 불티를 사납게 휘날리며 웅혼한 목소리를 뿜어냈다.
어처구니없는 도발에 나는 코웃음을 칠뿐이다.
“백날 그래라. 풀어주나.”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타이밍이 왔다.
“일단 한 번 죽자.”
상체를 한계까지 낮추고 발끝에 힘을 줬다. 투학! 허공을 힘껏 박찬다.
주력 이동기 <비약>의 발동이다.
“바로… 다음으로 가자.”
발사된 대포알처럼 쏜살같이 날아가는 와중. 나는 사복검을 합쳐 어깨 뒤로 장전했다.
서걱! 시뻘건 참격이 몬스터의 목을 썰어 넘겼다.
―……!!
푸쉬익!
잘린 머리통이 잔불처럼 허공에서 흩어졌고. 휑해진 목 위로 피분수가 힘차게 쏟아져 나온다.
붉은 피를 따라 타오르는 흑백의 불꽃이 제법 운치가 있었다.
‘여기까진 계산대로다.’
후우우.
그제야 나는 참았던 숨을 일거에 토해냈다.
꽤 오랜만이라서 약간 긴가민가했는데. 아직 실력과 기억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에 약간의 뿌듯함이 느껴진다.
‘좀 긴장하고 있었는데.’
내가 지금 목을 썰어버린 몬스터.
아니, 제82던전 <무저갱 음양도>의 던전 마스터. 아공(我空)의 반야(般若).
“…괜한 걱정이었나.”
이놈은 ‘음양의 지옥염’이라는 고유 스킬을 사용한다.
이것 때문에 형상도 보이지 않고. 물리면역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타이밍은 몸이 기억하는구만.”
초장에 썰어버리려면 시스템의 맹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대단한 건 아니고 버그를 악용하는 거다.
던전의 어떤 지속스킬도 영원히 지속되는 건 없다. 그 시스템의 대전제를 이용한 꼼수지.
‘첫 공격이 시작되고. 2분 22초마다 한 번씩… 이던가.’
나는 기억하는 공략법을 속으로 되새겨봤다.
이 타이밍마다 기존에 유지되던 반야의 스킬이 해제되고, 새롭게 지속 스킬이 갱신되는데. 이 지극히 찰나의 순간을 노려 공격을 가하면 된다.
‘10분의 1초 정도였나.’
허락된 텀은 1초 이하의 찰나. 아무리 나라도 잘해야 한 대 우겨넣는 게 고작이다.
그렇게 세 대를 우겨넣어서 이렇게 된 거다.
“뭐, 뭐야. 저건……!”
“미쳤다…. 저, 저런 움직임은, 본 적이 없어!”
그리고 그 순간. 지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숨죽이고 우리의 전투를 지켜보던 헌터들이었다. 그들이 희망과 의문, 그리고 공포를 담아 우리의 전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숨통이 좀 트였나 보다.
“우리… 살 수 있는 거냐?”
“해, 해치웠나?!”
마지막에 고함친 이름 모를 헌터. 네가 그 빌런 부활주문만 안 읊었어도 이대로 던전이 닫혔을지도 몰랐을 텐데.
혼자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실실 웃었다.
―…불쾌한 것은 나의 죽음인가.
어느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고.
푸화악! 직후 몬스터의 온몸이 거센 흑백의 화마에 집어삼켜졌다.
―아니면 죽음조차 허락받지 못한… 이 육신의 처지인가.
쿠르르륵!
어느 순간 흉포하게 날뛰던 화염들이 일거에 사그라들었다.
목 잘린 반야를 중심으로 뭉쳐들고 정제되더니. 이내 반들거리는 흑백의 갑주가 되어 반야의 몸을 단단히 감쌌다.
“뭐, 뭐야. X발.”
“부활… 했다고?!”
발아래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여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름 모를 D급 헌터. 딱히 진짜로 네가 부활 주문을 읊었다고 저게 부활한 건 아니니까.
그냥, 예정됐던 수순으로 2페이즈가 시작됐을 뿐이다.
―그대는 강하군.
왼쪽은 흑색. 그리고 오른쪽은 백색.
투구는 흑과 백이 마구 뒤섞여, 약간은 그로테스크하게까지 느껴진다.
―탐나는구나.
반야는 나를 정면으로 삿대질한 후. 기괴한 투구 속에서 음울한 목소리를 뽑아냈다.
―그러니, 잠깐 빌리겠다.
파스스슷!
반야가 뻗은 손아귀 안에서 검고 하얀 불티가 춤췄고. 이내 사람 모양의 자그마한 종이쪼가리로 화했다.
쉬리릭! 무수한 인간형 종이들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빨아가시든가.”
어차피 저건 타기팅 스킬. 대상으로 지정된 순간 피할 수 없는 부류의 스킬이다.
나는 종이 인형의 습격을 두 팔 벌려 환영해줬다.
[아공의 반야 특수 아이템, <반야의 식신> 대상이 되었습니다.]
[대상자의 열화 복제품이 소환됩니다.]
쿠르르륵!
내 전신에서 흘러나온 시커먼 기운이 순백의 종이에 흡수된다. 그러자 인형들이 일제히 시커먼 먹물을 쏟아내며 변화무쌍하게 꿀럭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변신이 완성된 종이 인형들은, 모두 내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춤추거라. 지금.
반야의 명령이 떨어졌고.
투두두두! 수백에 달하는 종이인형… 열화판 ‘나’들이 내게 진격해왔다.
‘온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5연속 비약.
소름끼칠 정도로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