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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86화 (186/235)

186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

‘좀 오래 걸렸어.’

터벅.

나는 풍화된 대리석으로 뒤덮인 웅장한 건물 앞에 멈춰 섰고. 그것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것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거대한 신전이었다.

“오랜만이네.”

익숙한 생김새에 약간의 격세지감을 느끼는 한편.

후우. 탈력감에 한숨을 슬쩍 흘렸다.

“좀… 피곤하구만.”

맞닥뜨리는 수호자들을 적당히 지나쳐왔다면 이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을 거고, 이렇게 지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무형검의 변신을 한계까지 실험하다 보니 좀 많이 늦어졌다.

‘일단 무형검의 데이터는 충분히 모였다.’

실험을 하면서 알아낸 사실은 대충 이렇다.

형태의 변신 코스트는 마력. 내가 상상한 위력과 형태에 상응하는 마력이 소모된다.

위력이 강하다면 그만큼 소비되는 마력도 크다는 소리.

‘그리고 원거리 무기군은 기본적으로 마력 소모가 크다.’

심지어 한참 후달리는 위력이라도 말이다.

이것저것 실험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상상하기 좀 어렵거나, 메커니즘이 복잡한 무기일수록 마력도 많이 소비되는 것 같았다.

활이나 크로스보우는 물론이고. 총이나 대포류는 더더욱 그랬다.

‘결국은 칼날이 효율 면에선 최고야.’

검. 창. 도끼. 기타 등등.

날붙이의 형태를 띠고 내가 직접 적을 썰어버리는 무기. 최대 효율로 최대 위력을 내려면, 결국 냉병기의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플 이즈 굿인가.”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는 한편.

파짓! 스킬로 다시 눈앞에 빛덩이를 소환해냈다.

저벅저벅. 신전의 반쯤 무너진 정문을 지나쳤고. 어둠에 깊게 잠긴 신전의 복도로 천천히 진입했다.

“…….”

내부는 토 나오게 넓지만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여기는 26던전 <사양의 신전>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그곳은 신전 자체가 던전 기믹의 일부라서 미궁처럼 길이 꼬여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넓은 복도가 한없이 이어질 뿐. 그 외의 기믹은 전혀 없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쿠우웅! 문득 전방의 어둠 너머에서 육중한 땅울림이 일었다.

“그래. 저거.”

기믹은 더 이상 없지만, 최후의 보스가 하나 기다리고 있지.

지나치게 넓은 신전복도는 일종의 보스룸이기도 했다.

―그오오오…….

쿠웅, 쿵!

낮고 소름끼치는 그로울링. 점차 가까워지는 육중한 발소리. 어슴푸레한 조명이 점점 놈의 형상을 선명하게 비춘다.

나는 늘 그랬듯이 뒤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 봐도 X같이 생겼구나. 너.”

심장부 수호자들의 살점과 팔다리를 덕지덕지 이어붙인 거인이었다.

특유의 짜리몽땅한 팔다리가 여기저기 기워져 육체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고. 얼기설기 짜 집어 놓은 살가죽을 그 위에 덧씌웠다.

―기에… 끼에에에……!

―크각. 카가각!

목 위로는 휑하다. 머리랄 만한 게 없었다.

대신 널찍한 가슴팍에 수호자들의 머리통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 수는 적게 잡아도 수십. 그리하여 수백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아가리들이 연신 끔벅거리며 이빨을 날름거린다.

그리고 그 수십 개의 머리가 동시에 뒤룩. 나를 돌아봤다.

―끼에에에에!!

―키이에에에에!!

수백의 입이 일제히 포효한다.

그리고 쿠구구구! 그 거대한 몸을 뒤뚱뒤뚱 움직여 나를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고래 뱃속에서 벌이는 최종전이 시작되었다.

[스킬 발동: 블러드 스트림]

푸화악!

대 거인전에서 비행 스킬은 필수. 일단 혈액을 분사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체장 수십 미터에 달하는 살점 덩어리를 정면에서 주시했다.

―구오오오오!!

쇄애액!

놈이 팔뚝을 힘껏 들어 올렸고. 그대로 내 쪽에 힘껏 내리친다.

엄청난 속도로 손바닥이 가까워진다. 손바닥 한가운데엔, 수호자들의 잘린 머리통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안 되지.”

피할 가치도 없었다.

푸화악! 타이밍을 맞춰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투명한 궤적이 눈앞을 번득였고, 놈의 팔뚝은 통째로 잘려나갔다.

―궤에에에엑!!!

놈의 온몸에 붙어 있는 수백 개의 입이 동시에 비명을 내지른다. 신전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는 괴성의 합창이었다.

나는 인상을 바짝 찌푸렸고. 놈의 절단된 팔목을 주시했다.

‘역시, 재생하는군.’

쿠르륵, 쿠륵!

떨어져 나갔던 살점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이내 살점거인의 신체를 스멀스멀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철퍽. 절단면을 스스로 맞춰 다시 회복해버렸다.

―기에에에엑!!

아까보다 적의에 찬 짤막한 괴성.

쿵쿵쿵! 거인이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진격해온다.

‘평범한 참격으론 역시 어림도 없어.’

방금의 일격으로 알았다.

저 살점거인의 초재생 기믹은 기억 그대로 설치돼 있다. 그리고 무형검만으론 그 초재생을 막지 못한다.

이건 좀 아쉽다. 나는 무형검을 슬쩍 내려다봤다.

‘무형검으로 초재생을 씹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네.’

살점거인은 주저앉은 광대처럼 마냥 무적이 아니다.

놈은 그냥 육체의 회복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빠를 뿐이다. 그래서 회복하기도 전에 치사량의 대미지를 지속적으로 때려 박으면 그냥 죽어버린다.

‘그 치사량이 좀 높아서 그렇지.’

요컨대 메커니즘은 단순하지만 실현이 약간 어려운 부류의 기믹.

광대 같은 ‘절대무적’이랑은 근본적으로 다른 힘이다. 그래서 무형검의 고유능력인 ‘불사의 존재를 죽이는 힘’이 발동되지 않는 듯하다.

다만, 이래선 죽이는 데 한 세월 걸릴 게 뻔하다.

“그러면… 이렇게 해볼까.”

나는 중얼거렸고. 무형검에 곧장 마력을 집중시켰다.

키잉! 스킬을 발동시킨다.

[스킬 발동: 멸망의 화염]

푸화악!

오른쪽 손등 위로 선명한 불꽃이 치솟는다. 무형검의 기본 형태에 따라 평범한 장검의 모양이었다.

촤르륵! 장검을 사복검의 형태로 변형시켰다.

“이건 좀 아플걸.”

멸망의 화염은 통상적인 방법으론 웬만해선 꺼지지 않는 불꽃. 특히 살아 있는 생물을 태울 때 유독 집요하게 타오른다.

이걸로 지져버리면… 재생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겠지.

“죽어.”

촤르르륵!

나는 오른손을 휘둘렀고. 시뻘건 불꽃의 뱀이 허공을 가르며 쇄도했다.

변칙적인 궤도를 따라, 촤아악! 달려들던 살점거인의 왼팔을 그대로 찢어발겼다.

―끄오오오오오!!!

징그러운 거대한 팔뚝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아까와는 격이 다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인의 잘려나간 팔뚝 단면에선 시뻘건 홍련이 이글거렸다.

―그룩… 그루루루……!

―끄르르르……!

거인의 무수한 입에서 가래 끓는 신음이 쏟아졌다. 놈의 잘려나간 팔뚝은 겁화에 휩싸여 신전 바닥에서 미친 듯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을 칠 뿐. 내 예상대로 좀처럼 재생을 못하고 있다.

“끝났네.”

재생을 못하게 된 살점거인은, 그냥 쓸데없이 큰 샌드백에 불과하다.

생긴 게 아주 불쾌한. 당장 때려죽이고 싶은 샌드백.

“이제 진짜 죽자.”

쉬리릭!

다시 한번 사복검이 굉장한 기세로 휘둘렸다.

방향은 정면. 궤도는, 정확히 살점거인을 둘로 쪼개는 수직선이다.

―끄기… 키기기기!!

하지만 파파팍! 내 공격은 빗나가 애꿎은 지면을 때렸다.

거인이 직전에 회피해 바닥을 구른 것이다.

―키에에에에!!

투학!

거인이 바닥에 웅크렸던 몸을 일순간에 펼쳤고. 단숨에 지면을 연속적으로 박차며 내게 도약해왔다.

엄청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굉장한 민첩성이다.

“귀찮게 하지 말고…….”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회피 기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쾌감을 가득 담아 중얼거리며, 정면에서 오른손을 휘두를 뿐이다.

“죽으라고. 좀.”

콰콰콰콰!!

찰나에 몇 번이나 겹쳐진 참격. 내 앞으로 불꽃의 파도가 수많은 곡선을 그린다.

돌진해오던 살점거인과 내 신형이 교차했고.

―끄… 에에에!!!

―키이이이……!!

푸화아악!

하나 남은 팔과 두 개의 다리. 그리고 상체와 하체까지.

살점거인은 순식간에 5등분의 신부가 되었다.

―그… 그긱… 키그긱…….

꿈틀꿈틀꿈틀.

토막 난 거인의 파편들이 바닥에 널브러졌고. 각자 엄청난 기세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서로 붙으려 하지만, 단면을 지지는 불꽃이 그것을 방해한다. 놈들은 그저 죽을 때까지 바닥을 기며 춤출 수밖에 없었다.

“…….”

곧 일대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치지지직. 살점을 태우는 기분 나쁜 소음. 그리고 단백질 타는 매캐하고 역한 냄새만이 감각을 자극할 뿐이다.

“드디어 끝났나.”

곧 거인의 사지가 완전히 발악을 멈췄다.

던전 마스터 처치 알림은 뜨지 않는다. 애초에 이 던전의 던전 마스터는 저 거인이 아니라 나를 삼킨 천경. 이 전투 공간 자체니까.

사망 판정을 직접 해야 하는 게 좀 귀찮다.

“…….”

숯덩이가 된 살점거인의 시체를 잠깐 내려다봤다.

그야말로 시커먼 석탄이었다. 멸망의 화염은 일말의 자비도 없이 놈을 태웠고, 지금은 거인의 형체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다.

“보자.”

이내 뒤적뒤적. 건조하게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털그렁! 청명한 소리와 함께, 숯덩이들 사이에 뭔가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곧장 집어 들었다.

‘찾았다.’

보석이었다. 내 손바닥 정도의 크기에, 불길한 적색으로 빛나는 마름모꼴의 보석.

나는 그것을 소중히 품에 챙겼다.

“준비는 끝났고.”

그리고 저벅저벅. 살점거인 때문에 지체됐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거인이 등장했다는 건 마냥 귀찮게만 볼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보스가 등장했다는 건 끝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여기.’

이내 신전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파짓! 나는 나이트비전의 출력을 한껏 강화했다.

“음.”

눈앞의 시야가 한계까지 밝아졌다.

그런 내 앞에는, 톱니바퀴와 금속들로 이루어진 정교한 기계 장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거였지.”

하늘을 향해 한없이 뻗어나간 굵직한 포신(砲身). 탄을 장전하기 위한 약실과 폐쇄기까지.

그것은 분명, 거대한 대포였다.

‘마력 주입.’

파지지직!!

나는 거인의 시체에서 챙겨온 보석을 꺼냈고. 거기에 곧장 마력을 주입했다.

보석의 붉은 빛이 한계까지 폭사한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마치 심장처럼. 미친 듯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장전.’

나는 거대한 대포의 약실을 열었고. 그곳에 보석을 능숙하게 집어넣었다.

키이잉! 보석은 정확히 약실의 홈에 맞물려 들어갔다. 보석에서 퍼져 나온 고동에 따라, 붉은 빛무리가 대포의 기계 장치들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폐쇄기 닫고.’

철커덕!

열린 채 방치돼있던 대포의 옆면 장갑판을 닫았다.

그러자 우웅, 우우웅! 대포의 부속품들에서 붉은 빛이 공명했고. 이내 육중한 굉음과 함께, 기계 장치가 일제히 맞물려 기동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은…….’

털컹!

방금 닫은 해치 위. 붉고 동그란 버튼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장전됐고. 노리쇠는 당겨졌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면, 이제 남은 건.

“발사.”

버튼을 눌렀다.

콰아아아앙!!! 장대한 폭음과 붉은 빛무리가 순식간에 솟구쳐 올라갔다.

쿠궁, 쿠구구구구!! 신전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친다. 안 그래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신전은, 그 진동에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오오!!!

나는 빠르게 신전을 탈출하기 시작했고. 문득 처절한 비명소리가 유적 전체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방금 발사된 대포에 심장이 꿰뚫린… 천경이 내는 소리일 테다.

[제17던전 ‘세계를 삼킨 자’의 던전 마스터, ‘천경’이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던전의 시스템이 고지해줬다.

서울의 하늘을 유영하던 거대한 고래는, 그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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