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85화 (185/235)

185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7)>

쿠르르륵!

얼마나 어둠 속에서 소화액 위를 미끄러졌을까.

나는 방패를 능란하게 제어하면서도, 머릿속으론 계속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신념의 방패> 특성 스킬 ‘최후의 신념’이 해제됩니다.]

때마침 30초가 지났다.

방패에 깃들었던 패시브 스킬이 빠르게 해제된다.

투명하고 맑은 오오라가 사라지며, 다시금 치지지직! 매캐하고 불쾌한 내음이 방패 표면을 지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눈을 한계까지 가늘게 떴다. 순식간에 휙휙 지나가는 육벽 사이를 뚫어져라 관찰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눈을 부릅떴다.

“지금.”

투학!

방패를 순간적으로 비틀어 궤도를 상승시켰다. 파도 끝자락을 타고 신형이 대포알처럼 솟구친다.

파지직!

체공하는 동안, 나는 방패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고.

“여기였지.”

처척.

바닥에 두 다리로 가볍게 착지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화액 위가 아닌 평평한 ‘바닥’에 멀쩡하게 착지했다.

톡톡.

나는 괜히 발아래의 맨질거리는 돌바닥을 신발코로 두들겨봤다. 그리고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어둠 속을 가만히 주시했다.

‘봐도 봐도 신기하네. 솔직히.’

무너져가는 거대한 유적이 그곳에 있었다.

넘실거리는 소화액의 파도 위. 외딴섬처럼 고고하게 서 있는, 폐허가 된 도시의 유적.

“이제야 출발선인가.”

천경이 삼켜버린 도시의 잔해.

이게 제17던전 ‘세계를 삼킨 자’의 본체다.

외부의 타격으론 천경을 죽일 수 없다. 이 멸망한 도시에서 특정한 기믹을 수행해야 비로소 천경은 죽는다.

[스킬 발동: 나이트비전]

파짓!

나는 시야의 선명도를 최대한으로 높였고. 천천히 유적 안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어둠에 잠긴 유적을 어슴푸레한 시야에 의지해 가르고 나아간다.

‘천경에 변화가 없었으니… 유적 구조도 딱히 변화는 없을 테지.’

부서진 채 늘어진 순백의 열주들. 을씨년스럽게 방치된 무너진 민가를 가로지르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시선은 오직 정면. 복잡하게 갈라지는 골목에서도 헤매는 일은 없다.

‘여기서 오른쪽.’

목표는 신전이었다.

이 삼켜진 도시의 중앙. 거대한 첨탑이 딸린 신전이 있다. 지금은 어둠에 삼켜져 보이지 않지만, 아마 조금만 더 전진하면 보이기 시작할 거다.

‘직진. 그 다다음 블록에서 왼쪽.’

그 신전에 천경을 죽일 무기가 구비되어 있을 거다.

정확히는 그 신전의 첨탑 자체가 거대한 무기다. 이 도시 자체가 천경의 심장을 파괴하기 위해 구축된 도시라는 설정이니까.

아니. 이제 와서 설정이라는 말은 좀 우습다.

‘전부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

내가 모르는 어떤 다른 차원에서.

세상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로 처먹고 다닌 천경과, 그에 저항하기 위해 도시를 세웠던 존재들. 그들이 어딘가에 실제로 있었던 거다.

“너는…….”

그리고 이 던전의 던전 마스터는, 도시를 축조한 누군가들 중 하나가 아니다.

천경. 거대한 고래 쪽이었다.

“뭘 실패한 거냐.”

천경은 화신이 선택한 주인공으로서 뭔가 강렬한 목적의식이 있었고. 최후에는 그걸 이루는 데 실패했다.

그러니까 던전 마스터로 전락한 것이다.

“뭘… 이루려 한 거냐.”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며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저 위장이 주기적으로 맥동했고, 심장의 고동이 천둥처럼 위벽 너머로 쿵쿵 울릴 뿐이다.

‘지금쯤.’

그쯤에서 나도 우뚝, 거침없던 발을 멈췄다.

파파팍! 발치에 귀신같이 시커먼 광탄 세 발이 내리꽂혔다. 내가 멈추지 않았다면, 그대로 발등에 꽂혔을 것이다.

―키키… 키이익!

―카캬아아악!!

그리고 어둠에 잠긴 골목 너머.

숨어 있던 인영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케악! 케가가각!

숫자가 꽤 많다. 10명, 20, 아니, 50명 이상.

전후좌우, 사방의 비좁은 길목을 메우며 나를 조여 들었다.

철컥. 나는 무형검을 장검 형태로 합쳤고. 신형을 낮추며 전투태세를 가다듬었다.

“꽤 오랜만이구나. 너희도.”

지구의 사람보단 약간 작은 키의 벌거벗은 난쟁이들.

오랜 어둠에 적응해 퇴화해버린 두 눈. 눈두덩 너머로는 눈알 대신 날카로운 이빨들이 빼곡하게 자라나 있다.

얼굴에 입만 세 개 달린, 기괴한 난쟁이들이다.

―키이… 키키. 키키키키!

팔은 총 네 개가 달려 있고. 다리는 문어나 거미처럼 8개가 가지런히 나 있다.

한 쌍의 팔로는 활과 화살. 그리고 나머지 한 쌍으로는 마력이 일렁거리는 스태프와 얄팍한 단검을 쥐고 있었다.

뭐랄까. 육해공 잡탕짬뽕 병사라는 느낌이다.

―키에에에엑!!

―키야아아!!!

놈들이 세 개의 입을 벌려 일제히 포효했고. 이내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일부는 단검을 휘두르며 근접공격. 일부는 활로 견제사격. 그리고 그 외의 일부는 스태프를 치켜들어 마법을 준비한다.

‘상태창을…….’

습관적으로 띄울까 하다가, 이내 관뒀다.

어차피 전생과 똑같다는 게 기정사실이 된 참이다. 이미 이름부터 약점, 공격패턴과 대략적인 스펙도 다 아는 마당이다.

후반 붕괴도 아니고. 봐서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는가.

‘그냥 죽여버리자.’

놈들의 이름은 <심장부 수호자>.

천경이 삼킨 이 유적의 주민이자 원주인들.

하지만 천경에게 먹혀버린 지금은 천경이 내뿜는 독기에 침식되었고. 침입자를 무차별적으로 죽여버리는 일종의 백혈구 같은 놈들이다.

‘강점은 어둠 속에서의 귀찮은 연계.’

쉬쉭! 파파팟!

쉴 새 없이 사방에서 단검이 찔러 들어왔다.

피해낸 곳에는 어김없이 화살들이 날아오고. 그것마저 피해내면 광역마법이 내 갑주를 짓누른다.

―캬아악! 캬하하학!!

―키햐아아악!!

어둠 속에 녹아들어 그림자처럼 조여 오는 수호자들.

약간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귀신같이 그곳으로 공격이 들어온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를 상대하는 것 같다.

나는 쯧, 짜증을 섞어 혀를 찼고.

‘약점은 분명…….’

그래. 하나의 생명체 같은 움직임.

그건 강점이면서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지.

푸화악!

직후 내가 휘두른 무형검의 궤도로 수호자 하나가 두 동강 났다.

―키약?!

―키키키……?

터무니없이 쉽게 쪼개지고. 마치 장난감처럼 바닥을 구르는 수호자의 시체쪼가리.

그 갑작스런 상황에 일순 수호자들의 공격이 일제히 멈췄다.

“하나.”

퍼거걱! 정확히 반으로 토막 난 수호자의 머리를 짓밟아 터뜨렸다. 적갈색 걸쭉한 체액이 장기와 뒤섞여 사방으로 튀었다.

후두둑. 수호자들 방향으로도 건더기가 꽤 흩어진다.

“다음.”

스르릉.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칼날을 놈들에게 겨누었다.

보이진 않지만 느껴지긴 한다. 특히나 눈이 없는 수호자들에겐, 이 무형검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더더욱 크게 느껴질 테다.

―키캭. 캬캭……!

―캬아아악……!

놈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한 풀 꺾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진 않았다.

파파팟! 아까와 비슷하지만 약간은 위축된, 놈들의 2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어딜.”

그리고 푸화악!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참격이 허공에 일섬. 순간적인 도약과 함께, 다시 한번 땅을 쪼갤 듯한 일섬.

두 마리의 수호자가 또 소리 소문 없이 흩뿌려졌다.

“셋.”

나는 건조하게 카운팅을 할 뿐이다.

원래부터 습관적으로 하는 행위기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일부러 크게 소리 내서, 놈들 들으라고 하는 퍼포먼스였다.

―키히… 키이이!!

―키야아아!!

이제 나를 향해 쉽사리 달려드는 수호자는 없다.

단검병도 궁병도 마법병도, 각자의 무기를 필사적으로 내뻗으며 으르렁거릴 뿐.

내가 놈들에게 다가갈 때마다, 오히려 주춤거리며 물러서기 바빴다.

수십의 무리 중에서 단 세 마리 죽였을 뿐인데, 직전의 포악했던 놈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물 같다.

―키윽… 키키윽!

―키르르르!

숨죽인 공포가 역병처럼 퍼져있었다.

이것이 지나친 결속력이 갖는 치명적인 단점. 놈들은 무리에서 단 몇 마리만 죽여버려도, 그것에 심각하게 연연하는 경향이 있다.

“안 오면 내가 간다.”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나는 주변을 맴돌던 빛의 구체를 꺼뜨려버렸고. 눈도 감아버렸다.

완연한 암흑으로 물든 시야. 나는 빠르게 마력을 집중해 무형검으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필요한 건… 강한 한 방이 아니야.’

그리고 강하게 연상했다.

무형검을, 내가 원하는 형태로 벼려내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적을 한꺼번에. 효율적으로 처리할 병기가 필요하다.’

이건 분명히 무형‘검’이지만. 정말로 정해진 형태가 없다면 굳이 ‘검’이라는 형태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러면 역시 냉병기가 아닌 화기… 이를테면 총이나 대포. 지금 같은 경우엔 광역 공격이 가능한 폭탄 쪽이 유리하겠지.

혹시 이런 무기의 변신도 가능한가.

‘아니. 아니지.’

‘가능한가?’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가능하다. 이렇게 나 자신을 속이고, 그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 무형검의 대전제니까.

‘결정했다.’

이내 나는 전력으로 연상을 한곳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의 거짓말을 내 뇌가 전력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단 하나의 형상만을 집요하게 머릿속에 그려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후우.”

오른손목을 괜히 흔들어봤고. 흡족한 한숨을 흘렸다.

육안으로 보이진 않지만, 느껴지는 묵직함이 익숙하다. 내가 방금까지 상상하고 있던 그 묵직함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연상은 분명히 성공했다.

“잘 될지 모르겠네.”

철커덕!

나는 오른손 주먹을 말아 쥐었고. 그것을 다시 한번 수호자들에게 겨누었다.

―크히… 키히이……!

몇 초 남짓이 지났지만 수호자들은 아직도 우왕좌왕하고 있다. 내게서 느껴지는 무형검의 기운이 심상치 않으니 더더욱 그랬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놈들의 중심으로 손을 가만히 뻗었다.

“예술은 폭발이지.”

시험 삼아 위성폭격 비슷한 무기를 연상해봤다.

변신시킨 무형검의 형태는, 굳이 말하자면 리모컨 같았다.

손등 위로 장착된 검 끝. 그곳이 가리킨 좌표를 향해 마력을 사출. 한순간에 일점으로 집속시킨다.

그리고 한계까지 뭉쳐진 마력을 일제히 방출한다면.

“갈.”

콰아아앙!!!

그 지점에서 엄청난 마력 폭발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이다.

―끄에에에엑!!

―키야아악! 캬아악!!

폭발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일대의 유적 잔해들이 후폭풍에 휘말려 가루처럼 으스러져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수호자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끝난 뒤.

“나쁘지 않네.”

한 방에 전멸해버린 수호자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쉬리릭! 무형검을 가장 기본 형태인 사복검으로 다시 되돌렸다. 그리고 갈가리 찢긴 채 유적의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을 쳐다봤다.

‘위력은 아주 괜찮은 편.’

반경 30미터 정도가 마력 폭풍에 휘말려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됐다. 상당한 파괴력이다.

물론 직후엔 시선이 손등 위로 갔고. 미간에 골이 잔뜩 패였다.

‘하지만 효율적이진 않군.’

폭격 리모컨은 로망용 변신 폼에 가까웠다.

원거리에서 원하는 지점에 순간적으로 대폭발을 일으킨다. 이것 자체는 굉장한 이점이긴 한데, 그만큼 들어가는 마력량이 상상초월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금 신전 방향을 향해 걸어가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다른 화기도 다 이런 식인가?”

마력이 지나치게 많이 소모되는 건 유사 화기(火器)의 공통된 특징일까. 아니면 내가 즉석으로 상상해낸 이 무기만이 유독 이런 걸까.

이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부터… 알아내볼 참이다.

“어서 오고.”

츠츠츠츠.

골목의 또 다른 블록에 진입한 순간. 아까처럼 수많은 수호자들이 나를 둘러싼 채 득시글거리기 시작했다.

실험체가 이렇게나 많다. 데이터를 수집하기엔 최적의 조건.

무형검에 대한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을 때 최대한 뽑아내겠다.

“이제 죽자.”

퍼펑! 투두두두!!

오른손목 위에서 보이지 않는 화기들이 각양각색의 마력광을 뿜어냈다.

일대의 수호자들을 남김없이 학살해버릴 때까지. 요란뻑적지근한 무형검의 굉음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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