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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84화 (184/235)

184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

쉬이이익!

투명하게 일렁거리는 내가 서울 상공을 가로질렀다.

속도는 이미 음속을 돌파. 소리보다 약간 빠르게 신형이 공기를 꿰뚫고 있다.

‘다음 예상지는……!’

대규모 마력파장 발생을 쫓기 위해 감각을 풀개방했고, 일단은 다음으로 가까운 예상 지역을 향해 초고속으로 비행했다.

그리고 파지직! 개방된 감각에 뭔가가 저릿하게 걸려왔다.

―부오오오오!!

온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퍼져나간다.

나는 공중에서 그대로 멈춰 섰고. 멍하니 전방을 주시했다.

“하.”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다음 예상 붕괴지. 그 상공에 이지러진 검붉은 하늘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서 굉음을 뿜고 있는, 거대한 던전 생물도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부오오오오오……!

고래였다.

하늘을 표류하듯 유유히 날고 있는 거대한 고래.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래의 아파트 단지가 일개 말미잘처럼 보일 정도의, 몸길이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칠흑의 고래다.

“오… 와아…! 짱 크다!!”

이브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옆에서 토식이도 소리만 안 냈지, 그 웅장한 자태에 넋이 나가 있었다.

같은 던전 생물이라도 저 괴물은 좀 놀라운 듯하다.

지구인인 내가 제일 안 놀란 게 레전드네.

“천경.”

나는 가만히 괴물의 이름을 입에 담았고. 습관적으로 상태창부터 띄웠다.

삐빅. 고래의 상세 정보가 눈앞에 떠오른다.

[몬스터 정보]

[명칭: 천경(天鯨)]

[체력: ??? 마력: ???]

[힘: ??? 민첩: ??? 지능: ???]

[상세: 제17던전 ‘세계를 삼킨 자’의 던전 마스터.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한 오만의 상징. 자라고 자란 끝에 그 주인을 삼켰고, 자라난 도시를 삼켰고, 마침내 세계를 삼켰다.]

이름은 천경. 문자 그대로 ‘하늘의 고래’라는 뜻이다.

일단 외관과 하는 짓은 잘 어울린다.

“…고래가 난다요.”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브가 얼핏 들었는지 나를 슬쩍 올려다봤지만. 나는 시치미를 떼고 전방만 주시했다.

남이 들었으면 살짝 부끄러웠을 개드립. 하지만 튀어나오는 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걸로, 반쯤 확실해졌다.’

상태창까지 확인해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육사도를 하나 빼고 모두 모은 지금, 붕괴지는 아무런 규칙성도 없이 뒤틀리기 시작했지만, 붕괴하는 던전과 내용물은 여전하다.

‘기억과 완전히 일치하는 상태창이야.’

처음 한 번은 우연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두 번 연속으로 우연일 가능성은 적다.

확정은 이르지만, 일단 내 기억에 있는 100개 던전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과연 보스의 기믹까지… 똑같을까가 문제군.’

천경의 모든 상태창은 전과 똑같이 물음표 표기다.

경험상 저건 전형적인 기믹 보스의 표식이다.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만 죽일 수 있거나 데미지가 박히기 시작하는 놈들이 대부분 저렇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천경은, 실제로 기믹 보스였다.

“시험해 보는 수밖에.”

길게 생각해 봐야 언제나 결론은 단순하다.

상의 앞섶의 단추를 빠르게 풀어헤친다. 이브는 이제 그 제스처만 보고도 나를 힘껏 부둥켜안고, 송곳니를 날카롭게 벼린다.

“가자. 이브.”

“으응.”

푸각!

송곳니가 가슴 깊숙이 박혀 들어왔다.

쿠르르륵!

쏟아지는 선혈의 파도에 이브의 신형이 잠식되고. 그대로 녹아내리듯 흐물흐물 허물어진다.

그리고 내 온몸을 감싸는 선홍색 갑주가 되었다.

“토식아. 너도 합치자.”

혈천갑을 뒤집어쓴 나는, 곧장 왼쪽 어깨의 토식이에게 명령했다.

흠칫. 토식이가 못 들을 말 들은 양 몸을 굳혔다.

“어… 어? 굳이 나까지?”

“그래. 너까지.”

“나 그냥 인벤토리 들어갈까? 아니면 어깨에 붙어 있으면 안 돼? 진짜 가만히 있을게!”

“간수하기 귀찮아. 안 돼.”

모 해적만화 CP9도 아니고. 어깨에 괴생물체 달고 싸우면 내 정신이 사나워서 싫다.

하지만 토식이는 끝까지 말대꾸를 해댔다.

“너 과유불급이라고 혹시 아니?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쓴다는 말은?”

“사자는 토끼 잡는데도 전력을 쓴다는 말은 아나 모르겠구나.”

“쓰읍……!”

대체 저 새끼가 한국의 속담과 관용구를 어떻게 아는지는 둘째 치고. 변신하기 오지게 싫어하는 기색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렇게까지 싫은 이유가 뭘까. 그만큼 변신 후 탈력감이 극심한 걸지도 모른다.

‘시키면 넙죽넙죽 해주는 이브가, 오히려 이상한 건가……?’

반대로 생각하니 이브가 좀 더 기특해지기도 한다. 이번 붕괴를 막고 나면 딸기우유 좀 챙겨줘야겠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빨리. 변신. 하라고.”

나는 한층 살벌한 어조로 최후통첩을 했다.

토식이도 분위기를 읽은 듯하다. 죽상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은 뻗대지 않았다.

“쓰으… 칼 내놔봐. X발.”

“옛다.”

“하, 새끼 진짜. 옥좌의 모체만 아니었어도 진짜…….”

치이익!

토식이가 궁시렁 대면서 담배를 사복검 끝자락에 갖다 댔다.

푸스스스!

전과 똑같은 조화다. 검신 전체가 희끄무레한 연기가 되어 마구 휘몰아쳤고. 이내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자, 검신은 이미 실체가 흐릿해졌다.

“이거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손등. 그러나 분명히 자리하는 묵직한 존재감.

나는 익숙한 느낌에 흡족하게 끄덕였고.

“드가자.”

푸화악!

튕겨나가듯 천경을 향해 사출되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나와 천경. 그 찰나의 순간에도 천경은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부오오오오!!

고래의 거대한 입이 쩌억, 벌어진다.

끔찍하리만치 커다란 이빨들이 나열된 선홍색 입 안, 무저갱 같이 칠흑으로 뒤덮인 목구멍 너머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크우우우우……!!

그리고 천경이 거대한 울음을 토해냈다.

입 안의 암흑이 미친 듯이 진동하고, 충격파를 토해내는가 싶더니. 이내 엄청난 흡입력으로 주위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나는 천경이 뭘 하는지 깨달았다.

‘좀 늦었구나.’

내가 한발 늦었다.

포식이다. 놈은 지금 식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부오오오오!!!

일대의 중력이 한순간에 역전된 듯한 광경이었다.

사람도 건물도 도로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고. 저항할 틈조차 없이 천경의 입 속으로 사라져갔다.

“끄, 아아……!”

“꺄아아아!!”

콰드득! 뿌드드득!

가공할 흡입력으로 일대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육체가 하릴없이 찌부러지고. 건물 잔해나 다른 인간의 유해들과 뒤섞여 흩어진다.

―부우우우우……!!

쿠과과과과!

천경은 그렇게 입을 벌린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아파트 단지 하나를 순식간에 초토화해 삼켜버리고. 다음 먹잇감을 빨아들이러 전진하는 것이다.

―구오오오오오!!!

천경이 만족하려면 이 정도 희생으론 어림없다.

흰수염고래는 하루에 4톤에 달하는 크릴새우를 먹어치운다고 하지.

저건 지구의 고래와는 완전히 다른 생물이지만. 그 먹성만큼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수십만 명은 먹어치워야 끝날 거다.’

푸우우우!!

문득, 천경의 등판에서 시뻘건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수면 위로 올라온 고래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후두두둑. 분수의 내용물이 내 눈앞까지 날아와 흩어진다.

“…크.”

무지막지한 피비린내.

그리고 부패한 살점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시커멓게 썩은 핏물과 함께 쏟아지는, 미처 소화되지 못한 인간의 뼛조각들. 그리고 건물과 교량의 잔해들이폭우처럼 쏟아졌다.

‘서두르자.’

투학!

허공을 연속적으로 박차 <비약> 스킬을 발동했다. 신형이 한껏 가속하며 천경의 정면으로 날 단계적으로 밀어낸다.

틱, 티틱! 흐트러지는 인골조각이 갑옷과 부딪쳐온다.

―구우우우……?

디룩.

문득 천경의 거대한 눈동자 두 개가 내 쪽을 향했고. 점차 가까워지는 내게 시선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드디어 놈이 나를 포착했다. 이쪽도 슬슬 ‘준비’를 해둬야 한다.

[스킬 발동: 안티 노멀 리플렉터]

[스킬 발동: 기드온의 유지]

우선은 미친 듯이 날아다닐 건물잔해를 막아낼 물리 방벽. 그리고 다음은 상태이상 내성을 높여주는 ‘기드온의 유지’라는 스킬이다.

스킬 쪽은 끝났고.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신념의 방패.’

파지직!

인벤토리를 열어 마지막 준비물을 꺼내들었다.

새하얀 방패. 어떤 무늬도 없는 순백색의 장방형 방패였다.

“이거지.”

나는 그것을 옆구리에 단단히 끼웠고. 다시 천경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딱히 상태창은 열어보지 않는다. 열어볼 필요가 없으니까.

이거 애초에 방어용으로 꺼낸 것도 아니다.

―끼이이이이이!!

때마침 천경이 입을 한껏 크게 벌렸다.

지금까지처럼 느긋한 식사가 아니다. 포효는 사납게 공기를 찢어발겼고, 쩍 벌어진 입은 정확히 나를 겨냥하고 있다.

식사보단 사냥. 위협적인 기운을 내뿜는 나를 죽이려 드는 움직임이다.

“와라.”

나는 도전적으로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그뿐. 그 외의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방금 꺼낸 방패를 들어 올리는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않았다.

그저 뜬눈으로, 점점 들이닥치는 고래의 거대한 아가리를 관망했다.

―구오오오오오오!!!

천경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엄청난 흡입력이 매서운 태풍이 되어 내 온몸을 휘감는다. 블러드 스트림을 조절해 그 자리에서 버텨내는 데 사력을 다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흡입력. 잠깐만 정신을 놔도 그대로 휘말릴 것 같다.

‘조금만 더.’

그렇게 얼마나 버텨냈을까. 이내 거대한 아가리가 위아래로 나를 감싼다.

콰드득! 놈의 아가리가 용서 없이 닫혔다.

‘여기까진 순조롭고.’

계획대로 천경에게 먹혔다.

사방이 칠흑 같은 암흑에 휩싸인 지금. 그제야 나는 행동하기 시작했다.

휘릭! 신주단지 마냥 보관하던 방패를 번쩍 들어올렸다.

“오랜만이라… 잘 될진 모르겠네.”

파짓!

야시(夜視) 스킬로 시야부터 확보한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전방시야가 부분적으로 확보됐다.

천경의 어두운 입 안. 선홍색 살점의 파도가 꿈틀대고 있다.

‘슬슬 버티는 것도 한계였던 참이야.’

가까스로 유지하던 블러드 스트림을 해제했다.

푸화악! 태풍처럼 사나운 기류가 순식간에 나를 목구멍 너머로 빨아들인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방패를 발 아래로 내려, 그대로 밟고 올라섰다.

“가보자고.”

쉬쉬쉬쉭!

서핑을 하듯, 거센 기류의 흐름을 타고 쾌속으로 전진한다.

몇 번은 균형을 잃고 방패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지금껏 해온 짬이 있어서 윈드서핑은 금세 적응되었다.

‘이쯤이던가.’

푸화악!!

내가 떠올리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문득 발아래서 걸쭉한 진녹색 액체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고,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천경의 소화액.’

목구멍을 넘어 식도, 그리고 위의 경계에 도달했다는 증거다.

이제부터가 진짜 서핑의 시작이다.

“훗……!”

신형을 한껏 낮춰 방패에 최대한 밀착했고, 걸쭉하게 흐르는 소화액 위로 방패를 최대한 안착시켰다.

치지지직!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이템 <신념의 방패>가 ‘산패(酸敗)’ 상태가 됩니다.]

[내구도가 빠르게 감소합니다. 0까지 삭감되는 순간 파괴됩니다.]

동시에 패널이 떠올라 방패의 상태를 말해준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하고 많은 아이템 중에 이 방패를 꺼낸 이유가 뭐겠는가. 이 방패는 존재 의의 자체가 서핑보드다.

당연히, 그리 쉽게 부서질 리가 없다.

[<신념의 방패> 특성스킬 ‘최후의 신념’을 발동합니다.]

[30초간 모든 피해에 면역되며, 파괴되지 않습니다.]

내 몸에 둘러 쳐진 방어 스킬은 모두 내구도가 있다. 그래서 천경의 소화액에 일정 시간 이상 노출되면 스킬이 해제된다.

그 제한 시간을 어떻게든 늘여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아이템이다.

‘이대로 계속… 진입한다.’

쉬쉬쉬쉭!

격렬하게 넘실거리는 소화액의 파도를 타고, 나는 점점 더 나아갔다.

천경의 핵심이 있는 곳까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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