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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83화 (183/235)

183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

“음. 셋 다 육사도는 아니네.”

세 사람을 무사히 담배빵 한 번씩 지져본 후. 토식이의 판결은 그러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러냐.”

“어. 육사도는 아니야.”

“육사도, 는?”

말을 좀 의미심장하게 흐리는 토식이.

나는 그것을 물고 늘어졌고. 토식이는 연기와 함께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본처 있잖냐. 머리 긴 쪽.”

“그래. 수아.”

“그 쪽은 확실히 뭔가 있긴 해. 마냥 평범한 인간은 아니야.”

“……!”

지금껏 심증만 있었는데. 이로써 신뢰도가 꽤 높은 증인까지 생겼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슬쩍 물었다.

“혹시, 왕이냐?”

“정확히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 그럼 그렇지.”

“아무튼 이 세계의 발에 채이는 엑스트라들이랑은 근본적으로 뭔가 달라. 높은 확률로 요주 인물 중 하나다. 그거는 확실해.”

“…….”

그렇다고 한다.

믿을 만한 정보통한테 확답을 들으니 감회가 좀 새롭다. 또한 수아에 대한 인식이 재정립되는 기분이기도 하다.

재정립된 수아는, 한층 더 의심스러운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후우.”

내 불행의 촉은 꽤나 잘 맞는 편이다.

지금은 수아에게서 그 촉이 느껴지고 있다.

대체 어떤 현실이 내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지금은 그저 막연하게 두려울 뿐이다.

* * *

가장 가까운 셋을 확인한 후엔 다짜고짜 인근의 번화가로 나갔다.

이 거리에서 유동량이 가장 많은 거리를 이세라에게 물어봤고. 그 한복판에 멀뚱히 선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스캔해보기 시작했다.

‘현자의 눈. 현자의 눈. 현자의 눈…….’

삑. 삐빅. 삐비빅.

쉴 새 없이 떠오르는 개성만점의 상태창들.

공격이나 방어계 스탯은 일절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 1을 넘는 경우가 없으니까.

[인물 정보]

[명칭: 김정숙]

[별칭: 없음]

[명칭: 정선혁]

[별칭: D급 헌터]

[명칭: 유정산]

[별칭: 없음]

내가 특히 주목한 곳은 별칭 항목 쪽이었다.

간혹 보이는 C급이나 D급 헌터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없음’. 깔끔한 공백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엑스트라들의 별칭란이다.

‘혹시나 육사도가 있다면… 여기에 뭔가 이변이 있을 거다.’

근거는 내가 봤던 유일한 선례. 애덤 크로스였다.

<광기의 요람>. 애덤 크로스의 상태창에는 그런 정체불명의 별칭이 하나 붙어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육사도의 모체가 됐다는 일종의 표식.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몰라. 일단 다 뒤져봐.’

삑. 삐빅. 삐비빅.

그래서 시작한 것이, 대한민국 5천만 국민 별칭 수색 프로젝트.

지금 내가 벌이고 있는 개미친 쌉노가다의 현장이었다.

‘어느 세월에 이걸 다 하냐.’

불현 듯 그런 생각이 퍼뜩 치고 들어왔고.

고개를 세차게 저어 곧바로 물렸다.

‘생각하지 말자.’

뭐 어쩔 건데. 달리 뾰족한 방도도 없잖아.

지금의 나는 순경들이 들고 다니는 스피드건이다. 사람 스캔하는 기계일 뿐이다.

자아를 가지면 자괴감만 드니까, 사고를 정지해버리겠다.

‘남는 게 시간이야. 어차피.’

거듭 말하지만 나는 시간 빌게이츠.

세상에 나보다 시간이 넘쳐나는 부자 새끼가 달리 없다.

“현자의 눈… 현자의 눈…….”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입 밖으로 영창이 줄줄 새고 있었다.

내 주변에서 사람들이 어째 거리를 둔다 싶었는데. 혼잣말 계속 해서 미친놈인 줄 알고 피해가는 거였다.

“…쓰읍.”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다시 줄기차게 행인들을 스캔했다.

날이 꼴딱 새서 행인들이 아무도 없어지는 새벽녘까지. 계속이다.

그리고 다음날. 2차 붕괴일이 되었다.

하루 종일 개삽질만 하다 귀환한 뒤, 휴게실에서 쪽잠을 청하고 있던 내 어깨를 누군가 마구 흔들었다.

“저, 정용 씨. 정용 씨. 일어나 봐요.”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을 가까스로 떴다.

하루 종일 상태창만 쳐다봤더니 눈알이 빠지는 것 같다.

“…으음.”

나는 뻑뻑한 눈을 열심히 굴렸다. 시야가 점점 맑아진다.

이세라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깨셨군요. 정용 씨.”

깨운 사람이 이세라.

그 시점에서 온몸에 긴장감이 치달았다. 그녀가 시답잖은 이유로 나를 깨울 리가 없으니까.

“무슨 일이냐.”

나는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자 이세라도 약간 긴장한 듯이 허리를 곧게 폈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보, 보였어요.”

역시나 붕괴 알람(?)이었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흠칫 놀라는 이세라 앞에서, 나는 얼굴을 한껏 들이밀었다.

“어디. 몇 시.”

“그… 일단 시간은 1시간 정도 뒤인데요.”

3시간 뒤. 그 말을 듣자마자 시계부터 확인했다.

지금 시간은 오전 6시.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여기서 1시간 후면 붕괴는 7시 정각쯤이라는 소리.

‘시간도 바뀌는군. 확인.’

훨씬 시간이 당겨졌다. 전에도 이른 시각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래서. 어디.”

조바심에 이세라의 어깨를 콱, 힘껏 붙잡았다.

조금만 뜸 들였어도 탈곡기 마냥 휘둘렀을 거다. 다행히 그녀는 빠릿하게 즉각 대답했다.

“그, 그게. 분명히 보이긴 했는데요.”

“보였는데.”

“어, 어디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잠깐 벙쪘다.

처음엔 장난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세라의 찌푸려진 미간과 곤란한 표정을 보니, 이거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는 잠기기 시작했다.

“뭔 소리냐. 모르다니. 보였다고 했잖아.”

“그, 그게. 보였는데.”

“보였는데?”

“그… 특징이랄 게 딱히 없는 아파트 상가 주변이라서요. 이게 대체 어딘지를, 잘 모르겠어요.”

“아.”

붕괴지가 랜드마크가 아니구나.

일반 시가지. 그것도 특징이 희박한 평범한 거리 중 하나인 듯하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맹점인데…….’

이세라의 예지는 미래의 불특정 ‘장면’을 보는 것. 그 장면이 정확히 어디인지까지 알아서 파악되는 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이세라.”

“네, 네.”

“지금까지 시간은 어떻게 알아냈던 거냐.”

“시간이요? 해가 떠있는 위치로 추측했죠.”

“…허.”

“워낙 많이 보기도 하고. 현역 시절엔 전문적으로 훈련도 받았으니까요. 그쪽은 알아보는 데 익숙해요.”

훈련이라.

하긴, 미래시를 제대로 써먹으려면 시간대를 특정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헌터협회 수뇌부도 병신들이 아니니 당연한 조치긴 했다.

‘숙달되면… 분 단위로 정확히 추측이 가능한 건가.’

그건 좀 많이 놀랍다.

내가 침음을 흘리자, 이세라가 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렸다.

“어쨌든, 그. 결론적으로는…….”

“시간만 특정됐을 뿐. 이번 붕괴지는 정확히 특정할 수 없다. 그거지.”

“…네. 미, 미안해요.”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세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손사래를 쳤다.

“미안할 건 없고.”

이세라는 슈레더라는 리스크를 떠안긴 것에 부채의식을 갖는 듯했다. 그래서 제 역할을 못하게 되자마자 저렇게 미안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미안할 건 없었다. 나는 되도록 거짓말은 안 하는 주의다.

“보였던 장면. 최대한 상세히 말해줘.”

대신 이세라에게 얼굴을 한껏 밀착한 뒤. 그런 요구를 했다.

이세라는 모르는 그 거리를 나는 알 수도 있다. 그러니 피상적으로나마 교차 검증을 해보려는 거다.

그러자 이세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그러면. 우, 우선… 아파트 단지가 있었어요.”

“단지 이름. 브랜드.”

“이름? 어… 놋데 캐슬이었던 것 같은데.”

“확인. 주변 경치.”

“그러니까. 우선 단지 정문 쪽으로 꽤 큰 차선이 나 있고…….”

한동안 이세라의 장면 묘사가 이어진다.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는 염사(念寫) 같은 스킬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 와선 아무짝에 없는 후회가 잠깐 머리를 스친다.

이내 깔끔하게 접고, 그녀의 묘사를 그대로 머릿속에 펼쳐봤다.

“…모르겠네.”

하지만 그러면 그렇지.

대가리 아무리 굴려봤자 수확은 없었다.

1천 번 넘게, 매번 같은 15개의 똑같은 장소만 왕복해왔던 나다. 어딜 싸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기에 서울 지리를 잘 알지도 못한다.

‘기껏해야 가본 곳이라곤…….’

우리 집 주변. 15개의 붕괴지. 이세라의 칵테일 바 주변.

그리고 수아의 기분을 달래줄 때마다 찾아갔던, 틀에 박힌 나들이 레퍼토리. 남산타워 정도다.

“…남산타워.”

그리고 생각이 거기 미친 순간. 나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콱! 이세라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산타워다.”

“어, 예?”

“그 장면 안에. 남산타워는 보이고 있냐.”

”아, 아아…! 잠시만요!”

그제야 이세라도 내 의도를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필사적인 얼굴로 끙끙대기 시작했다.

나도 이세라도 그 장소를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예상 지역을 좁힐 수는 있겠어.’

남산타워가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보인다면 어느 방향에서 보이는가.

그것만 알아도 동선이 효율적으로 좁혀진다.

“…보, 보여요. 보이네요!”

그리고 다행히도 내가 기대하던 대답이 나왔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방향은.”

“어, 그러니까… 부, 북동. 북동 방향이요.”

얻어낸 정보를 점점 구체화한다.

북동 방향으로 남산타워가 보이는 놋데캐슬 아파트 단지.

예상 지역도 점점 구체화된다.

* * *

예상 지역이 생각보다 많다.

어떻게든 이세라를 쥐어짜서 최대한 좁혀봤는데. 그래도 5개 가까이 됐다.

‘서울에 놋데캐슬 X발 존나 많네.’

새삼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됐다.

어쨌든 나는 그 예상 지역 중 남산타워에 가장 가까운 스팟에 출동해 있었고. 지금은 붕괴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느 순간, 옆에서 토식이를 주물러대던 이브가 물어왔다.

“아빠. 앞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돼?”

“앞으로… 3분 정도.”

“으음. 얼마 안 남았네.”

이브가 다시 자리에 쭈그려 앉아 토식이를 쓰다듬는다.

토식이는 발광하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해보지만, 완력차가 확연해서 손아귀를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오 쫌! 좀 놔줘!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그치만… 나 심심하다고. 토식아.”

“넌 왜 맨날 나만 갖고 지랄이야! 심심하면 저기, 저 옥좌한테 놀아 달라 그래! 쟤도 존나게 한가해 보이는구만!”

“으응, 아빠는 방해하면 안 돼. 아빠는 안 그래 보여도 엄청 바쁘다구.”

토식이가 억지로 화살을 내게 돌려보지만, 이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나를 두둔해줬다.

토식이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보기 시작한다.

그 도전적인 시선을 딱히 피하지 않았다.

“왜. 뭐.”

“…너, 바쁘냐?”

“너보다야 바쁘지 않겠냐.”

사실 안 바쁘다.

나도 붕괴 일어나기 전까진 딱히 할 일 없다.

이브도 짬바가 있으니 이 사실을 대강 알 거다. 하지만 이브는 나를 배려해주고, 토식이를 괴롭히는 걸 선택했지.

이게 너와 나의 신뢰도 차이다. 수십 회차를 넘나들며 끈끈해진 유대가 X으로 보이냐.

“주제를 알아라. 잡종.”

“…갑자기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그렇게 시답잖은 실랑이가 잠깐 이어지는 사이, 3분이 훅 지나갔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시계를 내려다봤고.

“…움직이자. 얘들아.”

푸화악!

두 던전 생물을 양손에 붙들고, 그대로 지면을 박차 올랐다.

‘아무렴. 내 인생이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예정된 붕괴 시간이 경과했는데 눈앞에 이변이 없다.

10분의 1확률의 찍기가, 실패했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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