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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82화 (182/235)

182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

곧 긴급 출동한 헌터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헌터들은 이미 초토화가 되어 있는 서울월드 현장에 아연실색했지만. 이내 베테랑들을 중심으로 정신을 차리고, 즉각적인 상황 대처에 나섰다.

“이쪽입니다! 피난민 분들은 이쪽 보라색 견장 찬 사람들 따라오세요!!”

“감식반 애들 있어?! 몬스터 사체 조사 좀 해봐!!”

“생존자 수색해! 빨리!!”

빠릿빠릿하고 일사불란한 지휘와 움직임. 던전에서 레이드로 단련된 베테랑 헌터들의 현장 통솔력이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덕분에 현장의 대혼란은 생각보다 빠르게 수습되었다.

‘나도 슬슬 시작해볼까.’

어느 정도 현장이 소강상태에 이르던 차.

나는 투명화를 풀지 않은 채 아직 서울월드 상공에 둥둥 떠 있었고. 별안간 허공을 찢어 인벤토리를 열었다.

“토식아. 나와봐라.”

불쑥.

집어넣었던 손에 토식이가 딸려 나온다.

“으엉? 으음. 뭐, 뭐야. 뭔 일인데?”

놈이 비몽사몽한 얼굴로 눈을 연신 끔벅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나 내 면상과 마주하더니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인벤토리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던 듯하다.

“너도 포X몬 다 됐네. 처음엔 그렇게 싫어하더니.”

“무슨 몬……? 그게 뭔 소리냐?”

“그런 게 있다.”

인벤토리가 잠 올 정도로 익숙해진 토식이에게 찬사(?)를 보냈다.

태평한 농담 따먹기는 거기까지다. 나는 곧장 진지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확인 작업. 가능하냐.”

“으음?”

의문의 탄성을 흘리는 토식이. 나는 그 앞에 손가락을 들어 아래를 가리켰다.

스르륵,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붕괴 현장으로 향했다.

“아하. 난 또 뭐라고.”

토식이는 금세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치직! 토식이가 담배에 불을 붙여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가 능숙하게 담배 사이로 침을 찍 뱉어냈다.

“물어봤으니 대답을 해주자면. 가능은 하지.”

“좋군.”

“근데 다음부턴 웬만하면 살려서 내놔라. 그게 더 확인하기 편하니까.”

“노력해본다.”

나는 광학미채 슈트를 그에게 건넸다.

슈르륵. 토식이의 작은 신형이 신기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한다.

“가자.”

“오냐.”

우리는 곧장 백족의 처참한 시신 위로 착지했다.

수백 조각으로 채썰기를 당한 시신을 보자, 으음. 토식이가 침음을 깊게 흘렸다.

“원형이라도 좀 남겨놔. 이게 뭐야 인마.”

“다음부턴 남겨놓는다.”

“오냐. 좀 오래 걸려도 그러려니 해라.”

“그래.”

치지직!

전에 그랬듯이, 토식이가 담배 끝자락을 백족의 시신에 갖다 댔다. 그리고 가만히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더니, 집중 모드에 들어간 듯하다.

‘…대체 담배빵이 무슨 원리로?’

무심코 떠올랐다.

그리고 떠올린 직후 폐기했다.

생각하지 말자. 저거 깊게 생각하면 내가 지는 거다.

“야 옥좌야. 이건 땡이다.”

한참 후 들려온 목소리는 그런 통보를 했다.

뭐 그렇겠지. 애초에 큰 기대도 안 했고, 억만 분의 일 상황을 생각해서 확인해본 것뿐이라 실망도 크게 안 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철수한다. 가자.”

“오냐.”

“돌아와 토식몬.”

“……?”

파지직!

나는 토식이를 대충 인벤토리에 욱여넣은 뒤. 펄쩍 점프해 하늘로 치솟았다.

‘귀환하자.’

블러드 스트림을 발동. 빠르게 하늘을 가로질렀다.

방향은 노원구. 이세라의 칵테일 바가 있는 상가 건물이다.

* * *

1차 붕괴일도, 그 다음 휴일도 나름 무탈하게 지나갔다.

강서윤과 강수아 자매는 내게 궁금한 것이 엄청 많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질문은 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올 수가 없었다.

“야. 한정용. 있잖아.”

“아아, 정용 씨는 지금 피곤하시대요.”

“하, 하지만. 언니……!”

“나중에. 좀 쉬고 나서 나중에 할까요?”

“으, 으음.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뭐.”

내가 온몸으로 거부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세라가 옆에서 서포트해준 것도 컸다.

옆에 두니 이렇게 든든한 매니저가 또 없다. 덕분에 최근 이세라의 호감도가 천장을 찍다 못해 뚫고 있었다.

“저 뒤통수 뚫리겠어요. 할 말 있으신가요?”

내가 계속 쳐다보자 이세라가 물어온다.

눈도 없으면서 시선은 귀신같이 느끼는 그녀였다. 오히려 눈이 없어서 더 잘 느끼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피식 웃으며 맞장구 쳤다.

“매니저가 생겨서 든든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어.”

“매니저 말고 내조라고 해주세요.”

“우리 언제 결혼했냐.”

“해주실래요?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

“고민 좀 해보고.”

“어머. 최소한 가능성은 있나보네. 다행이에요.”

쓸 데 없는 대화들이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당연히 이세라도 그렇겠지만, 나한테도 순도 100%의 농담들이다.

‘결혼이고 나발이고…….’

평화로운 미래가 오면, 난 미련 없이 죽을 예정이다.

모든 게 끝난 뒤의 기약은 전부 공허한 망언잡설에 불과하다.

“근데 서윤 씨랑 수아 씨도 같이 있는데… 저랑 결혼한다느니 어쩌니. 그런 폭탄 발언을 함부로 하셔도 돼요?”

그리고 이세라가 애국가 4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농담 계속 하면 좀 뇌절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대꾸는 성실히 해줬다.

“사귄다면 강서윤과 사귀고 싶고. 수아는 항상 1순위로 좋아하지만. 결국 결혼은 너랑 하겠지 싶은데.”

뇌절엔 뇌절로 응수할 뿐이다.

이세라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얼굴을 슬쩍 붉혔다.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난처하게 웃기 시작했다.

“와. 방금 건 진짜 천하의 개쓰레기 같은 발언이었어요. 정용 씨.”

“난 근본이 쓰레기야.”

“또또. 괜히 그러신다.”

‘또또’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 난 이세라에게 이런 말은 처음 해보니까.

미래의 나한테 멋대로 듣고 온 모양이다. 다른 미래의 나도 저런 말을 서슴없이 했다는 게 레전드긴 하다.

“…그래서, 감시는 아직인가요?”

직후 이세라의 어조가 급변했다.

낙차가 꽤 심각했다. 내용 역시 무거운 사안이었다. 직전의 가벼운 농담들은 이걸 위한 빌드 업이었나 보다.

앞뒤가 다 잘라 먹힌 말이었지만. 나는 의미를 단박에 캐치했다.

“그래. 아직 계속되는 중이다.”

어제 오전쯤부터 시작된 슈레더의 감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번은 전생보다 약간 늦게 시작되었는데. 그래서 나의 대처도, 슈레더의 동향도 이미 전생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나는 던전 붕괴 대비하느라 놈들을 잠깐 방치해뒀고. 그 놈들도 갑작스런 던전 붕괴 때문에 정신이 없어져서… 지금은 감시가 약간 소홀해졌다.’

그리고 이 사실은 현생에선 이세라에게만 말해준 상태.

수아한텐 말해줘봐야 소용이 없다. 서윤이는 괜한 걱정거리만 늘어나는 데다, 돌발 행동을 벌일 가능성이 있어서 리스크가 있다.

‘최소한 이세라는 슈레더에 우라 돌격 할 일은 없지.’

게다가 감시가 붙은 원인 제공자기도 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그녀는 알고 있는 게 맞을 것 같아서 말했다.

“흐음. 그렇군요.”

“하지만 말했던 대로, 어제보단 훨씬 느슨해졌어. 이번 던전 붕괴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은데.”

“하긴. 그럴 법도 하네요.”

그러면 이런 상황이 된 지금. 내가 슈레더를 몰살하는 게 맞을까?

글쎄. 지금의 나는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알짱거리는 말벌을 없애자고, 벌통을 건드리는 게… 과연 맞는 건가.’

슈레더를 몰살하면 양호성과의 마찰이 거의 확정 이벤트가 된다.

척을 지는 대상이 협회 비밀조직에서, 헌터협회 전체로 확장되는 것이다.

‘전생에야 워낙 감시가 빨리 붙었으니. 몰살이 옳은 판단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1차 붕괴가 일어난 뒤라 더더욱 고민된다.

정작 장수혁도 발바닥 불나게 바빠져서 감시에서 빠졌다. 지금은 슈레더 소속 똘마니 몇이, 멀찍이서 주점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뿐.

놈들은 전생처럼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뿜지도 않았다.

‘현재로선 슈레더가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아.’

괜히 긁어 부스럼으로 더 큰 위협을 초래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에 판단이 제대로 서질 않았고. 그래서 아직까진 감시 인원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중이었다.

던전 붕괴 막으러 출동할 때만 좀 조심하면… 현재로선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야, 약간은 다행이긴 한데…….”

“다행이긴 한데. 뭐.”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니까요. 괜히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해지는 건… 좀.”

이세라는 걱정스런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걱정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직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뭔가 이변이 일어나면, 내가 곧장 움직일 거다.”

“네. 그렇군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라고 너한테만 말해준 게 아니야.”

“네. 그렇죠. 저도… 믿을게요.”

이세라가 위태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도통 못 미더운 새끼를 어떻게든 믿어주고 싶어 하는 행색. 취준생 10년 차 아들을 응원하는 어머니 같아서 뭔가 짠하다.

답례로 나도 뭐라도 좀 말해주고 싶었다.

“너희는 내가 지켜. 내 목숨을 걸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낼 거다.”

내 진심을 그대로 내뱉었다.

푸흡. 이세라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리더니 얼굴을 슬쩍 붉혔다.

“그, 그런 말. 직접 내뱉으면 쪽팔리지 않아요?”

“음?”

“뭔 전대물 주인공이에요? 듣는 제가 다 오글거리는데요. 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지만요!”

“…음.”

순수한 진심이라 그대로 내뱉은 건데. 대놓고 지적받으니 좀 쪽팔려지긴 한다.

나는 거기서 더 추하게, 구구절절 변명을 내뱉기 시작했다.

“너희 셋 중 하나라도 죽으면 나도 같이 자살할 거다. 그런 의미였어.”

“아니, 도원결의예요?! 엄청 살벌한 말이었네?!”

“너무 진지하게는 듣지 말고. 그런 마인드를 박고 임한다 이거지.”

“그, 그렇죠? 난 또…….”

이건 거짓말이다.

진짜로 자살해서 리셋 할 생각이다.

적어도 이 셋 정도는 살려내지 않으면. 내 1032번의 루프가 퇴색해버릴 것 같다. 적어도 나 자신은 그렇게 느낄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생에서 끝장을 보겠다. 지금은 그것이 눈앞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걸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는 과제가 하나.

‘…붉은 용.’

아직 소재조차 모르는 마지막 육사도. 목 잘린 붉은 용.

이번 생에서 반드시 찾아내겠다.

“그러면 우선.”

파지직!

인벤토리를 열고 토식이를 꺼냈다.

토식이는 인벤토리를 이제 거의 숙소처럼 사용하고 있다. 병든 닭 마냥 꾸벅대며 딸려 나오는 모습이 퍽이나 처량해 보였다.

“으엉? 뭐, 뭐냐 또?”

토식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끔벅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곧장 용건을 말했다.

“깨자마자 미안한데. 일이다.”

“일? 무슨 일.”

“확인 작업을 해줘야겠어.”

“누구를.”

“이세라. 강서윤. 강수아.”

“아……?”

이 셋 중 하나가 육사도의 모체일 가능성.

등잔 밑이 어둡다고. 혹시나 모를 그 사태부터 미연에 방지하기로 했다.

나는 주점 안의 세 여자를 쳐다보며, 한껏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제 믿던 도끼한테 발등 찍히는 건… 신물이 난다고.’

수아에 얽혀 있는 비밀만 해도 골머리를 잔뜩 썩는 중이다.

발등 처맞을 거라면. 차라리 빨리 맞는 게 낫다.

“얘들아.”

그런 각오로 나는 모두를 불렀고.

한껏 진지하게 굳힌 얼굴로, 조용히 권유했다.

“담배빵 한 대씩만 맞자.”

죽빵 맞을 뻔했다.

옆에서 토식이가 설명해줘서 간신히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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