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
―퀴익! 퀴오오오!!
골통이 윙윙 울릴 정도로 괴성이 연신 쏟아진다.
잡아먹히던 사람, 도망치던 사람. 그리고 잡아먹던 키메라들까지. 모두의 주목이 순식간에 쏠릴 정도의 거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키에에에에엑!!
콰아앙!
거대한 땅울림과 함께 백족이 지면에 착지했다.
크기 자체는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몸길이만 수십 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지네가, 마치 기지개를 켜듯 온몸을 꿈틀거린다.
“아, 아. 아아……!”
“뭐야. 저, 저게.”
그 크기가 주는 위압감에 압도된 것인가. 도망치던 사람들 중 일부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서히 다가오는 거대한 죽음을 관망할 뿐이다.
―키에에에에엑!!
쿠구구구구!
문득 백족의 포효가 터졌고. 놈은 수많은 다리를 발발거리기 시작한다.
놈의 거대한 원통형 몸체가, 순간적으로 돌진해왔다.
“끄, 으아……!”
“온다! 온다아아아!!”
콰자자작!!
순식간에 전방으로 쏠리는 거체. 지나가는 길에 있던 모든 것이 속절없이 분쇄당한다.
약해 빠진 사람의 몸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어트랙션들이 마치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무너져 내리며 더 큰 혼란을 초래했다.
“꺄아아아악!!”
“끄아아악!!”
내가 본격적으로 나선 건 바로 그때쯤이었다.
어깨에 짊어진 이브를 툭툭 두들겼다. 그녀가 자기를 부르는 것을 깨닫고 퍼뜩, 온몸을 떨었다.
“으엥, 왜?”
“변신. 혹시 가능하냐.”
“그러엄. 안 될 거 없지?”
그렇다면 더더욱 금상첨화다.
나는 백족의 행패를 오래 놔둘 생각이 없으니까.
“지금 바로 부탁한다.”
“응. 알았어!”
파지직!
투명화 스킬을 해제했다. 이브도 조심스럽게 광학미채 슈트의 후드를 벗었다.
완전히 드러난 그녀의 이빨이 내 가슴께로 직행했다.
“아음.”
콰자작!
성장한 뒤로 한층 길어진 송곳니가 내 살갗을 꿰뚫는다.
필요 이상으로 엄청난 혈액이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진다. 그 양은, 정확히 치사량의 50% 정도이리라.
“후우.”
쿠르르륵!
변형은 이제 순식간이었다.
나는 투구 안에서 탈력감에 찬 한숨을 슬쩍 쉬었다.
[스킬 발동: 피어 블러드]
그리고 곧장, 현시점에서 내 최강의 스킬을 영창했다.
푸화악!
두 눈을 중심으로 막대한 탈력감이 발생했고. 온몸에서 뻗어 나온 세찬 혈류가 눈앞의 일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처럼 많이 모을 필요도 없겠지.’
백족의 상태창은 진작에 확인해봤다.
전형적인 1차 붕괴급의 던전 마스터. 대단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차라리 비슷한 스펙으로 여러 마리가 튀어나오는 드래곤들 쪽이 더 힘들었을지 모르겠다.
“발사.”
콰아앙!
한계를 모르고 응축된 혈류가 전방으로 발사되었다.
한 줄기의 굵직한 붉은 궤적. 강렬한 적색 유성이 허공을 순식간에 가른다.
―크헥……?!
워낙 빠른 탄속이다. 백족은 그것에 채 반응하지도 못했다.
푸화악!
놈의 거체 정중앙. 붉은 입자포가 사정없이 갑피를 찢어발기고, 놈을 관통하다 못해 두 토막으로 잘라버렸다.
―퀘에에에에에엑!!
처절한 고통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 시점에서 잠깐 눈앞의 붉게 물들더니, 이내 완전히 암전.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스킬 사용의 백래쉬가 왔음을 실감했다.
―크르르… 크기기긱!
쿠궁, 쿠과광!
완연한 어둠으로 잠겨버린 세상 속. 백족이 몸부림치는 굉음만 간간이 들려온다.
그렇게 대충 3초 정도가 지났다.
“후우.”
나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정상으로 돌아온 시야에 다시 한번 장송의 백족을 담았다.
―크헥… 키긱… 키이이이!!
백족의 절단면에서 푸른 체액이 벌컥벌컥 쏟아졌고. 완전히 토막 난 육체는 추하게 지면을 발발 기었다.
우드득, 뿌득! 그리고 놈의 머리는, 주변의 생물을 닥치는 대로 뜯어먹고 있었다.
―키에에엑!!
“끄악! 아아아악!!”
사람과 키메라 할 것 없이. 그야말로 전부였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놈의 입 안. 주인을 알 수 없는 살점과 뼛조각이 부서지고 뒤섞인다.
―그에에에에엑!!
어느 순간 놈이 쩌렁쩌렁한 포효를 내질렀다.
쿠르륵, 구륵! 그러자 토막 났던 상하체에서 살점과 뼈가 솟아나더니. 이내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다시 들러붙기 시작한다.
“이걸 재생하네.”
비주얼이나 끈질김이나 역겨운 나머지 중얼거리는 한편.
꾸드득, 나는 주먹을 있는 힘껏 틀어쥐었다.
‘어딜 멋대로.’
끈질긴 건 끈질긴 거다만. 내가 저대로 재생을 마치게 둘 리가 없다.
나는 맹렬하게 회전하는 혈류의 주먹을 내질렀다.
[스킬 발동: 스파이럴 블러드]
콰아앙!
거대한 나선의 혈사포가 백족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꽂혔다.
놈의 단단한 갑피와 그 안의 여린 속살까지. 머리통 전체가 흔적도 없이 갈려나갔다.
워낙 부지불식간이었다. 놈은 일말의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
쿠당탕!
대가리가 잘려나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백족.
가까스로 다시 붙은 길다란 육체였건만. 놈의 몸은 다시 갈가리 찢겨나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일단 눕히고.”
콰지직!
백족의 거체는 이제 아까처럼 격렬하게 저항하지 못했다.
직전의 발버둥으로 몸통 일부가 롤러코스터 레일에 걸쳐졌다. 그대로 축 늘어진 것이, 외풍 건조 시키는 과메기를 연상시킨다.
‘이제 최후의 저항이 남았던가.’
전생에 이놈을 만났던 때를 반추해본다.
이 지긋지긋한 새끼는 머리를 잘랐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제2, 3의 머리가 몸통 여기저기서 우후죽순 튀어나와 깜짝 2페이즈를 벌일 공산이 크다.
“안 되지.”
키리릭!
사복검을 채찍 형태로 길게 늘어뜨렸다.
롤러코스터 레일 위로 가볍게 착지. 순식간에 달려 나가 백족의 육체가 걸쳐있는 곳까지 접근했다.
“2페이즈 컷.”
콰지직! 뿌드득!
오른손을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통소시지 썰어내듯, 놈의 몸통을 미친 듯이 난자해 수백 토막으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으, 아아아!”
“뭐, 뭐야. 뭐 하는 건데……?”
예민해진 청력에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포착된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내가 쏟아내는 광기 어린 행동에 다시 한번 공포에 질린 것이다.
“이쯤이면 됐겠지.”
그러든 말든. 나는 뿌듯하게 중얼거리며 끝까지 작업을 끝냈다.
원본의 형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잘게 다져진 고깃덩어리들의 집합체가 내 아래 있었다. 저리 조져놨는데도 다리들이 꿈틀거리는 게 놀랍다면 놀랍다.
[제84던전 ‘진화의 끝자락’의 던전 마스터, ‘장송의 백족’이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그 미미한 움직임까지 완전히 멈춘 후. 비로소 던전 폐쇄의 패널이 떠올랐다.
급한 불은 껐다는 생각에 한숨 돌렸고. 직후 곧바로 태세를 재정비했다.
키이잉! 마력과 생명력을 한껏 연소시킨다.
“나도 2페이즈 가볼까.”
아직 내 일은 끝나지 않았다.
게이트가 닫혀서 후속 병력이 충원되지 않을 뿐, 이미 튀어나온 키메라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지.
‘부속 장비 소환.’
끌어올린 마력으로 연상을 보조한다.
키키킹!
등갑 너머로 모여든 마력이 내 연상에 따라 실체를 갖기 시작한다. 깃털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벼려진 거대한 날개의 형상이다.
[스킬 발동: 팬텀 베인]
곧바로 스킬을 영창했다.
파사삭!
수많은 깃털들이 날개의 뼈대에서 흘러나와 허공을 팔랑팔랑 유영한다. 나는 마력 대신 생명력을 끌어올려, 깃털마다 하나씩 주입했다.
깃털들이 마치 별자리처럼, 새파란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는다.
“…와아.”
“세, 세상에.”
그 광경에 넋이 나간 이들이 간혹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허겁지겁 포식을 서두르는 키메라들에게 뜯어 먹혔다. 옆에서 사람 머리통이 으적으적 씹히는 모습을 직관한 다음에야 다들 현실로 돌아갔다.
―퀴이이이!!
―크레레레렉!!
몇몇 키메라는 감이 좋은 건지 위협적인 울음을 쏟아냈다. 날 줄 아는 놈들은 비행해서 나를 직접 공격해오기도 했다.
물론, 내가 오른손 몇 번 휘두르는 걸로 전부 제압해버렸다.
―크에에에엑!!
“조용히 하세욧.”
―쿠겍!
촤자작!
꿀밤 때리듯 가볍게 내리친 손날. 그에 따라 매섭게 쏟아지는 칼날의 폭포에 키메라들이 추풍낙엽처럼 썰려나갔다.
그 과정이 한동안 반복됐고. 곧 내게 달려드는 키메라가 완전히 없어졌다.
“오래도 걸리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깃털의 준비가 끝났다.
쉬리릭! 내 시선에 따라 깃털들이 빳빳하게 일어서나 싶더니. 일제히 내 시선 방향을 정확히 겨냥했다.
나는 손을 슬쩍 들어 올렸고.
“가라.”
피피피핑!!
모든 깃털을 일제히 사출시켰다.
살의로 가득 차있는, 수천 다발의 섬광폭격이 시작되었다.
―크에에에엑!!
―키악! 키기기기긱!!
키메라들의 비명이 도처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일정한 방향으로 쏟아지던 깃털들이 어느 순간 전방위로 방사되었고. 키메라들을 향해 집요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악! 아, 아파!!”
“끄아아아악!”
“X발, 나, 나는 왜……!”
비례해 사람들의 절규도 한층 늘어났다.
키메라들이 위기의식을 느껴서 사람들을 잡아먹었을까?
아니다. 내가 쏟아내는 빽빽한 깃털의 폭격에 휘말려 희생된 것뿐이다.
‘계속한다.’
약간의 희생은 감수하겠다.
나는 더욱 난폭하고 더욱 빠르게, 깃털로 사방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푸화악!
이제 인간인지 키메라인지도 모를 살과 뼈. 그리고 대량의 피보라가 도처에서 난무한다.
―퀘에에에에엑!!
그렇게 마지막 키메라의 몸통을 깔끔하게 둘로 갈랐고. 놈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대로 절명했다.
스르륵. 할 일을 마친 깃털들은 그대로 마력덩어리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일단 대충은 끝났는데.”
눈에 보이는 모든 키메라를 빠짐없이 척살했다.
그사이 도망치거나 서울월드 밖으로 빠져나간 키메라가 있을지가 관건이다. 잔당처리는 힘들진 않지만 귀찮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뭐… 거기부턴 헌터협회가 알아서 하겠지.’
내가 전력을 발휘하는 건 여기까지다.
아직 1차 붕괴의 잡몹들이다. 협회 떨거지들 선에서도 충분히 방어 가능하다.
‘어디.’
직후 삐빅. 패널을 띄워 시간을 확인해봤다.
1차 붕괴로 튀어나온 ‘진화의 끝자락’을 제압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그 정확한 타임 어택을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오.”
시간을 확인해본 나는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오후 2시 34분. 처음 게이트가 붕괴하고 채 1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84던전 상대로 이 정도면… 유래가 없는 대선방인데.”
결과는 실로 흡족했다.
몬스터들이 전체적으로 약체화된 걸 감안해도 파격적인 시간단축이다. 일례로 직전에 폐쇄했던 5차 붕괴의 제84던전은 최소 수 시간이 걸렸다.
몇 시간이 고작 15분으로 단축된 거다.
“흐음.”
나는 혈천갑으로 둘러싸인 손을 쥐락펴락 했다.
이내 슬쩍, 피처럼 새빨간 갑주의 표면을 슬쩍 문질러봤다.
‘스킬들이 터무니없이 세긴 하네.’
오랜만에 내가 강해졌다는 실감. 성취감을 느꼈다.
스탯이 맥스 수치를 찍은 뒤로는 성장이 눈에 띄게 더뎌졌는데.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 아아. 사, 살았다. 살았어어어!!”
“으아아앙! 어, 엄마. 엄마아!!”
문득 발아래에서 어수선한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만신창이가 된 생존자들이었다. 살아남은 것을 기뻐하는 이부터 죽은 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이 그곳에 드글거렸다.
“저, 저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뭐야?”
그들 중 일부는 내게 관심이 지대했다.
더 이상 ‘레드 저거너트’ 따위의 히어로 행세는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아무짝에 소용없는 짓이었다는 걸 지금은 다 아니까.
그러니 저들에게 쇼맨십을 보여줄 필요도, 없다.
“…오래들 살아남아라.”
그저 염불처럼 중얼거렸고.
파지직!
투명화 스킬을 사용해 그들의 시야에서 숨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