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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78화 (178/235)

178화

<103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1)>

“하아… 뭐, 뭐야. 너였냐?”

내 얼굴이 드러나자 강서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그녀가 쌍심지를 확 치켜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현관으로 평범하게 들어오면 덧나냐? 팍 씨! 존나 깜짝 놀랐잖아!!”

퍼퍽!

강서윤이 퍼뜩 달려들어 내 어깨를 마구 두들긴다.

하긴. 내가 헌터협회가 쳐들어오네, 어쩌네 겁을 잔뜩 주고 갔으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대로 분노로 바뀐 듯하다.

‘이쪽은 당장 대화가 안 통하겠고.’

원숭이처럼 날뛰는 강서윤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슬쩍 돌아간 시야 끝에는, 여전히 미미하게 웃고 있는 이세라가 있다.

“별일 없었냐.”

“서윤 씨가 화났다는 거 빼면요?”

“없었구만.”

“네. 다행히도요.”

이세라와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나의 의지도, 이세라의 의지도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 불쑥 끼어든 불청객 때문이었다.

불청객… 수아가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오빠.”

그리고 또박또박 나를 불렀다.

그 한 마디로 집안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변했다.

강서윤도 그것을 느꼈는지 발광을 우뚝 멈췄고. 이세라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

“…….”

약간의 침묵이 흐른다. 모두의 귀추가 우리의 대치에 주목돼 있다.

그리고 수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빠. 지금까지 뭐 하다 오셨어요?”

“몬스터 사냥.”

“몬스터… 사냥이요?”

“TV 틀어봐라. 슬슬 내가 뭐하고 왔는지 떠들고 있을 거니까.”

“TV…….”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수아.

곧 그녀의 시선이 소파 위의 리모컨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세라는 이 흐름조차 미리 읽었는지, 이미 리모컨을 쥐고 있었다.

“어디, 볼까요?”

이세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전원을 눌러 TV를 켰다.

스르륵.

나와 이세라, 강서윤과 강수아까지. 대화에 관심 없는 던전 생물 듀오를 제외한 모두가 TV를 주목했다.

내 예상대로 긴급 보도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대기 기자. 현장 상황은 어떤가요?]

오랜만에 김대기 기자 면상을 볼 수 있었다.

쟤는 팔자가 얼마나 꼬였길래 해운대까지 가서 저 지랄을 하고 있냐. 반가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불쌍하기 그지없다.

[혀, 혀, 현장은… 마, 말도, 안 되게… 우윽. 아. 아아……!]

화면 속 김대기 기자는 넋이 완전히 나갔다.

처참한 파괴현장에 헛구역질 하느라 멘트도 못 치고 있었다.

나름 베테랑 기자로 보이는 그였지만. 아무리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라도, 지금 해운대 급의 참상은 당연히 경험이 전무할 테다.

‘구획 전체가 사라졌다시피 했으니.’

시야를 어디로 돌려도 새빨간 피로 점철됐던 게 떠오른다.

어림짐작만 해도 구 단위 이상의 피해다. 사망자는 적게 잡아도 수십만 대를 예상 중이다.

공교롭게도 그 지분의 절반 이상은… 광대가 아니라 나한테 있다.

“…대를 위한 희생이지.”

스스로 변호하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강서윤이 그런 내게 의문스런 시선을 슬쩍 보내왔고. 반면 이세라는 시선만으로 멈추지 않았다.

“좀, 자세하게 설명 가능하신가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온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해운대에서 던전 마스터가 튀어나왔다. 그래서 내가 막고 왔지.”

“…그게 끝?”

“그래. 끝.”

옆에서 지켜보던 서윤과 수아 자매가 ‘그게 뭐야?’ 싶은 시선을 열렬히 보내온다.

정작 질문했던 이세라는, 고개만 살짝 갸웃거릴 뿐이다.

“그 던전 마스터가 해운대에서 튀어나올 줄 알고 계셨군요?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정용 씨는 해운대로 가셨으니까요.”

“맞아.”

“어떻게요? 전생에서 보고 오셨나요? 정작 저는 안 보이던데.”

“내가 꺼냈으니까.”

“…네?”

“그 던전 마스터를 세상에 튀어나오게 만든 게 나다.”

“…….”

“그래서 알 수밖에 없지. 꺼낸 게 나니까.”

이번엔 수아와 서윤, 그리고 이세라가 모두 인상을 바짝 찌푸렸다.

해괴하게 뒤틀린 시선이 세 방향에서 열렬히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오해를 종식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당연히, 꺼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

그 이유를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구절절한 사정 설명이 이어진다. 변명이라 칭해도 좋다.

아무튼 나는 말할 수 있는 범위, 그녀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 상세히 설명해줬다.

“…으음. 아하.”

“그, 그렇군요. 그렇다면야.”

끝까지 들은 강서윤과 이세라의 반응은 그랬다.

강서윤은 떨떠름하지만 일단은 납득이라는 느낌. 반면 이세라는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미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일단 잘 넘어갔나.’

내 설명 실력이 여기까지 발전했다. 감개무량하군.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려는 찰나.

“…아니야.”

수아 쪽에서 클레임을 걸어왔다.

수아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쥐어 싸매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떨리는 눈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오, 오빠는. 제가 아는 한정용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

수아가 연신 고개를 휘저으며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아니라네. 대꾸해줄 말이 애매해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수아가 넋두리를 계속 늘어놓았다.

“…오빠. 뭐 좀 물어봐도 돼요?”

“그래라.”

“오빠의 말대로라면요. 오빠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어나갈 걸 알면서, 그 던전 마스터를 불러냈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맞아. 실제로 알면서 소환했다.”

흠칫. 수아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워낙 즉답이라 그런가. 서윤이나 이세라도 약간은 놀란 기색이었다.

다만 놀랐다가도 결국은 수긍하는 두 사람과 달리, 수아는 끝까지 납득하지 못했다.

“어떻게…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사람들이 죽을 걸 알면서, 어떻게!!”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했냐. 수아야.”

“어, 네……?”

수아는 엄청나게 당황했다.

내가 역공할 거라곤 상상도 못해봤다는 기색.

“내가 가만히 있으면 꼼짝없이 한 달 후에 세상이 끝장 나. 뭐라도 해봐야 했다.”

그녀야 놀라든 당황하든, 나는 시선을 더욱 날카롭게 치켜뜰 뿐이다.

“그리고 이게 지금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고. 최선의 선택지다.”

“그, 그야. 그, 그렇다고… 하셨죠.”

“내가 사람들 쳐죽이고 싶어서 소환했다고 믿고 싶은 거냐. 수아야.”

“그, 그럴 리가……!”

“그래. 좋아서 한 일이 아니야. 전혀 아니지.”

“……!”

애꿎은 사람들 죽는 건 싫다. 이건 분명한 팩트다.

근데 옛날처럼 엄청나게 싫어하냐 하면, 사실 이젠 그 정도는 아니다.

‘딱히 아무 생각 없지.’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다.

어차피 생물인 이상 결국 다 죽는다. 내 기준으론 죽을 수 있으면 오히려 축복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깊은 속내까지 밝힐 필요는 없을 테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게 베스트였을까. 나은 방안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좋아. 뭐라도 좋으니 말해. 수아야.”

“그, 그, 그게.”

“질타하고 싶으면 우선 피드백을 해. 해결책을 동반하지 않은 비판은 비난일 뿐이다.”

“으으……!”

수아는 이제 울상이 되어 울기 직전이었다.

내 말투가 전에 없이 차가운 것도 있고. 지금껏 병신같이 져주기만 하던 한정용이, 기를 쓰고 반박해서 더더욱 기가 눌린 거겠지.

‘패 죽여도 전처럼은 못 대하겠네.’

지금의 내가, 자기가 알던 한정용이 아니라고 했던가?

심히 통감한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다.

‘지금의 강수아 너는, 이미 내가 알던 강수아가 아니지.’

그래서 이런 하찮은 기 싸움도 진심이 된 거다.

정체불명의 너에겐 가위바위보도 져줄 생각이 없다. 강수아.

“아무튼, 영양가 없는 대화는 여기까지 하자.”

내 쪽에서 먼저 일축해버렸다.

이 이상 수아와 말 섞어봤자 서로 비호감 스택만 복리로 쌓일 게 뻔하다. 시선을 완전히 그녀에게서 돌려버렸다.

“뭐야. 벌써 끝이냐? 주먹다짐이라도 하나 싶었더니.”

“아, 아빠. 엄마랑 싸워? 싸우지 마아…….”

시선을 돌린 곳엔 공교롭게도 토식이와 이브가 나란히 서있었고. 두 사람이 사이좋게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이브는 걱정스러운 행색. 토식이는 좋은 구경거리 놓쳐서 아쉽다는 행색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어색하게 침묵을 지키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나는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에 곱창 난 분위기에 난감해하던 찰나.

“…장소를 바꾸는 정도라면 가능했겠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슬쩍 돌려봤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세라였다.

그녀의 씁쓸한 미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해운대는 해안이 가깝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그게 왜.”

나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시선을 느꼈는지 이세라가 계속 말했다.

어린애 타이르듯이 나긋나긋한 어조다.

“사람들이 밀집된 내륙 쪽보다, 사람이 적은 해안가 같은 곳을 찾아내서 던전 마스터를 풀어놨다면. 인명 피해가 훨씬 줄지 않았을까요?”

“…그건.”

예상외의 지적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지. 솔직히 말하겠다. 엑스트라들을 진심으로 걱정하지 않다 보니, 딱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게 맞겠다.

그런 내 생각을 앞지르듯 이세라가 고개를 저었다.

“급해서 미처 생각을 못했다면 할 말은 없구요.”

“…….”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인명 피해를 줄일 방법은 있긴 했네요?”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사실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옳았다.

“…잠깐.”

아니. 그게 아니다.

방법이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그런 수가 있었구나.”

괜히 말대답하기보다, 파지직! 인벤토리에 손을 거칠게 쑤셔 넣었다.

퍼뜩, 이세라가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서윤 씨! 저거 막아요! 빨리!!”

그리고 비명처럼 외쳤다.

강서윤은 영문도 모른 채 “어, 으엉?” 하는 탄성을 내뱉었지만. 이내 이세라의 절박한 분위기를 읽고 내게 달려들었다.

파팍!

순간이동으로 접근한 강서윤이 내 손을 붙잡았다.

“…야. 한정용.”

그리고 강서윤도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발견했다.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었고, 으르렁거렸다.

“그걸로 뭐 하게.”

내 손엔 예광을 발하는 블라이스의 단검이 들려있다.

싸늘한 날붙이의 등장에 분위기가 한껏 얼어붙는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수아가 겁에 질린 듯이 숨을 삼켰다.

“야. 묻잖아. 뭐 할 거냐니까!”

꾸드득. 강서윤이 내 손목을 더욱 세게 틀어쥐었다.

물어보는 게 아니고 혼내는 어조다. 그녀는 이미 내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쓸데없이 발악하지 않았다.

“자살.”

“자, 살? 왜! 왜 갑자기!”

“내가 지금 자살하면 모두가 산다.”

“뭐……?!”

뜬금없는 소리에 강서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서윤이의 면전에 태연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광대… 그 던전 마스터와의 용건은 끝났어. 그리고 그놈은 내가 회귀해서 시간이 돌아가도, 다시 부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 그게… 정말이야?!”

“거짓말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광대는 까마귀처럼 스킬을 남기고 죽어버린 케이스.

전에 토식이는 분명 다시는 까마귀를 만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으로 광대도 다시 만날 이유가 없을 테다.

이미 광대의 고유 스킬 <커튼콜>은, 내가 탈환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죽어서 시간이 돌아가면. 해운대의 참사 자체가 사라진다. 하나도 죽지 않아도 된다고.”

“아아. 그, 그게 그렇게 되나……?!”

강서윤의 표정이 일순간 밝아졌다.

어디까지나 일순간이다. 직후 다시 우장창 구겨졌다.

“그래서. 사람들 살리겠다고, 네가 지금 죽겠다는 거 아냐!!”

“그래.”

“야! 왜 그렇게 즉답인데?! 고, 고민하는 척이라도 좀 해봐!”

“고민할 건덕지가 어디 있냐.”

“뭐가 어째……?”

계속 태연하게 대꾸하자 이젠 강서윤이 뒷걸음질 쳤다.

난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나 하나 죽으면 수십만이 살 수 있잖냐. 이게 무조건 맞지.”

“아니. 그, 그치만! 네가! 네가 죽잖아! 죽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너 자신이라고!!”

“난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노 코스트로 극한의 이득을 본다니까.”

끝까지 어조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주장했다.

서윤이의 어깨가 잘게 떨린다. 이내 질린 듯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한정용. 너 진짜… 미, 미쳤어. 완전 미쳐버린 거야? 어?!”

“아마 맞을걸.”

“맞긴 X발아! 진지하게 대답해! 죽는 게 쉽냐고!!”

“난 계속 진지했고. 죽는 건 쉽지.”

“읏……!”

“너도 1032번 죽어봐라. 나처럼 안 되나.”

거기까지였다.

이번 강서윤은 전처럼 ‘쉽게 자살하지 마라’라고, 끝까지 다그쳐주지 않았다.

“하. 하… 하아.”

은은하게 퍼지는 내 광기에 완전히 질린 것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질근 깨물고, 분한 듯이 내게서 시선을 피하더니.

주르륵. 눈물을 한 움큼 쏟아냈다.

“X발… 몰라. 그러든가! 어디 네 X대로 해봐라. X대로!!”

그리고 설득하길 포기해버렸다.

당연히 이렇게 되겠지. 대충 결과는 예상하고 있었다.

‘우는 것까진 조금 예상외긴 한데.’

어쨌든 서윤이의 신념상 살릴 수 있는 생명을 못 본 척하는 건 말이 안 되고. 지금은 누가 봐도 내가 희생하는 게 교환비가 개사기다.

베테랑 헌터인 그녀는, 피치 못하게 목숨의 저울질이 능숙할 테다.

“그러면 이제 불만은 없는 걸로.”

주위를 빙 둘러보며 중얼거렸고. 단검을 들어 올려 내 목에 정조준했다.

그리고… 쫘아악!

불꽃 싸대기가 내 뺨에 적중했다.

“누구 맘대로요. 정용 씨.”

어느새 강서윤 앞에 이세라가 들이닥쳐 있었다.

그녀는 내 뺨을 때렸던 손을 털어내더니. 발표하는 학생처럼 번쩍, 그 손을 들어올렸다.

“저요. 이의 있음!”

학생 같다는 말은 좀 수정해야겠다.

모 재판게임 변호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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