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103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2031년 11월 29일. 1차 게이트 붕괴의 마지노선이 되는 날이다.
어떻게든 무사히 오늘까지 맞이한 지금. 나는 주위를 스윽 둘러봤다.
“자. 여기로 움직일 생각이셨죠?”
“아앗, 뭐야! 또 읽혔잖아!”
먼저 이세라와 강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배경은 이미 우리 집의 낡은 거실이 아니었다.
무려 이세라의 칵테일 바. 운치 있는 조명 아래. 두 사람은 테이블을 보고 마주앉아 체스를 두고 있었다.
“아하하. 체스로 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니까요.”
“그러게요. 진짜 수를 전부 읽어버리는구나……!”
“그럼요. 예언자니까요.”
“존나 신기해요 언니! 실제로 당하니까 더 신기하다, 이거!”
사실상 대국은 거의 끝나있었고. 지금은 완패한 강서윤과 대승한 이세라가 미소를 머금은 채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분위기는, 며칠 전의 어색함이 거짓말처럼 화기애애하다.
‘저쪽은… 저렇다 치고.’
거기서 슬쩍, 오른쪽으로 좀 더 시선을 옮겼다.
카운터 쪽의 스탠딩 테이블이었다. 수아와 이브, 그리고 토식이가 의자에 쪼로록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으헤헤~ 날아간다아아! 엄마아~! 나 날아가고 있어엉~!!”
“아니, 이브. 술을 너무 마셨어……!”
셋은 한창 술잔을 비우는 중이다.
수아야 원래부터 술을 잘 못하니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이브는 제멋대로 폭주해서 도수 높은 술들을 차례로 비웠고, 현재는 인사불성이 되어버렸다.
“크핫. 볼만하구만. 이것도 나름 즐거워.”
발광하는 이브 옆에서 토식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째릿, 뒤치다꺼리를 하던 수아는 당연히 쌍심지를 바짝 세웠다.
“토식아. 그런 말이 나와?”
“으음? 뭐가 말이냐. 인간 계집.”
“술은 네가 먹였잖아. 너도 말리는 것 좀 도와!”
“거절하지. 애초에 왜 말리는 거냐? 본인이 즐겁다는데. 한 번뿐인 인생, 즐겁게 살다 가면 된 거 아니겠냐?”
“야. 너 진짜……!”
이세라와 강서윤. 강수아와 이브와 토식이까지.
내 영원회귀의 주연들이 왁자지껄 잡담을 하고 있다.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간혹 보이지만,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태평하고 목가적이다.
‘정말 놀랍도록… 천하태평이구만.’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을 수준이다.
어제 해운대에서 그 대참사가 있었다고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어쩌다 이렇게 됐지.’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부터 든다.
난 일이 이렇게 된 과정을, 처음부터 반추해보기 시작했다.
* * *
이번에야말로 광대를 시체로 만든 직후였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일거에 내쉬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무형검을, 다시 원래 크기로 되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긴장이 쭉 빠진다.
“허억, 헉. 커헉……!”
전량의 마력과 체력을 일거에 쏟아부어서 그런가. 한동안 탐욕스럽게 숨을 빨아들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탈력감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히든 던전 마스터 ‘주저앉은 광대’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삐빅. 내 앞에 떠오른 패널이 있었다.
광대 사냥의 보상 패널이다.
[고유 스킬 ‘커튼콜’을 획득하셨습니다.]
육사도 <주저앉은 광대>의 사냥 보상은 스킬이었다. 아무래도 전에 사냥했던 ‘까마귀’와 비슷한 케이스인 듯하다.
스킬은 대충 이런 느낌이다.
[스킬 정보]
[스킬명: 커튼콜 (S급)]
[타입: 토글형/버프]
[효과: 3분 간 ‘피안’의 세계로 초대받는다.]
[효력 범위: 시전자 반경 50m, 원기둥 형태.]
[상세: 잊혀진 던전 마스터 ‘주저앉은 광대’의 처치 보상. 광대의 고향이자 이면의 차원, ‘피안계(彼岸界)’로 향하는 장막을 들춰낸다. 시전자는 이 세계에 발을 담그는 동안 일체의 물리적/마법적 간섭에 면역 상태가 된다. 재사용 대기시간은 30분이다.]
S급의 고유 스킬.
이름은 <커튼콜>.
기능을 요약하면, 3분간의 완전한 피격 면역.
“X발 뭐냐. 개쩐다.”
반사적으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정도로 대단한 개사기 스킬이다. 패널을 읽고 또 읽고,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알아낸 뒤에야, 가까스로 다시 목소리가 나왔다.
“피안계… 라.”
갑옷. 검. 방패. 불꽃. 그리고 심장.
이게 토식이가 말했던, 내가 얻어야 할 육사도의 유물들이다.
‘이건, 방패겠지?’
이 스킬은 기능을 봤을 때 ‘방패’에 가까워 보인다.
갑옷도 검도 불꽃도 문자 그대로의 물건이 나왔는데. 이것만 유독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이건 왜지.’
잠깐 고민해보다가, 이내 납득했다.
하긴. ‘최강의 방패’가 아니면 이 스킬을 달리 뭐라고 칭하면 좋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대체할 말을 모르겠긴 하다.
“한 번… 바로 써볼까.”
자고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다.
스킬들이 처음 사용하는 즉시 숙련되는 시스템이라곤 하지만. 닥쳐와서 부랴부랴 숙련되는 것과 미리 알고 전투에 임하는 건 안정감이 다르다.
‘따로 대가도 없는 것 같고.’
스킬 발동에 필요한 특수 코스트는 없다.
혈질계 스킬이나 장비처럼 피를 빨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케이스면 아마 마력이 오지게 빨리는 경우일 거다. 던전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등가교환. 날로 먹는 게 단연코 전혀 없으니까.
“얼마나 빨리는지를 미리 알아놓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손을 쥐락펴락 해보며 중얼거렸고.
꾸드득!
어느 순간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커튼콜.”
의지를 집중하고. 육성으로 스킬명을 왼다.
콰콰콰콰!
곧장 온몸에서 마력이 뿜어져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상상 이상의 막대한 양이었다.
[스킬 발동: 커튼콜]
푸화악!
갑작스럽게 오른쪽 눈과 귀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어닥치나 싶더니, 물풍선 터지듯 핏줄기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키잉!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오른쪽 시야가 피로 새빨갛게 물들고, 이지러진다.
“크윽……!”
황급히 눈을 쥐어 싸맸다. 필사적으로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상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어느 순간.
“아.”
스킬의 사용법이 모두 이해되었다.
설명창에서 봤던 ‘피안’이라는 이면세계가 뭔지. 그리고 그 세계를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까지… 전부, 한꺼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래서였구나.”
이해한 뒤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입가엔 쓴웃음이 걸렸고. 뇌리 한편에는, 애덤 크로스의 최후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래서… 그런 게 가능했던 거였냐.”
그가 개발했던 스킬 재머.
그리고 전에 사용했다던 고성능의 순간이동까지.
이 스킬을 이해한 지금에서야, 모든 아귀가 맞아들었다.
‘피안 세계. 이게 관건이었다.’
나는 질끈 감았던 오른쪽 눈을 슬쩍 떴다.
시뻘겋게 물든 시야 너머. 왼쪽 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비치고 있다.
―꺄아아아아악!!
―뜨, 뜨거워… 아파! 사, 살려줘!!
―끄아악! 카하아아아악!!!
오른쪽 귀로는 끊임없이 절규가 들려왔다.
내 오른쪽 반신 앞에 펼쳐진 건 지옥의 풍경. 그 자체였다.
‘이게… 피안계.’
분명히 왼쪽 눈과 풍경 자체는 똑같이 비친다.
하지만 실제론 눈앞에 없는, 세상을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타오르는 겁화. 그리고 화염 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절규가 추가돼 있었다.
‘세계의 이면. 밑바닥 아래의 지하. 음(陰)속성의 차원.’
강제로 쑤셔 박힌 ‘피안계’의 지식들을 떠올려본다.
광대는 이 정체불명의 세계에 반쯤 걸쳐있던 존재였다. 그래서 평범한 방법으론 제대로 타격을 할 수도 없고, 죽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스킬 면역. 피해 면역. 그리고 무한한 부활의 원천은 이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용하면.’
나는 눈앞에 오른손을 천천히 뻗었다.
허공에 문고리를 강하게 연상했다. 그리고 연상한 그 지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꾸득.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무언가 잡혔다.
“개문(開門).”
시동어를 영창하고 가상의 문고리를 열어젖혔다.
파직, 파지지직!!
눈앞의 공간 자체가 사각형으로 찢겨나갔고. 마치 여닫이문이 열리듯, 천천히 뒤로 후퇴했다.
뻥 뚫린 공간 너머. 그곳엔 오른쪽 눈에 비치던 불지옥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길게 머무르는 건 위험.’
주입된 지식 중에서 경고 사항을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연결된 피안계로 한 발짝, 또 한 발짝. 조심스럽게 입장했다.
“…후우.”
완전히 피안계에 진입했다.
이제 왼쪽 눈에도 똑같은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폐허가 된 세상. 무너진 건물과 도시. 어디로 눈을 돌려도 시뻘건 겁화가 타오르는 지옥이 나를 반겼다.
―끄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악!!!
―으핫! 카하핫! 아하하하학!!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는 비명. 그 사이 간간히 섞여있는 광소.
이제 왼쪽 귀에서도 동시에 들려온다.
“괜히 오래 머무르지 말라는 건… 아니구만. 확실히.”
서라운드로 들려오니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지속시간인 3분 내내 있다간, 그것만으로도 미쳐버릴 자신이 있을 정도.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아찔한 광기에 숨을 삼켰고. 이내 고개를 뒤흔들어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어디, 그럼.”
이 꺼림칙한 공간에 구태여 들어온 데는 이유가 있다.
초장거리 순간이동. 크로스 박사의 얘기로만 들었던 그 능력도, 이 세계를 이용하면 구현해낼 수 있었다.
‘이 세계의 나는 영체에 가깝다.’
지금 이곳에 서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외부세계의 내 레플리카. 영혼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영체기 때문에, 속박된 법칙도 없고.’
이 세계의 나는 모든 물리법칙을 초월할 수 있다.
질량보존을 무시하고 갑자기 거대화하거나. 작용과 반작용도 무시할 수 있는가 하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좌표에서 갑자기 뿅, 하고 솟아나는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다.
‘문제가 있다면… 내 상상력의 한계.’
이 세계는 굉장히 불안정한 듯하다.
모든 지식을 습득한 지금도 미지인 부분이 많았다. 존재 자체가, 관측자인 내 상상력에 의존하는 성향이 있다.
‘내가 상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곳만. 이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상상력과 기억력이 지극히 빈약한 편이지.
그러니 순간이동을 한다 쳐도, 내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원래라면 이곳의 나와 외부의 나는 별개의 존재지만…….’
‘커튼콜’ 스킬을 사용하는 동안엔, 레플리카가 외부의 진짜 나와 결속된다.
즉 이곳의 내 좌표가 이동되면. 바깥으로 나갔을 때의 나 역시… 그 장소까지 강제로 육체가 이동되는 것이다.
“하나. 둘… 셋.”
그래.
바로 이런 식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떴고. 눈앞의 풍경은 이미 변해있었다.
‘성공했다.’
우리 집 거실이었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 을씨년스러운, 온통 화염으로 집어삼켜진 공간. 부산에서 서울까지 단숨에 순간이동 한 것이다.
익숙하기에 더더욱 낯설게 느껴지는 거실 풍경을 뒤로한 채.
“…개문.”
파지직!
나는 다시 한번 허공에 차원문을 생성했고, 사각형으로 찢어진 공간 안으로 성큼 몸을 집어넣었다.
왼쪽 눈에 다시 평범한 세상이 비친다.
“어어……?!”
“어머나.”
“누, 누, 누구?!”
먼저 익숙한 여인 셋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온 나를 화들짝 놀라며 쳐다봤고. 미미하게 웃고 있는 이세라와 달리, 서윤과 수아 자매는 허둥지둥 나를 경계했다.
“뭐, 뭐야. 넌 또 뭐 하는 새끼야! 빨갱이!!”
스르릉!
강서윤이 재빨리 크로노스 소드를 뽑았고. 그것을 내게 겨누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나머지 두 사람을 지키는 포지션을 잡고 있다. 역시 강서윤.
“너, 어떻게 갑자기 허공에서 솟아난 거지? 텔레포트의 마력흔은 없었는데……!”
강서윤이 나와 대치한 채 한껏 적대적인 시선을 벼렸다.
위상 능력에 몰빵한 여자라 그런가, 그 와중에도 텔레포트의 방법론부터 물어보는군.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반응이다.
“흐.”
나는 힘없이 피식 웃으며 커튼콜 스킬과 혈천갑을 해제했다. 막대한 탈력감이 온몸을 짓누른다.
쿠르르륵!
내 앞으로 이브가 재구성되었고. 어김없이 볼멘소리를 꿍얼거렸다.
“아우. 매번 힘들어 죽겠어, 정말.”
그리고 촤촤촥!
그 옆에 연기가 뭉게뭉게 뭉쳐져 재구성된 토식이도, 피곤한 기색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역시 오래는 못 해먹을 짓이야. 이거.”
토식이까지 힘들어하는 건 살짝 의외다.
이브는 몰라도 토식이는 내 앞에서 괜히 죽는소리 낼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저게 진심이란 소리인데.
‘변신이 체력을 심하게 소모하긴 하나 보군.’
지금까지 이브가 꾀병 부린다고 생각했건만.
이건 좀 반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