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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76화 (176/235)

176화

<103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0)>

‘대미지 무효화’는 멸망의 화염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니 ‘초재생’ 기믹을 틀어막기 위해선 아마 무형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실험도 주로 무형검을 사용했다.

“…후우. 허억.”

무수한 실험을 반복한 뒤. 지금에 이르렀다.

나는 한껏 격해진 숨을 고르며, 지친 눈을 물끄러미 치켜떴다.

“그… 흐. 크흐. 으크크큭……!”

여전히 광대의 우람한 거체가 눈앞에 있었고. 입에서는 고통에 짓눌린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핏줄기와 함께 쏟아지고 있다.

문득 놈이 쩌억, 길게 찢어진 입을 크게 벌렸다.

“카아아아앗!!”

푸화악! 그 포효가 신호였다. 만신창이가 되었던 광대의 온몸이 빠르게 수복되기 시작했다.

“키하아앗!!”

떨어져 나갔던 살점이 지점토처럼 처덕처덕 다시 붙고. 갈라진 살이 메꿔지며 말끔하고 창백한 피부가 그 위를 덮는다.

“크… 후하하하!!”

수복을 마친 광대가 후련하다는 양 광소를 터뜨렸다.

놈은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다. 지금까지 이어진 내 모든 실험이 모두 실패했다는 소리다.

쯧. 나는 조용히 혀를 찼다.

“쉽지 않네, 이거.”

이걸로 벌써 5번째 실패였다.

다음엔 먹히겠지, 그다음엔 먹히겠지. 그렇게 무지성으로 이것저것 들이받은 시도가 벌써 5번째.

방금 그 5차 시도가 실패했으니, 이젠 사실상 6번째에 돌입하겠군.

‘전이랑 똑같다. 다를 게 없어.’

순간적 대미지 누킹. 약점 공략. 온몸을 108분할하는 오마카세 사시미질까지. 검으로 할 수 있는 웬만한 지랄들은 다 이룩했다고 자부한다.

그 결과가 전생 때와 다를 게 없어서 문제지.

“케하하하하핫!!”

콰드드득!

상념을 꿰뚫고 거대한 손톱이 내 머리를 짓눌러온다.

나는 진절머리를 내며 허공에서 가볍게 뒷걸음질을 쳤다.

“질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구만.”

푸쉬익! 발아래 혈류가 순간적으로 폭사하며 내 몸을 뒤로 밀어냈고, 손톱은 정확히 내 코앞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 강렬한 풍압이 온몸을 직격한다.

‘이젠 마력도 체력도… 솔직히 곧 한계인데.’

방금의 아슬아슬한 회피는 허세를 부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자원을 사용하기 위한 발악에 가까웠다.

슬슬 인정해야겠다. 내 일천한 대가리로는, 다 차려진 밥상도 혼자 못 받아먹겠다.

‘무형검… 해제.’

나는 굴욕감을 씹어 삼키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푸스스스! 형태 없는 칼날 위로 잿빛의 연기들이 빠르게 휘몰아쳤고, 이내 미친 듯이 꿈틀거리나 싶더니. 익숙한 토끼의 형상으로 뭉쳐졌다.

“으엥? 뭐, 뭐냐?”

혈천갑의 사복검은 원래의 붉은 칼날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손에는 어느새 토식이가 안착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옥좌야. 갑자기 왜 해제했냐? 쟤 아직 살아있잖아!”

그는 내 얼굴과 주변 상황을 한동안 빤히 주시했고. 이내 버젓이 살아있는 광대를 보더니 당황한 듯이 외쳐댔다.

의아한 눈초리가 날 책망하는 듯하다. 난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좀 생겼다.”

“문제? 갑자기 뭔 문제.”

“무형검도 멸망의 화염도 먹히지 않아.”

“엉? 그럴 리가?”

“아무래도 준비가 아직 덜 됐거나, 뭔가 내가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도저히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다.”

“아니! 너 아까부터 뭔 소리 하는 건데?”

내 말에 어리둥절한 탄성을 흘리는 토식이.

의아한 반응에 나 역시 탄성을 흘렸고. 이내 놈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표정 보니 진짜 이해를 못한 것 같다.

‘급해서 너무 축약했나.’

하긴. 전후 설명도 없이 너무 급발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천천히, 목적어와 서술어를 분명히 해서 다시 설명해 줬다.

“그러니까. 무형검이랑 멸망의 화염이, 광대의 무적 기믹을 뚫지 못했다고.”

“아니 그러니까. 너 대체 뭔 소리를 하냐고.”

“뭐가.”

“네가 언제 무형검을 썼다는 거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썼으면 내가 몰라볼 리가 없다고.”

“…음?”

“…응?”

다시 한번 의문에 찬 눈초리가 교차한다.

동문서답. 혹은 우문현답. 알고 보니 우리는 서로 완전히 평행선을 타고 있었다.

“아아. X발. 알 만하네.”

이내 토식이가 머리털을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통탄에 겹다는 듯이, 그의 한심한 눈초리가 나를 가만히 쏘아본다.

“너 지금까지 무형검을 어떻게 썼는데.”

“…어떻게라니.”

“형태를 변형시켜 보려고 노력은 했냐? 혹시 그냥 최초 상태 그대로 무식하게 휘둘러 댄 거 아냐?”

토식이가 퉁명스럽게 추궁하기 시작했고.

나는 상상도 못 해본 대화의 흐름에, 눈을 한껏 부릅떴다.

“변…형이라고. 지금 변형이라 했냐.”

“그래, 인마. 변형! 형상 변화!”

“무형검 그거… 모양이 변할 수도 있는 거였나?”

“뭔 당연한 소리야! 애초에 무형검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검의 형태를 네가 직접 만들어 낸다는 의미인데!”

가슴을 쾅쾅 두들기는 토식이. 어이가 없다 못해 답답해진 듯하다.

나는 여전히 벙찐 나머지 더듬더듬 물었다.

“그냥 투명해지고 끝이 아니었다고?”

“아니 븅신아. 그러면 그게 투명검이지 무형검이냐?”

“…아.”

“무형(無形). 형태가 없다고. 무기의 형태를 네 심상에 따라 구현하고, 벼려내는 것. 무형검을 사용하는 최초 단계가 바로 그거다. 멍청한 새꺄.”

쇄애애액!

때 마침 찔러 들어오는 광대의 공격을 또 한 번 피해냈다.

거의 본능적인 회피였다. 나는 지금 반쯤 넋을 놓은 무의식 상태에 가까웠다.

“어떻게, 감이 좀 오냐? 아직도 안 오면 곤란한데.”

깊어지는 상념을 토식이의 목소리가 깨웠다.

퍼뜩, 나는 팔뚝에 매달려 있던 토식이를 쳐다봤고. 놈의 은근한 시선을 가만히 마주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대충은 알겠다.”

스르릉, 철컥!

나는 사복검을 장검 형태로 합쳤고. 그것을 그대로 토식이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토식이도 내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핫. 싸가지 없긴.”

치지직!

토식이가 신속하게 담배를 빼물었고. 그 불꽃을 사복검 칼날에 힘껏 쑤셨다.

그러자 푸스스! 맞닿은 담배 끝자락에서, 아까처럼 막대한 잿빛 연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성공해 보라고. 안 되면 또 부르든가.”

푸화악!

비아냥거리던 토식이의 형상도 연기와 동화되어 사라진다. 잿빛 연기의 기류가 칼날을 중심으로 거세게 휘몰아쳤다.

어느 순간 말끔하게 사라진 연기와 함께, 파팟! 칼날의 형상도 완전히 소멸했다.

“캬하하하악!!”

변신 매너를 모르는 광대가 공격을 가해왔다.

콰아앙! 묵직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놈의 일격은 내 정수리로 정확히 꽂혀 들어왔다.

그리고 직후.

“캬아아아아악!!”

콰자자작!

매서운 파육음과 함께 커다란 손바닥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었다. 내가 맞서 휘두른 투명한 사복검에 갈려나간 것이다.

광대는 토막 난 손을 쥐어 싸매며, 허겁지겁 내게서 상체를 물렸다.

“보채지 마. 좀.”

화르륵!

형태가 없는 칼날 위로 날름거리는 시뻘건 화마. 그리고 그 아래 찐득하게 눌어붙은 광대의 새빨간 핏줄기가 조화를 이룬다.

나는 다시 멸망의 화염을 꺼트렸고. 눈을 슬며시 감았다.

“심상의… 구현.”

지금부터 무형검을 사용해 보겠다.

우선은 심상의 구현. 토식이가 말했던 최초의 단계를 이행하려 했다.

‘방법은 정확히 모른다.’

토식이에게 물어보면 좀 더 자세히 가르쳐 줬을지도 모른다.

그놈은 겉으론 틱틱대도 은근히 나한테 호의적이니까. 욕을 한 바가지 섞어가며 상세히 알려줬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물어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할 수 있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근거는 없지만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형검을, 내가 원하는 형태로 벼려내겠다.

‘원하는 검의 형태는 뭐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무수한 심상, 상상들이 뇌리를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찰나. 어쩌면 꽤 긴 시간 동안 그 과정이 이어졌고.

‘가장 강한 무기를 원하지.’

고심 끝에 도출된 대답은 지극히 단순했다. 내가 원래 그러하듯이.

그렇다면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생각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기는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가.

‘존나 크겠지.’

역시나 단순했다. 내가 원래 그러하듯이.

우르릉! 감은 눈 밖에서 천둥 같은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오른 팔목 위가 약간 묵직해진 느낌이 드는 듯하다.

아니. 부족해. 나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더 크게.’

가장 강한 검.

광대를 죽여버릴 검.

신도 죽여버릴 수 있다는 살신(殺神)의 무형검은, 고작 이 정도 묵직함이 아니다.

‘조금 더. 훨씬 더.’

우르릉, 쿠르르릉!!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연신 울려 퍼졌고. 그럴 때마다 팔목 위가 무거워진다.

잘하고 있다. 틀리지 않았다. 그것만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윽.”

나직한 신음이 흐른다.

오른팔이 무겁다. 더는 들고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추욱. 나는 결국 팔을 아래로 맥없이 늘어뜨렸다.

“아직… 조금, 더.”

그래도 연상을 멈추지 않았다.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 상정할 수 있는 최대한의 크기. 그리고 그 한계 너머까지 필사적으로 생각해 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후우.”

지면을 향해 축 늘어진 오른팔을 눈에 담았고. 만족감에 찬 한숨을 흘렸다.

나는 곧장 멸망의 화염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멸망의 화염]

푸화아악!

화염이 팔목 위로 한도 끝도 없이 뻗어나간다.

10미터. 30미터. 50미터. 아니, 광대의 앉은키를 아득히 상회하는가 싶더니. 끝내는 지면에 그 보이지 않는 칼끝이 맞닿아 있다.

“한 100미터… 좀 안 되려나.”

내가 떠있는 고도를 떠올리며 중얼거렸고.

쿠구구구! 나는 그 무식할 정도로 장엄한 거병을, 온힘을 다해서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크. 흐히. 흐히힉?”

광대는 온몸이 바싹 얼어붙어 있을 뿐이다.

반격이나 기습을 가할 생각도 못한 채. 그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간헐적인 웃음에서 느껴지는 건, 압도적인 공포였다.

“너. 안 움직이면 죽는다.”

확신을 담아 서슬 퍼렇게 중얼거렸다.

스르릉! 화염에 휩싸인 100미터의 검신은, 어느새 하늘을 찌를 것처럼 꼿꼿이 선 채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다.

“히히. 히이… 흐히히힉……!”

내 친절한 경고에도 광대는 요지부동. 울상으로 웃어대는 것 밖에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마치 예전에 시스템 패널이 말해줬던 것처럼. 왕의 위엄 앞에 스스로 복종하는 신하 같다.

“이제 죽자.”

두 번 경고는 없다.

나는 느긋하면서도 확실하게, 양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쿠구구구구! 화염의 단두대가 하늘을 쪼갤 기세로 쏟아져 내렸고.

“키… 하학……!!”

서걱!

칼날이 광대를 두부처럼 순식간에 절단한 뒤. 그대로 지면에 내리꽂혔다.

잠깐 광대의 비명이 들려오나 싶더니.

“……!!”

콰아아아앙!!

지금껏 경험한 적이 없는 압도적인 섬광과 뇌명.

대폭풍이 몰아닥친다.

“…끝났다.”

검 끝에서 일어난 천지개벽이 종식된 후. 지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힘없는 웃음을 띠며 중얼거렸다.

오직 폐허.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이 방금 일격으로 초토화되었다.

“장난 아니구나. 이거.”

시야 끝자락에 보이는 이름 모를 야산이 눈에 밟혔다.

중턱쯤부터 완전히 둘로 쪼개져 있다. 능선을 따라 흉터처럼 남아있는 거대한 검흔(劍痕)은, 방금 내가 내려친 무형검의 궤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건… 광대보다 내가 더 심한데.’

거대괴수보다도 마을을 심하게 때려 부수는 전대물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실없는 생각을 하는 한편. 시야를 발아래 쪽으로 슬쩍 내렸다.

“진짜로.”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쪽으로 거칠게 뜯겨나간 광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끝이구나.”

회복이나 부활의 기미는 전혀 없다.

분명히, 시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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