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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73화 (173/235)

173화

<103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7)>

요즘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가.

난 의외로 모든 전말을 세세히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끝. 내가 아는 선에선 다 설명했다.”

길었던 썰풀이가 끝난 뒤. 나름 잘 설명했다는 뿌듯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크로스 박사의 반응은…….

“…허. 허허.”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헛웃음의 연속이었다.

그 반응을 보니 더 확실해졌다. 그는 내 말을 모두 제대로 이해했고, 또한 받아들였다.

저건 그런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리액션이다.

“내가… 악당 역할이라고?”

이내 크로스 박사는 허탈한 듯이 물어왔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좀 틀리지.”

“틀려? 뭐가.”

“넌 악당이 봉인된 그릇이다. 의식의 제물 같은 느낌이지.”

“흐핫. 악당조차 못 되는 거냐. 그렇다면 평범한 엑스트라… 받고. 쓰고 버리는 소품이라고 보는 게 맞겠네.”

“…….”

골방을 공허하게 맴도는 애덤 크로스의 넋두리.

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내 대신 그의 공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네가 악당을 처단하는 주인공 역할이라고?”

“그렇다고 하더만.”

“그래서였군.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악당……. 광대를 이미 알고 있는 거였나.”

“쉽게 정리하면 그런 거지.”

“내 안에 숨어있는 이 시끄러운 놈을 죽여버리기 위해서. 그래서 불가피하게, 그 그릇인 나를 먼저 죽일 수밖에 없는 거고. 그렇지?”

흐. 흐흐흐.

크로스 박사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놈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것을 납득하고, 또한 체념한

“그래. 그런 거군. 그런, 거였어…….”

“…그런 거지.”

나는 크로스 박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입맛이 영 쓰다. 이런 기분이 될 줄 알았으면, 대화 같은 건 안 하는 게 신상에 이로웠을지도 모르겠다.

때 늦은 후회를 속으로 하고 있자니.

“뭘 그리 패배자 같은 표정이냐. 주인공.”

크로스 박사의 목소리에 흠칫, 눈을 돌렸다.

푹 수그려 음영 진 고개 너머. 그의 올곧은 시선이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다.

“얼굴 좀 펴봐라. 너 지금, 악당을 해치우러 온 히어로의 면상이 아니라고.”

“…….”

“뭐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떳떳해야지. 내가 죽어야 세상을 구할 희망이 생기는 거라면서. 아니었냐?”

크로스 박사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비아냥거렸다.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얄궂은 운명 자체를 비웃는 듯하다.

“나는 말이야. 내 대가리에 숨은 이 개새끼의 정체를 알려준 것만으로도… 너한테 충분히 감사한다. 진짜야.”

“…그러냐.”

“혹시나 전부 지어낸 개소리였다고 말하려면, 아직 늦지는 않았는데?”

“거짓말 아니다.”

“……!”

“도망치지 마라. 크로스 박사.”

헛된 희망은 이쪽에서 원천 봉쇄 해버렸다.

크로스 박사는 눈에 띄게 어깨를 들썩였다. 재차 충격받은 듯이 몸을 바짝 굳혔다가, 이내 이마를 싸매며 다시 실실대기 시작했다.

“그래. 맞지. 갑자기 들이닥쳐서, 이딴 X같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분명 그렇긴 하지.”

“그 말대로다.”

“게다가 네 말이 거짓말이라기엔… 내 상황이랑 불쾌할 정도로 딱딱 들어맞기도 하니까.”

“그렇겠지. 전부 사실이니까.”

“나도 알아. 사실이라는 건, 나도 전부 안다고. 이 개 같은… 망할.”

한동안 지리멸렬한 혼잣말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리 둘의 시선이 흠칫, 똑같은 곳으로 향했다.

“어.”

“아.”

시선이 향한 곳은 이브였다. 그녀의 몸이 은은하게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크로스 박사가 당황의 탄성을 흘렸다.

“뭐, 뭐야. 무슨 일인데?!”

이내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동행자인 나라면, 이 갑작스런 이변의 원인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겠지.

실제로 나는 원인을 알고 있다.

“…깨어난다.”

드디어. 꼬박 하루 정도가 지난 끝에.

이브가 최종 진화에 들어갔다.

* * *

침묵과 긴장 속에서 한동안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핏빛을 닮은 붉은 빛무리가 이브 주위로 맹렬하게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이내 파앗! 엄청난 섬광을 내뿜었다.

“큭……!”

“으윽!!”

사위가 하얗게 명멸할 정도로 눈부신 빛.

나도 크로스 박사도 고개를 팩 돌렸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섬광의 폭격이 끝나길 기다렸다.

다행히 섬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으음, 으웅.”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천천히 돌아오는 시야 너머. 흐릿한 눈앞으로 새하얀 무언가가 어른거린다.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은 채 기지개를 편다.

“아우, 잘 잤다! 오랜만에 엄청 개운하게 잤네!”

들려온 목소리로 정체는 진작에 짐작되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그것의 이름을 불렀다.

“…이브.”

나는 눈을 세차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눈앞에 있는 묘령의 여인, 이브의 형상이 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익숙한 멘트를 중얼거렸다.

“또 많이 컸구나. 심하게.”

“푸흐. 아빠, 전에도 비슷한 말 하지 않았어?”

이브가 요염하게 눈웃음치며 대꾸해 왔다.

예상대로 그녀는 20대 초중반 정도의 외관이 되어 있었다. 전에는 ‘요염하게’라는 말이 어색해 보이는 앳됨이 공존했다면. 이제는 그야말로 찰떡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분명히 사람을 현혹시키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아, 아름답군.”

옆에서 애덤 크로스가 홀린 듯이 중얼거린다.

‘예쁘군’도 아니고 ‘아름답군’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예술품을 대하는 자세. 욕정보단 순수한 경탄이 서린 감탄사였다.

그 한마디를 이브도 들은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퍼뜩 돌아간다.

“으음? 이 아저씨…….”

이브는 신기한 듯이 자기 몸을 내려다보다, 이내 크로스 박사 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어어. 그녀가 탄성을 흘리며 그의 얼굴을 삿대질했다.

“아빠. 이 아저씨! 전에 봤던 그 아저씨 아니야?”

전생에서 만났던 기억을 떠올린 듯하다.

그러나 정작 지금의 크로스 박사는 그 기억이 없는 상태다. 애초에 이번 생에선 겪은 적이 없으니까.

“…뭐, 뭐? 무슨, 내가 언제? 당신이랑……?”

어리둥절한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아무튼,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이브가 무사히 깨어났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그 사실뿐이다.

나는 고개를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간이 됐다. 크로스 박사.”

나직이 사형선고를 내렸다.

흠칫, 크로스 박사가 경기를 일으키듯 온몸을 떨었다. 두려움과 혼란이 뒤섞인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놈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지금까지… 저 여자가 깨어나길, 기다린 거였냐?”

“그래. 그리고 깨어났지.”

“그래서 이제 나를 죽일 때가 되었다?”

“눈치는 빨라서 좋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고. 크로스 박사의 앞까지 도달해, 허리춤의 홀스터에 꽂아뒀던 단검을 애덤 크로스의 목에 겨누었다.

스르릉! 단검의 날 선 칼날이 놈의 목에 밀착한다.

“으잇?”

단잠에서 깨자마자 뜬금없는 상황을 맞이해서 그런가. 이브 쪽에서 낮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녀에게 슬쩍 시선을 흘렸고.

“…유언.”

다시 크로스 박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짧은 단어 하나였지만, 크로스 박사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고개를 슬슬 저었다.

“딱히, 없다.”

“왜지. 나를 원망하진 않냐.”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딱히 널 책망할 생각은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기꺼이 죽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납득은 된다. 이건… 결국. 누구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도 아닌 거잖아.”

크로스 박사는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주워섬겼다.

그러나 그 직후.

“아니. 아니… 아니야.”

크로스 박사는 얼굴을 싸매고 있던 손을 퍼뜩 치웠다.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이 내게 향했다. 놈의 입술은 공포로 파랗게 질려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X발. 주, 죽고 싶지 않아. 내가… 내가, 대체 왜!!”

“…흠.”

“세상을 구해? X발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개죽음 당할 운명이라고?! X발 개 족까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

“왜… 대체 왜. 이런 곳에서! 내가!! 정체도 모르는 너 따위한테 죽어야 하는 건데!!”

와락! 애덤 크로스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한껏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내 다리에 빌붙었다. 그리고 눈물을 질질 흘리며 울먹거렸다.

“사, 살려줘. 나는… 나는, 살고 싶어!”

“…….”

“로즈. 미안해. 나는, 나는 아니었어. 역시 나는 아니었다고! 아직, 이렇게… 너만 남겨두고 죽어버릴 수는… 없다고! X바아알!!”

그래. 어쩐지 너무 의연하다 했다.

방금까지의 태연한 모습은 전부 가면이었다. 턱밑까지 조여든 죽음의 공포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다.

솔직히, 이제야 좀 정상적인 반응이다 싶었다.

“이건 약속해 주지.”

우드득!

틀어쥔 칼끝에 힘을 불어넣었다.

털퍼덕. 애덤 크로스의 일그러진 얼굴이, 무기질적으로 이불 위에 떨어졌다.

푸화악!

목 위로 힘차게 솟구치는 선혈의 분수. 볼에 튄 핏방울들을 손끝으로 닦아내며, 나는 마저 중얼거렸다.

“약혼자의 안전. 책임지고 보장해 준다.”

들을 사람도 없는 공허한 약속이 울려 퍼진다.

털썩. 목 없는 시신이 곧, 굴러간 머리 옆으로 엎어졌다. 시뻘건 얼룩이 이불에 흥건하게 고이기 시작했다.

“으아… 부, 불쌍해.”

문득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크로스 박사의 시체를 주시하고 있었고. 이내 의문스런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혼란스러운 시선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입이 콱 다물렸다.

“아, 아빠.”

그러자 이브가 먼저 나를 불렀다.

내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이 아저씨, 왜 죽인 거야?”

“왜냐고?”

“응. 나, 일어나자마자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그, 그래도 아빠가 한 일이니까. 뭔가… 이유가 있지? 그런 거지?”

“…….”

“왜… 그런 거야?”

잠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크로스 박사는 나한테 뭔가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어도 싼 악당이어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대답해 주기가 애매하다. 누가 봐도 내가 개새끼가 맞는 상황이다.

“…….”

사람이란 뭔가.

죄 없는 사람 하나 죽여놓고도, 건조하게 몸에 튄 피부터 닦아내는 놈?

아니면 측은지심에 인상을 바짝 찌푸리고 울상을 짓고 있는 년?

“…….”

나와 이브.

누가 몬스터고 누가 사람이냐.

금방 생각하길 그만뒀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철학에 관심 없다.

“이건.”

그냥 희생된 거다.

운명. 자연재해 비슷한 불가항력의 무언가한테.

거기에 나랑 사이좋게 매몰되었고. 그래서 내 손으로 숨통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단박에 죽여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자비였다.

“이유는, 이제 알게 될 거야.”

그냥 그렇게 얼버무렸다.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에 번쩍. 나는 그녀의 면전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이브. 좀 갑작스럽겠지만, 힘을 빌려줘.”

맡겨놓은 물건 찾아가듯이 요구했다.

이젠 육체의 나이가 사춘기도 지나버린 탓인가. 아니면 지금 내 표정이 그만큼 진지한 건가.

이브는 내 뜬금없는 요구에도, 전처럼 괜히 틱틱대지 않았다.

“…응. 알겠어.”

이브는 제법 우아한 행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가타부타 말없이 내 쪽으로 걸어와, 입술을 슬쩍 벌리고 천천히 내밀었다.

번득. 한껏 벼려진 그녀의 송곳니가 예광을 발했고.

[모든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콰자작!

날 선 이빨이 내 심장을 파고드는 것과 거의 동시.

[잊혀진 던전의 던전 마스터, <주저앉은 광대>가 현현합니다.]

언제부터였을까.

바닥에 널브러진 애덤 크로스의 참수된 시신. 핏발 선 머리통의 쩍 벌어진 입 안에서, 거대한 팔뚝이 튀어나왔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방 안을 가득 메우다 못해, 지붕을 뚫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뿌뿌. 뿌뿌뿌우!

섬뜩한 코끼리 나팔 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온다.

끼기긱, 끼긱! 거대한 팔뚝과 소름끼치는 얼굴이, 모든 물리 법칙을 무시한 채. 크로스 박사의 시신 안에서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주저앉은 광대다.

계획대로. 다시 한번.

‘히든 던전 마스터’가 내 앞에 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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