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103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
나는 무너진 선반으로 털레털레 다가갔고. 그리고 로즈 휴스턴 앞에 꿇어앉았다.
선반에 깔린 채 나를 노려보는 로즈 휴스턴을, 나도 가만히 마주봤다.
“예비 신랑 어디가고 네가 맞이해 주냐. 미스 휴스턴.”
“…F**k you.”
“아.”
당연하게도 유창한 외국산 욕지거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퍼뜩 몸을 일으켰다. 로즈 휴스턴과 슬쩍 거리를 벌리고, 곧장 그녀의 상태창부터 확인해 봤다.
[인물 정보]
[명칭: 로즈 B. 휴스턴]
[별칭: 카일 인더스트리 수석 연구원, C급 헌터]
[체력: 18 마력: 21 신체 상태: 정상]
[힘: 13 민첩: 16 지능: 15 포텐셜: 23]
[최종 전투력: 57]
“…괜히 네가 나온 건 아니구나.”
상태창을 보니 납득이 되었다.
로즈는 현역 C급 헌터에 달하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실제로 별칭 목록에 라는 게 있는 걸 보면. 아마 연구원 업무와 더불어 헌터 생활을 같이 하는 부류인 것 같다.
“로, 로즈!!”
그리고 덜컹!
안쪽의 방문이 열리며 익숙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당연히 애덤 크로스다. 그가 로즈 휴스턴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이 새끼……!”
그러나 직전에 나를 포착하고 멈칫, 발을 멈춘다.
놈이 푸른 눈동자를 표독스럽게 빛낸다. 경계심이 잔뜩 어린 행색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철커덕. 들고 있던 권총을 내게 겨누었다.
“너, 뭐야.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찾아온 목적이 뭔데!!”
크로스 박사가 방아쇠를 만지작거리며 외쳤다.
똑같은 외국인이지만 역시 한국어가 들려오니 살 것 같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안심감이 있다고 할까.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유언.”
“…뭐?”
“유언 있냐고.”
“뭐, 그, 그게 무슨?”
“넌 오늘 나한테 죽는다. 애덤 크로스.”
“!!”
대놓고 사망 통보를 들이박았다.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살해 협박을 당할 줄은 몰라서인가. 크로스 박사가 얼굴을 하얗게 표백시켰다.
“그나저나, 이건 좀 예상 밖인데.”
파지직!
인벤토리에서 새하얀 사슬… <바실라스의 안개>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전에 박현우를 포박할 때 썼던 그것이다.
나는 혼란에 빠진 크로스 박사와, 그로기 상태인 로즈 휴스턴을 번갈아 쳐다봤다.
“여자 쪽까지 던전 경험자일 줄은 몰랐네. 속박 아이템은 하나뿐인데.”
그쯤에서 다시 크로스 박사를 지그시 주시했다.
흠칫, 놈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눈에 띄게 어깨를 움츠렸다.
“직접 너희 처우를 선택해 봐라. 크로스 박사.”
“뭐, 뭘 말이냐.”
“네가 세뇌당하고 약혼자를 묶을까. 아니면 약혼자를 세뇌하고 너를 묶을까.”
“……!!”
“10초 준다. 골라라.”
“이, 개… X발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크로스 박사가 핏발선 눈으로 나를 쏘아본다.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시뻘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는데. 절간 입구의 인왕(仁王)상을 연상시키는 박력이 있다.
물론 박력이야 있든 말든. 나는 할 말을 할뿐이다.
“대답 안 하면 너를 묶는 방향으로 간다. 뇌를 잘못 건드렸다가 광대를 자극하면 골치가 아프니까.”
“과, 광대……?! 너, 이 새끼, 그건 어떻게……!!”
“10. 9. 8. 7…….”
경악으로 부릅뜬 눈초리를 묵살했다.
시간은 용서 없이 흐른다. 내가 되뇌는 카운트도 빠르게 삭감되어 간다.
“3. 2… 1.”
마침내 카운트가 끝나버릴 때까지. 크로스 박사는 이를 부득부득 갈 뿐, 한 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좀 의외인데. 약혼자를 위해 기꺼이 세뇌를 택할 줄 알았더니.”
“내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뭔가 켕기는 거라도 있나?”
“네 말대로 내 머릿속의 그놈이 자극을 받기라도 하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게 뻔하니까 그렇지. 개새끼야.”
“…….”
의표를 찔렸다.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멍하니 있는 나를 크로스 박사가 빤히 쳐다봤다.
“너. 내 안에 있는 이놈을… 아는 거지?”
아마도 내가 ‘광대’를 언급한 순간부터였을 거다.
나를 쳐다보는 크로스 박사의 시선은, 마냥 적대감만을 품고 있지 않았다.
“내가 대체 무슨 일에 휘말린 건지. 너는… 당신은, 알고 있는 거 아냐? 응?”
절박하고 필사적인 기대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거였군. 크로스 박사를 마주한 내 시선이 착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놈도 따지고 보면… 피해자던가.’
정신 차려보니 이미 무대 위에서 발악 중이었고. 화신의 유흥을 위해 인생을 통째로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우리는 크게 보면, 똑같은 피해자 신세다.
‘다른 건 역할뿐이지.’
주인공으로 선택받은 나.
사망이 확정된 엑스트라로 선택받은 애덤 크로스.
역할의 차이가 지금의 구도를 만들었을 뿐. 놈과 나는… 근본적으로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나직이 쉬었다.
곧장 피직스 그랩을 발동. 콰지직! 무너진 선반을 들어올려, 그 아래 깔려 있던 로즈 휴스턴을 구출해 냈다.
그리고 촤르륵! 새하얀 사슬을 조작해, 다시 그녀의 신체의 자유를 빼앗았다.
“뭐, 무, 무슨……?!”
애덤 크로스가 의문과 혼란을 담아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당당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 할 말을 했다.
“아직 시간이 좀 있다.”
이브는 아직 깨지 않았다.
그녀가 없으면 혈천갑을 발동시킬 수 없다.
광대를 꺼낼 때는 무조건 만전의 상태여야 한다. 그래서 이브가 깨지 않은 지금, 크로스 박사를 죽이는 건 시기상조다.
“막간에 대화나 하자. 둘이서.”
그래서 크로스 박사에게 제안을 했다.
내 뜬금없는 발언에, 당연히 그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 대화라니. 너랑, 내가 말이냐?”
“또 누가 있는데.”
“나, 나를… 세뇌한다 그러지 않았냐?”
“세뇌받고 싶냐.”
“그, 그럴 리가……!”
“그래서 안 해준다잖아.”
의외의 제안에 크로스 박사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대신 날뛰거나 저항하지 마라. 이것만 약속해 준다면, 적어도 쾌적한 여생을 보장해 줄게.”
“…….”
‘쾌적한 여생’ 소리에 어깨를 흠칫거리는 크로스 박사.
이내 그가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지만, 뭐 제까짓 게 어쩔 것인가.
“그리고 내가 전부 말해주겠다. 네가 무슨 일에 휘말린 거고. 네 안에 숨은 그놈의 정체가 뭔지.”
“!!”
크로스 박사는 절대 거부하지 못한다.
네가 얼마나 궁금해 하고 있을지, 같은 피해자인 내가 가장 잘 안다.
“…따라와.”
결국 그는 거실 안쪽의 방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모두 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좋다 이거야. 어디 해보자고. 대화.”
“생각 잘했다.”
크로스 박사의 안내에 따라 안방으로 들어왔다.
좁은 옛날식 골방에 이불이 나란히 펴져 있었고. 방구석에는 편의점 샌드위치 같은 요깃거리가 어지럽게 늘어져 있다.
‘식사를 하고 있었나.’
늘어진 꼬라지를 보고 바로 추측할 수 있었다.
아무튼 생활감이 굉장히 짙게 나는 공간이었다.
“…대충 아무 데나 앉아라.”
털퍽. 크로스 박사가 먼저 자포자기하듯 이불 위에 주저앉았다.
권유해 줬으니 딱히 거절하지 않겠다. 나는 업고 있던 이브를 내려놓고 그 옆에 대충 걸터앉았다.
“…….”
“…….”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좁은 골방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집은 산 거냐?”
내가 먼저 툭 물어봤다.
크로스 박사는 이해를 못했는지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집 구석구석을 손으로 가리키자, 그제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 해먹으면서 벌어놓은 게 좀 있었지. 급하게 매물 하나 사들였다.”
“생각보다 성실하구만.”
“서, 성실……? 갑자기 뭔?”
“명색이 C급 헌터에 D급 헌터의 무력을 가진 도망자 커플인데. 선량한 시민의 사택을 강탈한 줄 알았지.”
“내가… 그, 그딴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설마 농담이라고 한 소리냐?”
굳이 따지자면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예민하다. 아무래도 크로스 박사는 제 나름의 정의와 신념이 살아있는 듯하다.
‘뭐, 서론은 이 정도면 됐지.’
아무튼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한다는 소기 목적은 달성했지 싶다.
이제 내가 진짜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볼 차례였다.
“이거. 정체가 뭐냐.”
나는 주머니를 뒤졌고. 지금도 스스로 빛을 뿜는 붉은 보석을 꺼내들었다.
놈이 보석의 정체를 알아보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건, 내 발명품이잖아.”
“맞지.”
“마당에서 하나 주워온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발동된 스킬 재머들은 마력을 머금고 있을 수가 없는데?”
“출처는 알 것 없고. 뭔지나 말해봐. 빨리.”
전생의 너한테 받아왔다 해봐야 믿지도 않을 거잖아.
나는 재머를 유심히 살피는 크로스 박사를 연신 재촉했고. 그는 여전히 의아한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스킬 재머라는 놈이다.”
“이름은 알아.”
“허? 뭔 개같은 소리야. 내가 너한테 말해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
“발동되는 순간 강렬한 마력섬광이 터지고. 일대를 특수한 자장(磁場)이 흐르는 지대로 만든다. 그 영역 안에서 아이템의 시전자는 모든 스킬에 완전 면역 상태가 되겠지.”
“뭣… 어, 어떻게?!”
“보다시피 기능이나 발동 과정도 전부 알고 있다. 구라가 아니라고.”
청산유수처럼 정보가 술술 흘러나올 때마다, 애덤 크로스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곧 그의 일그러졌던 얼굴에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뭐야. 다, 다 알고 있잖아. 그러면 뭘 더 알려달라는 건데?”
“힘의 출처.”
“…아.”
“스킬 면역이라는 사기적인 기능을 내는 동력원. 그게 뭔지가 궁금하다.”
“그, 그건.”
거기서 크로스 박사는 잠깐 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눈을 질끈 감더니, 체념한 듯 순순히 불기 시작했다.
“그건… 간단해. 내 생체 마력이다.”
“네 마력?”
“정확히는, 내가 마력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섞여서 나오는… 그 놈의 찌꺼기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는 크로스 박사.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자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린다.
내 시선이 한껏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놈이라면…….”
“내 머릿속에 숨어있는 그놈. 그 새끼가 흘려보내는 불순물 말이야.”
“아하.”
“내 생체 마력을 추출하고 증류해서, 정제된 그 새끼의 힘을 마력석에 저장했다고. 그랬더니 스킬 재머 같은… 듣도 보도 못한 기능의 아이템들로 변했어.”
“…그렇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대답이었다.
역시 스킬 면역 기능의 출처는 광대였다. 크로스 박사는 자신의 안에 숨어있는 광대의 힘을, 외부에 저장해서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근데, 스킬 재머뿐이 아니었다 그랬었지.’
전생의 크로스 박사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과거엔 다른 기능을 가진 마력석도 있었다. 그 말은 곧… 광대에게서 흘러나온 힘이, ‘스킬 면역’ 외에 다른 것도 있다는 소리다.
‘텔레포트 비슷한 뭔가도 있다 했고.’
게다가 내가 직접 광대를 상대해 봐서 잘 안다.
분명 단순히 스킬 면역으로 끝이 아니다. 놈은 분명 일반 공격의 대미지까지 무효화시키는 불가사의한 힘을 사용하기도 했다.
준비가 안 돼서 재생된 거랑은 별개로. 공격 대미지를 무시하는 기능도 따로 있는 것이다.
‘뭔가가 더 있다.’
<주저앉은 광대>는 그 모든 기능들을 아우르는, 좀 더 포괄적인 힘을 가진 것이다.
직후 들려온 목소리에 상념이 부서졌다.
“질문은 그걸로 끝이냐?”
턴이 바뀌는 분위기다. 이젠 애덤 크로스가 내게 질문 차례다.
그는 절박한 표정으로 한참을 뜸 들였고.
“…그래서 너는 뭐고. 내 머릿속의, 이 개새끼는 뭐고. 그리고 너는 날… 왜 찾아온 거냐.”
그런 질문을 해왔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건 많은데.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최대한 퉁친 모습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깔끔하게 정리해 줬다.
“무슨 일에 휘말렸는지를 알려 달라. 이 소리잖아.”
“…그, 그래. 그거지.”
크로스 박사는 숨을 삼켰고.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 나는 피식, 헛웃음을 머금었다.
“알려주지.”
이건 내 나름의 자비다. 나와 같은 처지인 희생자에 대한 동정이다.
그리고 또한.
“…듣고 후회하지나 마라.”
나만 당할 수 없지. 너도 이 억울함과 부조리함을 함께 느껴보자.
그런 억하심정도, 없지는 않았다.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테즈몬 현대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