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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71화 (171/235)

171화

<103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

강서윤 강수아 자매, 그리고 이세라한테까지 내 사정을 납득시키는 것까진 성공했다. 첫 단추는 어떻게든 무사히 끼운 것이다.

그러면 이제 내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광대 만나러 가야지.’

시간이 꽤 촉박하다.나는 1차 붕괴 이후 크로스 박사의 정확한 동선을 모른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1차 붕괴가 일어나기 전. 오늘 밤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최소한 이번엔, 방해할 장수혁도 없어.’

슈레더의 웬만한 주전력은 내가 전부 죽여버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양호성도 이변을 눈치챘겠지. 장수혁이 마지막으로 접촉한 게 나였으니, 분명 나를 향해 엄청난 압력이 들어올 거다.

‘그러니 더더욱. 이 일을 빨리 끝내야 한다.’

분명 그게 방금까지의 플랜이었는데.

바로 지금.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그 큰 그림이 찢겨졌다.

“…얘는 왜 안 일어나는데.”

이브가 아무리 기다려도 잠을 안 깬다.

한참을 기다리다 지쳐서, 흔들고 때리고 지지고 볶고 다 해봤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이 악물고 자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강서윤이 한마디 툭 던졌다.

“야. 그거 뒤진 거 아냐?”

“…….”

소름 돋는 소리를 태연하게 지껄인다. 혹시 희망 사항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혀를 차면서도, 스르륵. 홀린 듯이 이브의 가슴께에 귀를 갖다대 보는 내가 있다.

콩닥콩닥. 이브의 심장은 아직 잘만 뛰고 있다.

“…토식아. 도움.”

나는 결국 베란다에서 담배만 뻑뻑 피우던 토식이를 소환했다.

토식이는 엄청 귀찮아했지만, 내가 협박을 연발하자 어쩔 수 없이 이브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야 옥좌야. 이거 최종 진화 각인데?”

이브를 면밀히 진찰하던 토식이가 말했다.

의미심장한 단어가 등장했다. 나는 눈을 한껏 가늘게 뜨며, 확성기를 입에 가져갔다.

“최종 진화…라고?”

“어. 방금 체크해 봤는데 확실하다. 마지막 개화(開花)… 최종 진화를 준비하느라 계속 퍼질러 자는 거야.”

“이브가 포X몬이었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포X몬?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고. 한 세 번쯤 거쳐 왔잖아. 진화 형태 말이다.”

“아.”

세 번의 진화한 형태.

토식이가 말하는 ‘최종 진화’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말을 듣고 나도 감이 왔다.

“역시… 한 번 더 성장하는 건가.”

외형의 성장.

‘최종 진화’라고 한 걸 보면, 아마 이번이 마지막 성장일 테지.

전과 같은 페이스로 성장한다고 가정하면. 아마 최종적으로는 20대 초중반 정도의 여성이 되지 않을까 싶다.

“깨려면 얼마나 걸릴 거 같냐. 토식아.”

“낸들 아냐? 지 맘이겠지 뭐.”

“그건… 좀 많이 곤란한데.”

“너무 걱정은 마라. 이미 최종 안정 단계에 접어들었어. 웬만하면 오늘 안에는 깰 거다.”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릿속 한편에 묻어놨던 해묵은 의문을, 새삼 꺼내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있다.”

“아무렴 그러시겠지. 우리 호기심 천국이 질문 없이 잘 넘어가나 했다.”

토식이가 진절머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국은 혀를 차면서도, 헛기침을 하며 피식 웃는다.

“이번엔 또 뭐가 궁금해지셨나. 응?”

입으론 툴툴거려도 토식이는 질문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 정도 유용함이면 약간의 츤데레쯤은 받아줄 수 있지. 나는 피식 웃으며 의문을 입에 담았다.

“이브의 진화 조건. 혹시 알고 있냐.”

“으음? 조건?”

“내가 어떤 요소를 만족시켜야 이브가 진화하는 거였는지. 그 조건 말이야.”

사실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이미 이브는 네 번의 진화 단계를 착실히 밟아버렸고. 결국 현재는 최종 단계까지 진화를 목전에 뒀다고 한다.

다시 퇴화시킬 수단도 이유도 없는 상황. 이제 와서 조건을 알아봐야 무의미하다.

“알고는 있는데. 그걸 알아서 뭐 하게?”

토식이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렇게 물어온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화답했다.

“대단한 이유는 없어.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다.”

“흐음. 그러냐.”

“그래. 그러니 귀찮다면 대답 안 해도 상관은…….”

“말하자면 친밀감과 동질감이지. 음.”

내 말을 비집고 토식이가 대답해 줬다.

친밀감과 동질감. 그 말을 혼자 곱씹고 있자니.

“동질감은 육체적 동질감과 정신적 동질감.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토식이가 특유의 젠체하며 부연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는 당연히 미간을 바짝 모았다.

“…무슨 소리냐. 그게.”

“네가 하트 여왕의 눈물을 사용하면 갑주의 형태로 하나가 되지. 그러면 육체적 친밀감이랑 동질감이 자연스럽게 상승한다. 이건 이해되지?”

“되지.”

“근데 굳이 합체를 안 하더라도, 모종의 이유로 저 계집이 너한테 정신적 동질감을 느끼는 상황이 오면? 그것도 진화의 트리거가 될 수도 있다. 뭐 이런 소리라고.”

“아하.”

“한마디로 너에 대한 호감도가 특정 수준을 넘을 때마다 단계적으로 진화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다.”

정신적 동질감. 그리고 육체적인 친밀감이라.

나는 곤히 자는 이브의 얼굴을 내려다봤고. 그대로 멍하니 상념에 빠졌다.

그런 거였군. 대충 전말이 짐작되었다.

‘최종 진화의 계기는 아마…….’

수아에게 정면으로 부정당한 이브. 그리고 그런 그녀를, 결정적인 말 한마디로 함락시켰던 내가 떠오른다.

정신적 동질감. 이브는 분명 나한테서 그것을 깊이 느꼈을 테다.

“설명 고맙다. 토식아.”

깔끔하게 납득한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섬주섬, 이브를 이불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고. 이내 번쩍 들어 등에 업었다.

“어… 야. 잠깐만.”

가만히 지켜보던 강서윤이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이브를 업은 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시선만 슬쩍 돌려 강서윤 및 여인네들을 한 번씩 훑어봤다.

이제 보니 강서윤뿐만 아니라, 다들 의아한 눈초리를 내게 보내는 중이다.

“갑자기 뭐, 뭐 하는데? 걔 업고 뭐 하려고?”

강서윤이 여자팀 대표가 되어 물어왔다.

나는 이브를 내 쪽으로 한층 바싹 밀착시켰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잠깐 일이 있어서. 해운대에 다녀올 거다.”

“해, 해운대?!”

“그래.”

“갑자기 웬? 무, 무슨 일인데! 혼자 가는 거야?”

“…어. 혼자 가야 돼.”

한참 지난 전생 때. 광대가 벌여놨던 피의 축제가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워낙 그로테스크한 광경이라 그런가. 꽤 지난 전생인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여기가… 나 가는 곳보단 무조건 안전해.”

해운대는 100% 확률로 지옥도가 예견돼 있다.

그런 곳에 쟤네들을 쫄래쫄래 데리고 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잘됐다. 나는 이세라와 강서윤에게 오히려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얘기해 줄 게 있어. 잠깐 둘만 가까이 와봐라.”

“응? 뭐, 뭔데 또.”

“내가 없는 동안 헌터협회가 기습해 올 가능성이 있어.”

“아……!!”

“이 집을 중심으로 방어 플랜을 짜놨으니까 참고만 해라. 세부 전술은, 베테랑인 네가 알아서 잘해 줄 거라 믿는다. 서윤아.”

그 말에 놀라는 건 강서윤도 이세라도 아니었다.

한 발짝 뒤에서 관심 없는 척, 누구보다 유심히 듣고 있던 강수아였다.

“허, 헌터협회가, 기습? 여기로? 우리를요?!”

수아가 벌떡 일어나 터덜터덜 다가온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무, 무슨 소리예요, 오빠? 방어… 플랜이라니. 왜 우리가 난데없이 헌터협회한테 공격을 당하는데요?”

“…그건.”

“오빠 범죄자예요? 뭔가, 협회한테 밉보일 만한 짓이라도 하셨어요? 그런 건가요?!”

“…….”

실제로 했기 때문에 할 말이 궁하다.

나도 모르게 이세라와 강서윤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런데 이쪽도 다들 나만큼이나 켕기는 게 있는 양반들이라 그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만 수그리고 있다.

“그냥 좀. 그렇게 됐다. 어쩌다 보니.”

결국 내가 나서서 말을 얼버무렸다.

필요하다 싶으면 이세라나 강서윤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 얘기해 줘도 될지, 그 적정선을 잘 모르겠다.

“뭐예요. 그게.”

수아는 입을 댓 발 내밀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 이상의 불평이나 추궁은 하지 않았다.

그녀도 나름의 배려를 해주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플랜은 대충 이렇다.”

나는 강서윤과 이세라를 앞에 두고 찬찬히 설명해 나갔다.

팔랑. 내 손에는 어느새,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반야의 식신’이 들려 있었다.

이야기가 깊어지고, 강서윤과 이세라의 표정도 한껏 가라앉는다.

* * *

이브를 등에 단단히 업고. 토식이는 인벤토리에 때려 박은 채.

나는 전속력으로 남쪽으로 직행했다.

‘이쯤이었지. 분명.’

그렇게 1032번째 11월 28일의 늦은 오후. 5시쯤.

나는 생에 두 번째 해운대를 방문했다.

“우선 여기부터.”

목표했던 스팟과 가까워졌다.

나는 슬슬 비행 고도를 낮추며 수색 준비를 시작했다.

치지징! 이브와 토식이, 그리고 나 자신에게 차례로 은폐장을 두른다.

‘전에 크로스 박사를 만났던 이 골목. 여기부터 찾아본다.’

투화악!

까마득한 상공에서 그대로 급강하를 감행했다. 칼바람이 볼을 할퀴며, 신형이 순식간에 지면까지 추락했다.

마력의 시야로 주변을 연신 훑으며, 상념이 한껏 깊어진다.

‘이세라의 예지를 기대할 수 없으니. 내가 그만큼 발품을 팔아야지.’

그나마 위안은 크로스 박사를 한 번 만났다는 것.

생판 본 적 없는 사람과 한 번이라도 본 사람. 내가 사람을 찾는 데 있어서,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마력 잔향은 아직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니 크로스 박사만 아직 해운대에 있다면, 오늘 안에는 무조건 찾을 수 있다.

반드시 찾아내겠다. 해운대 전체를 뒤지는 한이 있어도.

* * *

전체를 뒤질 것도 없었다.

전생에 조우했던 곳부터 뒤진 것이 정답이었다.

내가 슈레더와 전투를 벌였던 그 후미진 골목 어귀. 한 낡고 허름한 개인 주택 안에서 놈의 마력 잔향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는…….”

잔향이 흘러나오는 사택을 잠깐 멀찍이서 쳐다봤다.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주택이었다. 굳이 꼽자면 낙후된 달동네 골목 분위기에 맞게 허름하다는 게 특징일까.

나는 미간을 바짝 좁혔다.

“사들인 건가?”

크로스 박사가 왜 저 집에 들어있을까.

몇 가지 가정들이 뇌리를 빠르게 스친다.

‘돈으로 정당하게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아님 빈집에 숨어들었다.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살던 집을… 힘으로 죽여서 강탈했다.’

D급 헌터쯤만 돼도 일반인 살해는 갓난아기 손목 비틀기보다 쉽다.

그래서 헌터들에게 능력의 무단 사용이 극도로 제한된 거고. 위반 시 처벌도 필요 이상으로 엄중한 것이다.

뭐 사실,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오늘 죽자. 크로스 박사.”

나는 서슬 퍼렇게 중얼거렸고.

끼이익! 낡은 양철 대문을 연 뒤, 주택의 비좁은 앞마당으로 입성했다.

감각은 상시 풀 개방.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와도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온몸을 극도의 긴장 상태로 유지시켰다.

“…….”

그리고 어느 순간.

마당을 빠르게 둘러보던 내 시선이 우뚝 멈췄다.

우우웅! 붉은빛을 영롱하게 흩뿌리는 보석이, 주택 주변으로 잔뜩 흩뿌려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스킬 재머다.’

보석의 정체는 곧바로 파악했다.

스킬 재머가 발동된 상태로 주택 일대를 메우고 있다.

전생의 경험상 저걸 일일이 치운다고 이미 발동된 재밍 영역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면…….

‘저택에 들어가면 스킬은 사용할 수 없겠어.’

그렇다면 은폐장을 유지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파지직! 스킬 재머 영역 밖에서 은폐장을 풀었다. 그리고 인벤토리를 미리 열었다.

내 주 무기인 단검 두 자루를 꺼내서, 철그럭. 양쪽 허리춤에 신속하게 납도했다.

‘문은.’

조심스럽게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슬쩍 돌려서 밀어봤다.

끼이익. 놀랍게도,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밀려났다.

“…안 잠겼네.”

생각보다 허술한 보안에 어리둥절하길 잠시. 조심스럽게 내부로 한 발짝을 디뎠다.

쉬리릭! 그리고 단검을 전방에 휘둘렀다.

“하아아아앗!!”

여성의 찢어지는 비명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키킹! 직후 면전을 향해 칼날이 치달렸다. 그러나 내가 휘두른 단검에 속절없이 막혔고, 그 반발력으로 습격자가 오히려 허공을 날았다.

“꺄윽!!”

쿠당탕!

한참을 튕겨나간 괴한이 방바닥을 구르다 벽에 부딪혔다. 식기를 담은 선반이 박살나며 괴한의 위를 그대로 덮쳤다.

콰장창! 무너진 선반에서 식기가 쏟아져 나온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 흐윽. 끄흑!”

괴한은 대파된 선반 아래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고. 이내 온몸을 웅크린 채 고통에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괴한… 아니, 집주인을 빤히 내려다봤다.

“예비 신랑 지키러 나왔냐. 로즈 아줌마.”

괴한의 정체는 로즈 휴스턴.

분명 애덤 크로스의 약혼자라고 했던, 그 여자였다.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테즈몬 현대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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