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103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
미래적 디자인의 순백색 복도는 어디에도 없다.
보이는 것은 오직 인간의 육편. 그리고 그것을 뒤덮은 새빨간 피. 시야에 닿는 모든 색이 적색으로 통일되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관망하다 피식 웃었다.
“…초장부터 엄청나게 뒤져 나가겠네.”
슈레더에는 고위급 헌터가 많이 소속되어 있다.
수장인 장수혁부터가 그렇다. 무려 서열 2위의 오버 랭커. 이 새끼 외에도 S급 헌터나 상위 A급에 달하는 헌터도 부지기수다.
‘그런 놈들을 다 죽여버렸으니.’
놈들이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
민간인 피해량에서 꽤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처럼 내가 던전 붕괴 저지에 소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아마 초창기의 붕괴 쪽에서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날 거다.
“…그만큼 열심히 일하면 되겠지.”
울며 겨자 먹기로 행복 회로를 돌렸다.
어쨌든 슈레더 소속 헌터들이 지켜낼 무수한 민간인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내 계획의 편의성.
두 요소의 저울질에서, 지금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일단 준비물은 챙겼으니.”
파지직!
허공에 인벤토리를 열었다.
내가 집어든 것은… 그새 시커멓게 혈색이 죽은 장수혁의 머리. 그것을 균열 안으로 대충 던져 넣었다.
“이제… 진짜의 시작이구만.”
나는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는 한편.
파팟! 서둘러 텔레포트 스킬을 영창. 귀가를 서둘렀다.
‘곧 양호성이 눈치챌 거다.’
전생에서 겪었던 비슷한 경험을 떠올렸다.
장수혁의 죽음을 감지한 양호성은 순식간에 양동작전을 펼쳐, 내 발목을 묶고 수아에게 위협을 가했었다.
이미 헌터협회 전체와 척을 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편하다.
‘그러니까… 시간이 많지 않아.’
내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그래야 최소한 이세라와 강수아, 그리고… 강서윤의 안전이 확보될 것이다.
* * *
서윤이를 향한 세계의 억까는 상상을 초월한다.
내가 흔히 ‘온 세상이 합심해서 강서윤을 교수대에 올린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게 진짜 거짓말이 1%도 함유되지 않은 순수한 진실이다.
‘박살나고. 소산(消散)하고. 찌부러지고. 산화하겠지.’
매번. 항상.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억지로 죽냐?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죽어댄다.
적어도 내가 겪어온 1천 번의 한 달에선 항상 그랬다.
‘본인이 살고 싶은 생각이 있든 없든. 무조건. 반드시 그랬어.’
강서윤은 6차 붕괴가 개시된 후. 정확히 30분에서 1시간 남짓한 사이의 시간에 확정적으로 사망하곤 했다.
지난 수많은 회차 동안, 내가 강서윤을 단 한 번도 설득하지 못했을까?
‘천만에.’
그렇지도 않았다.
이성에도 호소해 봤고 감성에도 호소해 봤다. 강서윤은 대체적으로 감성파였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제발 나랑 같이 도망가자!’라고 애원하면. 그녀는 간혹 나와 함께 6차 붕괴지에서 도망쳐줄 때가 있었다.
‘그래도 얄짤없이 뒤졌지.’
기껏 도망치자마자 강서윤이 5번이나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
지금껏 한 번도 실패하지 않던 서윤이의 텔레포트가 그날따라 오류를 일으켜, 지면 아래 3킬로미터의 깊디깊은 지하에 3번이나 생매장당할 확률.
이런 족같은 개억지가 무려 14번이나 되풀이될 확률.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모르겠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극도로 희박한 확률인 건 확실했다. 끈질기기론 어디서 둘째가면 서러운 나를 기어코 체념시킬 만큼.
‘하지만… 그래.’
그렇게나 데여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한번 강서윤까지 구해내길 도전하려 한다.
늦가을의 공활한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의 나는. 분명히 다르다.”
야구팀 감독들이 시즌 초마다 내뱉는 개소리였다.
그러나 야구팀 감독들도 제 딴의 근거가 있어서 그런 말을 싸지르듯이. 나 역시 내 나름의 근거는 있었다.
‘내가 확정이라고 생각했던 사건들 중에… 진짜 확정은 하나도 없었어.’
진짜 바뀌지 않는 ‘운명’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운명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전부, 그렇게 흘러갈 확률이 엄청나게 높았던 사건이었을 뿐이었다.
토식이는 그것을 내 앞에서 확언해 줬다.
‘이브가 있으니 이세라는 살아났지.’
고작 이브 단 하나의 차이였다.
육사도가 하나만 내 손에 있었는데.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이 살아났다.
‘하물며 지금 내가 가진 육사도의 힘은 세 개다.’
그러자 1031번 동안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붕괴지까지 변했다.
이런 마당에 강서윤이 죽으라는 법? 아직 어디에도 없다.
“아니.”
그딴 족같은 법 따위.
있다 해도 내가 철폐해 버리겠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브는 여전히 꿈나라 한복판이었고. 침대 옆에서는 이세라와 토식이가 나란히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나오자마자 한마디 했었지.”
“뭐라 그러셨는데요?”
“그래. 나를 깨운 옥좌가 네놈이구나? 거기, 우중충한 사내새끼!”
“푸흐흣. 하긴, 정용 씨는 항상 우중충한 얼굴이긴 하죠?”
“말해 뭐 해. X바!”
토식이가 한창 신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중이었고. 이세라는 그 옆에서 즐거운 듯이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내가 등장하니 화들짝 놀라며 대화를 얼버무리는 행색이 인상적이다.
“그새 많이 친해졌구만.”
“…어, 뭐.”
“사람 친해지는 데는 남의 뒷담만 한 게 없지. 그럼.”
“크험. 허흠험!!”
내가 비아냥거리자 헛기침으로 무마하는 토식이였다.
됐다. 추궁해서 뭐 할 거냐. 지금 쟤네들이 날 뭐라고 씹었는지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토식이에게서 관심을 꺼버렸다.
“시작해 볼까.”
나는 우선 이세라와 토식이를 피해 베란다로 나갔다.
곧장 핸드폰을 꺼냈다. 빠르게 전화번호부를 뒤져 강서윤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꽤 길게 신호음이 가고, 철커덕. 느지막하게 전화가 연결되었다.
―뭐야, 한정용. 갑자기 전화를 다 하냐?
핸드폰 너머로 약간 얼떨떨한 강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 아직 한 것도 없는데 가슴이 갑갑해지는 듯하다. 먹먹한 기분을 뒤로한 채,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화를 이었다.
“긴급 사태야. 잠깐 우리 집으로 와봐야겠다.”
―뭐어? 갑자기 뭔 개소리야 이 새낀. 내가 너처럼 한가한 줄 알아?
“없는 시간이라도 내야 할걸. 중요한 얘기다.”
―…뭐, 뭐야. 불안하게. 무슨 일인데?
여기부터가 중요한 구간이지. 나는 심호흡을 잠깐 하며 뜸을 들였고.
강서윤을 즉시 소환하는 ‘마법의 주문’을 읊었다.
“수아랑 나 사이에 애가 생겼다.”
효과는 이미 전생에 체험한 바가 있다.
예상이 맞다면 늦어도 3분 이내. 강서윤은 텔레포트까지 써가며 허겁지겁 내 앞에 등장…….
“야 이 개새끼야아아아!!”
푸확!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공간이 찢어졌다.
그리고 익숙한 일갈이 들려왔다.
“예상보다 빠르구만. 강서윤.”
내 예상이 약간 틀렸음을 깨달았다.
3분은 무슨. 30초가 채 안 걸렸다. 성능 진짜 확실하구만.
“방금 그 말, X발! 대체 무, 무슨 소리야!!”
강서윤은 전생처럼 허겁지겁 내 멱살을 잡아챘고. 내 온몸을 전후좌우로 흔들어 대며 비명처럼 외쳤다.
소름 돋을 정도로 전생과 비슷한 반응. 나는 반사적으로 쓴웃음을 짓다가, 씩씩대는 강서윤을 보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시간 좀 있냐.”
“…뭐, 뭐?”
“시간 좀 있냐고.”
“허? 갑자기 웬 시간?”
“잠깐 나랑 대화 좀 하자.”
일단 전생과 비슷하게 대화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전생과 비슷한 프레이즈. 그것이 실수였던 듯하다.
“얘기라니. 전화로 했던 말 해명이라도 하게?”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지금은 더 중요한 사안이 있어.”
“야 이 X발아.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사안이 세상에 어딨는데?!”
“놀랍게도 있다. 일단 좀 들어봐.”
“조까! 난 그… 애, 애 생긴 얘기가 듣고 싶어서 온 거라고!”
수아와 썸씽으로 불러낸 건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전생과 대화의 흐름이 지나치게 비슷했다. 이러면 본론을 꺼내는 데까지만도 시간이 한 세월 걸릴 게 분명하다.
‘그건 좀 싫은데.’
강서윤이 심하게 충격 받을까 봐 절차를 밟고 싶었건만.
더 이상의 시간낭비는 곤란하다. 이쯤에서 내가 강수를 두기로 했다.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파지직!
인벤토리를 열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휙, 그녀의 발치로 그것을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간 그것의 정체를 강서윤이 곧 확인했다.
“히, 익……!”
강서윤은 경악과 공포로 숨을 삼켰고. 다리에 힘이 약간 풀렸는지 상체를 휘청거렸다.
그럴 법도 하다. 내가 꺼낸 것은 장수혁의 머리였으니까.
부릅뜨인 강서윤의 시선이 이내 내게 향했다.
“야. 너, 너. 하, 한정용……. 이거… 이거 뭐야!!”
“혈색이 죽어서 못 알아보나? 슈레더 헤드인 장수혁이다.”
“슈, 슈레……?! 한정용! 너, 너 어떻게 그걸!!”
내가 죽은 장수혁의 머리를 내던진 것만도 놀라운데. 내 입에서 ‘슈레더’라는 특급기밀 암부조직의 명칭까지 튀어나왔다.
강서윤은 연이어 쑤시고 들어오는 경악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놀라긴 이르지.’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 충격에 대비하게 만들기 위한 프롤로그였을 뿐이라고.
“서윤아. 난 사실 한 달 뒤의 미래에서 왔다.”
전생에 분명 강서윤이 이렇게 말했지.
내가 ‘슈레더’에 대해 잘 안다는 걸 미리 말했다면. 내가 회귀자라는 것을 더 쉽게 믿었을 거라고 했던가.
그래서 준비해 온 게 장수혁의 머리다.
어떻게, 내 진심이 잘 전달됐을지 모르겠네.
* * *
충격을 잔뜩 받은 강서윤이 정신을 차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내 마음을 추스린 그녀가 조심스레 내게 물어왔다.
“…바, 방금 한 얘기. 한 달 뒤가 뭐라 그랬지? 정확히 무슨 말이야……?”
수아와 나의 썸씽 따위는 완전히 뒷전이 됐다.
하긴 헌터협회 서열 2위의 모가지를 태연하게 잘라온 남자가 눈앞에 있다. 이런 마당에 수아의 애 따위가 중요하겠는가.
“하나씩 설명을 해주자면…….”
어쨌든 그렇게 나는 겨우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생의 강서윤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방금 보여준 퍼포먼스가 있어서 그런지, 서윤이는 내 말을 어느 전생보다도 훨씬 쉽게 믿었다.
“그, 그렇구나. 정말로 1032번이나… 돌아왔다고?”
이로서 계획의 첫 단추는 잘 꿰어졌다.
나는 연신 혼자 중얼거리는 강서윤을 보며, 고개를 가만히 주억거렸다.
“그래. 그런 거지.”
거창하게 ‘계획’이라고 했지만 사실 대단한 건 없었다.
지금까지 모인 데이터를 참고하고, 가용한 모든 수단을 활용해서. 최대한 빨리 강서윤과 강수아를 연쇄적으로 납득시킨다.
그리고 그녀들을 최대한 가까이서 지킨다. 결국은 그것이 골자다.
‘그리고 서윤이를 먼저 함락시킨 건…….’
이 또한 이어질 다음 작전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강서윤은 어디까지나 설득의 난이도가 낮은 중간 보스지. 설득의 최종 보스는 당연히, 좀처럼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강수아였다.
“그래서 말인데. 서윤아.”
덥석. 나는 별안간 강서윤의 두 손을 굳게 붙잡았다.
장수혁의 머리통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히익, 숨을 삼켰다. 이내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뭐, 뭐야. 갑자기 뭔데! 손은 왜 잡아!!”
“너한테 부탁이 하나 있다.”
“…부탁?”
“그래. 부탁.”
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획의 최종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아가 날 믿을 수 있게… 도와줘.”
이세라와 강서윤.
두 사람의 힘을 동시에 빌려서 초장부터 수아를 납득시킨다.
이런 시도를 전에 안 해본 건 아니다. 무수히 해봤지만, 이세라도 강서윤도 끌어들이는 순간 헌터협회라는 리스크가 붙기에 안 한 거지.
‘이건 말하자면. 내 각오다.’
무난하게 수아만 살릴 거라면? 둘을 안 끌어들이는 게 정답일지 모른다.
아니, 무조건 그게 정답이겠지.
‘하지만 모두 살릴 거라면… 이 수밖에 없다.’
가장 처음부터 모두 끌어들이고, 처음부터 모두에게 신뢰를 얻고.
그리고 처음부터, 모두 내가 지켜내야 한다.
‘세 명 다 반드시. 살려내겠다.’
배수의 진을 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생을 내 마지막 한 달로 만들겠다.
‘그리고 한 달 끝에는…….’
최소한 이 셋만이라도.
비좁은 손에 틀어쥔 이것들만이라도, 반드시 지켜내고 말겠다.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테즈몬 현대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