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67화 (167/235)

167화

<103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

빠르게 회귀 프레이즈를 진행했다.

계승품은 대충 자유 능력치 1포인트로 정했다.

[유물의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종속 스킬인 ‘멸망의 화염’ 외에 계승할 만한 걸 얻었던가?

모르겠다. 있었어도 딱히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만사가 귀찮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

[현재 시간선 : 2031년 11월 27일. 오후 2시.]

햇살이 눈꺼풀을 찔러 천천히 눈을 떴다.

막간에 품었던 일말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나는 어김없이 1032번째 11월 27일의 한복판에 도착해 있었다.

“음냐아. 으우웅……!”

이브의 잠꼬대 소리가 돌려와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아직 자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일어나고 나면 또 추궁하는 거 아닌가 약간 걱정도 됐다.

“옥좌야. 갑자기 자살은 왜 하냐?”

흠칫. 한 번 더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내내 이브에게 안겨 있다가 방금 전에 간신히 탈출한 이세계 토끼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얘를 잊고 있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봤냐.”

“봤지. 그럼.”

“그래. 잊어버려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쇼.”

토식이는 잠결에 손을 뻗는 이브에게서 황급히 멀어졌고. 안전거리를 확보한 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놈이 담배를 진득하게 한 입 빨더니,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묻고 싶은 게 있는 얼굴이야?”

“있다. 두세 개 정도.”

“물어보든가.”

“수아는… 왕이냐?”

“몰라 나도.”

칼같은 즉답이다.

아마 내 질문을 미리 예측한 듯하다.

일단 토식이는 잘 모른다고 한다. 중요할 때만 귀신같이 못 미더운 이세계 토끼가 그러면 그렇지.

“그래. 일단 그건 알겠고.”

반응은 대충 짐작했기에 타격은 없었다.

대신 예고했던 대로, 곧장 다른 질문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돌아왔으니 게이트 붕괴는 다시 열다섯 번이 남았다.”

“그렇겠지.”

“이번 생에도 붕괴지가 멋대로 바뀔 가능성은?”

“높음. 아니지… 존나 높음?”

이번에도 즉답이다.

상당히 골치 아픈 대답이기도 했다. 미간을 잔뜩 모아 오만상을 썼다.

“이유가 뭐냐.”

“쉽게 말하자면 육사도들이 정해진 운명을 완성해 갈수록, 그에 비례해서 초인을 둘러싼 사건들은 혼돈치라는 게 높아지거든.”

“혼돈치? 그건 또 뭔데.”

“설명하기 귀찮으니 결론이나 알아둬라. 네가 육사도의 힘을 하나씩 모아갈수록, 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점점 더 규칙성이 박살 나고 개판이 된다고.”

“…그런 거군.”

“그러니 던전 붕괴도 갈수록 조건들이 변동될 확률이 늘어나겠지. 이해가 되냐?”

“대충 알겠다.”

솔직히 나도 원리까진 딱히 궁금하지 않다.

일단 내내 궁금했던 부분은 토식이가 속 시원하게 긁어줬다. 그쯤에서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 알면 됐어.”

이걸 알았으면 한 가지는 확실해진다.

역시 이번 생에도 이세라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녀는 이제 미래의 게이트 붕괴 예상지를 예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이 얘기는 끝이다.”

“오냐.”

토식이는 쿨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토식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 생에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별안간,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육사도나 다 모아. 그러면 싫어도 전부 알게 될 거라고.”

“…….”

“육사도가 다 모이면. 왕이 옥좌를 차지하러 강림하거든.”

당연히 목소리의 주인공은 토식이였다. 어느샌가 특유의 짓궂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다.

나는 상념을 끊고 놈을 다시 내려다봤다.

“왕이 강림한다. 그래서?”

“뭘 그래서야. 죽은 왕이 되살아나서,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리를 하고 있잖아.”

“…아하.”

“그러니 왕의 정체가 궁금하면 육사도를 모으라고. 그게 의문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일 거다.”

치지직.

토식이가 그사이 다 피운 담배를 혓바닥에 비벼 껐다.

놈의 가라앉은 시선이 바닥의 무늬를 멍하니 쫓아가고 있었다.

“너한테 걸려있던 시간 동결 저주도 있다 보니, 나도 이번 왕은 면상이 좀 궁금해졌다. 왜 그딴 이상한 짓을 했는지도 의아하거든.”

“처음으로 마음이 통하는데.”

나는 병든 웃음을 지으며 동조했고. 토식이도 쓴웃음으로 응수했다.

토식이가 새 담배를 꺼내며 계속 말했다.

“애초에 이번 촌극은 나도 의문점이 많아. 일단 네 존재 자체도 그렇고.”

“…내 존재?”

“초인이면서 동시에 육사도라니. 뭔가가 중간에 배배 꼬여있단 말이야. 이해가 되질 않아. 적어도 저주를 건 당사자인 왕이라면… 그 해답을 알고 있겠지.”

그 말을 끝으로. 놈도 할 말 다했다는 듯이 나를 외면해 버렸다.

나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은 그게 시작인가.”

육사도를 모두 찾아낸다.

그리고 놈들의 힘을 내 것으로 만든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점이요. 또한 종결점인 듯하다.

* * *

토식이와 대화 후엔 미뤄뒀던 졸음이 쏟아졌다. 일단은 한숨 푹 자고 일어났다.

일어났을 때는 다음 날 여명이 밝고 있었다.

“흐음.”

덜컹. 나는 곧장 현관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평소의 루틴대로 햄스터를 놔줄 겸, 산책하면서 머리도 식힐 겸. 새벽의 어스름한 거리를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생각을 좀 해보자…….”

단지 옆 낡아빠진 놀이터를 지나치는 와중. 나는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재 나의 당면 과제는 크게 세 가지 정도였다.

‘첫째는 이세라와의 접촉.’

토식이를 통해 확실히 확인했다. 앞으로도 게이트 붕괴지가 불규칙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세라는, 그 변화한 붕괴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슈레더의 주목을 받더라도… 지금은 어쩔 수 없겠지.’

햄스터만 풀어준 뒤 당장 이세라를 만나러 그녀의 주점으로 찾아갈 것이다.

그만큼 이세라가 갖는 존재감이 굉장히 커졌다.

‘둘째는 육사도 수색.’

수중에 수집된 육사도는 두 체.

그리고 빼앗은 스킬이 하나. 그리고 내 안에 숨어있는 게 하나.

소재는 아는데 아직 못 찾아온 놈도 하나. 그리고 아직 소재조차도 오리무중인 놈도 하나 남았다.

‘이제 수중에 없는 둘 중 하나를 공략해야 하는데.’

<목 잘린 붉은 용>은 단서가 티끌 하나 없는 상태다.

나는 지금까지 등장했던 육사도들의 등장 패턴들을 하나씩 꼽아보기 시작했다.

‘이브랑 토식이는, 트리거를 충족시켰을 때 던전 마스터의 드롭 아이템으로 나오는 경우였고.’

반면 <길을 잃은 까마귀>는 던전의 일반 몬스터가 변신해서 등장했다.

한술 더 떠서 <주저앉은 광대>의 경우엔 무려… 지구의 평범한 인간 안에서 기생하고 있었다.

‘이 중에 어떤 패턴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아이템 형식이라면 어떤 던전 마스터를 어떤 트리거로 잡아야 할지. 몬스터가 변신하는 거라면 어떤 몬스터가 변신하는지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애덤 크로스처럼 지구의 인간에 기생하는 케이스면?

‘답도 없지. X발.’

솔직히 앞날이 깜깜하기 그지없다.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스캔해 보면서 다녀야 하나. 생노가다를 벌일 생각에 한숨부터 나온다.

‘기왕 회귀도 했으니, 크로스 박사부터 다시 만나자.’

그러니까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붉은 용’은 잠시 제쳐두고. 소재라도 확실히 아는 ‘광대’ 쪽부터 다시 도전한다.

그것이 내가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가까운 것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내 오래된 신념을 중얼거렸다.

그때에 비하면 육사도의 힘이 두 개나 늘었다. 재수가 어지간히 없지 않고서야, 웬만하면 이번에야말로 광대를 쓰러뜨릴 수 있겠지.

‘마지막 셋째는… 이거였지.’

덜그럭.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것을 꺼내들었다.

새빨간 빛을 영롱하게 뿜는 작은 돌멩이가 들려나왔다.

‘이 스킬 재머를 알아보는 것 정도.’

이 건은 사실 우선순위가 높진 않았다. 여의치 않다면 스킵해도 무방할 정도.

이 돌의 정체에 대해선, 이미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나마나 광대와 관련된 힘이겠지.’

스킬 재머의 주된 기능은 스킬 면역.

나는 광대 본인과 싸워본 적이 있고. 그놈이 패시브 스킬처럼 스킬 면역과 비슷한 기능을 사용한다는 것을 안다.

그때의 광대는 단순히 스킬 면역을 넘어서, ‘대미지 면역’이라는 느낌이었지.

‘게다가 광대의 모체가 크로스 박사기도 하고.’

문득 머리맡을 스치는 애덤 크로스의 얼굴.

나는 손안의 붉은 보석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슬쩍 열린 입술 사이로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새끼. 천재가 맞긴 맞았네.”

애덤 크로스가 광대에게 선택받은 건 우연이다.

하지만 놈이 모종의 방법으로 만들어 낸 이 스킬 재머. 이건 순전히 애덤 크로스의 피땀이 서린 고유의 발명품이었다.

‘아무리 계기는 우연이었다고 해도.’

그는 결과적으로 자기 손으로 던전의 비밀을 파헤쳐 냈다.

던전의 가장 깊숙한 비밀을 일부나마 풀어내고. 이렇게 실용화까지 시킨… 세계 유일의 던전 학자인 것이다.

“일단… 정할 건 다 정해졌고.”

덜컹!

나는 들고 온 케이지를 열었고. 햄스터를 길가에 조심스레 올려놨다.

후다닥 도망가는 햄스터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움직이자.”

스스로에게 명령하듯 중얼거렸다.

투학! 곧장 비약 스킬을 발동. 허공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방향은 북동. 이세라의 칵테일 바가 있는 곳이다.

* * *

주점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파지직! 건물의 인식 저해 장막을 뚫어내고 지하로 달리듯이 내려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칵테일 바의 출입구를 열었다.

끼이익. 열리는 문 너머로 카운터에 서있는 이세라가 보인다.

“…역시 오시는군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런 말부터 꺼내는 이세라.

그녀가 카운터 위로 언제나처럼 칵테일 한 잔을 올려놨고. 난 가타부타 말없이 한 번에 들이켜 버렸다.

잔말할 시간도 아깝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뭘 물어볼지는 알고 있냐.”

“아마도요?”

“예. 아니오. 선택해.”

제안할 것은 그녀의 합류다.

이세라가 내 집으로 이전할지, 아니면 우리가 이세라 쪽으로 빌붙을지는 모르겠다. 그건 상황 보고 판단할 예정이긴 한데…….

글쎄.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동거 제안이라.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건 안다.”

인간 불신이 팽배한 나라면 단칼에 거절한다.

게다가 그녀는 주점 밖으로 멀리 나가는 걸 극도로 꺼리는 상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절당할 요소가 너무 많다.

“그래도 난 네가 필요해. 이세라.”

하지만 상대가 이세라라서 확신할 수 없다.

제법 많은 회차를 함께한 그녀였지만, 나는 아직 이세라의 사고 패턴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 일말의 의외성에 걸어보고 있다.

“이거 하나는 여기서 맹세해 줄 수 있다.”

덜그럭. 나는 다 마신 술잔을 이세라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고개가 그리로 떨어지나 싶더니.

“…이번이 최후의 루프다.”

이세라가 나보다 먼저 목소리를 냈다.

선수를 뺏긴 내가 멍하니 있자, 그녀가 말을 이어서 했다.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어떻게든 이 비극을 끝장내겠다. 이거였던가요?”

폼 좀 잡아볼랬더니 미리 읽어버렸다.

나는 멋쩍어져서 뒷머리만 하릴없이 긁적였다. 그러자 이세라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로채서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고.”

“워낙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서요. 무심결에 따라해 버렸네요.”

“음?”

“어떤 미래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수십 번 가까이 보였던 정용 씨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저한테 그렇게 맹세해 줬어요.”

“…….”

이세라는 거기까지 말한 뒤 정장 마의 단추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카운터에서 걸어 나와 내 앞까지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확신을 하시는데. 안 믿을 수가 있겠어요?”

어느새 익숙한 외출복 차림의 이세라가 있었다.

이미 준비를 마친 모양새다. 나는 말문이 막혀 이세라를 쳐다볼 뿐이다.

그녀가 문득 양손을 뻗어 내 손을 굳게 맞잡았다.

“저도 믿어볼게요. 제 눈에 다시… 한 달 후, 멸망 후의 미래가 보이는 날이 올 거라고.”

“…….”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을 테니까. 배신하지 말아주세요……?”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세라의 체온. 그녀의 양손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형언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노력해 본다.”

믿음직한 멘트를 생각하다가 포기했다.

확실하지 않은 걸 호언장담하는 거짓말. 역시 좀 거북하다.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테즈몬 현대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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