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65화 (165/235)

165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4)>

이세라가 멍하니 내 얼굴 쪽을 마주했다가, 이내 다시 천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대로 잠깐 고요히 시간이 흐른다.

그녀의 입이 열린 것은 한참 후였다.

“그래서, 여기는 어디죠? 정용 씨.”

“안심하세요. 병원입니다.”

“푸흐. 하나도 안심이 안 되는 멘트인데… 백병원 의사세요?”

이세라가 과장스럽게 몸을 떨었다.

이런 낡아 빠진 옛날 개그를 알아듣고 받아쳐 줄 줄이야. 역시 수아랑 다르게 개그 치는 보람이 있는 여자다.

그런 목가적인 생각이나 떠올리자니.

“그러면 정용 씨는… 무슨 용건으로, 저를 다시 찾아오셨나요?”

이세라가 불쑥 핵심을 물어왔다.

그녀의 입가에 걸려있던 씁쓸한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공산당 할 거냐고 물어보러 온 건… 아닐 거잖아요.”

“그야, 뭐.”

“제가 쓰러지기 전에 뭘 봤는지. 왜 갑자기 그렇게 발작했던 건지. 그게 궁금하신 거죠?”

“…….”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세라가 선수를 쳤다.

하기사 늘 이런 패턴이긴 했지. 알아도 어쩔 수 없이 치솟는 불쾌감을 뒤로하고,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였다. 이세라.”

“제 말대로…요?”

“쓰러지기 전에 나한테 그랬지. 뭔가가 변했다고.”

“제, 제가 그런 말도 했던가요?”

“그랬어. 그리고 실제로 뭔가가 변했다.”

이세라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린다. 본인이 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약간 애매한 모습이다.

나는 그녀의 텅 빈 눈두덩을 빤히 쳐다봤다.

“쓰러지기 전에… 뭐가 보였던 거냐.”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세라가 살짝 굳은 얼굴로 입을 콱 다물었다. 그대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 줬다.

“으음. 그게, 아하하. 뭐랄까요.”

결국 이세라는 어렵사리 말문을 텄다.

약간의 난처함과 막연한 두려움. 지금 그녀의 행색에선 이질적인 두 감정이 뒤섞여 표출되고 있었다.

그녀가 당시 상황을 천천히 반추하기 시작했다.

“그 혹시, 알고 계셨나요?”

“뭘.”

“제가 정용 씨랑 만나기 전부터 상태가 이상했던 거.”

“당연히 알았지.”

실제로 얼굴 마주한 즉시 간파했었다. 그래서 대화의 첫마디부터가 ‘어디 안 좋냐’로 시작했다.

근데 이세라는 그 대답이 상당히 의외였던 듯하다.

“그, 그랬어요? 나름 열심히 괜찮은 척했는데…….”

“내가 널 얼마나 많이 봐왔는데. 그 정도는 바로 알아본다.”

“아… 음. 그, 그렇구나. 마, 많이 보셨구나.”

이세라의 말소리가 급격하게 볼륨이 줄어들었다.

내가 인상을 가만히 찌푸리고 있자니. 그녀가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어,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요. 그땐 거짓말을 해서 죄송했어요.”

“갑자기 무슨 거짓말.”

“정용 씨. 이번 붕괴는 어디에서 일어났죠?”

“……?”

아까부터 주제가 이리저리 삐딱선을 타는 느낌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맥락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편. 일단 순순히 질문에 대답해 줬다.

“예술의 전당이었다.”

“예술의 전당. 서울에 있는 그거 맞죠? 서초구 쪽에.”

“맞을걸.”

“…정용 씨가 전생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장소인가요?”

“아니. 그래서 그게 변했다는 소리였다.”

“역시. 그랬군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이세라.

역시. 방금 역시라고 했나?

“이세라. 설마.”

수상쩍은 반응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혼수상태에서 방금 깨어난 이세라가 붕괴지를 알고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저런 반응이 나온다는 건…….

“보였냐? 어디서 붕괴할지?”

“…네. 아마도요.”

“……!”

물어보면서도 설마 긍정이 나올 줄은 몰랐다.

잠깐 온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격렬한 흥분으로, 뇌가 달군 쇳덩이처럼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세라의 말이 이어졌다.

“그걸 말해주고 싶어서… 정용 씨를 만나려고 그곳에 찾아갔던 거예요. 이상하게 요즘 당신과 관련한 미래가 유독 선명하게 보였거든요.”

“…그, 그랬던 거군.”

“네. 그랬는데,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런 일. 눈에서 피를 콸콸 쏟으며 괴성을 질렀던 그것일 테다.

마침 말을 잘 꺼냈다. 나는 그에 대해서도 좀 물어보기로 했다.

“그때도 뭔가 보였던 거냐?”

“음. 보였다고 할지, 들렸다고 할지. 좀 애매하네요?”

“무슨 소리야. 구체적으로.”

“정용 씨랑 대화하다가 갑자기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고요. 그 뒤엔, 선명한 장면이 하나 보였어요.”

“…장면?”

“네. 그리고 그 장면의 주인공이 바로 당신이었어요. 정용 씨.”

나는 흠칫, 숨을 삼켰다.

이세라의 흉측하게 일그러진 눈두덩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폐허밖에 안 보이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당신이 강수아 씨와 대화하고 있더군요.”

“……!”

“엄청나게 괴로운 얼굴로요. 정용 씨는 뭔가를 필사적으로 고민하고 있었어요. 강수아 씨는… 그런 당신을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죠.”

여기서 갑자기 수아가 튀어나올 줄이야.

내가 수아와 대화를 하는 장면? 나는 뭔가를 엄청나게 고민을 하고 있고, 수아가 그런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고?

게다가 그런 해괴한 장면을, 이세라가 미래시로 봤다?

“그다음엔… 목소리가 들려왔죠.”

흠칫. 이어진 이세라의 말에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심결에 그 말을 되새김질했다.

“목소리?”

“네. 혼란스러워하는 저한테 그 장면을 설명해 주듯이요.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목소리가… 갑자기 저한테 말을 걸어왔어요. 아니, 명령을 했다고 할까요?”

“무슨… 명령을.”

아니. 잠깐만.

이 전개는 너무 익숙하다.

애덤 크로스. 진조 노스페라드의 얼굴이 차례로 뇌리를 스친다.

‘의지의 화신. 또 너냐?’

불길한 가정이 불쑥 가슴을 쑤셨고.

이어진 이세라의 말로 가정은 확정되었다.

“…가서 초인에게 전해라.”

항상 이런 식이지.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뇌리에 새겨 놓아라. 이것이 자네가 곧 맞이할 종언의 정경이니까.”

“!!”

그것이 이세라가 들었다는 목소리.

의지의 화신이 초인인 내게 말하는, 일종의 전언이었다.

“으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그 말만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이 남아요.”

이세라는 거기까지 말한 뒤. 내 반응을 기다리듯 다소곳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텅 빈 눈두덩이 내 얼굴을 빤히 마주한다.

“…….”

“…….”

그러나 나는 반응해 줄 겨를이 없었다.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수많은 상념에 복잡해진다.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얼마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을까.

“실례합니다. 좀 들어가겠습니다?”

똑똑.

별안간 들려온 노크 소리가 산통을 깨부쉈다.

드르륵, 이세라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문은 열렸고. 사내 하나가 불쑥 병실로 들어왔다.

“……!”

들어온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뒤. 나는 그대로 온몸이 바싹 굳었다.

놈의 입가에 걸린 잔잔한… 가식적인 미소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

나는 침묵 속에서 놈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것을.

“자, 장수혁, 씨……!”

이세라가 들어온 남자 쪽으로 얼굴을 돌리더니.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완전히 표백돼서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들어온 사내… 장수혁이 내 옆에 조용히 멈춰 섰다.

“안녕하십니까. 이세라 씨.”

그리고 이세라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놈의 뱁새눈이 미미하게 호선을 그렸고. 이세라의 면면을 핥듯이 살핀다.

“몸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셨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염치 불고하고 급하게 찾아와 봤습니다.”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장수혁이, 천안의 이름 없는 병원까지 몸소 찾아온 이유. 저 말로 모든 전말이 대충 짐작되었다.

‘이세라의 상태를 살피러 왔군.’

본인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은퇴했다고는 하나. 무려 ‘예언자’인 이세라는… 헌터협회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재원이다.

언젠가 암부의 아카이브에서 읽어낸 정보를 떠올렸다.

‘애초에 공짜 재원도 아니었던가.’

협회 수뇌부의 철저한 계획에 따라, 막대한 투자를 기울여 완성시킨 ‘만들어진 예언자’. 그게 이세라다.

세간의 이목을 신경 써서 겉으로만 은퇴시켜 준 거지. 지금도 이세라는 협회 암부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있다.

‘갑자기 피 쏟고 쓰러졌다니까 쫄렸냐?’

사안이 사안이라 장수혁 본인이 출두한 모습이다.

이러면 이미 병원 일대에 슈레더 암살자들이 쫙 깔려있겠군. 골치 아프게 돌아가는 상황에 조용히 침음을 흘렸다.

“직접 뵙는 건 오랜만이군요. 이세라 씨.”

“아… 네, 네. 그, 그렇, 네요.”

“어떻게, 은퇴하고 그 동안은 잘 지내셨습니까?”

“네에. 뭐, 더, 덕분에요. 아하하…….”

이세라는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말을 엄청나게 더듬거리고, 손가락이 안절부절 춤을 춘다.

장수혁이 왜 자기에게 찾아왔는지. 이세라도 대충은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 제가 뭐, 이세라 씨에게 해드린 게 뭐가 있겠… 아.”

능글맞게 지껄이던 장수혁이 흠칫, 온몸을 굳혔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별안간 나를 향했다.

장수혁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퍼뜩 고개를 숙였다.

“아아, 죄송합니다. 선객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무조건 거짓말이다.

S급 오버랭커… 그것도 대한민국 서열 2위의 장수혁. 그가 내 존재를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나는 딱히 기척을 숨기고 있지 않았으니까.

‘일부러 모른 척했겠지.’

넌 뭐 하는 새낀데 여기서 엉덩이 비비고 있냐. 눈치 보고 알아서 빠져라.

대충 그런 뉘앙스로 시위를 하는 거다.

“저, 실례지만. 혹시 이세라 씨와는 관계가……?”

장수혁이 눈치를 살살 보며 물어왔다.

흥미 만만 관심 만만한 시선이 내게 꽂혀 있다.

‘이건 좀 낭패인데.’

내가 헌터협회가 괴멸하기 전까지, 웬만하면 이세라와 먼저 접촉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다.

그녀와 접촉하면 거의 100% 확률로 슈레더와 장수혁의 애정을 듬뿍 받게 된다.

‘일단은 빠져나가자.’

더 이상 주목을 받는 건 사양이다.

나는 장수혁에게 연신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옛날에 신세를 좀 졌던 지인입니다. 안 그래도 곧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이야 이거. 괜히 저 때문에 서두르시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뭐하면 제가 잠깐 밖에서 기다려도 되는데……?”

“그러실 거 없습니다. 어차피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하던 중이었으니까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해 버렸다.

겸연쩍은 시선을 보내는 장수혁을 뒤로한 채. 나는 이세라를 향해 손을 불쑥 뻗었다.

난데없는 악수 요청이었다.

“뭐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다. 세라야.”

“어, 네? 아… 네, 네에.”

이세라는 퍼뜩 눈치를 읽고 내 손을 맞잡아줬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손가락 끝에 조용히 마력을 담아냈다.

파지짓. 그녀의 손등을 이리저리 살살 긁으며, 마력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앗.”

이세라가 짤막한 탄성을 냈다.

손등에 새겨지는 마력의 흐름이, 어떤 숫자의 배열을 그리는 것을 깨달은 거겠지.

행여 장수혁에게 들킬세라 덥석. 이세라가 화들짝 입술을 깨물었다.

“나중에 또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

“네, 네에. 그러네요.”

“다음엔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 퇴원하면 기념으로, 내가 밥이라도 한 끼 살게.”

“아, 하하.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입으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작별 멘트를 읊으면서.

스르륵. 나는 장수혁이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이세라의 손등에 내 전화번호를 새겨 넣는 데에 성공했다.

‘아무튼 이세라는, 변화한 붕괴지를 미리 읽어냈다.’

현 상황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일단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뿐이다. 지금은 슈레더의 리스크를 감안해도 이세라와 계속 교류하는 게 옳아 보였다.

‘베르페아노의 말대로지.’

나는 학자가 아니다. 사냥꾼이다.

어떤 법칙이 있고, 무슨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천천히 알아내도 늦지 않는다. 솔직히 몰라도 상관없다.

“또 보자. 세라야.”

“아……!”

나는 맞잡은 손을 떼며 등을 돌렸고. 이세라는 아쉬운 듯한 탄성을 흘렸다.

곧 정신을 차린 그녀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요. 꼭이요.”

“…그래.”

짤막하게 맞인사를 해줬다.

따갑게 꽂히는 두 쌍의 시선을 무시한 채.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