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2)>
귀머거리 토끼. 길을 잃은 까마귀. 목 잘린 붉은 용.
하트 여왕의 눈물. 주저앉은 광대. 그리고 죽어버린 왕의 옥좌.
이렇게 여섯이 내가 아는 육사도 목록이다.
‘아직까지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건 하나뿐이지.’
<하트 여왕의 눈물>과 <귀머거리 토끼>는 이미 보유했다.
<길을 잃은 까마귀>는 내가 직전에 죽여서 전용 스킬을 강탈해 냈다.
<주저앉은 광대>는 아마 지금도 애덤 크로스 안에 있을 것이고. <죽어버린 왕의 옥좌>는… 웬걸. 바로 내 안에 있다고 한다.
‘목 잘린 붉은 용.’
그래서 남은 육사도는 그것밖에 없다.
당연한 수순으로. 애덤 크로스처럼 박현우도 육사도의 모체라면… 무조건 <목 잘린 붉은 용>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접촉을 하지.’
일단 가능성이 생긴 순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당장 박현우와 접촉하고, 친해질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깐의 궁리 끝에 나온 결론은…….
“전화번호.”
퍼뜩, 휴대전화를 들고 주소록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철썩,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한 대 후려쳤다.
“없었지.”
전생에 한 번 박현우와 연락처 교환을 했었다.
그걸 떠올리고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한마디로 개짓거리다.
‘한참 전의 전생이잖아.그거.’
흥분해서 대가리도 잘 안 돌아가는 것 같다.
속으로 애국가 4절까지 완창했다. 어느 정도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오히려 그때의 경험을 필사적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번호나 외워놓을걸…….’
당시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 어쩔 수 없다.
알기야 알지만. 후회가 막심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역시, 일단은 직접 부딪쳐 봐야 하나?’
결국 최종적인 결론은 그것이었다.
리스크가 큰 행위지만 어쩔 수 없다. 남은 방도가 그것뿐이니까.
실패는 곧 내 죽음이다. 그런 각오와 기세로 신중하게 접근해 보기로 했다.
“…후. 좋아.”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 헌터들의 인파 속에서.
나는 박현우에게만 시선을 박은 채 연신 심호흡을 했다.
무슨 사랑 고백 준비하는 17세 소녀도 아니고. 남자한테 이러고 있는 내가 레전드다.
* * *
접촉 전에 토식이와 간단한 작전 회의를 거쳤다.
기념적인 첫마디를 내뱉은 건, 그 뒤로도 약 15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저기, 혹시 박현우 씨 되십니까?”
공적으로 헌터 소집의 해산 명령이 떨어지고. 박현우가 겨우 부대장 직책에서 해방되어, 본격적으로 혼자가 된 순간.
나는 그때만을 노려서 득달같이 접근한 것이다.
“아, 예. 제가 박현우 맞습니다만……?”
박현우가 내 쪽을 돌아본다.
한동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혹시 실례지만… 저희가 언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아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아니면. 제 이름은 어떻게……?”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의심이 많다.
타인은 내 목숨을 언제든지 위협할 수 있는 존재. 무조건 그렇게 취급하는 편이 던전에서 생존율이 훨씬 높으니까.
사람 좋은 박현우도 그 기본적인 마인드셋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이게 먹히려나 모르겠네.’
그래서 일단 박현우를 불러놓은 지금.
나는 구상한 작전을 실행하면서도, 여전히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이 작전의 성패가 나 자신도 갈피가 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식이는… 친해져서 집으로 끌고 오라고 했었지만.’
상식적으로 헌터가 초면인 사내새끼 집까지 떨레떨레 찾아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 나로선 도저히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도저히 힘들 것 같다고 호소하자, 토식이가 허들을 좀 낮춰줬다.
“그러면 최소한 인적 없는 곳이라도 끌고 가봐.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정도면 어떻게든 가능할 법한 요구다.
불안은 있다. 헌터의 인간 불신 풍조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피할 수 없다면 하는 수밖에.
“저 아까 헌터님 부대에 속해있던 사람입니다. 이름은 그래서 알고 있는 거고요.”
“아… 그러시군요.”
“예. 이런 사람입니다. 여기.”
나는 파카의 안주머니에서 헌터 명함 하나를 건넸다.
명함 이거 하도 오랜만에 꺼내봐서 있는지도 까먹고 있었다. 진짜 몇십 회차 만에 써보는 건지 모르겠다.
명함을 받은 박현우는 나와 명함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 정용 씨…군요.”
“예. 그렇습니다.”
“D급 헌터고. 하긴, 제 부대였으니 당연한가요?”
“그렇겠죠. 아무래도.”
쓴웃음과 헛웃음이 교차한다. 잠깐이나마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물론 어디까지나 잠깐일 뿐이다.
“용건이 뭡니까. 한정용 헌터님.”
순식간에 정색하며 말투를 굳히는 박현우.
전생에 엄청 살갑게 대해주던 표정이 잠깐 뇌리에 스쳤지만. 이제 와서 이 정도 갭으론 씁쓸함조차 오래가지 못한다.
나도 언제 웃었냐는 듯, 태연하게 말을 받아칠 뿐이다.
“다른 게 아니고… 좀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요.”
“…이상한 점?”
“예. 저희가 도착했을 때, 이미 게이트가 닫혀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분명히.”
“그것과 관련해서 특이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박현우의 안색이 슬쩍 변했다.
의심과 긴장. 그리고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만면에 깃들어 있다.
나는 그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쐐기를 박았다.
“이거 어쩌면, 게이트 재붕괴의 전조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일단 임시 부대장이었던 헌터님한테 보고를 하려고 했습니다.”
“재, 재붕괴……?!”
박현우가 단숨에 성큼, 내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럼 그렇지. 박현우 몰래 회심의 미소를 슬쩍 머금었다.
‘너라면 관심 가질 줄 알았다. 박현우.’
나는 박현우의 사고 회로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전생에서 쌓인 데이터들을 통해 행동 패턴을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4회차에 걸쳐 분석한 박현우라는 인물은, 대충 이렇다.
‘기본적으로 인명(人命)제일주의. 하지만 책임감이 상당히 강하고. 일단 동료 의식이 박힌 사람한텐 의리가 투철하지.’
그래서 내가 내렸던 한 줄 평은 ‘헌터 생활 오래는 못 해 먹을 성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굳이 이런 거짓말을 한 거다.
‘임시 부대장 직책은 방금 소멸했다지만.’
그렇다고 네가 이 폭탄 발언을 무시할 수 있을까?
다른 수많은 B급 헌터 부대장들은 몰라도, 너라면. 내가 내뱉은 말에 반드시 격하게 반응해 줄 줄 알았다.
덥석! 박현우가 내 양어깨를 힘껏 틀어쥐었다.
“아니. 던전 게이트가 무슨 두더지 잡기도 아니고. 사람 놀리듯이 순식간에 닫혔다가 재붕괴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그렇죠. 저도 말이 안 되는 건 압니다. 예.”
“아는데도 그런 말을 해요? 대체 뭘 봤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방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어… 글쎄요. 책임까지는 잘……?”
나는 일부러 어리숙한 티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박현우가 애간장 타는 기색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혀를 쉴 새 없이 차던 그는, 이내 내 어깨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한정용 헌터님. 앞장서십쇼.”
“아, 예? 무슨 앞장이요?”
“그 특이점을 봤다는 곳으로 가봅시다. 제가 직접 보고 판단해야겠습니다!”
“…아, 예. 그, 그러시죠. 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아무렴. 감사하고말고요.
나는 재촉하는 박현우를 데리고 빠르게 교외로 빠져나갔고. 이내 예술의 전당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기슭에 이르렀다.
척. 나는 산 위로 올라가는 비탈길을 가리켰다.
“여기. 이쪽입니다.”
“아, 네.”
잘 닦인 차도를 따라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퍼서석! 나는 수풀을 헤치며 진행 방향을 급하게 꺾었다.
“이쪽으로.”
“아, 네……?”
우두둑, 우둑.
풀과 나뭇가지 밟는 발소리만 연신 울렸다.
사람의 흔적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며, 추위에 시들기 시작하는 나뭇가지가 점점 빽빽하게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여기입니다.”
“여, 여기가……?”
박현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빠르게 사위를 살폈다.
이내 그의 표정에 살살 음영이 졌고. 크게 떴던 눈은 점차 가늘어졌다.
“…아하.”
박현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와 혼란으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속였군요. 한정용 헌터님.”
“그렇게 됐습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겁니까.”
“당신의 물러터진 성격을 미리 알았으니까. 사람들 목숨을 저당 잡으면, 판단력과 의심이 흐려질 걸 알았지.”
흠칫. 삼신할머니 마냥 줄줄 읊는 말에 박현우가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박현우는 한층 미간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렸고. 등에 멘 특대검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스르릉! 투박한 그레이트 소드가 내게 겨누어졌다.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죠. 한정용 헌터.”
“그럼 뭡니까.”
“거짓말을 해서 날 여기로 끌고 온 목적. 그걸 묻고 있는 거다.”
“그건 왜냐면… 너 지금 뭐 하냐?”
“뭐?”
내 뜬금없는 말에 박현우가 눈을 부릅떴고.
내가 말을 걸었던 진짜 상대, 토식이는 이미 박현우의 등 뒤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잘해줬다! 이젠 내가 알아서 하지!”
호기롭게 쩌렁쩌렁 외치는 토식이.
치지징! 광학미채로 신형이 일렁이는 토식이가, 하늘 높이 치켜세웠던 몽둥이를 냅다 후려쳤다.
“으랏차!!”
콰자작!
나무 몽둥이가 박현우의 뒤통수에 시원하게 적중했고. 박현우의 온몸이 퍼뜩 굳었다.
후두둑. 박살난 몽둥이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뭐, 뭐야……?”
그러나 박현우는 뒷머리를 싸매며 의아해할 뿐이다.
겉으로 보나 상태창을 보나. 이렇다 할 대미지를 입지 않았다.
“이건… 토, 토끼? 아니, 더, 던전 생물인가?!”
당연하다. B급 헌터의 맷집이다.
고작 토끼한테 뻑치기 좀 당했다고 기절할 리가 없지. 그러면 서러워서 헌터 생활 어떻게 하겠냐.
상황이 그렇게 되자 당황하는 것은 토식이 쪽이 되었다.
“어. 이, 이게 아닌데?”
이내 퍼뜩! 토식이의 다급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오, 옥좌야! 이 새끼 조져! 일단 어떻게든 기절시켜!!”
“…후우.”
가관으로 흘러가는 전개에 한숨을 쉬는 한편.
퍼퍽! 순식간에 박현우와의 거리를 좁혔고. 그의 뒷목에 ‘슬립’ 스킬을 조용히 때려 박았다.
문자 그대로 전광석화였다.
“어, 크윽……!”
털썩. 박현우가 힘없이 풀 바닥 위에 엎어졌다.
나는 손아귀의 마력광을 흩어내는 한편. ‘한 건 했다’라는 면상으로 우쭐대고 있는 토식이를 가만히 노려봤다.
“2인조 퍽치기범이 된 느낌인데.”
“된 느낌이 아니고. 실제로 된 거지.”
“…쓰읍.”
“막타도 직접 쑤셔놓고 뭔 발뺌이냐. 이제 와서.”
치직!
토식이는 손가락을 튕겨 담배에 불을 붙였고. 내 앞에서 뻔뻔하게 한 모금 빨았다.
놈이 후우, 허연 숨과 함께 말을 내뱉는다.
“아무튼 결과만 좋았으면 됐지, 새꺄.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그건 분명히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기절시키는 게 목적이었으면, 훨씬 더 쉽고 빠른 방법이 있었다는 게 문제다.
‘그냥 내가 재워서 보쌈했으면 됐잖아.’
사람들 보는 눈이 걱정된다?
그러면 세뇌 스킬 <괴뢰의 실>을 썼어도 됐다.
다른 것보다도 박현우한테 극혐하는 거짓말까지 지껄여야 했다. 쓸데없이 빙빙 돌아간 게 짜증나는 거다.
“…다음부턴 작전 짤 때, 나한테 상세히 보고부터 해라. 토식아.”
“고려는 해보마. 내 이름부터 제대로 불러주면.”
“…….”
요즘 기도 좀 허한데. 슬슬 물 올리고 된장 풀어야 하나.
토끼 내장탕 마려워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