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1)>
얼마나 홀로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었을까.
삐빅. 익숙한 전자음이 정신을 깨웠다.
[던전 마스터 ‘하얀 그릇’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패널이었다.
탈력감으로 흐느적거리는 손을 인벤토리에 쑤셔 넣었고. 홀린 듯이 확성기를 빼내어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삐익―! 노이즈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를 증폭시켰다.
“토식아.”
“어. 왜.”
“…까마귀가 나한테 복속되는 조건이, 정확히 뭐냐.”
“네가 준비된 상태로 그놈과 싸워서 이기고. 놈이 튀어나온 던전을 폐쇄해 버린다. 그게 조건 맞을 텐데?”
“그렇단 말이지.”
“그래.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잠깐 확성기에서 입을 떼고 전방을 주시했다.
지금도 눈앞에 둥둥 떠있는 클리어 보상 패널을 쳐다본 것이다.
[고유 스킬 ‘멸망의 화염’을 획득하셨습니다.]
‘멸망의 화염’이라는 처음 보는 스킬을 얻었다.
좋은 스킬인지 아닌지는 상세 설명을 안 봐서 모르겠고. 어쨌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다른 패널이 더 떠오를 기미는 안 보인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바로 그 사실이었다.
‘스킬 하나 얻겠다고 그 지랄한 게 아닌데.’
지금 얻은 건 어디까지나 제74던전의 클리어 보상.
정작 내 주요 관심사였던, 육사도와 관련한 무언가가 드롭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브나 토식이의 경우처럼 까마귀 본인이 내 편으로 개과천선한다거나. 아니면 최소한 까마귀의 유품 같은 거라도 나올 줄 알았다.
토식이가 시킨 대로 했음에도, 클리어 보상으로 스킬만 떨렁 뱉었다는 건…….
“…이놈도 준비가 안 됐다는 소리인가.”
순간 온몸에서 힘아리가 쭉 빠졌고. 나는 한숨 쉬듯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러자니 불쑥, 옆에서 토식이가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왜. 뭐가 나왔길래 그러는데.”
“스킬이 하나 나왔다. 그게 끝이야.”
“뭔 스킬. 이름이 뭔데?”
내가 받은 스킬의 이름을 궁금해하는 토식이.
놈의 이상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편. 딱히 숨겨야 할 얘기도 아니니 스킬명을 그대로 말해줬다.
“멸망의 화염…이라는 이름인데.”
“뭐야. 제대로 나왔구만. 그거 맞아, 인마.”
“…음?”
“까마귀의 힘인 불꽃. 멸망의 화염. 네가 이번에 얻어야 했던 게 그거 맞다고.”
“??”
“잘됐네. 내 다음이 걔가 맞았구나. 한 시름 덜었구만?”
토식이가 태연작약하게 덕담을 건네온다.
하도 어조가 평탄해서 받아들이는 데까지 좀 걸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퍼뜩, 상태창부터 띄웠다.
삐빅. 방금 얻은 스킬, ‘멸망의 화염’의 정보가 눈앞에 떠오른다.
[스킬 정보]
[스킬명: 멸망의 화염]
[타입: 토글형/인챈트]
[효과: 무기에 멸망의 겁화를 두른다.]
[효력 범위: 본인 소유의 도검류 무기 한정.]
[상세: 제74던전의 히든 던전 마스터 ‘길을 잃은 까마귀’의 처치 보상. 자신 소유의 무기에 멸망의 화염을 두른다. 검주(劍主)의 감정을 눌러 담은 지옥의 겁화는 거세고, 난폭하며, 특히 인간을 태울 때 집요하다.]
“이거… 그거였구나.”
상세 설명을 읽자마자 스킬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까 까마귀가 대검에 둘렀던 새빨간 홍염.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스킬이 분명했다.
나름 까마귀와 관련된 요소를 드롭하긴 했던 것이다.
“이건.”
그리고 또 하나.
스킬 설명 패널 옆에 붙어있는, 또 다른 생소한 패널에 눈이 갔다.
[알림: 고유 스킬에 대하여]
[해당 스킬은 육사도 ‘길을 잃은 까마귀’의 고유 스킬입니다. 획득 시 소유자의 영혼에 각인하여 영구적으로 귀속되며, 시간이 회귀해도 절대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렇구만.”
영혼이 뭐 어떻다는 건 모르겠고. 딱 나한테 필요한 부분만 알아들었다.
회귀 때 계승품으로 이 스킬을 선택하지 않아도, 이 스킬은 무조건 다음 생까지 계승된다. 골자만 추리면 그것이었다.
삐이익! 다시 확성기에 입을 갖다 댔다.
“그러면 그냥, 이 스킬 얻었으면 끝이라고?”
“어. 이제 그 시커먼 집착남 새끼 볼 일 없어. 영원히.”
“너나 이브처럼… 까마귀 본인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게 아니었냐?”
내가 이번 트라이를 ‘실패했다’라고 단정 지은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그러니 내 입장에선 당연한 의문이었다.
토식이는 여전히 평탄한 행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같이 본체가 딸려오는 경우도 있고. 그 기분 나쁜 깜식이 마냥, 죽여서 엑기스만 빨아내는 경우도 있고. 그건 육사도마다 제각각이야.”
“그런 거냐.”
“그런 거지. 우리의 정확한 입지는… 설계자가 시나리오를 설계할 때마다 달라지곤 하니까. 이번 세계에서 다른 육사도가 어떤 케이스일지는 나도 잘 몰라.”
“…설계자.”
토식이가 말하는 설계자는 ‘의지의 화신’일 테다.
문맥으로 때려 맞추고 있자니. 문득 토식이가 눈을 크게 떴다.
“아. 너 설계자도 뭔지 모르냐? 내가 아는 선에서 얘기해 줄까?”
“아니. 그건 됐다. 대충 알아야 할 건 아니까.”
지금 내가 꽂힌 부분은 설계자… ‘화신’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쪽은 들을수록 베르페아노가 옳다. 화신은 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고 아득한 존재. 지금은 나도 최대한 고려하지 않으려고 노력중이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이번 세계, 라고 했지.”
토식이가 지나가듯 내뱉은 그 단어가 뇌리에 쿡 쑤셔 박힌다.
아까 토식이가 말해줬던 던전의 진실. 그것들이 머릿속에서 한데 엉키더니, 상념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흘러간다.
‘이번 세계가 있다는 건.’
지구 이전의 세계도 있었고.
당연히 지구 다음의 세계도 앞으로 나올 테다.
만약… 만약에. 지구의 초인인 내가, 화신이 예비한 시나리오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지구>라는 던전의, <한정용>이라는 던전 마스터로 전락한다. 이거지.’
어쩌면 명칭들은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화신의 수많은 장기말 중 하나로서. 지구 뒤에 이어질 ‘다음 세계’를 멸망시키는 데에 일조하게 되는 건 틀림이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처부숴 왔던… 던전들이 그렇듯이.’
그쪽 세상에 평화롭게 살던 인간. 아니면 오크. 엘프. 그 외의 수많은 아인종.
혹은 갖가지 형태의 괴물들에게… 이유 없는 악의를 쏟아내면서 말이다.
“…괜찮네. 그것도.”
“엉? 갑자기 뭐가.”
“그냥 좀. 혼잣말이다.”
“허어. 기분 나쁜 옥좌 새끼…….”
나는 그쯤에서 확성기를 물렸고. 혈천갑의 변신을 풀어헤쳤다.
쿠르르륵! 갑주가 허물어지며, 눈앞에 눈처럼 새하얀 소녀가 재구성되어 간다.
“푸하아! 이번엔 진짜로 힘들었다, 아빠. 그치?”
이브는 굉장히 지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도 화답하듯, 굉장히 지친 미소를 띠어줬다.
* * *
게이트 붕괴를 틀어막고 약 20분 정도가 지난 후. 전생에도 언제나 그랬듯이, 급조된 D급 헌터부대 방어 병력이 부랴부랴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들 사이에 스무스하게 끼어 있었다.
‘안 늦어서 천만다행이군.’
행군하는 헌터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트붕괴 시 비상 징집에 응하지 않으면, 수십 년 철창살이가 기본이다.
타이밍이 꽤 아슬아슬했는데. 다행히 징집자 명단에서 내 이름 호명하는 순간 버저 비터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어… 엉?”
“뭐, 뭐냐?”
그렇게 공포와 긴장에 떨던 D급 헌터들 앞에 펼쳐져 있는 건. 이미 흔적도 없이 닫혀버린 게이트의 모습이었다.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폐허를 보고, 다들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탄성을 흘렸다.
“뭐야. 내 눈이 이상한 거야?”
“그래서… 게이트는? 게이트 어디 갔는데?”
“다, 닫혔어? 왜?!”
제들끼리 혼란스럽게 쑥덕대길 잠시.
이내 그들의 면면이 하나씩 밝아지기 시작했고. 뛸 듯이 기뻐하며, 서로 얼싸안고 함성을 질러댔다.
“우와아아아! 사, 살았다! 살았어!!”
“어우, X발! 꼬, 꼼짝없이 뒤지는 줄 알았네, 진짜!!”
“뭔 일인진 모르겠지만… 살았으면 됐지, X발! 우후우우!!”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우리는 자타공인의 고기 방패. 수많은 막장 인생 중에서도 엄선된 S급 막장들만 득득 긁어온 버림 패들이다.
게이트 붕괴에 불려나온 D급 헌터의 말로? D급 헌터들이 가장 잘 안다.
‘운 좋으면 중상. 무난하면 평생 불구. 운 나쁘면 사망이지.’
특히나 최근의 연속 게이트 붕괴는 그 피해 규모가 심상치 않다.
이번 현장에 나갔다간 우리 같은 약골들은 틀림없이 뒤진다. 병신이 아닌 이상 그 정도는 다들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모인 D급 헌터도 인원이 꽤 조촐했다.
‘모인 숫자는… 전생 평균이랑 대충 비슷한 정도군.’
3차 붕괴에서 징집 명령이 떨어진 D급 헌터는 못해도 3천 명 이상. 실제로는 항상 3백 명이 조금 넘게 모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머지 9할은 뭐, 헌터협회 감시과를 평생 피해 다닐 각오하고 빤스런 친 거겠지.
‘솔직히 그게 현명하지.’
나는 이번 생의 ‘미련한 놈들’ 면상을 하나씩 눈에 담아봤다.
그것이 이번 D급 헌터 제17부대의 임시 부대장까지 닿은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허?”
스포츠 스타일로 짧게 자른 머리. 큰 체구와 우락부락한 인상.
그리고 그런 육체계 외형과는 사뭇 다르게, 눈빛이 날카롭고 이지적인 남자.
이젠 약간 지겨울 정도의 외관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저건 왜, 여기까지 쫓아왔냐.”
남자는 박현우였다.
지난 몇 번의 전생에서 3차 붕괴면 항상, 천안의 구세계 백화점에서 만났던 그 양반.
이번엔 예술의 전당에서 또 만난 것이다.
“왜 그러냐. 옥좌야.”
어깨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학미채를 뒤집어 쓴 토식이였다.
이브는 잽싸게 집에 데려다 놓고 왔지만, 토식이는 아는 게 많다보니 도움이 될까 싶어서 데려온 거다.
“저 남자 보이냐. 토식아.”
나는 주변 눈치를 보다가 투명화 스킬을 발동했고. 곧장 확성기를 들어 토식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토식이가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탄성을 흘렸다.
“어. 저 키 큰 빡빡머리? 저 새끼가 왜.”
“전부터 자꾸 눈에 띈다. 어째 3차 붕괴만 되면 계속 나랑 엮이는데……. 설마 여기서까지 볼 줄은 몰랐네.”
“오호. 그렇단 말이지?”
토식이가 흥미 어린 침음을 내다가, 이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꾹꾹. 토식이가 급하게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옥좌야. 저 새끼 계속 주시해 봐라.”
“음?”
“아니. 주시하는 걸로 끝나면 안 되지. 일단 어떻게든 친해져서 무조건 집까지 데려와. 확인해 볼 게 있으니까.”
“갑자기 뭔…….”
별안간 터무니없는 주문을 하는 토식이였다.
나는 황당한 나머지 잠깐 말문이 막혔고. 이내 가까스로 되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네 번이나 똑같은 타이밍에 우연히 마주쳤다. 이게 우연이겠냐?”
그 말에 흠칫, 눈을 부릅떴다.
토식이를 쳐다보는 시선이 한층 낮게 가라앉았다.
“우연이 아니면?”
“필연일 확률이 높다는 소리지.”
“필연이라니.”
“이 연극은 지금 신나게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육사도가 옥좌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게 무슨 의미인진 이해했냐?”
“…글쎄.”
실제로 잘 몰랐기에 고개를 저었다.
토식이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한편. 이내 미간을 모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육사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리게 돼있어.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옥좌의 주변으로 나타나도록 설계돼 있단 말이지.”
“음. 그 말은 좀 알 것 같다.”
나는 애덤 크로스와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에겐 이런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고 했다.
“광대야. 왕이 사라진 옥좌를 찾아가라.”
아마 다른 놈들도 그런 식으로… 내 주변에 필연적으로 모여들도록. 모종의 유도 장치가 대가리에 박혀있다는 소리일 테다.
이해하기 무섭게 토식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래서 모든 육사도가 한곳에 모이는 건 필연이야. 정확히 말하면, 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유일한 필연은 오직 그것뿐이다.”
“그렇군.”
“그 외의 다른 모든 요소들은… 진짜 필연이 완성돼 가다보면 얼마든지 뒤틀릴 수 있지. 다만 사건들마다 확정성이 높냐 낮냐의 차이일 뿐이야.”
“…그렇군.”
“그래. 이번에 ‘길을 잃은 까마귀가 등장한다’라는 필연이 완성되기 위해서, 지금껏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붕괴지가 변한 것처럼 말이지.”
내가 ‘확정성 사건’이라고 믿어왔던 무수히 반복되는 사건들.
그것들도 사실 언제든 뒤틀릴 수 있는 우연들의 산물이었다. 다만 그 사건들의 ‘확정성’이라는 게 높아서 유난히 자주 나온 것뿐.
토식이의 말은 대충 그런 의미였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같은 루프가 계속 반복됐던 건…….’
‘진짜 필연’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서였다.
내 루프에서 유일하게 확정되어 있는 단 하나의 운명. 언젠가는 모든 육사도가 내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것.
‘그 최초 단계인 하트 여왕의 눈물이 없어서였다… 이 소리군.’
이브가 내 수중에 없었다.
그래서 무수한 우연들 중에서도 확정성이 비교적 높은 사건들만, 아무런 의미도 없이 줄창 반복됐던 거다.
이해했다. 이해한 나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아니,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이렇게 말했는데도 모르냐?”
“……?”
“생각을 해봐, 새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게이트 붕괴 장소까지 변한 마당에. 아직도 저 새끼를 만난다는 사건은 안 변했잖아. 응?”
“……!!”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몰라?”
아니. 아주 잘 이해했다. 저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데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이해한 바를 천천히 중얼거렸다.
“박현우가, 육사도의 모체라는 거냐?”
“확정은 아니고. 그럴 가능성 정도는 있다는 소리지.”
“……음.”
“그래서 좀 진득하게 접촉해 보라는 거야. 내가 직접 확인해 볼 방법이 있으니까.”
약간 애매하긴 했지만 토식이의 보장이 있었다.
역시 토식이를 데려오는 판단은 옳았다. 이 새낀 말투가 존나게 건방지긴 해도, 정말 기특한 이세계 토끼가 틀림없다.
‘나중에 담배 한 보루 사줘야겠네.’
그렇게 다짐하는 한편.
한껏 가늘어진 내 눈이, 박현우의 뒤통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