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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61화 (161/235)

161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0)>

우드득!

나는 백발 여인의 목을 힘껏 틀어쥐었고. 그녀의 앙상한 몸은 내 힘에 따라 공중으로 번쩍 떠올랐다.

그녀가 썩어가는 팔다리를 처량하게 버둥거렸다.

―아, 카흑……!

그러나 아찔한 신음만 흘릴 뿐.

그녀는 이렇다 할 저항을 하나도 못했다.

‘그럴 테지.’

이 던전 마스터는 외관에서도 알 수 있듯 극도로 쇄약한 상태다. 상태창을 봐도 평범한 인간만큼이나 스탯과 전투력이 낮다.

까마귀를 돌파한 시점에서, 이미 이 던전은 닫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언 있냐.”

꾸드득.

여인의 목을 한층 더 조르며 말했다.

아, 아아. 여인은 숨넘어가는 탄성을 질렀고.

―요, 용사. 그흑.

색색거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백발의 여인은 간신히 말을 만들어 냈다.

―다음에도, 만약. 눈을… 뜬다면. 날… 기억……!

여인은 내가 기억하는 유언을 그대로 읊는다.

대충 10번 좀 넘게 이 던전을 맞닥뜨려 봤고. 그녀는 단 한 번도, 저것 외의 유언을 말한 적이 없었다.

마무리를 위해 손아귀에 힘을 넣으려는 순간.

―…다음은 없어.

증오에 찌든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여인의 목을 놓고 황급히 펄쩍 뛰었다.

푸화아악! 직후 시뻘건 화염의 대검이, 방금까지 내가 서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흠.”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기습에 당했을 테다.

난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렸고. 습격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해칠 수 없어.

키기긱. 키기기긱!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까마귀 갑주의 사내.

그가 시뻘건 대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내게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절대로. 그러게 두지 않는다.

쿠르륵!

사내… ‘길을 잃은 까마귀’가 다시금 내 앞에 대치해 섰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철그럭!

까마귀는 화염으로 휩싸인 대검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고. 내게 겨누었다.

놈의 투구 안에서, 질척한 투지의 흉광이 한껏 폭사되었다.

“3페이즈는 뇌절 아니냐. X발.”

나는 집념에 질려서 중얼거리는 한편.

쉬리릭! 곧장 사복검을 늘어뜨려 정면을 향해 휘둘렀다.

“큿……!”

채애앵!

삽시간에 쇄도해 온 까마귀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거센 홍염의 충격파가 우리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푸화악! 시뻘건 불티와 화염이, 대공연장 전역을 뒤덮고 거세게 타올랐다.

―크아아아!

콰앙, 콰콰쾅!

지옥염을 두른 까마귀는 무아지경으로 대검을 휘둘러댔다.

일말의 지성도 전술도 없다. 그저 나를 죽이겠다는 일념만이 찐득하게 눌어붙은, 집념과 망집의 연격이 쉴 새도 없이 이어졌다.

―그아아아악!!

까마귀의 고함이 전후좌우. 사방에서 들려온다.

그마나도 비명인지 기합 소리인지도 점차 불분명해진다. 짓뭉개진 괴성이 쏟아진다.

“크으……!”

나는 얼얼한 양손을 털어내며 재빨리 스텝을 밟았다.

무지성 연격을 쏟아낼 뿐인 지금의 까마귀였지만. 나는 그런 까마귀에게 꽤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무지성을 상쇄할 만큼, 공격 하나 하나가 묵직해졌기 때문이다.

‘스탯이 강화된 건가?’

혹시나 싶어 까마귀의 상태창을 띄워봤다.

하지만 아니었다. 놈의 상태창에는 수치적으로 변화가 없었다. 오직 체력만이 빠른 속도로 0에 수렴해 가고 있다.

회광반조. 놈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 사력을 쏟아내고 있을 뿐이다.

‘마냥 시간을 버텨도 내 패배다.’

이대로 까마귀가 불타 죽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도 없다.

아마도 놈은 죽으면 높은 확률로 부활할 거다. 다시 말끔하게 원상 복구가 된 까마귀와 재결전을 벌여서 이길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구속한다.’

키잉! 곧장 손아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까마귀의 민첩 스탯은 99. 천라는 솔직히 맞출 수 있을지부터 미지수다. 지금 상황에 스킬 한 방이 빗나가면 치명적인 빈틈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사용할 건, 사용하면 반드시 맞출 수 있는 스킬.

“글레이프…….”

―글레이프니르!!

영창에 앞서 까마귀가 선수를 쳤다.

차르르륵! 까마귀의 머리 위. 거대한 무저갱의 문이 열리며 시커먼 사슬 다발이 꿈틀거렸고, 나를 향해 일제히 쏟아진다.

“무슨.”

웬걸. 내가 사용하려던 스킬과 이름만 같은 줄 알았더니.

내용물까지 완전히 똑같은 스킬이었다.

“그, 글레이프니르.”

멈췄던 영창을 다시 완성했다.

차르르륵! 내 머리 위에서도 똑같은 관문이 생성되었고. 까마귀의 것과 똑같은 사슬 다발이 쏟아져 나왔다.

‘일단 스킬부터 상쇄해야……!’

까마귀 본인에게 사슬을 날리는 대신. 날아오는 암흑의 사슬을 내가 쏘아낸 사슬로 하나씩 요격하기 시작했다.

콰직! 콰장창! 맞닿은 사슬들은, 피아 구분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으, 으아아아앗!!

내가 간신히 모든 암흑의 사슬을 상쇄시킨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절호의 찬스가 다가왔다.

―커허억! 끄아아악!!!

푸화악!

문득 까마귀의 투구 안에서 걸쭉한 진물이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휘청, 놈의 상체가 순간적으로 고꾸라졌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 것이다.

‘뭐지.’

갑작스런 상황에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

문득 내 눈은 까마귀가 바닥에 쏟아낸 걸쭉한 진물에 향했고. 나는 그 안에서 질척하게 녹아내린, 둥그스름한 무언가를 포착해냈다.

“…눈알.”

그제야 까마귀가 비틀대는 이유를 알았다.

얼굴의 모든 살점과 근육이 녹아내려 버렸다. 어쩌면 머리뼈와 뇌까지 가루가 될 정도로 타버려서, 반쯤 녹아내린 안구가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눈알이 없다. 지금 까마귀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천라.”

그 천재일우를 놓칠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파지지직! 손을 하늘 위로 뻗었고. 뭉쳐든 푸른 마력이 거대한 번개의 그물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스킬 발동: 천라]

투학!

완성된 섬광의 그물을 까마귀에게 곧장 투척했다.

―그으… 어, 어디야……. 어디냐아아!!

까마귀는 그 순간에도 엉뚱한 방향으로 마구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정수리 위에서 덮쳐오는 그물을 끝까지 포착하지 못했다.

휘리릭! 번개의 그물이 까마귀의 사지를 단단히 조였다.

―끄윽! 카하아악!!

파지지직!

그물이 시퍼런 전류를 한가득 방전하며 놈을 지진다.

불꽃과 번개. 두 속성이 한데 어우러져, 죽음을 부르는 광란의 춤사위를 벌였다.

“얌전히 있어라. 금방 끝나니까.”

투학!

나는 곧장 공연장의 뼈 무덤을 거슬러 올라갔다.

던전 마스터, 하얀 머리칼의 여인은… 아까 내가 팽개친 그 자리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아아… 용사. 그만 됐다. 멈추거라. 난, 괜찮아……!

바닥을 발발 기며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손끝이 향하는 곳은, 지금도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까마귀의 방향이었다.

―괜찮으니까. 내가, 허락하겠다. 이제… 쉬거라. 부탁이니, 제발!

던전 마스터는 쥐어 짜내듯 말한 뒤. 힘이 다한 것처럼 그 자리에 엎어졌다.

그녀의 텅 빈 눈두덩에선 쉴 새 없이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쉬게 해준다. 둘 다.”

나는 차갑게 통보했다.

우직. 사복검의 칼날이 단두대처럼 추락했다.

텅, 털그럭! 잘려나간 던전 마스터의 머리통이 뼈 무덤의 비탈을 타고 굴러간다. 그리고 정확히 까마귀의 발 치까지 굴러갔다.

―……아.

발광하던 까마귀가 그것에 반응했다.

얼빠진 탄성이 한 번 흐른다 싶더니. 이내 모든 움직임을 일순간 멈춰버린다.

―아. 아… 아아아.

온몸이 녹아내리는 고통도 잊은 양. 까마귀는 연신 얼빠진 탄성만 흘렸다.

철그럭, 스르륵. 놈은 무릎 꿇은 채 바닥을 기어갔다. 그리고 홀린 듯이 던전 마스터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다가, 이내 퍼뜩 다시 손을 물렸다.

―아… 윽. 아……!

지금도 자기 전신을 살라먹고 있는 지옥의 겁화. 천라의 번개그물.

그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겠지.

―용…사. 아직. 거기, 있느냐……?

그러자니 문득. 던전 마스터의 잘린 머리가 필사적으로 말을 만들어 냈다.

―……!!

까마귀는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저 잿가루가 되어 소멸하기 시작한 던전 마스터의 머리를, 망부석처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용사. 내, 이름을… 불러주거라.

문득 던전 마스터가 그런 요구를 해왔다.

그러자 까마귀는 번개라도 맞은 양 온몸을 움찔거렸다. 바싹 굳어있는 그에게, 계속해서 던전 마스터가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웃음기가 녹아있는 목소리였다.

―네가, 처음으로 나한테 붙여줬던… 그 이름. 어서 말해다오.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들이 계속 흐른다.

어쨌든 던전 마스터의 목을 자른 순간 붕괴 종료는 확정이다. 이미 던전 마스터는 물론이고, 까마귀 역시 온몸이 재가 되어 소멸하고 있었으니까.

이 짧은 여유 동안 저놈들이 무슨 삼류 신파극을 찍든. 나로선 알 바가 아니었다.

―…루시.

얌전히 게이트 소멸이나 기다리던 그 순간.

지금껏 숨소리도 못 내던 까마귀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루시. 루시, 루시… 루시……! 루시!!

‘루시’라는 이름을 염불처럼 되뇌는 까마귀.

그가 다시 한번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이미 형체도 거의 남지 않은 던전 마스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하다.

―나는 정말로, 즐거웠느니라. 용사.

그러나 파스슷!

까마귀의 손이 채 닿기도 전. 던전 마스터는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추하게 빼빼 마른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미소를 남긴 채.

―…루시. 나는… 나, 나도… 나도.

내뻗은 까마귀의 손은 그 뒤로도 계속 허공을 휘적였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뭔가를 찾듯이.

그나마도 파스스, 까마귀도 곧 잘게 부서져 흩날린다.

[제74던전 ‘계승의 화원’의 던전 마스터, ‘하얀 그릇’이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으음. 드디어 끝났구만?”

얼마나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을까.

문득 발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식이의 목소리였다.

지금껏 어딘가에 잘 숨어있다가,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니 기어 나온 듯하다.

“…토식아.”

삐이익. 나는 확성기를 꺼내 토식이를 불렀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던전 마스터와 까마귀가 사라진 방향에 고정돼 있었다.

“어. 갑자기 왜 부르냐.”

“…던전은, 대체 뭐냐.”

두 몬스터의 처절한 최후를 목격한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을 그대로 입 밖에 내뱉었다.

그러자 토식이는 즉각 대답해 줬다.

“던전? 던전은 실패한 세계지.”

“…….”

“뭐야. 왜 눈을 그렇게 떠. 설마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있었냐?”

“…그래. 잘 모른다.”

‘실패한 세계’라고 한다.

일단 모두 사실이었구나, 애덤 크로스.

너는 정말 누군가의… 화신이나 광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거구나. 그것을 토식이의 대답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설계자>에게 선택받은 초인이, 준비된 결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완전히 꺾여버렸을 때. 그 세계는 실패한 세계가 되고… <설계자>의 지배하에 복속된다.”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새하얗게 으스러져 바닥에 쌓인 까마귀의 송장. 그리고 잿가루로 변해, 바람도 없이 허공에 흩날리는 던전 마스터의 잔해가 눈가를 간질인다.

토식이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실패한 세계는, 실패해 버린 초인들의 말로인 <던전 마스터>를 가두는 다차원 감옥. <던전>이 되는 거지.”

“……!!”

“일단 기본 골자는 그거야. 뭐… 일부 극소수의 초인이 설계자랑 직접 거래를 한다든지 하는 예외 케이스가 있긴 한데. 말 그대로 극소수의 예외니까 지금은 논외로 치자고?”

화염이 일렁이는 폐허가 된 공연장을 눈에 담았다.

두 눈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이걸, 음. 네 케이스에 맞춰서 결론을 말해주자면?”

타이밍 좋게 토식이의 말은 이어졌다.

하얗게 칠해진 뇌리 속으로. 놈의 태연한 말들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초인인 네가 마지막까지 <설계자>의 기대치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너랑, 네가 사는 이 세상의 말로가… 바로 저런 거라는 소리지.”

척. 토식이의 앙증맞은 손가락이 앞을 가리킨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두 던전 생물이 쓰러져 있던 자리였다.

나는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다.

“그게. 내 말로라고.”

던전 마스터는 한때 초인이었던 자들.

그리고 던전은 지금의 지구처럼, 의지의 화신이 준비한 시나리오에 따라 멸망을 향해 달려갔던… 다른 차원의 세계들.

“실패한… 세계.”

육사도 보팔의 말.

그리고 애덤 크로스가 했던 말까지.

드디어 나도 전부 이해했다.

이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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