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103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
찰나에 벌어진 수십 합의 공방.
그 끝에 내 왼손이 무참히 잘려나갔고. 머리 위로는 불꽃이 이글거리는 거대한 대검이 쏟아지고 있었다.
‘외통수다.’
승패의 향방은 이미 정해졌다.
나는 다가오는 대검의 칼끝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옳지.”
퍼뜩! 손목이 잘려나간 왼팔을 대검의 궤도 앞에 가져갔다.
정확히는 그 팔뚝에 달린, 용문장의 버클러를 들이민 댄 것이다.
―무슨?!
내 갑작스런 기행에 까마귀의 탄성이 터져 나왔지만. 이제 와서 휘둘린 대검을 물리기엔 너무 늦었다.
콰아앙! 불꽃의 대검이 엄청난 기세로, 내 버클러를 내리찍었다.
“크윽……!!”
엄청난 중압감에 신음을 토했다.
블러드 스트림을 최대 출력까지 단박에 증폭했고. 그것으로 가까스로 지면에 튕겨나가는 건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버틴 나는…….
“끝났다. 까마귀.”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것만 노렸다. 이 한 수로 승패를 단박에 결정지을 계획이었다.
그래서 아까부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놈이 가장 방심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하는 때.’
그래서 지금껏 필사적으로 숨겼다.
놈이 내 왼팔에 달린 바이탈 버클러를 신경도 쓰지 못하도록. 전투 내내 버클러를 방어 용도로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틈새를 파고드는 이 한순간을 위해서.
“왼손을 내줬던 건.”
내 혼잣말과 함께, 번쩍!
바이탈 버클러에 각인된 드래곤이 눈을 떴다.
쩌어억. 그 거대한 아가리가 순식간에 벌어지며, 숨막히는 열기를 머금었고.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콰아아앙!
한층 증폭된 지옥염이 까마귀를 집어삼켰다.
바이탈 버클러에 내장된 리플렉트 스킬. <종언의 함성>이 발동된 것이다.
―끄아아아아악!!
겁화에 휩싸인 까마귀가 찢어지는 괴성을 내질렀다.
허우적허우적. 필사적으로 온몸을 비틀고 팔다리를 털어내려 해본다. 그러나 불꽃은 지나치리만치 집요하게 들러붙어, 절대로 놈을 놔주지 않았다.
―아, 으. 크아… 아아악……!!
숨이 막히는지 목을 박박 긁으며. 숨넘어가는 신음만 간간이 흘린다.
이내 까마귀의 신형이 속절없이 지면을 향해 추락했고. 쿠당탕!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끄. 그극… 으극……!!
까마귀는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저 튀어 오르는 불티에 맞춰 간간이 온몸을 펄떡거릴 뿐이다.
나는 놈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잘려나간 왼손과 갑옷을 수복했다.
“리스토레이션.”
꾸드득, 우득!
잘려나간 손목 위로 소름끼치는 소음이 터졌고. 이내 뼈와 근육이 도마뱀처럼 순식간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참기 힘든 구토감에 입을 잠깐 틀어막았다.
“…크후우.”
화르르르.
그 순간에도 불꽃은 까마귀의 갑주를 시커멓게 그슬리고 있었다. 갑옷 내부를 펄펄 끓이며, 사람 태우는 냄새를 풀풀 풍겨왔다.
“허.”
연료도 딱히 없을 텐데 기름불 마냥 매섭게도 타는군. 무지막지한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불꽃이었잖아. 저거.’
저 대검과 불꽃만큼은 안 맞을 각오로 싸워서 천만다행이다. 잘려나갔던 왼손이 갑자기 저렴하게 느껴진다.
그쯤에서 나는, 고체연료처럼 끊임없이 불타는 까마귀 앞에 섰다.
“자승자박이라고 하던가. 까마귀.”
―…그윽… 끅……!!
“거기서 제발. 얌전히 불이나 쬐고 있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중얼거린 뒤. 나는 곧장 인벤토리를 열었다.
물컹. 뜨뜻한 체온을 가진 털 뭉치를 손에 쥐고 바로 꺼냈다.
“토식아. 도움.”
꺼낸 아이템(?)의 이름은 킬러 래빗 보팔.
며칠 새 이브의 애완 토끼로 전락한, 통칭 ‘토식이’였다.
“뭐, 뭐냐. 창고에 갖다 처박을 땐 언제고.”
아공간에서 석방된 토식이가 불만 가득한 어조로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발은 없었다. 괜히 더 개겼다가 다시 인벤토리로 처박히기는 싫어서 그럴 테다.
나는 그 소심한 항의를 일체 무시해 버렸다.
“네가 말한 재밌는 상황. 이걸 말하는 거였냐.”
“어? 뭐라고? 안 들려!”
“…X발.”
철지난 개그 프로도 아니고. 매번 한 번씩은 저러니 미쳐버리겠다.
삐이익! 나는 어쩔 수 없이 인벤토리를 뒤져 확성기를 꺼냈다.
“길을 잃은 까마귀… 육사도가 또 나왔다. 토식아.”
“어, 아아. 나왔냐? 역시 그렇지? 그럴 거 같더라고, 느낌이 딱!”
“네가 말한 재밌는 상황. 이걸 말한 거였냐.”
“으음, 뭐. 그렇지.”
토식이는 쌈박하게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뻔뻔한 행색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놈이 인벤토리에 처박히기까지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분명… 네가 꼭 필요할 거라고 말했지.”
“그건 기억하는구만. 하나도 안 듣는 줄 알았더니.”
“그래. 딱 네 정보가 필요해졌다.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냐.”
나는 육사도 중 하나인 ‘길을 잃은 까마귀’의 이후 처치법을 물었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육사도, 보팔의 대답은…….
“어떡하긴. 그냥 하던 대로 해.”
그것이었다.
움찔. 나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너 평소에 하던 대로 하라고. 던전 마스터 죽이고 게이트를 닫아. 그러면 돼.”
해답은 생각보다 명쾌했다.
나는 고개를 슬쩍 모로 꺾었다.
“…그냥 그러면 되는 거냐?”
“되겠지. 아니, 돼야 해. 네가 저 육사도를 복속시킬 준비만 끝났다면.”
여기서도 그 ‘준비’가 문제인 건가.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다시 말을 이었다.
“준비라는 건. 육사도를 복속시키는 순서가 맞아야 한다는 거였던가.”
“그렇지. 잘 이해했네.”
“너는 그 정확한 순서를 알고 있냐?”
“나는 내가 갑주의 다음이라는 것만 알아. 내 뒤쪽 순번은 나도 잘 모른다. 매번 랜덤으로 배치되거든.”
“…씁.”
중요한 부분에서 영 쓸모가 없는 토식이였다.
뭐 일단 좋다. 거기까지 파악된 시점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단, 던전 마스터부터 죽이러 간다.”
어차피 빠르든 늦든 던전은 닫아야 했다.
내가 준비가 됐는지 안 됐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결과는 신에게 맡기고, 내가 할 일이나 마치면 될 것 같다.
“가자, 토식아.”
“아니. 그 개 같은 이름 좀 그만…….”
“뭐. 어쩔.”
“하, 됐다. 그냥 토식이로 살란다, 그래.”
“그래. 포기하면 편하다.”
투덜대는 토식이를 어깨에 이고 예술의 전당 본관으로 걸어갔다.
나와 까마귀의 격렬한 전투로 인한 것인가. 그사이 본관 건물은 거의 뼈대만 간신히 남아있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도처에서 격렬한 화마가 치솟고 있다. 지옥의 한복판이다.
―머, 멈춰.
그리고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지면을 기어왔다.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온몸이 시뻘건 겁화로 타오르고 있는, 까마귀 갑주의 사내가 거기에 널브러져 있다.
―가지, 마라……!
어기적어기적.
놈이 벌벌 떨리는 사지를 꿈틀거려 바닥을 기어온다.
고통과 분노에 찌든 목소리로 서슬 퍼렇게 뇌까리며. 필사적으로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치지지직!
까마귀의 살과 피가 녹아서 뒤섞인 진물이, 그 순간에 갑주의 틈새로 계속 흘러내렸다. 아무리 나라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놈은… 전의를 전혀 꺾지 않았다.
“…허. 참.”
그 징글징글한 집념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까마귀가 전투 불능이 된 건 하늘이 알고 땅도 알고, 까마귀 본인도 아는 사실. 노력은 가상하나 장단 맞춰줄 가치는 없었다.
나는 발걸음이나 재촉하기로 했다.
“빨리 가자. 토식아.”
“어, 음. 그, 그래.”
잠깐 본 토식이도 까마귀의 광기에 질린 듯하다. 놈이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퍼뜩 까마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렇게 우리는 대파된 예술의 전당에 진입했다.
“74던전을… 여기서 보는 건 처음인데.”
지금까지는 던전의 붕괴 지역이 항상 일정했다.
그렇기에 1031회차에 이른 나는, 100가지 던전 중 대부분의 던전을 모든 붕괴지에서 한 번씩은 막아봤다.
‘던전 마스터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덕분에 이런 고민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공략하는데 신선한 맛은 있어서 좋네. 행복회로 불태우면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다.
본격적으로 수색하기에 앞서, 우선 눈 주위로 마력부터 끌어올렸다.
‘현자의 눈.’
쿠우웅!
묵직한 마력의 파동이 눈에서 발사되었고. 이내 전방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범위는 예술의 전당 건물 내부. 위층은 물론이고 지하까지도 한 큐에 샅샅이 수색한다.
숨이 붙어있는 개체라면, 아무도 내 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디.”
지이잉.
탐색의 파동이 사냥해 온 마력 잔향들을 취합했고. 눈앞에 선명하게 가시화했다.
그러나 곧 눈썹을 바짝 찌푸렸다.
‘좀 많군.’
시야 여기저기가 푸른 점으로 번쩍이고 있다.
잡히는 마력 잔향이 이번에도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건물 내부에 아직 살아서 숨어있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쯧, 나는 입구 쪽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기왕 청소할 거면 똑바로 할 것이지.”
인간 청소를 소홀히 한 까마귀를 향한 푸념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잔향이 찍히는 곳마다 찾아가서 일일이 노가다로 확인하는 수밖에.
‘서두르자.’
까마귀는 지금도 지속적으로 화염으로 대미지를 입고 있다.
언제 놈의 숨이 끊어질지 모른다. 죽어버린 뒤에 행여 부활이라도 하면 심히 곤란하다.
투학! 나는 훤히 드러난 건물의 철골을 성큼성큼 넘나들었다.
“…여기구나.”
그렇게 얼마나 건물 내부를 종횡했을까.
8번째로 찾아간 2층 대공연장의 마력 잔향. 그곳이 당첨이었다.
―아아?
널찍한 대공연장의 무대 위.
무수한 인골(人骨)이 산처럼 쌓여 뼈 무덤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해골 무덤의 꼭대기. 낡아 빠진 순백의 옥좌 위로, 한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요, 용사. 용사……? 네, 네놈인, 것이냐?
은백색의 기나긴 머리칼.
여인의 두 눈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간 상태다.
훤히 뚫린 두 눈두덩에는 구더기가 드글거렸고, 지금도 안구를 열심히 파먹히고 있다.
―용사. 어디? 어디에… 있는 게냐.
창백한 피부는 고목나무처럼 쩍쩍 갈라졌으며. 피골이 한계까지 상접했다.
어떻게 살아있는지는 둘째 치고, 정말로 저게 살아있는 건지가 의심되는 상태.
삐빅. 나는 추악한 여인의 상태창을 눈앞에 띄웠다.
[몬스터 정보]
[명칭: 하얀 그릇]
[체력: 1 마력: 1]
[힘: 1 민첩: 1 지능: ???]
[상세: 제74던전 ‘계승의 화원’의 던전 마스터. 모든 것을 버리고 전추한 용사와 함께, 세월의 사토에 묻혀버린 세계의 구원자. 이제 기억해 줄 이조차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처음에 까마귀가 그랬듯. 이번에도 큰 이변은 없었다.
눈앞의 여인… 던전 마스터는,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스펙이었다.
―돌아와… 얼른, 내 손을 잡아다오. 용사. 나, 무섭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춥다. 혼자는, 춥단 말이다…….
여인이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버서석. 얼굴의 살점이 맥없이 떨어져 나간다.
희미한 목소리는 애타게 ‘용사’를 부르짖고 있었다. 전생의 경험으로 그 용사가 누굴 말하는 건지는 알고 있다.
저벅저벅. 나는 던전 마스터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용사님은 내가 처리했다. 던전 마스터.”
―…아, 아……?
“너를 지키려고 개발악하던 쌍검의 흑기사. 이미 나한테 박살났다고.”
―아, 아냐. 그럴 수가. 그 용사가……? 아아, 안 돼. 용사. 용사아. 어째서……!
주르륵.
여인의 무저갱처럼 어두운 눈두덩에서 피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그녀가 둥글게 만 온몸을 슬픔으로 벌벌 떨었다.
콰직! 나는 여인의 여린 목을 틀어쥐었다.
“이제 네 차례다. 던전 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