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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48화 (148/235)

148화

<101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

“아빠. 이제 괜찮아?”

줄기차게 불러오는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이브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는 내 옷깃을 꽉 잡고 있다.

내가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그런 걱정이 역력한 행색이었다.

“어. 괜찮아.”

나는 태연하게 말하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대답을 이어나갔다.

“늘 하던 거라 익숙하다. 걱정할 필요 없어.”

“느, 늘 하던 거라니…….”

딴에는 진짜로 걱정을 덜기 위해 했던 말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악수였던 듯하다.

이브가 아까보다 심각해진 얼굴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빠. 이거… 얼마나 더 해야 끝나?”

이브에게 저 질문을 듣는 것도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아쉽지만, 내가 해줄 대답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도 몰라.”

“모르다니. 그런 게 어딨어. 진짜로? 설마 진짜 아빠도 모르는 거야?”

“미안. 진짜 모른다. 다만…….”

다만 방금 전 토끼발을 얻었고. 그로서 약간은 끝에 가까워졌다.

그 사실을 에둘러 말해주자 이브의 표정이 약간은 밝아졌다.

“아! 혹시 그런 건가?”

이브가 이내 뭔가 생각난 듯 탄성을 흘렸고. 불쑥! 내게 얼굴을 한껏 들이밀었다.

“그 이상한 언니? 그 초록 머리칼의 이상한 언니를 만나야 하는 거구나? 맞지?”

“그래. 그거 맞아.”

“앞으로 몇 번? 얼마나 더 만나야 되는 건데?”

앞으로 몇 번이냐고?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고. 조그마한 고깃덩어리 하나를 빼냈다.

하얀 털로 빼곡히 뒤덮인 그것을 빤히 쳐다봤다.

[아이템 정보]

[명칭: 토끼발(The Rabbitfoot)(S급)]

[타입: ???/보조]

[효과: 지금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효력 범위: 지금은 사용할 수 없다.]

[상세: 제41던전의 메인 보스 ‘심심한 에티’를 자살시켰을 때만 얻는 특수 보상. 귀머거리 토끼의 토막 난 3개 부위 중 하나다. 그녀가 가진 나머지 파츠를 모으면, 진정한 모습을 현현한다.]

고깃덩어리… ‘토끼발’의 상태창이 시야를 메운다.

상세 설명까지 세심하게 읽어본 다음. 나는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앞으로 두 번. 아마도.”

‘3개 부위 중 하나’라고 적혀 있다.

세 개 중 하나가 이번에 얻은 토끼발이다. 나머지 파츠 2개를 더 모아야 비로소 ‘귀머거리 토끼’의 완성체가 된다는 거겠지.

그러니 앞으로 에티를 만나는 것도, 최소 두 번은 더 해야 한다는 소리다.

‘몇 가지 변수가 있긴 한데…….’

예를 들면, 에티가 예정대로 자살해 주지 않는 경우.

지금까진 우연인지 필연인지 100%의 확률로 이브를 목격한 즉시 자살해 줬지만. 그다음, 다다음에도 그래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수순대로 자살해 준다고, 무조건 내가 노리는 아이템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이렇듯 생각해야 할 변수는 산더미처럼 있긴 하다.

하지만 지금, 굳이 이브에게 그것까지 말해서 초를 칠 필요도 없다.

“뭐, 대충 그런 소리다.”

나는 이브가 알아듣기 쉽게, 최대한 돌려서 설명했다.

잘 해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뭔가를 설명하는 걸 못하니까.

다행히 이브는 잘 이해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래서 아빠도 모르는 거구나…….”

“그런 거지.”

“아이, 진짜! 전에도 그렇게 자세하게 말해줬어야지, 아빠! 난 아빠가 괜히 심술부리는 줄 알고 오해했잖아!!”

“…어, 미안하다?”

“됐어.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용서해 주겠습니다!”

“…어, 고맙다.”

이브가 해실거리며 짐짓 자애롭게 떠벌거렸다.

이내 그녀가 갸웃, 고개를 귀엽게 꺾었다.

“근데 아빠. 그 무슨 토끼랬던가? 그걸 모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그건 나도 모르겠다.”

“엥? 몰라? 진짜?”

“이것도 진짜.”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브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헛숨을 연신 들이키며 따지듯 말을 이었다.

“아니, 아빠. 뭔지도 모르면서 왜 모으는 건데?”

“정확히 뭔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뭔가가 일어난다는 건 아니까.”

“…아아.”

“그러니까 할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나한텐 이것밖에 안 남았으니까.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삼켜버리고 그대로 말끝을 흐렸다.

“으응?”

이브는 잠깐 내 행색을 의문스러워 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 기미가 없자,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관심을 껐다. 그러곤 그녀가 언제나 그랬듯. 자기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으으, 아무튼 그 언니. 이번에도 엄청 무서웠어! 그치?!”

이브가 양어깨를 부비며 진저리를 쳤다.

안 그래도 하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에티와 맞닥뜨렸던 전생을 떠올리고 있는지, 온갖 오만상을 쓰고 있다.

“아빠, 봤어? 그 언니, 갑자기 날 보더니 눈빛이 엄청 살벌해졌었잖아!”

“…그래. 그랬지.”

“그러고 막, 아빠가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혼자서 막 이상한 말을 지껄이고! 으으, 나 아직도 소름끼쳐!”

“…….”

“아빠, 왜 그래? 듣고 있어?”

내가 넋을 놓으니 이브가 걱정스럽게 물어온다.

퍼뜩,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뒤늦게 태연한 척 표정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나 이브는 이미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미, 미안해, 아빠.”

뭐지. 이 타이밍에 갑자기 사과를?

나는 당황한 나머지 눈만 푼수처럼 끔벅였다.

“음. 아니, 뭐가 미안하냐.”

“아빠. 표정이 엄청 굳어 있잖아.”

“…그랬겠지. 아마도.”

“내가 아빠 죽기 전의 얘기 하는 거, 그렇게 싫었어?”

“아니. 싫은 게 아니고.”

나는 황급히 이브의 말을 부정했다.

이건 사실이다. 정말로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그저 지금 상황이, 좀처럼 실감이 안 됐던 거다.

“나는… 그냥…….”

이브와 나누는 전생의 이런저런 이야기라니.

전생의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진솔하게, 남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사실 자체에 놀란 것뿐이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상황이라서 그랬다.”

나와 진심으로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회귀해도 기억이 남아있는 누군가와, 같이 헤쳐 온 지난 전생에 대해서 회고하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아.”

있을 리가 없어서 상상한 적도 없다.

그런데 막상 그 상황이 현실로 닥쳐오니…….

“이제 네가 없는 회귀는,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다, 이브.”

과거의 수많은 이 순간이 머리를 스친다.

시간이 되돌아오는 순간. 시야에 한가득 들어오는 1012번째 똑같은 풍경.

그 토할 것 같은 무채색의 정경을, 혼자서 견뎌냈던 과거가 얼핏 떠오른다.

“이제 솔직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혀끝까지 치밀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민간인 사회가 익숙해지면. 아침 6시 반에 칼기상 했던 군 시절의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듯이.

지금 내가 딱 그런 느낌이었다.

‘대체 어떻게 버틴 거냐. 옛날의 나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그게 절대로 내 얘기는 아닐 줄 알았건만. 역시 속담이 괜히 속담이 된 건 아니다 싶었다.

‘이미 많이 의존하고 있었구나.’

회귀할 때마다 이브의 존재가 주는 안심감. 그것이 내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을 방금 깨달았다.

“에엥? 가, 갑자기,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손발 오그라들게!!”

이브는 내 말에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녀가 전에 없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고. 황급히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이내 그것으로 성에 안 차는지, 내 쪽으로 힘없이 발길질까지 해왔다.

“모, 몰라! 나 잘 거야!”

이브가 내게서 등을 팍 돌렸고. 그대로 침대에 성큼성큼 걸어가 이불을 뒤집어 써버렸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자라.”

“말 안 해도 잘 잘 거라니깐!”

“그러면 다행이고.”

또 무슨 스위치를 건드렸길래 애가 갑자기 츤데레 캐릭터가 됐냐.

백발 적안 외계인 소녀의 심리. 지구인인 내게는 여전히 불가해의 영역이다.

* * *

[1012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13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아무튼 그 뒤로도 내 자살런은 계속 이어졌다.

익숙한 던전 마스터들이 무수하게 스쳐 지나갔고. 잡다한 보상들이 내 주머니로 들어왔다가, 회귀할 때마다 강제적으로 빠져나갔다.

[아이템 ‘룬 블레이드’를 선택합니까?]

[아이템 ‘전능의 팔찌’를 선택합니까?]

[아이템 ‘진화의 흑익’을 선택합니까?]

아이템 몇 개는 일부러 계승해 놨다.

B급 이상의 아티팩트는 ‘아이템 옥션’에서 비싼 값에 팔아치울 수 있다. 저번에 오원태에게 줬던 20억도 그렇게 마련했었지.

그런 급전이 필요한 상황을 위해, 직접 쓸 게 아니더라도 쟁여두는 것이다.

[유물의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그렇게 돌아간다.

또 돌아간다. 한 번 더 돌아간다.

에티의 장난감 왕국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해서 시간이 돌아간다.

―당신. 누, 구야?

그리하여 어느덧 1016번째 회차.

2차 붕괴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53던전, ‘유령의 축제’가 등장했다. 던전 마스터 꼭두각시 소녀가 수많은 묘지기 광대와 함께 나를 반겼다.

―무, 서워. 당신은, 너무. 무서. 워.

소녀는 지긋지긋한 멘트를 내뱉으며 공포로 벌벌 떤다.

나는 지친 미소를 띤 채. 다만 기계적으로 단검을 들어 올릴 뿐이다.

“나도 슬슬 너 무서워진다, 개새꺄.”

푸화악!

단검은 꼭두각시 소녀가 아니라, 내 목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간다.

[1016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17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자살런을 진행하는 동안, 이브에게도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그녀도 슬슬 내 자살런에 익숙해진 것이다.

“어, 아빠. 어서 오고!”

이브는 이제 전처럼 화를 내지도, 울지도, 심지어 별로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냥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서 번쩍, 손만 흔들어 줄 뿐이다.

“어어, 아빠. 시작부터 왜 그렇게 죽상이야?”

“게이트가 꼴받게 하잖아.”

“으음, 딸기우유 한 팩 할래?”

“…한 팩 말아줘.”

베테랑의 연륜이 느껴지는 그 행색에 울어야 할지 웃어야할지 애매하다.

결국 쓴웃음만 진득하게 머금었던 기억이 있다.

[1017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18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1018회차에선 진조 노스페라드의 ‘고성 바르칼라이드’가 등장했다.

전과 비슷한 요령으로 빠르게 서큐버스들을 학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순식간에 노스페라드까지 제압해 버렸다.

“크, 으윽… 주, 죽여라, 인간!!”

“안 될 말이지.”

나는 능숙하게 노스페라드의 신병을 구속했고. 전과 비슷하게 심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하트 기어. 그러니까… 칼라브란테. 이게 뭔지 모른다는 거냐?”

“그래! 아까부터 모른다지 않느냐!”

“정말로? 거짓말 아니냐?”

“몰라, 모른다고! 그게 무엇인데 내게 자꾸 물어보는 것이냐! 이젠 내가 다 알고 싶도다!”

“…….”

노스페라드는 이미 이브의 존재 자체를 말끔히 잊은 상태였다.

그런 건 애초에 알았던 적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기억이 완전히 소거되어 있었다.

의지의 화신이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뭔지 알려주지. 바로 이거다.”

스르륵.

나는 혈천갑의 변신을 해제하고, 재구성된 이브를 노스페라드의 앞에 들이밀었다.

이브와 노스페라드. 소름 돋을 정도로 똑 닮은 두 던전 생물이 직면했다.

“읏!”

“어라?”

노스페라드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고. 반대로 이브는 깜짝 놀라 입을 헤 벌렸다.

이브의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곧장 나를 향했다.

“어… 아빠. 이, 이 아줌마, 나랑 엄청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야말로 길 가다 도플갱어라도 본 반응이다.

양쪽이 극과 극으로 갈린 리액션이었지만. 경악과 신기함이 뒤섞인 반응인 건 똑같았다.

나름 재밌긴 한데, 아쉽게도 양쪽 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서로를 못 알아보는데.’

기억이 소거된 노스페라드는 차치하고. 혹시나 이브는 노스페라드와 마주하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거늘.

역시 그런 형편 좋은 전개는, 내 사전에 없었다.

[1018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19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그렇게 하릴없이 내 도전은 1019회차로 넘어갔고.

2차 붕괴일인 11월 31일을 맞았다.

―돌격! 돌겨어어억!!

―여왕님을 위하여!!!

그리고 마침내.

두 번째 장난감 왕국이 월미도에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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