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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45화 (145/235)

145화

<101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

회귀 초창기의 나는 불안정했다.

이건 무력적으로도 물론 그렇지만. 정신 쪽도 해당되는 말이다.

“수아야.”

“…음? 네. 왜 그러세요?”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그래서 수아에게 ‘만약’을 가정해 자주 상담을 하곤 했다.

소위 말하는 ‘내가 아는 사람 얘기’. 절친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느낌으로, 영원회귀와 관련한 고민들을 에둘러 털어놓았다.

“과학 기술이 존나게 발전했다고 치자.”

“네네. 발전해서요?”

“기억을 기계에 저장하고, 다시 누군가한테 이식하는 것도 가능해졌다고 쳐.”

“와. 4차 산업 혁명 만만세네요!”

수아의 반응은 그때도 평소와 비슷했다. 내 뜬금없는 개소리에 아랑곳 않고, 없는 텐션 끌어올려 어떻게든 맞장구를 쳐줬지.

나는 목소리를 낮춰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기억이 실수로… 친구인 철수한테 덮어씌워졌다 치자.”

“아이고, 저런! 그래서요?”

“그래서 전에 있던 철수의 기억은 거의 사라지고 내 기억만 왕창 남았어. 그러면… 그건, 기억이 나랑 뒤섞여 버린 철수는, 계속 철수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던 고민.

거창하다면 거창한데.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거였다.

좀 오글거리나? 그럴지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질문했던 나는 상당히 진지했다.

“오글거려도… 좀 진지하게 생각해 줘라, 수아야.”

반복된 한 달의 기억이 쌓이고 쌓여간다.

이미 수십 개의 회차가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뒤섞여서, 기억이 뒤죽박죽인 상태였다.

이렇게 행동하면 수아는 저렇게 행동하던가? 아니. 그건 전전 회차였다. 아니, 이번 회차였나……?

“철수는… 기억이 완전히 뒤섞여 버린 철수는.”

내가 기억하는 수아라는 건, 대체 뭐냐?

눈앞의 저건… 내가 아는 수아가 맞겠지?

“…여전히, 철수냐?”

그러면 반대로 나는 뭐지?

전생의 나와 지금 나는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기억만 같은 타인인가? 기억이 완전히 똑같다면 그게 같은 사람 아닌가?

‘정말로 지금의 나는…….’

무수히 죽어버리고 죽여버린 나는, 최초의 순진했던 나와 동일인이다. 정말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

이런 상념이 폭주한 결과. 나는 반푼이 철학자가 돼버렸다.

‘이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나도 어려운 문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난 철학엔 하등 관심 없는 사람이다. 이런 쓸데없는 문제로 고민하는 건 나답지도 않고, 하등 생산성도 없다.

그런 당연한 사실은 알고 있다만.

‘생각하기 싫어도, 생각이 난다고.’

다만 지금 내가 직면한 현실이 이렇게나 복잡하고 X같아서 문제다.

군대에서 ‘내가 X발 왜 여기에 있지’ 같은 생각을 안 하는 게 이상하듯이. 내가 이런 의문을 안 가지는 게 더 이상한 수준인 것이다.

“으음. 그거 완전 테세우스의 배네요!”

그리고 수아의 답변은 그것이었다.

나는 순간 눈을 크게 떴고. 그녀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테세우스의 배?”

“네. 완전 그런 상황인데요? 혹시 알고 물어보신 거예요?”

“…아니야. 그게 뭔데.”

“음. 그게 뭐냐면요.”

수아는 무식한 내게 천천히 설명해 줬다.

옛날 그리스에 테세우스라는 새끼가 있었다. 그 양반은 미노타우르스라는 괴물을 죽이는 등, 대단한 업적을 남긴 영웅이라 아테네 사람들이 오지게 빨아줬다.

그래서 그가 귀환할 때 탄 배를, 아테네 사람들이 오랜 후세까지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요. 당연히 배가 어떻게 될까요?”

“…낡겠지. 파손도 될 거고.”

“그렇죠. 그러면 그 파손된 부분을, 하나씩 수리하거나 교체하겠죠?”

“오래 보존할 거면 그래야지.”

문제는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부터다.

세월이 지나면서 테세우스의 배는 점점 교체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갑판의 판자 하나에서 갑판 전체. 선두 전반. 돛과 마스트. 선체. 그리고 선미(船尾)까지.

급기야는 배의 모든 부품이, 최초의 ‘태세우스의 배’와는 완전히 다른 부품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면 그 구성품이 100퍼센트 교체돼 버린 배를,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뭐 이런 의문이 생긴다는 얘기죠.”

“그렇구나.”

“방금 오빠가 한 얘기랑 결이 비슷하지 않아요?”

“…그렇구나.”

수아의 말대로였다.

시대만 가상의 미래에서 가상의 과거로 바뀌었다지. 내 말과 주제가 거의 비슷했다.

결국 이 일화들이 하고 싶은 말의 골자는…….

“사람의 정체성이란 육체와 정신 중에 어디서 오는 걸까. 뭐 대충 그런 말이죠?”

수아가 내 생각을 가로채듯 말을 이어버렸다.

나는 약간 넋이 나가 수아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도 특유의 무구한 표정으로 날 빤히 올려다봤고.

“오빠는, 그런 의미로 물어본 거 맞나요?”

수아가 특유의 미소를 샐쭉 머금는다. 무심결에 따라 웃게 만드는 마력이 깃든 미소다.

그 마력을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정확해.”

‘테세우스의 배’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하여간 수아는 철학과라 그런지 별걸 다 안다. 철학과 애들은 다 얘처럼 척척박사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수아를 빤히 쳐다봤고.

“이거 딱히 철학과라 아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일반 상식일걸요?”

수아는 귀신같이 대꾸했다.

나는 독심술까지 가르치는 명문대 철학과의 다재다능함에 더더욱 놀랐고. 그대로 잠깐 얼어붙었다.

수아가 그런 내게 멋쩍게 웃어보였다.

“아니. 너무 대단하다는 표정을 짓길래요! 뭔 생각하는지 다 보였어요.”

“…그랬냐.”

“네. 오빠는 진짜 표정 읽기가 쉽다니까요. 으히히.”

“미안하다. 상식도 모르는 중졸이라.”

“아니, 오빠?!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뭐가 돼요! 무슨 잘난 체한 것 같잖아요!”

수아가 당황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런 느낌으로, 약간은 화기애애하게 분위기가 풀어졌던 것도 잠시.

“어쨌든. 이게 그 정도로 유명한 일화라는 건 말이죠?”

수아가 헛기침과 함께 다시 말을 꺼냈다.

어조는 다시 진지하게 돌아와 있다. 나를 쳐다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오빠랑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동서고금 막론하고 엄청 많았다. 이런 소리겠죠!”

나름 선생님처럼 젠체하며 말하는 수아.

한없이 진지했지만. 동시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 말투만큼이나 따스한 눈꼬리가 슬쩍,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필요해지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오빠.”

“…….”

“너무 혼자 떠안으려곤 하지 마시고요. 오빠는 가끔 좀… 위태로워 보일 때가 있어요. 걱정된다구요.”

‘아는 사람 얘기’가 으레 그렇지.

비유했던 철수 씨가 나였다는 건 진작에 들켰다.

“…….”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난 가만히 고개를 푹 떨궜다.

그리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맙다. 수아야.”

“아이, 고맙긴요. 오히려 죄송할 정도죠!”

칭찬에 약한 수아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를 흘깃거리는 그녀의 볼은, 벌써부터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지금 오빠가 고민하는 문제는 딱히 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제가 확실히 뭐다, 하고 대답해 드릴 수가 없네요. 미안해요.”

“…아니야. 방금의 대답만 해도 충분히 도움이 됐어. 많이 위로가 됐다.”

“에이, 정말 진짜로요?”

“정말이다. 진짜로.”

나 말고도 고민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그 고민의 정답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다.

“…그거만 알면 됐어. 정말로.”

나는 태생이 단순한 새끼다.

그래서 이 정도 이정표만 있어도 된다. 이젠 몸으로 때워서 해답을 찾아가면 된다.

수아 본인은 이번에도 자각을 못하는 듯하지만. 이번에도 난 그녀 덕분에 칠흑 같은 지옥 밑바닥에서 건져진 기분이었다.

“음… 아, 그러면요.”

하지만 수아는 괜찮다는 내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운가 보다. 나를 못 미더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끙끙대다가, 이런 솔루션을 제안해 왔다.

“방금 같은 딜레마가 생겼을 때 참고할 만한 토론이라도 같이 해볼까요?”

“…토론?”

“네! 같이 여러 문제에 대해서 토론해 봐요! 분명 재밌을 거예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잠깐 사고가 마비됐다.

내가 침묵을 고수하자, 그녀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첨언했다.

“아, 토론이라고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구체적으로 뭘 할 건데.”

“어… 별건 없어요. 방금처럼 답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토론하면서 노는 거죠 뭐.”

나는 눈썹을 바짝 틀어 올렸고. 반면 수아는 기대로 눈을 반짝였다.

수아의 표정을 가만히 주시하던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보자. 재밌겠네.”

“앗싸!!”

갑자기 철학적인 토론을 나누고 싶어진 건 아니다. 그냥 수아가 엄청나게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수락한 거다.

아무래도 옆집 무식한 오빠랑 대논쟁 철학 배틀 벌이는 로망이라도 품고 있었던 듯하다.

“음, 그럼 처음은 이걸로 한번 해볼까요……?”

이때 나눴던 대화는 대부분 기억에 없다. 유일하게 아직까지 기억나는 토론 에피소드는, 철길 위의 희생자 선택.

수아 말로는 ‘트롤리 딜레마’라 불린다는 문제였다.

“자, 오빠! 여기 통제 불능의 열차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열차 앞 선로에는 다섯 명의 선량한 시민이 옴짝달싹 못 하게 꽁꽁 묶여 있어요! 이대로라면 몰살이 확정이에요!”

“저런.”

“하지만 오빠에겐 스위치가 쥐어져 있고. 그 스위치를 누르면 열차가 다른 선로로 궤도를 바꾸게 돼요. 하지만 그 바뀐 선로에도 딱 한 명, 묶여있는 사람이 있었죠!”

수아는 마냥 즐거운 듯이 설명했다.

그리고 척, 토크 쇼의 사회자 마냥 마이크를 든 시늉을 하고. 기대 어린 표정으로 내게 가상의 마이크를 들이댔다.

“자, 다섯 명과 한 명. 오빠의 선택으로 둘 중 한쪽은 반드시 희생되는 이 상황! 오빠라면 스위치를 누를 건가요?!”

“눌러야지. 당연히.”

“으, 으음… 역시 그렇죠? 대부분은 그렇게 답하죠. 아직까지는 말이죠!”

내 기준으로 이건 고민할 가치도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왜 이게 ‘딜레마’인가가 오히려 고민될 정도였다.

수아도 이 정도는 예상했는지, 점점 상황 설정을 심화해 나갔다.

“그럼 스위치를 누르는 게 아니라요. 오빠가 직접 사람을 밀어서 죽여야만, 열차를 막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요?”

“밀어야지.”

“엑…….”

“네 명분의 개이득인 건 전이랑 똑같지 않나. 뭐가 달라진 거냐.”

“그, 그게. 똑같지만. 직접 밀어야 하는데요……?”

“줄 건 줘.”

“…….”

여기까지 칼같은 답변은 계산에 없었던 듯하다.

수아도 내 즉답에 당황한 건지,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 다섯 명 쪽이 오늘내일하는 어르신들이고, 한 명이 이제 걸음마 뗀 아기라면……!”

“죽어라, 아가.”

“그, 그럼! 다섯 명 쪽이 사실 흉악무도한 살인범들이어도?!”

“살아난 다음 뭘 하든, 그것까진 내가 알 바가 아니야. 어쨌든 나는 분명… 당장 더 많이 살릴 수 있는 쪽을 선택한다.”

그 전의 주제들에는 언청이 마냥 더듬더듬 말했던 나였지만. 그 문제만큼은 일말의 막힘없이 술술 답변했다.

수아도 그것이 이상했는지 캐물어 오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왜요? 왜 유독 이번 질문만 그리 당당한 거예요?”

“그게 옳으니까.”

“어, 네?”

“옳으니까. 그게 무조건 맞으니까.”

“…허어?”

내가 어떤 심경으로. 그리고 어떤 경험 끝에 그렇게 확신하는지. 당연히 그 때의 수아는 알 길이 없다.

“와. 진짜 사람이 어쩜 이리 한결같지……?”

그렇게 몇 번의 문답이 더 이어진 후, 결국은 수아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그녀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오빠 진짜, 뼛속까지 공리주의자네요?”

“공리주의자가 뭔데.”

“딱, 지금 오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요.”

“……?”

“아녜요. 됐어요. 시시비비 따지려는 건 아니니까. 딱히 틀린 사상인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나는 왜 유독 이 일화만 기억하고 있을까.

수아의 독특하게 벙찐 표정을 수집해서? 똑똑한 수아를 내 억지 논리로 침몰시켜서?

다 틀렸다. 진짜 이유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럼요 오빠. 죽어야 하는 한 명이 오빠 본인이라도… 오빠는 스위치를 눌러요?”

“…아직도 하는 거냐. 그거.”

좀 오기가 생겼는지, 그 뒤로도 수아가 구질구질하게 달라붙었다.

나는 대답 대신 슬쩍 한숨을 쉬었고. 수아는 그런 반응에 뺨을 슬쩍 붉혔다.

“아, 아무튼요. 대답해 보세요! 오빠 본인이 희생해도 눌러요, 안 눌러요?”

“누른다. 무조건 눌러. 오히려 나만 희생해서 끝나면 더더욱 고민 안 하겠지.”

“에, 에이. 그건 허세다! 그래도 자기 목숨인데요?”

“내 목숨은 적어도 내 거지. 그래서 마음대로 갖다버려도 죄책감이 안 생겨.”

“아니! 그, 그런 게 어딨어요……!”

수아는 내 솔직한 토로에 손사래를 쳤다.

마음대로 생각하면 된다. 실제 경험을 토대로 나온 말이라 해봐야 믿을 리도 없다. 믿으면 그것대로 곤란하고.

나는 슬슬 말장난도 귀찮아져서, 그쯤에서 대충 대화를 끊기로 했다.

“이제 만족했지? 그 얘기는 그만…….”

“그럼 있잖아요.”

“또 뭐.”

“제가 희생해야 돼도… 오빠는 스위치를 누를 거예요?”

“…….”

거기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의문스럽게 쳐다보는 수아의 시선을 마주보고. 홀린 듯이 내 손을 한 번 봤다.

끝에는 자연스럽게 땅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너… 는… 그, 그게.”

그리고 다시 언청이로 돌아왔다.

이것이 내가 이 에피소드를 잊지 못하는 이유다.

강수아는 내 근본적인 신념까지 뒤흔드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것을 내가 처음으로 자각한 순간이다.

“…잘 모르겠다. 나도.”

결국 희생자가 수아일 때만큼은 확답을 못 해줬다.

어째선지 수아는 그 애매한 대답에 엄청나게 부끄러워했지만. 아무튼 이런 기억도 있었다는 거다.

아니. 기억이 있었다?

정말로?

‘웃기는 소리군.’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좀 조심스럽다.

이제 이런 어렴풋한 꿈에서조차… 시커먼 의심밖에 들지 않는다.

‘이 기억도… 기억을 뺏길 때 개변된 거 아닐까.’

나한테 저렇게 해맑게 웃어주는 수아 따윈 어디에도 없었던 거지.

‘현자의 눈’ 대가로 바쳐버린 강수아의 기억을 대체하기 위해, 내 머리가 급조해 낸 가짜 강수아일지 몰라.

전부 그냥, 내 십덕 망상이 만들어 낸 가상의 에피소드인 건 아닐까?

“…….”

떠오른 내 생각을 부정하고 싶다.

뭐라도 좋으니 말을 해야겠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원래 꿈이라는 게 다 그렇지. 내 마음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

열심히 입을 뻥긋거려보지만, 꿈속의 나는 요지부동.

곧 세상의 모든 풍경이 정지한다. 흑백으로 이지러지고 완전히 정적으로 변했다.

초침 흐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숨 막히는 침묵이 도래했다.

“…!……!!”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

뭐라도 좋으니까. 빨리. 어서.

말을 해야…….

* * *

번쩍.

눈을 떴다.

“아.”

필사적으로 말하려던 입이 드디어 벌어진다.

익숙한 천장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침대 위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쓰읍.”

탄성을 흘렸던 입을 문질러 봤다. 그제야 제대로 실감이 든다.

여기는, 1011번째로 맞이한 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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