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44화 (144/235)

144화

<101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

“뭐, 내가 준비한 보상은 여기까지일세.”

베르페아노가 어깨를 으쓱였다.

슬슬 대화를 마무리하는 분위기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것을 느꼈다.

“…….”

고개를 슬쩍 들어 베르페아노를 쳐다봤다.

놈의 표정엔 여전히 일말의 변화도 없다. 그저 미미하게 웃음기가 어린 얼굴과 어조로, 하던 말을 이어나갈 뿐이다.

“이 보상을 어떻게 활용할지. 그건 자네의 자유일세.”

“…….”

“노망난 노친네의 헛소리라 치부해도 좋고. 아니면 진지하게 믿고, 강수아의 정체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도 좋겠지. 마음대로 하게. 거기까진 내 관여할 바가 아니니.”

“…….”

“다만 나는 전달해야 할 것을 분명히 전달했네. 그 시점에서 내 역할은 끝났다.”

베르페아노는 내 반응이 없어도 잘만 떠벌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려온 그 말에, 멍하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역할?”

퍼뜩, 상체를 쳐들고 놈을 똑바로 노려봤다.

역할. 누군가에게 맡게 된 책임이나 의무. 혹은 연극에서 배우에게 할당되는 소임.

보통 그런 걸 역할이라고 부른다.

‘연극.’

그래, 누군가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조종되는… 잘 짜여진 연극.

비슷한 말을 전에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잃어버린 기억을 들려준 건… 네 의지가 아니었구나, 베르페아노.”

나는 서슬 퍼런 어조로 베르페아노를 추궁했다.

그러자 베르페아노는 단박에 입을 닫아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쉬질 않던 아가리가 거짓말 같이 조용해졌다.

침묵하는 놈에게 연신 질문해 댔다.

“역할이 거기까지. 그렇다는 건, 그 역할을 네게 떠넘긴 누군가가 있겠지. 네가 출연한 연극을 연출한 감독 말이다.”

“…….”

“그게 대체 누구냐. 그놈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좀 말해봐라.”

“…….”

“나도 좀 짚이는 새끼가 있어서 그런다. 너한테 역할을 맡겼다는 새끼가… 내가 생각하는 그놈이 맞는지. 그거나 좀 알고 싶어서 그런다고.”

하지만 베르페아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대충 예상은 했다. 그 말 많은 베르페아노가 입을 뻥긋 조차 않고 있다. 그 시점에서 유의미한 대답이 나올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나는 차가운 조소를 진득하게 머금었고.

“…누구의 의지였든. 일단 보상은 잘 받아간다.”

드르륵, 의자를 밀고 힘없이 일어났다.

베르페아노에게 더 이상 대화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 앉아있는 건 의미가 없다.

서로에게 시간 낭비일 뿐이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의미 없는 덕담 한마디.

그리고 야멸차게 시선을 거둔 나는, 비척비척 출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자에 대해선 깊게 생각할수록 손해일세, 도전자.”

덜컥.

내 발을 멈춘 건, 베르페아노의 그 한마디였다.

“…….”

고개만 흘끔 돌려 놈을 가만히 노려봤다. 베르페아노는 답지 않게 축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시선이 오갔고.

“그자라니.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신랄하게 이죽거리며 슬쩍 떠봤다.

베르페아노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시치미 떼긴. 자네도 그새 능구렁이가 다 됐구먼.”

“덕분에 많이 배웠지.”

“아마 자네가 지금 떠올린 그자가 맞을 걸세.”

“……!”

“그자는 딱히 알려진 명칭이 없어. 그래서 나는 편의상 의지의 화신… 아니면, 줄여서 화신(化神)이라고 부르는 편일세. 자네가 떠올린 것도 필경 동일한 존재일 테지.”

틀림없었다.

베르페아노가 무대 뒤의 그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는 그가 직접 붙였다는 그놈의 이름을, 가만히 입에 담았다.

“…의지의 화신.”

다만 첫마디부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면 손해라고? 나는 이해가 안 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생각하지 말라는 거냐. 그놈이… 이 모든 일의 주범인 거 아니냐?”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일세.”

“그놈의 X발……!”

틀렸으면 틀린 거고 맞았으면 맞은 거지, 개새꺄. 아까부터 뭔 놈의 부분 점수가 이리 많냐.

베르페아노의 둥그런 머리가 세모 모양 될 때까지 패버리고 싶다.

내가 주먹을 꽉 쥐자, 베르페아노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농부는 태풍이 작물을 휩쓸어 갔을 때, 왜 태풍이 찾아왔는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뭐?”

“어떻게 최대한 작물을 살려낼 수 있을까. 이제 어떻게 하면 올겨울을 무사히 버텨낼까. 그 시점에 농부가 고민해야 하는 건 그것이란 말일세.”

“…….”

“이미 몰아쳐 버린 태풍을 원망하고 욕해본들 아무 의미가 없지. 아니 그러한가.”

아닌 밤중에 정말이지 뜬금없는 개소리였다.

하지만, 왜일까. 비유적 표현엔 영 자신 없는 나였지만, 지금 베르페아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알아챘다.

영원회귀를 반복하면서, 놈이 말한 ‘농부’와 사고방식이 비슷해져서 그럴지도.

“의지의 화신이, 그런 태풍 같은 놈이다?”

“그래. 그자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온갖 차원을 넘나드는 범우주적 자연재해. 그 자체일세.”

“…자연재해.”

“왜 이런 일을 벌이는가.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었는가. 이미 놈에게 휘말린 시점에서 그런 생각 자체가 일절 무의미하지.”

“허.”

“그냥 원래부터 그렇게 설계된 존재일 뿐이야. 놈은 문자 그대로… 우주의 어떤 거대한 의지 그 자체. 의지의 화신이란 말일세.”

저건 딱히 비유가 섞인 게 아닌데. 그냥 근본부터가 이해하기 어려운 개소리였다.

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베르페아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이해하도록 설명하긴 좀 힘들 것 같군. 그렇기에 더더욱, 그자에 대해선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길 권하겠네.”

“내가 생각을 안 하고 싶어도 새꺄. 저쪽이 나를 가만히 놔두긴 하냐?”

“놔둘 걸세. 반드시.”

베르페아노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척, 그가 손가락을 들어 내 면상을 찌를 듯이 가리켰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화신이 어떤 경위로 벌써 자네에게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것도 분명… 놈의 ‘계획’에서 뭔가가 어긋났기 때문이겠지. 맞나?”

“그건… 맞는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내가 ‘의지의 화신’을 목격한 유일한 순간. 노스페라드와 조우했던 전생을 상기시켰다.

“나한테서 대체 뭘 바라는지 모르겠군.”

“나는 이 계집의 입을 막기 위해 나왔다. 초인.”

그놈은 노스페라드의 입을 막기 위해서 나왔다고 했다. 뭔가가 자기 계획에서 어긋났기에. 일종의 버그를 수정하려고 직접 등장했던 것이다.

내 말에, 베르페아노는 무릎을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 보게. 그러니까… 화신이 미리 가정해 놨던 시나리오에서 심각하게 벗어나는 변수가 없는 한. 그놈은 자네가 무슨 미친 짓을 벌이든, 절대 개입하지 않을 걸세.”

무대 뒤의 존재. 가칭 ‘의지의 화신’.

이놈은 자기가 정해놓은 시나리오가 뒤틀릴 만한 일이 생기면 무대 위로 난입한다. 그래서 나는 저번에 그를 대면할 수가 있었다.

‘이걸 반대로 말하면.’

시나리오가 뒤틀릴 일만 없으면 된다.

그러면 놈이 등장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태풍이라고.”

그러니 내 알량한 힘으로 어쩌지도 못할, 농부에게 닥쳐온 태풍 같은 존재. 그 불가해한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건 하등 의미가 없는 짓거리다.

베르페아노의 말은 대충 그런 소리였다.

“그렇다는 건, 네 말은.”

나는 궁리 끝에 한 가지 깨달았다.

눈을 조금 크게 떴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묻기 시작했다.

“내가 영원회귀를 끊든. 던전 붕괴를 무사히 막든. 그놈은 끝까지,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소리냐?”

“그런 말이 되겠지.”

“…왜. 그건 어째서냐.”

“그런 맹탕 같은 결말 또한, 놈이 준비한 수많은 시나리오 중 하나일 테니까.”

“…….”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냥 한없이 의문만 솟구쳤다.

의지의 화신이란 놈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너무 궁금한 게 많아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때 마침 베르페아노가 그중 하나를 해소해 줬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놈은 자네가 결말까지 다다르는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야. 도전자.”

“…과정이라니.”

“동화를 보게.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해낼 걸 뻔히 알아도. 결국 사람들은 용사의 고군분투에 빠져들고, 스며들고, 응원하지 않나. 그런 걸세.”

“그 말은…….”

“자네가 아득한 죽음의 구렁텅이조차 뛰어넘어, 처절한 천신만고 끝에 공주님을 구해낼 때까지의 과정. 그 숭고하고 존귀하며, 약간은 광증에 가까울 정도로 굳건한 의지. 의지의 화신은, 말 그대로 자네의 ‘의지’ 자체를 탐닉하는 게다.”

“…….”

그것이 베르페아노가 말해준 화신의 동기.

이 세상이 ‘던전’이라는 재앙으로 멸망까지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이유. 또한 그 와중에 내가 선택받아 영원회귀를 1010회나 반복한 이유.

‘의지의 화신’이란 별명이 지독하게 어울리는, 순수한 광기의 편린이었다.

“그러니 자네는. 이미 일어나 버린 현상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게 아니지.”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새삼 놈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베르페아노 역시 나를 지그시 마주보고 있다.

“그건 학자들이나 하는 짓거리일세. 화신이 정해놓은 자네의 본분과 어울리지 않아.”

“…내 본분.”

“자네는 전사이며 사냥꾼이다. 궁구해야 할 것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해결책. 돌파구일세.”

“…….”

한동안 입은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간다.”

비척비척.

나는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다시 출구로 걸어갔다.

철그럭. 문고리를 잡고 힘없이 잡아당겼다. 출입구가 끼이익, 기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열렸다.

“나름, 아니. 많이… 유익했다. 고맙다.”

베르페아노에게 짤막한 감사를 표했다.

열린 문 너머는 시커먼 공허. 공간 자체가 찢어진 아공간 통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홀린 듯이 그곳으로 발을 집어넣는 그 순간.

“많이 혼란스러울 자네를 위해, 내 특별히 최후의 힌트를 주지.”

피이잉!

아득해지는 정신으로 베르페아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지금 힌트라고 했겠다. 나는 몰려오는 현기증을 애써 무시하고, 부릅뜬 눈으로 놈의 잔상을 쫓았다.

“최후의 던전 붕괴를 저지해도 자네의 영원회귀는 계속된다네. 하지만 반대로, 자네의 영원회귀가 끊어진다면… 던전 붕괴는 자연스럽게 저지될 걸세.”

웬걸. 들려온 정보는, 도저히 현기증에 흘려버릴 발언이 아니었다.

토할 것 같은 와중에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방금. 뭐라고……?!”

“이 이상은 좀 위험하니 다물도록 하겠네. 더 말했다간 보나마나 화신이 저지할 테지.”

“큭……!!”

“하지만… 그래. 요는 목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걸세.”

목적을 재정립하라고.

목적이라니. 무슨 목적을 말하는 거지?

이제는 거의 찰흙처럼 뭉개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허우적거려 베르페아노의 형상을 눈에 담았다.

“자네의 영원회귀는 던전 붕괴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건 바꿔 말해서… 던전 붕괴를 막기 위해 자네가 같은 시간을 반복하는 게 아니었다는 소리지.”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의 순간.

놈의 아득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뇌리를 채워갔다.

“그럼 영원회귀는 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저주였는가. 도전자.”

“……!!”

“이제 그 진정한 목적을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가 아닌가 싶네만?”

더 물어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뭐라도.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줘, 베르페아노.

나는 황급히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일단… 육사도의 단서와 행방을 모으고 있는 자네의 판단. 상당히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주고 싶군.”

베르페아노의 그 말이 끝이었다.

화아악! 시야가 일순 하얗게 명멸했고. 압도적인 현기증이 전신을 뒤덮었다.

정신이 순간 아득하게 멀어진다.

* * *

눈을 떴다.

주위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

처참하게 파괴되어, 원래 모습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월미도.

지나치게 익숙한 광경이다. 덕분에 내가 현실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빡세게 들었다.

“…흐.”

뜻 모를 헛웃음을 슬며시 흘렸고.

스르릉! 나는 망설임 없이, 블라이스의 단검을 치켜들었다.

“존나게 알찼네, 이번 회차.”

아직도 모르는 게 존나 많다.

새롭게 정립된 사실들로 미친 듯이 혼란스럽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었다. 베르페아노가 마지막에,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못을 박아줬으니까.

“어쨌든… 육사도를 계속 찾으면 된다. 이거지.”

유언을 마치기 무섭게 단검을 박았다.

뿌드득! 칼날이 경추를 헤집고 절단하는 섬뜩한 소리. 그리고 섬찟한 감각.

손바닥과 목에서 동시에 엄습한다.

“……!!”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피를 울컥울컥 쏟으며, 나는 그대로 자리에 무너졌다.

주변으로 순식간에 흥건해지는 내 피를 멍하니 관망하길 잠시.

“…하아아.”

생애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1010회차는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 끝을 맺었다.

이번에 월미도에서 살아남은 이는, 나 포함해서 아무도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