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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42화 (142/235)

142화

<101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

누군가 귀에 대고 확성기를 틀어놓은 것 같다.

확성기에선 지금도, 베르페아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자, 이러면 자네는 두 번째 보상도 절대 무시를 못 하겠지!”

머릿속이 윙윙 울린다.

귓구멍을 뚫고 쑤셔드는 말, 말, 말들. 그것들이 두개골을 후려치며 몇 번이고 고막에 메아리친다.

베르페아노는 짐짓 신난 듯이 지껄여 댔다.

“자네가 잃어버린 기억에는 무려… 자네가 걸린 저주의 열쇠가 담겨 있으니.”

저건 또 무슨 말이야.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머리에 돌덩이가 날아와 꽂혔다.

강렬한 충격의 연속에 뇌진탕이 올 것 같다. 시야까지 어지럽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나는 이마를 질끈 부여잡아 억지로 시야를 고정했다.

부릅뜬 눈에는, 여전히 날 향해 이죽거리는 베르페아노가 있었다.

“무슨 말이야. 저주라니……. 내가 저주에 걸렸다고? 무슨 저주 말이냐.”

“자네한테 걸려 있잖나. 시간 동결의 저주.”

“…….”

“아아. 아니지. 자네는 자네 나름대로, ‘영원회귀’라고 부르던가?”

“……!!”

“뭐, 의미만 통하면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나. 영원회귀. 개인적으로 괜찮은 명칭이라고 생각하네. 낭만 있고 좋지 않나? 흘흘.”

내게 걸린 저주. 영원회귀.

이 1010번이나 반복된 루프의 연쇄를 푸는 방법이… 잃어버린 내 기억 속에 있었다고?

나는 한동안 미친놈처럼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이내 퍼뜩, 무언가 떠올라 베르페아노를 쳐다봤다.

베르페아노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반응해 왔다.

“질문이라도 있나, 도전자.”

“지, 지금. 지금 네 말은…….”

더듬더듬 말하다 말고 목이 잠깐 메었다.

아찔한 정신을 가다듬고 목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영원회귀를 끊는 방법. 15차 붕괴의 던전 마스터를 죽이는 방법. 그게 서로… 다른 보상에 포함돼 있다는 소리냐.”

“그렇게 되지.”

베르페아노가 또 긍정했다.

아니야. 아직 내 불길한 예측이 확정된 건 아니다.

이건, 내 질문이 좀 잘못됐다.

‘다시 한번. 물어봐야 해……!’

좀 더 정확하게.

핵심을 꿰뚫어서 질문해야 하는데. 솔직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번 질문까지 저놈이 긍정해 버릴까 봐. 그게 너무나 두렵다.

“…15차 붕괴의 던전 마스터를 죽이면.”

그러나 호기심은 사람을 죽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입을 어렵사리 놀리기 시작했다.

“최후의 게이트 붕괴를 막으면. 내 영원회귀는… 자동적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냐?”

“갑자기 뭔 헛소린가. 당연히 아니겠지?”

“…….”

“그러니 각기 다른 보상에 포함된 걸세.”

역시나 쌈박하게 긍정해 버리는 베르페아노.

아직 놈의 보상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미… 나를 둘러싼 충격적인 진실을 하나 깨달아 버렸다.

허. 허허. 헛웃음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정말로, 그랬던… 거였나.”

언젠가. 머나먼 과거의 전생 속.

이세라와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을 아련하게 맴돈다.

“이세라. 내가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아냐?”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을 토로하는 대화였다.

15번째 붕괴를 마침내 무사히 막아내고. 그다음에 이어질 이야기.

이른바 엔딩 이후의 세계.

“아무도 나한테 목적지를 설정해 주지 않았다.”

혹시나 15차 붕괴를 막아냈는데.

그래도 여전히 내 영원회귀가 안 끝나면? 그땐 정말 어쩌면 좋지?

섬뜩하고 막연한 공포가 회귀 생활 내내, 나를 계속 갉아먹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

생각하기 싫어도 계속 생각난다.

폐부 한편에 숨죽인 채, 틈만 나면 심장을 쿡쿡 쑤셔댔다.

“나도 그냥, 뭐라도 좋으니 목적이 필요했던 건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강수아를 목숨 바쳐 지키기로 했다.

확고한 나만의 목적을 정해서, 내 불안한 미래를 무마하려고 했다.

이세라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16번째 게이트 붕괴만큼은… 절대 안 일어났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지금.

그때 지껄였던 모든 불안들이 사실로 드러났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가정이, 생생한 현실이 되어 들이닥쳤다.

“…아아.”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채를 쥐어 싸맸다. 벌벌 떨리는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했다. 그리고 얼빠진 신음만 흘렸다.

“으. 아아아아.”

지금껏 애써 억누르고 무시해 왔던, 압도적인 공포와 불안과 중압감.

한 곳에 뭉쳐 내 전신을 짓누른다.

“아아… 으아아아아!!!”

나는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마냥 어린애처럼. 도살당하는 짐승처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토해냈다.

* * *

얼마나 그 상태가 이어졌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간부터 기억이 전혀 없다.

체감으론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하… 하아… 하악……!”

어쨌든 정신 차려 보니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괴성을 멈추고.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아가던 바로 그쯤이었다.

“이거 참. 반응이 너무 좋으니, 오히려 좀 머쓱하구만그래.”

베르페아노는 귀신같이 그 타이밍에 중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발광할 것도, 언제쯤 정신을 차릴지도 모두 예측했다는 양.

정신없는 와중에도 으드득. 이를 슬쩍 악물었다.

“도전자, 이제 좀 괜찮아졌나? 응?”

여느 때와 같이 여유롭고. 그래서 토악질 나오게 기분 나쁜 이세계 현자의 목소리.

내가 알던 베르페아노 그대로였다.

“…좀, 이성을 잃었다.”

내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그것이다.

눈물로 흐릿한 눈가를 소매로 벅벅 문지르고. 무거운 머리를 한 번 세차게 뒤흔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빙글거리는 베르페아노를, 다시 눈에 담았다.

“자. 어떤 보상을 고를 텐가, 도전자.”

놈은 실실 웃으며 내게 물어왔다.

내 결심이 그사이 확고해진 것.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이미 전부 알고 있다는 행색이다.

“…2번 보상.”

불쾌감으로 표정을 굳힌 채 대답했다.

확실히 놈의 예상대로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요구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거, 알려줘. 지금 당장.”

던전 붕괴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방법.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기억. 영원회귀를 끊는 열쇠.

둘 중의 저울질에서, 나는 거침없이 후자를 택했다.

‘변명은, 안 한다.’

던전의 최종 붕괴를 막아낼 방법을 알면 뭐 하냐.

결국 영원회귀가 계속돼서 시간이 돌아오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니 영원회귀부터 먼저 끊는 선택이 옳다.

내 선택이 무조건 정답이긴 하다.

‘다 개소리. 집어치워. 조까.’

이런 허울 좋은 팩트와 정론들?

X발 알 게 뭔데. 허겁지겁 선택하고 나서, 한참 뒤늦게야 생각났다.

‘나는… 원래부터. 이런 놈인 거다.’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한 적도 없다.

그냥 존나게 무서워서 반사적으로 골랐다.

예전부터 이 무간지옥을 끝낼 방법만 있다면 무엇이든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른 거다.

그저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뿐이다. 평소의 나처럼.

“그렇겠지. 자네는 반드시 그걸 선택할 줄… 이미 알고 있었네.”

베르페아노는 여전히 기분 나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파지직! 놈이 손을 휘적이자, 그 앞으로 공간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들어오게.”

베르페아노의 개인실로 이어지는 아공간 통로.

나는 눈앞에 일그러진 균열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했다.

“보상 내용은… 들어가서 마저 얘기하지. 그게 적법한 ‘절차’니까.”

베르페아노 역시 가타부타 잔말 없이 손을 휘적였다. 그리고 스르륵, 먼저 균열 안으로 진입해 신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꼴에 경험자라 그런가. 뉴비 배려가 전혀 없는 모습이다.

“…후.”

나도 잠깐 심호흡을 하고. 아공간 통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나 멈칫, 결국 통로 코앞에서 한 번 멈춰 섰다.

“…….”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뭘 알게 될지. 내용도 모르면서 그냥 막연하게 공포가 밀려왔다.

‘…몸이.’

그 여파인지 방금부터 사지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작 대화 몇 마디에 이 정도까지 겁을 먹을 수 있구나. 이건 스스로가 좀 놀라울 정도다.

결국 내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후우우.”

다시 한번 숨을 머금었다.

딱히 뭐 대단한 결의가 생긴 건 아니었다. 경직이 풀린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뭐라도 해야지… 뭐라도.”

그런 매가리 없는 이유.

영원회귀 속에서 개발악하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한계까지 밀려난 나를 줄기차게 붕괴 현장으로 내쫓는 건. 언제나 이런 근본도 없고 이유도 불분명한 오기였다.

“…드가자.”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중얼거렸고.

스르륵. 통로 안에 발을 뻗음과 동시에, 아찔한 현기증이 밀어닥쳤다.

황금빛 벽면으로 가득했던 시야가 순식간에 격변했다.

“드디어 왔구만. 걸음마 배우는 애새끼도 아니고, 뭔 뜸을 그렇게 들이나, 이 사람.”

균열을 통과하자마자 일단 베르페아노가 꼽을 줬다.

물론 나는 이 악물고 무시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주변 풍경부터 살폈다.

‘…똑같군. 전이랑.’

우선 그것을 깨달았고.

거기서 묘한 안심감을 느낀다.

‘큐브의 심장부.’

벽면이 온통 황금빛 시계태엽과 정교한 기계 장치로 빈틈없이 들어찬 복잡스러운 방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벽면의 기계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고. 방 안에는 연신 규칙적인 격철음과 전자음이 삐거덕거렸다.

“여기 처음 와보나? 뭘 그리 신기하게 쳐다보나, 자네.”

이죽거리는 베르페아노는 방의 정중앙에 앉아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골방 한가운데 놓인 철제 탁자. 그 탁자를 중심으로 내 맞은편에 앉아, 정면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다.

일일이 도발에 대꾸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베르페아노.”

덜그럭, 의자를 빼고 삐딱하게 걸터앉았다.

턱을 괴고 앉아있는 베르페아노에게… 단박에 핵심을 파고들었다.

“네가 줄 보상의 정확한 내용을 말해봐라.”

“그새 잊어버렸나. 자네가 내게 빼앗긴 기억이 뭔지를 알려준다고 했네.”

“그 말은… 기억 자체를 돌려준다는 소리는 아니군.”

“애석하게도 그건 불가능하지. 자네에게서 가져간 기억은 이미 내가 먹어버렸다네. 내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소화되어서, 지금은 완전히 소멸해 버렸지.”

툭툭. 베르페아노가 관자놀이를 건드리며 설명했다.

불쾌한 몸짓에 진저리 쳐지는 한편.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평탄한 어조로 계속 물었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이… 영원회귀를 끊는 열쇠라고 했지.”

“그렇다네.”

“거짓말 아니고, 사실이냐?”

“거짓말 아니고. 사실일세.”

“그러면 예전의 나는, 그런 엄청난 기억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데. 왜 너와 현자의 눈을 거래한 거지?”

이건 아까부터 나를 괴롭히는 의문이었다.

한정용은 그 정도까지 사리 분별이 안 되는 빡대가리였나? 아니면, 그만큼이나 당시의 내게 현자의 눈이 절박했나?

‘아니. 그 정도는 확실히 아니었는데.’

놈과 눈을 거래하던 순간은 아직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때 내가 어떤 심정으로 거래를 했는지. 그것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현자의 눈이 굉장히 탐났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영원회귀를 끊을 방법까지 잃어버려 가면서 얻고 싶어 했다? 이건 주객전도지. 내 상식으론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한 거냐. 개병신 같은 과거의 나야.

“표정 보니 머릿속으로 자학하고 있구만. 과거의 자신한테 너무 그러지 말게, 자네.”

흠칫. 나는 격하게 어깨를 떨었다.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났나. 나는 황급히 표정을 고쳤고, 베르페아노가 그런 내 행색에 실쭉 웃었다.

내려다보는 자 특유의 눈웃음이 걸려 있다.

“과거의 자네한텐 아무 잘못이 없어. 당시의 자네로선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을 해서 현자의 눈을 얻어갔네. 거래했던 내가 인정하지.”

의미심장한 말들이 몇 개 섞여 있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석연치 않은 곳을 되짚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

“그때 나와 만났던… 211번째의 자네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기억이었다. 그러나 1010번째의 자네가 된 지금에서야, 그 사라진 기억이 중요해졌다. 뭐 이런 말일세.”

“…허?”

“정확히 말하자면 999번째의 자네부터였지. 음.”

999번째의 나.

999번째 회귀자 헌터 한정용.

멍한 와중에 기억을 되짚어 본다. 내가 999번째 회차에서, 영원회귀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뭔가를… 얻었던가?

“아.”

연상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오래 걸릴 수가 없지. 지금도 좋든 싫든, 울든 웃든, 심지어 죽어서 회차가 지난 뒤에도. 전생의 나를 똑똑히 기억해 주며…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니까.

“<하트 여왕의 눈물>을 손에 넣은 999회차. 바로 그 시점부터.”

타이밍 좋게 베르페아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한 채, 놈의 말을 받아들였다.

“비로소 자네가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은, 열쇠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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