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41화 (141/235)

141화

<101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

“이번 건 나름 관전하는 맛이 있었다. 도전자.”

귀신같이 베르페아노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큐브가 채 원상태로 돌아가기도 전이었다.

“지나치게 연명했던 도마뱀의 추악한 발악과 최후라. 꽤 볼만한 경치였다네.”

얼굴의 피딱지를 대충 훑어낸 뒤. 목소리의 방향을 흘깃 쳐다봤다.

베르페아노가 보인다. 놈이 여전히 띠꺼운 웃음을 두른 채, 북쪽의 국방위원장 마냥 박수를 짤깍거리고 있다.

“…일부러 행차까지 해주고. 황송하네.”

놈을 향해 짐짓 비아냥거렸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눈앞의 베르페아노가 푸른 마력허상이 아니라 진신(眞身)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체가 직접 나를 마중 나온 건… 분명히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칭찬이라도 해주려고 왔냐.”

“뭐, 비슷하지.”

“비슷한 건 뭐냐. 부분 점수냐.”

“이번 보상 얘기를 하려면 불가피하게 대화가 길어질 테니까. 자네의 소중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절약해 주기 위해, 내 직접 배웅하러 온 걸세.”

“…….”

이번 보상.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굳었다.

놈이 최종 시험 직전에 말했던, 하이퍼 큐브의 클리어 보상. 그건 분명…….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거냐.”

“옳지. 그것도 준비된 보상 중 하나일세.”

“보상 중 하나? 다른 것도 준비돼 있다는 소리냐.”

“자네는 역시 성미가 급한 게 흠이구먼. 지금부터 하나씩 설명해주겠다고 하잖나, 내가. 쯧쯔.”

“…….”

“자네가 정확히 이해하려면… 최대한 풀어서 차근차근 설명해야 하니까 말이야. 일단은 진득하게 이 노구의 말을 들어보는 게 어떤가?”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다.

긴장을 풀면 안 된다. 상대는 그 베르페아노다.

정당한 대가를 가져간다는 이유로, 태연하게 남의 눈을 산 채로 뽑고. 당사자 앞에서 그 안구를 하나씩 삼켜버릴 수 있는… 광인 중의 광인이지.

“…제대로 들어야지. 그럼.”

대충 들었다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코를 베일지. 며느리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으음. 그 정도 긴장감이 딱 옳은 자세야. 좋은 마음가짐일세.”

베르페아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성성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내 그가 내 앞을 가로지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게. 좀 걷지.”

“…그래.”

나는 베르페아노의 약간 뒤에 서서 놈을 쫓았다.

쿠르르륵! 그사이 큐브가 다시 격변한다.

흩어진 드래곤의 살점과 피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시신 본체도 신기루처럼 사라져 간다.

온통 불꽃에 그슬렸던 평야가 다시 황금빛의 큐브로 돌아오는 그 순간.

“일단 형식상 물어는 보겠네.”

베르페아노가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뭔가 제대로 시작하려는 눈치와 어조. 나도 긴장을 담아 놈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뭘 말이냐.”

“자네는 천칭의 눈과 여신의 눈, 그 둘 중에는 어느 보상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알고 있어도 되겠나?”

“그렇게 알고 있어라. 사실이니까.”

천칭의 눈과 여신의 눈.

사실 둘 다 굉장히 탐나는 스킬이긴 하다.

미래 예지가 가능하다면 전투 방면에선 그야말로 천하무적. 반면 허상 간파는 몬스터들의 환상 계열 기믹 파훼에 치트키 수준이니까.

‘대가가 너무 커서 문제일 뿐이지.’

예지가 가능하면 뭐 하냐.

정작 맨눈이 안 보여서야 전투력만 급감한다. 그야말로 주객전도다.

이세라처럼 마력 파장을 이용해 일상생활이야 가능하다만. 인간에게 시각이 가져오는 압도적인 정보량은, 어떤 감각 기관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세라가 괜히 서포터계 헌터였겠냐고.’

여신의 눈도 비슷한 이유로 싫다.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라고 하면 짐짓 대수롭잖은 제약처럼 들린다. 하지만 제약을 어긴 대가가 ‘칠공분혈 즉사’라 문제인 거다.

이건 전투보단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온다.

‘사실상… 평생을 반 벙어리로 살아야 하니.’

‘야, 점심 먹었냐?’라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먹었어’라고 대답했다 치자.

내가 그날 진짜로 점심을 먹었다면, 그건 틀림없이 진실을 말한 거다. 얄짤없이 온몸에서 피 쏟고 즉사해야 된다는 소리다.

‘이게 말이 되냐고.’

자타공인 빡대가리인 나는 그렇게는 못 산다.

수아한테 대답 잘못해서 안일사만 몇 번이나 할지, 감도 안 잡힌다.

“허헛. 역시 자네는 소신이 있어서 좋아. 덕분에 얘기가 빨라지겠구먼.”

아무튼 베르페아노는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든 눈치다.

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퍼퍼펑! 우리의 주변에 푸른 마력 덩어리를 몇 개 띄웠다.

그것이 연신 꿈틀거리며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괜히 떠봐서 미안하군. 사실 처음부터, 자네가 그런 결정을 내릴 건 알고 있었어.”

그리고 베르페아노는 그리 말했다.

나는 그 특유의 잘난 체에 눈살을 찌푸렸고, 곧장 질문으로 받아쳤다.

“알고 있었다니. 언제부터.”

“자네가 큐브에 들어오기 전부터.”

“…….”

“아니지. 자네가 저번 방문 때 현자의 눈을 가져간 그 순간부터. 이미 이런 흐름을 예상하고 있었네.”

느긋한 어조.

내 알량한 생각 따윈 다 꿰뚫고 있다는 말투.

이세라와 무르무르. 그리고 이 새끼까지. 내가 길게 대화하기 싫어하는 존재들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다.

자연스럽게 내 미간은 한계를 모르고 좁아졌다.

“다 알면 왜 물어봤냐. 시간 절약 한다더니.”

“말했잖나. 형식적인 게지. 자네 세상 말로는… 그래. 와꾸. 와꾸 맞추는 걸세.”

“…형식이라.”

“이런 중요한 거래는 원래 절차가 중요한 게야, 이 사람아.”

퍽이나. 나는 같잖은 말들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스르륵. 때마침 허공에서 꿀럭거리던 마력덩이가, 내 앞으로 포르르 날아왔다.

“자네는 지금부터… 세 가지 보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네.”

놈은 눈썹을 연신 까딱였다.

기분 나쁜 시선이 내 가슴께를 향했다. 정확히는, 내 가슴팍 앞에 둥둥 떠있는 마력 덩어리를 향한 것이었다.

그사이 마력 덩어리가 세 개로 분열했고. 각기 다른 형상으로 변화를 마쳐 있었다.

“첫째는 단순한 무력의 강화.”

가장 왼쪽의 마력 덩어리는 번개의 형상이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베르페아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보자. 이미 시스템상… 자네의 스테이터스는 최강에 이르렀지. 맞나?”

“공격계 스탯은 그렇지.”

“그래. 그 한계에 달한 스테이터스 수치를, 일시적으로나마 두 배까지 돌파할 수단을 주겠네.”

“……!!”

“첫 번째 보상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뭐, 그런 것일세.”

힘, 민첩, 지력.

이미 99까지 만렙을 찍은 스테이터스의 한계 돌파.

이건 미심쩍게 가늘어졌던 내 눈을, 단숨에 부릅뜨게 만들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두, 배. 두 배라고 했냐?”

특히나 그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솔직히 다른 건 모르겠고, 저 부분만은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혀와 눈이 돌아가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일시적이라고 해도.’

물론 그런 조건이 붙어있긴 하다.

단숨에 스탯 2배 뻥튀기. 다만 효과는 한시적.

포X몬식 영구 진화가 아니라, 디X몬식 일시 진화로 신체를 강화할 수단을 주겠다는 소리인데.

‘단숨에 두 배면 얘기가 달라……!’

공격계 스탯은 1포인트만 높아져도 어마어마한 효율이 난다.

내 스탯이 그대로 두 배가 된다면. 힘, 민첩, 지력이 각각 99씩 상승한다는 소리인데.

‘아주 단순하게 계산해도… 이건.’

지금 상태에서 최소 100배는 강해진다 봐도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100배면 과소평가하는 수준이다.

“지금보다, 100배……?”

그걸 인간이라 칭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 아니다. 인간을 벗어난 초인. 초인을 아득하게 넘어선 괴물.

그리고 괴물을 초월해서, 반쯤은 신에 가까운 무언가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놈도.’

혹시나.

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로 어쩌면?

뱃속 깊이 숨겨놨던 희망까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최종 붕괴의 그놈도……!’

그 거대하고.

내 눈으로 직접 봐도 정체를 알 수 없고.

시야에 닿은 것만으로도 절망이 뼛속까지 스미는… 15차 붕괴의 던전 마스터.

지금보다 100배로 강해진 나라면. 아무리 그놈이 압도적이고 무지막지해도, 마음이 꺾이지 않는 게 아닐까?

“…….”

상념과 호기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간다.

입과 눈을 풀 개방 한 채 뻐끔거리자, 베르페아노가 히죽 웃었다.

“첫 선택지부터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군. 질문하고 싶어 미치겠지?”

“…질문하면. 받아는 줄 거냐.”

“그러려고 직접 배웅까지 나온 거 아니겠나. 대답 가능한 선에서 전부 해소해 주겠네.”

그렇다고 한다.

나로선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다. 나는 궁금한 것을 즉각 이것저것, 최대한 세세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 한계 돌파라는 건, 사용 한도가 있냐?”

“없네. 일종의 스킬 개념으로 생각해도 좋다네.”

“지속 시간은 얼마나 되는데.”

“1카팔리온… 아니지. 자네 세상의 단위로 말해주면, 32분에서 35분? 그 정도겠군.”

약 30분이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데. ‘단숨에 스탯 두 배’라는 성능을 생각하면, 이건 선 씨게 넘을 정도로 길다고 봐도 좋다.

나는 가슴이 점점 두근대는 걸 느끼며, 계속 질문했다.

“사용 후 반동은.”

“없다곤 못하겠군. 시스템에 설정된 한계치가 괜히 한계인 게 아니겠지?”

“…그야 그렇지.”

“한계를 억지로 비틀어 오버클럭을 시키면. 육체에 부담이 와야 정상일세.”

“지금의 나한테도 치명적인 수준이냐?”

“사용 후엔… 그래. 24시간 정도는 충분한 휴식을 권장하는 바일세. 그동안은 스킬은커녕, 몸 가누기도 쉽지 않을 것이야.”

“널널하네.”

걱정했던 반동 부분은 다행히 합격점이다.

어차피 하루걸러 이틀마다 던전을 폐쇄하는 게 내 일과다.

24시간이라는 반동은 절대 짧지 않다. 그러나 얻는 혜택에 비해… 절대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구미가 어지간히 당기나 보군 그래, 응?”

베르페아노가 은근한 시선을 쏘아 보낸다.

표정에서 단숨에 생각을 읽혔다. 그만큼 내가 노골적으로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소리다.

나는 서둘러 안색을 고치고,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그렇게 열심히 질문해 줬는데 좀 미안하네만. 내가 예언 하나 해도 되겠나?”

그러자니, 갑자기 베르페아노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나는 시선을 슬쩍 돌렸다.

어느새 베르페아노는… 여느 때처럼 순수하고 잔혹한,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냐. 갑자기.”

그 특유의 표정. 나는 몰려오는 불안을 애써 억누르고 마른침을 삼켰다.

베르페아노는 그런 내 앞에서, 예언하기 시작했다.

“남은 두 보상의 선택지 있잖나. 그것까지 마저 들으면 말일세.”

“들으면, 뭐.”

“방금 말해준 첫 번째 보상. 단숨에 우선순위가 최하위로 밀릴 것이야.”

“…….”

대체 또 얼마나 X되는 보상들을 준비했길래. 저렇게까지 온 동네 설레발을 혼자 다 치고 지랄일까.

그렇게까지 남은 보상들에 자신이 있나?

‘대체… 뭐길래?’

아니. 아니지.

그러고 보니 ‘스탯 테라버닝 선택지’에 정신 팔려서 깜빡 잊었다.

남은 선택지 둘 중 하나는… 놈이 아까 말해줬지 않은가.

“내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걸 알려준댔나.”

“그래, 그렇지. 그건 두 번째 보상일세.”

베르페아노는 쌈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퐁. 첫 번째 마력덩이가 사라지고, 두 번째 마력덩이가 내 정면으로 맴돌았다. 인간의 뇌 같은 형상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마력으로 구성된 뇌 모형을 빤히 주시하다, 이내 깊은 침음을 흘렸다.

“솔직히 인정한다. 이건 좀 많이 궁금하긴 해.”

“그럼. 누구도 아니고 이 몸이 고심해서 고른 보상이다. 당연히 그럴 테지.”

“그러면 세 번째 보상은 뭔데.”

“던전 붕괴를 종식시키는 법. 허심탄회하게 알려주지.”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턱이 순식간에 쩍 벌어졌다. 얼굴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

한참 후에 가까스로 멍청한 탄성을 내뱉었다.

멍하니 풀린 얼굴로 놈을 응시하자, 베르페아노가 친절하게 재방송을 해줬다

“자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던 15차 붕괴. 죽이긴커녕 저항할 생각조차 좀처럼 못하던 최후의 던전 마스터. 그놈을 없애는 유일한 절차와 방법.”

어느새 두 번째 마력덩이도 사라지고.

눈앞에는… 거대한 옥좌의 형상을 한, 마지막 마력덩이가 어른거렸다.

“그리하여 자네가 사는 땅에서… 다시는 던전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법. 아무런 숨김도 없이 전부 알려주겠네.”

“…….”

“그게 세 번째 보상의 골자일세, 도전자.”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땐.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것은 경악의 시작에 불과했다.

베르페아노가 지치지도 않고… 말을 계속한 것이다.

“자네가 잃어버린 기억에는 말이야? 저주를 푸는 열쇠가 깃들어 있다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