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9화 (139/235)

139화

<101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

―으흠. 시험의 내용도 시간도 훌륭하구만. 역시 자네야.

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깨를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나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돌려, 등 뒤를 빤히 쳐다봤다.

대체 언제부터였지. 마력으로 구성된 베르페아노의 환영이 거기에 있었다.

―이 상태면 뭐,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도 금방이겠구만. 도전자.

놈의 시퍼런 환영이 내 주위를 맴맴 맴돌았다.

파리 쫓듯 놈의 잔상에 손사래를 쳤다. 물론 내 손은 스르륵, 놈의 잔영을 허무하게 가를 뿐. 어떤 물리적 간섭도 불가능했다.

“…쯧.”

저 수다스런 아가리를 막을 수단이 없다. 그게 제일 짜증나는 부분이었다.

나는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놈을 노려봤다.

“중요한 전달 사항 없으면 꺼져라. 베르페아노.”

―기왕 오랜만에 만났잖나. 외로운 늙은이를 그렇게 문전 박대 하면 쓰나.

“네 말대로 곧 내가 만나러 갈 거다. 할 말 있으면 그때 해라.”

―쯧쯔. 사람이 참 예나 지금이나 쌀쌀맞구만. 그리 각박하게 살면 말년에 고생하네. 나처럼 말일세.

입구컷을 시전해 봤지만, 역시나 씨알도 안 먹힌다.

괜히 쓸데없는 대화만 좀 더 늘었군. 나는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긁적이다, 결국 항복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이 뭐냐.”

―뭐 대단한 건 아니네만. 좀 궁금해져서 말일세.

“뭐가.”

―특전은 잘 써먹고 있나?

“…….”

―전에 자네가 골라간 특전. 현자의 눈 말일세. 보아하니 아까도 좀 써먹는 것 같던데. 맞지?

“…그래. 썼지.”

―어떤가. 꽤 괜찮은 물건이지 않나? 응?

양심상 그 말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가히 모든 스킬 중 원탑급으로 잘 써먹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상대가 수다스러운 이세계 사이코 틀딱이라도,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솔직히 좋다. 아주 쓸 만해.”

―하하핫. 그럴 줄 알았어. 내 자네에게 괜히 그걸 추천한 게 아니라니까.

“…그래.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이제 됐냐.”

―아아. 잠깐, 잠깐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게.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베르페아노가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날 제지했다.

놈이 한동안 진득하게 날 쳐다보다가, 히죽.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만약 자네가 이번에도 내게 도달하면 말일세. 이번 보상도 기대해도 좋아.

“…뭔 얘기 하나 했더니.”

뜸 들인 것치곤 맥없는 소리다.

내 경험과 이세라의 경험담을 미루어 봤을 때. 베르페아노가 줄 수 있는 보상의 선택지는 어차피 딱 세 개뿐이다.

“그래봐야 천칭의 눈이랑 여신의 눈. 둘 중 하나 아닌가? 현자의 눈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미래를 보는 천칭(天秤)의 눈.

모든 정보를 꿰뚫는 현자의 눈.

그리고 모든 허위와 기만, 거짓을 간파하는 여신의 눈.

―아니. 아니야.

그런데 베르페아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내 말을 부정했다.

놈이 내 눈을 빤히 주시하며 계속 말했다.

―그건 초회차 기준의 얘기지, 이 사람아.

“…초회차 기준이라니.”

―내 보상을 처음 받는 이에겐 자네 말이 맞아. 반드시 그 셋 중 하나를 준다.

“그 말은…….”

―두 번째 방문자에겐 좀 다르다네. 자네의 선택에 따라 다른 보상을 받을 수도 있어. 전보다도 훨씬 값지고, 특별한 보상을 말이야.

“……!”

나는 부릅뜬 눈으로 베르페아노를 노려봤다.

그리고 내 눈에 서린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을, 놈이 읽어냈다.

―궁금한가 보구만. 그렇지?

“…그야. 뭐.”

―뭐, 아무튼 그렇다는 걸세. 동기 부여가 좀 될까 해서 찾아와 봤네.

베르페아노는 대수롭잖게 중얼거렸고. 이내 히죽, 아까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최후까지 머금었다.

파지직! 놈의 신형이 빠르게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2차 시험으로 들어가 보자고.

우르릉!

어디선가 웅장한 기동음이 울렸다. 그리고 직후, 키리리릭! 귀를 찌르는 격철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으음.”

‘세상을 뒤흔들었다’라는 건 비유가 아니다.

푸른 하늘이 손으로 구긴 것처럼 이지러지고, 땅은 미친 듯이 갈라졌다. 공간의 일그러짐에 따라 나무와 풀 같은 지형지물도 종잇장처럼 오그라들고 있었다.

[공간 재구성을 실시합니다.]

공간의 재구성.

제2시험에 진입함에 따라, 큐브는 내부의 스테이지를 새롭게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2시험을 선정할 때까지, 잠시 대기해 주십시오.]

철컹! 쿠르르륵!

무수한 격철음과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심장을 때린다.

내 몸이 슬쩍 공중으로 떠올랐고. 공간의 재구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어느새 주변에 가득했던 수풀과 나무들은 어디 가고, 벽면에 수많은 빗금이 그어진 황량한 큐브 내부의 정경만이 남았다.

[제2시험의 선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내 눈앞에는 그런 패널이 떠올랐다.

동시에 큐브가 한 차례 쿠구궁! 격렬한 진동을 내뿜었다.

지금부터 일어날 거대한 지각 변동을 암시하듯이.

[제2시험에 적절한 필드를 구성합니다.]

그다음은… 그야말로 거대한 큐브 퍼즐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키기긱! 키리리릭! 천장과 바닥이 수시로 뒤집히고, 좌가 우가 된다.

그런가 하면 벽의 일부 배열만이 전후좌우로 종횡무진 회전하기도 했다.

“…으음.”

그 아스트랄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약간 어지럽다. 정신 나갈 것 같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변화가 끝나길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필드 구성이 완료되었습니다.]

구성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삐빅. 나는 패널음을 신호삼아 눈을 천천히 떴고.

“…쓰으. 춥구만.”

휘오오오오!

어느새 시야를 하얗게 뒤덮은 눈보라 속에서. 까마득한 설산의 중턱 어딘가에 서있던 내가 중얼거렸다.

[제2시험 구역―한파지대]

때마침 패널이 튀어나왔다.

보이는 그대로, 제2시험의 필드는 한파가 몰아치는 설산 콘셉트인 듯하다.

“으으음.”

나는 눈을 한껏 가늘게 뜨고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세찬 눈보라 덕에 시각 정보가 많이 제한됐다. 한 술 더 떠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기고 있다.

나는 양팔을 부비는 한편. 황급히 스킬부터 발동했다.

[스킬 발동: 냉혈의 한(恨)]

스스슷.

창백한 마력광이 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그러자 한기가 순식간에 잦아들었지만. 대신 단전 부근에서 공허한 기운이 맴돌며, 신체 말단의 감각이 약간 둔해졌다.

[지속 스킬 ‘냉혈의 한’의 효과를 받고 있습니다.]

[한기 관련 상태 이상에 모두 면역됩니다. 발동 중에는 민첩 스탯의 효율이 소폭 저하됩니다.]

무상으로 화염 저항을 높여주는 <염제의 가호>와는 달리, 한기 저항을 높여주는 <냉혈의 한>은 약간의 디버프를 동반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가. 이름부터가 한쪽은 ‘가호’고, 다른 한쪽은 ‘한’이니까.

‘뭐 그리 억울하다고, 보상 스킬까지 꼬장을 피우냐, 설녀.’

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게 죽어가며 이 스킬을 뱉고, 한을 품은 원주인. 제31던전의 던전 마스터 ‘냉혈의 아스트라에아’를 향한 의미 없는 볼멘소리다.

[큐브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잡생각을 하는 사이 삐빅. 어김없이 패널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이번에도 유심히 한 번 읽어봤다.

[제2시험―유산 탈환]

[‘화이트 스토커’의 습격을 피해, 설산 정상에 잠든 옛 마녀의 유산을 탈환하십시오.]

[완료 보상: 제3시험으로의 퀘스트 진행]

그리고 끝까지 읽은 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만.”

산 정상까지만 등반하면 끝. 일단은 퀘스트의 목표점이 뚜렷한 것이 만족스럽다.

패널에 언급된 ‘화이트 스토커’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만…….

‘뭐, 몬스터든 사람이든. 둘 중 하나겠지.’

피하라는 걸 보면, 내가 마녀의 유산을 가져가는 걸 막는 세력일 게 뻔하다.

미안하지만 이건 거절하겠다. 딱히 피해 다녀줄 생각은 없었다.

‘정상으로 직진한다.’

키잉!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냈고. 번득이는 전광을 바짝 깃들였다.

신형을 약간 낮춘 채, 정상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막는 게 있으면…….’

죽여버릴 뿐이다.

그게 화이트 스토커든 그냥 스토커든.

* * *

결과적으로 말해서, ‘화이트 스토커’는 몬스터의 일종이었다.

이 설산에 집단을 이루고 사는 몬스터 같은데. 나와 만날 때마다 집요할 정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키에에에엑!

―키오오오!!

다른 던전에서 출몰하던 ‘자이언트 예거’와 비슷한 생김새다. 상상의 동물 ‘예티’와 비슷한 털북숭이 거인.

단순 무력은 자이언트 예거보다 약간 딸렸지만 성가시기론 한 수 위였다.

―케에에에에엑!!

이놈들은 무리의 일부가 무참히 살해당해도 공포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만나면, 반드시 누군가는 죽어야 끝났다.

“괜히 오래 걸렸네. 그 새끼들 때문에.”

말할 것도 없이, 죽는 건 화이트 스토커였다.

그렇게 나는 약간의 소요 사태 끝에 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 무너져 가는 외딴 오두막 안에서, 백골이 된 마녀의 시신을 발견했다.

[제2시험에 통과했습니다.]

풍화된 백골 시체가 소중히 껴안고 있던 보물 상자를 여는 것.

그것을 마지막으로 제2시험은 끝났다.

[제3시험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 1분]

그 뒤로는 같은 과정의 지루한 반복이었다.

어김없이 베르페아노의 환영이 등장해 시답잖은 개소리를 왈왈대고. 나는 거기에 대충 맞장구를 쳐준다.

그러다 보면 쿠르릉! 다시 한번 큐브가 전율했다.

[제3시험의 선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제3시험 구역―할센의 고성(古城)]

3차 시험 필드는 할센의 고성. 이건 내가 전 회차에서 해본 적이 있는 필드였다.

눈에 익은 스테이지에 조금 반갑기까지 했다.

“일단 하나 날로 먹었고.”

철커덕.

나는 인벤토리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며, 쾌재를 불렀다.

할센의 고성은 언데드와 함정이 득실거리는 저주받은 폐성을 탐험하고. 중간 보스와 최종 보스를 죽이면 되는 단순한 구성이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꺼낸 은탄용 권총… ‘콘스탄트’가 특효였다.

“뒤져. 전부.”

타타타탕!!

사방을 빽빽이 메운 언데드. 나는 조준할 것도 없이 권총을 사방팔방으로 난사하기 시작한다.

뭐랄까. 핵 앤 슬래시 게임을 하는 느낌으로 수월하게 돌파했다.

―아, 아아. 주인…님.

그러던 도중에 만난 특수 언데드 하나.

빗자루와 연결된 특이한 칼날을 휘두르는 메이드복 차림의 언데드, 중간 보스의 심장에 총알을 미친 듯이 난사해 숨통을 끊었고.

―나는, 이곳, 을… 지켜, 야……!

마지막은 ‘엑시큐터’라는 이름의, 거대한 근육질 언데드의 미간에 총알을 한 방.

최종 보스는 은탄의 정화 마력에 의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제3차 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그것으로 3차 시험은 종료다.

그 뒤로 역시나 나타난 베르페아노한테 훈화 말씀 잠깐 듣고. 곧장 다음 시험으로 이어졌다.

[제4시험의 선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제4시험 구역―풍랑 해역]

풍랑 해역의 시험.

이것도 처음 보는 시험이었다만. 역시나 특별히 꼬여있는 기믹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간단히 말하면 해상 전투의 시뮬레이션이었다.

―사격! 함포를 쏴라!!

―저 살덩이 놈을 수장시켜 버려!! 카하하핫!!

내가 탄 소형 범선이 풍랑 위에서 위태롭게 휘청거렸고. 주위로 엄청난 수의 유령선 함대가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험이 시작되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 유령선을 전멸시켜라. 그것이 이 스테이지의 골자였다.

“…별게 다 있네, 스테이지.”

일단 내 첫 번째 감상은 그거였다.

배에 내장된 함포를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 퀘스트의 추천이었다. 대 유령선 전용의 퇴마 포탄이 장전되어 있다나 어떻다나.

하지만 나는 그 명령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어어어……!

―흐아아아악!!

콰앙, 콰콰쾅!

전 시험에서 썼던 은탄 권총을 쏴보기도 하고. 라이트닝 헬릭스로 지져보기도 했는데. 벼락이 기본적으로 빛 속성 스킬이라 그런가. 라이트닝 헬릭스가 의외로 유령선원들 때려잡는데 특효였다.

“역시… 조강지처가 좋긴 해?”

파지지직!

풍랑이 휘몰아치는 시커먼 바다 위. 수백 발의 굵직한 뇌전 쐐기가 작렬한다.

날카로운 섬광이 번득일 때마다, 유령선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그아아아악!!

―안 돼. 이렇게, 허무하게 가라앉을 수는……!

전형적이고 진부한 유언과 함께 사라져 가는 유령선의 선장들.

마침내 모든 선장들이 강렬한 번갯불에 휩싸여 분쇄되었다. 그러자 유령선은 신기루처럼 고요하게, 바다 밑으로 천천히 수장되었다.

[제4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그렇게 제4시험까지 스무스하게 통과.

별다른 우여곡절 없이, 나는 마지막 시험을 목전에 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