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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4화 (134/235)

134화

<1004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

수아는 그렇게 그날도, 우리 집에서 거의 하루 종일 비비다 갔다.

날이 꼴딱 새고, 수아가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

“수아야. 잠깐.”

현관문 앞에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덜컥. 손잡이를 잡았던 수아가 퍼뜩 뒤를 돌아봤다.

“어, 네? 왜요?”

“…그게.”

불러놓고 잠깐 주저했다.

이 질문을 해도 괜찮은 건가. 그런 생각이 덜컥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민해서 어쩔 텐가. 나는 결국 마음에 담아뒀던 질문을 내뱉었다.

“혹시 이브랑… 다음 약속 잡아놨냐.”

내내 궁금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수아는 잠깐 눈을 크게 뜨나 싶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다음에는 이브랑 쇼핑도 같이 하기로 했어요.”

“…쇼핑. 그러냐.”

“네네. 전에는 제가 입던 낡은 옷들만 줬잖아요? 이번에 아울렛이라도 나가서, 이브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들 좀 몇 벌 사주려고요.”

“그렇구나.”

“으히히. 벌써 기대되네요! 이브가 있죠, 생각보다 저를 엄청 잘 따라요! 사이좋은 여동생이라도 생긴 느낌이라니까요?”

“그건… 잘됐네.”

무미건조한 반응의 연속.

솔직히 최초의 긍정만 제대로 들었다. 그 뒤론 거의 대부분이, 한쪽 귀로 들어가서 한쪽 귀로 다시 나갔다.

“오빠, 괜찮아요?”

그리고 눈치 빠른 수아가 내 이변을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

나는 퍼뜩 표정을 고쳤지만. 이미 때는 한참 늦었다.

“괜찮아.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생각이요. 이번엔 또 무슨 생각?”

“…무슨 생각이냐면…….”

“지금 저한테 어떻게 거짓말할지?”

“…….”

“오빠. 이브랑 싸웠어요?”

똑같이 대답은 못했지만, 이번엔 넋이 나가서 그랬다.

아무리 눈치가 빠르다지만. 이 정도면 삼신할머니 수준인데. 어이가 없다 못해 좀 무섭다.

수아는 내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휴. 그럴 줄 알았어요. 싸웠구나?”

“…그, 어떻게……?”

“어떻게는요. 이브도 오빠도 뭔가 하루 종일 데면데면한 게, 딱 봐도 이상했잖아요!”

딱 봐도 이상했다고.

아니. 천만에. 그럴 리가 없었다.

적어도 내 눈으로 봤을 땐, 이브는 평소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답지 않게 굉장히 연기를 잘한다고 감탄할 정도였지.

“게다가 이브는 둘째 치고. 오빠는 묘하게 저까지 피하는 느낌이었죠?”

그것도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했다.

실제로 나는, 의식적으로 수아에게서 약간씩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가 그랬나.”

“그랬다구요.”

이쯤 되면 이 악물고 부정하는 것도 추해지는 수준.

나는 한숨을 대놓고 내쉬었다.

“후우.”

일종의 항복 표시였다.

수아도 그것을 캐치했는지,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본론을 꺼냈다.

“이브랑 화해하는 데 좋은 방법. 알려줄까요?”

심란한 거랑 별개로, 그건 좀 솔깃하다.

알아두면 당장 다음 생에 쓸모가 있을 내용이다.

나도 모르게 눈빛을 번쩍 빛냈고. 수아에게 성큼 다가갔다.

“꼭 좀 알려줘. 부탁한다.”

“어… 네, 네. 알려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붙지는 마시고.”

갑자기 내 태도가 돌변하자 부담스러웠나. 수아가 몇 발자국 황급히 물러났다.

이내 그녀가 크흠, 사뭇 귀여운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브는 딸기우유를 좋아하죠? 저 이상으로 엄청 좋아하던데.”

“그렇지. 그건 맞아.”

“그리고 이브는 저랑 죽이 잘 맞잖아요. 화났을 때 풀어주는 방법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음?”

“그러니까 딸기우유를 선물로 주세요. 진심 어린 사과랑 함께!”

수아가 해맑게 웃으며 솔루션을 내놓았다.

내가 표정을 뒤틀며 수아를 빤히 쳐다봤지만. 그녀의 미소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내 귀에 이상이 없는 걸 깨닫자, 곧장 수아에게 되물었다.

“그게 끝?”

“네. 끝이에요. 이러면 이브랑 바로 화해할걸요?”

“…그 작전이 먹힐 확률은?”

“으음. 제 생각엔 최소 80퍼센트 이상!”

“그, 어떻게 그렇게까지 확신하지?”

거기선 잠깐 수아가 뜸을 들였다. 그러다 이내 포근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브도 지금요. 오빠랑 화해하고 싶어 하니까요.”

“…….”

이번엔 내가 뜸을 들일 차례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브가 직접, 너한테 그렇게 말했냐?”

“아뇨. 그냥 분위기로 때려 맞춘 거죠 뭐.”

“…그렇구나.”

“그래서 80퍼센트예요. 제가 잘못 봤을 확률이 20퍼센트!”

“하.”

네 눈이 제대로 됐다면. 딸기우유 작전이 먹힐 확률은 100%라는 소리냐.

“고맙다, 수아야… 정말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는다고 노력했다.

직후 수아가 폭소한 것을 보니, 제대로 되진 않았던 것 같다.

“푸하하! 표정이 그게 뭐예요! 완전 웃겨,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자지러질 듯이. 진심으로 즐겁게 웃는 수아였다.

“…….”

그것을 보니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지만, 수아는 정신없이 웃느라 그것까진 못 봤다.

다른 것보다도 그게 다행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월미도로 갔다.

이브는 없었다. 그녀는 내가 ‘혼자 갔다 오겠다.’라고 말하자, 지나칠 정도로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여 줬다.

“그래……? 응. 그래. 그렇겠지, 아무래도.”

그래. 그야말로 지나칠 정도였다.

어제까지의 그 찰거머리 같던 이브가 거짓말 같을 정도.

이건 뭔가가 이상했다.

“잘 갔다 와, 아빠. 뭐… 내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하겠지만.”

마지막에 보여준 씁쓸한 미소엔,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것인가.

웃으면서도 슬퍼 보이는 그 표정은… 어제 하루 동안 수아한테 특훈이라도 받아온 것인가.

왜 그녀는 점점, 수아에게서 안 좋은 것만 닮아오는 것인가.

“…….”

심란한 마음과는 별개로. 예정된 시각에 게이트는 붕괴했다.

넋 나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어……?”

“저, 저, 저거...!”

“게이트……? 게이트 아냐?!”

파지지직!

놀라는 그들의 머리 위로, 아무런 전조나 예고도 없이. 무수한 대나무 다발들이 게이트의 균열을 비집고 소환되었다.

“어……?”

“대, 대나무? 저거 대나무 맞아?”

사람들은 일단 등장한 물건의 정체를 알아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다. 그렇게 되물을 시간, 놀라고 있을 시간에 도망쳤어야 했다.

직후 대나무들이 일제히, 쉬쉬쉬쉭! 하늘을 빽빽하게 가르며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뭐, 뭐야! X발!!”

“떨어진다! 피해!!”

투두두두두!

우왕좌왕하는 인파들을 향해 대나무 폭격이 강타했다.

“끄아아아악!!”

“무, 무슨… 커허억!!”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또한 빈틈없이 빽빽하다. 어디로도 도망칠 곳이 없다.

그것은 대나무의 폭우. 그 자체였다.

“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콰쾅, 콰과과광!

비명과 절규. 그리고 폭음의 삼중주.

대나무가 지면에 박힐 때마다, 폭음과 함께 피 보라가 솟아올랐다. 시퍼런 대나무 줄기가 핏방울로 붉게 물들어간다.

[망향(望鄕)의 검림(劍林)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내 눈앞에서 테마파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피와 살점을 흠뻑 머금은 대나무 삼림. 그리고 그 주위로 스산한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하는 그 순간.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그런 패널이었다.

[검림을 떠도는 수라의 잔영들을 찾아내고, 베어내십시오.]

[수라의 잔영이 하나라도 남아있는 한. 망집의 대숲은 점점 세를 불려나갈 것입니다.]

[남은 수라의 수: 42개체]

그런 의미 불명의 패널들도 이어서 떠올랐다.

아니지. 하도 많이 겪어봐서 의미 불명이라 하기도 머쓱하다. 무슨 의미인지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어쨌든 대나무가 보일 때부터 짐작은 했다만…….

“꽝이네. X발.”

딱 봐도 내가 기대하던 에티의 던전은 아니다.

시스템 패널에서도 잠깐 나왔지만. 이번에 붕괴한 던전의 정체는 제14던전. ‘망향의 검림’이라는 비선형 던전이었다.

“꺄아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재개되었다.

빽빽한 대나무 너머의 어딘가였다.

“뭐, 뭐야! 왜 이래! 왜 이러는데요!!”

“살려줘! 살려줘어어어!!”

자욱한 안개를 뚫고 비명 소리, 사람의 살 찢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침음을 깊게 흘렸다.

‘벌써 시작됐구나.’

본격적으로 던전 마스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나무 폭격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극소수 일반인들을 살육하고 있는 것이다.

“후딱 치우고. 리셋하자.”

키잉! 블라이스의 단검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굳이 붕괴한 게이트를 닫고 리셋할 이유는 없지만. 이 던전은 아직 기대할만한 클리어 보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굳이 안 닫고 갈 이유도 없었다.

잠깐 시간 써서 가챠 한 번 돌린다고 생각하자.

“…간다.”

스르륵.

손을 뻗어 자욱한 안개를 헤집고, 대나무 숲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삐빅. 작달막한 패널이 튀어나와 무언가 통보해 준다.

[검림에 진입했습니다. 망향의 수라들이 당신의 존재를 포착했습니다.]

[안개의 마력에 의해 대숲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수라를 베어내 선향의 안개를 흩어내십시오.]

그것이 내게 내려진 시스템의 명령.

이건 일종의 퀘스트 던전 같은 건데. 적힌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따지고 보면 간단한 얘기였다.

“나오는 족족. 다 죽이라는 소리지.”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는 찰나.

파팟! 내 양옆에서 대나무의 수해를 뚫고, 두 개의 신형이 빠르게 쇄도해 온다.

“……!”

이성보단 본능의 영역이었다.

빠르게 두 번. 양쪽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채챙! 찢어지는 금속음과 파쇄음이 동시에 울렸다.

―크욱……!

―그윽.

습격자들에게서 얄팍한 신음성이 흘러나온다.

나는 신형을 극한까지 낮춰 전투태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튀어나온 면면들을 빠르게 살폈다.

―…….

―…….

온통 시커멓고 하늘하늘한, 동양풍 옷차림의 괴한들.

한 명은 남자에 한 명은 여자. 실루엣의 끝자락이 불꽃처럼 일렁거렸고. 시커먼 복면 위로 드러난 눈가는 굵은 핏줄이 흉하게 자글거렸다.

나를 쳐다보는 두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어 부릅뜬 상태.

―그우… 하아. 카학.

―히… 히이……. 히힉……!

그리고 가려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

인간의 그것이라기보단 극도로 흥분한 짐승에 가까운. 야생의 숨결이었다.

―돌아, 가야 한다……. 어머니. 어머니가 있는, 그곳으로.

―아아. 선향……. 선향의 빛이여……!

놈들이 연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싶더니.

이내 꾸드득. 각자 꼬나든 낡은 외날 검을, 한껏 치켜들었다.

―돌려보내 줘. 나를… 그곳으로! 돌려보내 줘어어!!

―아아… 아아아악! 죽어어어!!

투두두두!

가로막는 대나무들을 거칠게 썰어버리며, 두 사람… 두 마리의 수라가, 다시금 내게 저돌맹진 해왔다.

나는 놈들에게 단검을 치켜들고, 중얼거렸다.

“보내준다. 지금 당장.”

거기가 너희들이 말하는 ‘선향’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보내줄 수 있는 데는 지옥뿐이다.

“후우.”

짤막하게 숨을 삼키고, 그대로 거둔다.

이후의 절차는 평소와 같다.

“……!”

콰쾅! 광풍이 대나무 사이를 휩쓴다.

‘비약’ 스킬을 발동. 순식간에 일점으로 파고들어가, 먼저 왼쪽의 여자 쪽을 베어냈다.

―끄욱?!

채챙!

단검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여자가 든 칼이 동강 나, 주변의 대나무에 박혔다.

단숨에 무력화. 들어 올린 단검을 순식간에 다시 내리친다.

“하나.”

푸화악!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혈선이 그어졌다.

쩌적. 정확히 두 조각 난 적이 장기 다발과 함께 바닥에 엎어진다.

―그… 어, 컥……!

단말마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는 우측으로 지면을 박찼다.

―윽!!

남성형 수라도 그간 본 게 있다. 그러니 내 기습에 가까스로 반응해 왔다.

반응해 왔지만. 그래봤자 늦었다.

―크아……!!

서걱.

놈의 오기에 찬 고함이 도중에 끊어졌다.

내가 목을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컥.

털퍼덕.

멀찍이 굴러간 수급에서 단말마가 흐른다.

파스스! 절단된 두 괴한의 신형이 단숨에 부서져 내렸다. 마치 다 타고 남은 재가 되듯이, 허연 가루가 되어 안개 속으로 홀연히 흩어진다.

“후우.”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나는 불쾌감에 인상을 찌푸렸고. 곧장 손을 들어 얼굴을 닦아냈다.

철퍽. 방금 놈들에게서 튄, 피를 닮은 질척한 무언가가 손에 잔뜩 묻어나왔다.

[남은 수라의 수: 40개체]

그리고 삐빅. 패널이 건조하게 결과를 통보해 줬다.

총 42마리의 수라 중 방금 2마리를 베었다. 그래서 40마리 남았다.

대충 그런 의미였다.

“가볼까. 계속.”

뱉어놓고 아차 싶어 입을 막았다.

이놈의 혼잣말. 시도 때도 없이 나온다. 진짜 미쳐버리겠네.

뭐, 어차피 이브도 없겠다. 아무렴 어때.

‘오늘까지만 그냥 하고, 내일부터 끊자.’

흡연자들 금연 선언 하듯. 일단 내일로 미뤘다.

저벅저벅. 안개를 뚫고, 나는 점점 대나무 숲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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