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3화 (133/235)

133화

<1004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

1차 붕괴는 생각한 그대로 흘러갔다.

붕괴한 99던전이 다시 닫힐 때까지.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소리다.

―키에에에……!

“아가리.”

푸확! 퍼억! 뻐버벅!

게이트가 붕괴하기 무섭게 드래곤들이 쏟아져 나왔고. 포효 한 번 제대로 내지를 틈도 없이, 나한테 하나씩 대가리가 터져나갔다.

―키오오오오!!

―키이… 키에에에엑!!

지상을 향해 흑염을 내뿜던 칼라마이트.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씹어 삼키던 조르시카.

그 외 각양각색의 드래곤들이, 제대로 난동을 피워보기도 전에 비명과 함께 스러져 갔다.

[제99던전 ‘대격변지대’의 던전 마스터, ‘멸망을 부르는 용’들이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제압은 순식간이었다.

2분 초반대. 이번에도 신기록이다.

작정하고 빠른 몰살에 온 신경을 쏟았다. 당연히 그만큼 인명 피해나 물자 피해도, 전생을 통틀어 경이로운 수준으로 적었다.

‘레드 저거너트의 주목도는 당연히 줄어들겠지만.’

이번만은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번 세계는 정확히 이틀 뒤, 내 의지로 확정적으로 리셋된다.

“…있지도 않을 뒷일 따위.”

생각할 필요 없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 * *

회귀 초반엔 유독 불쾌한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이유는 모른다. 앞으로 하려는 짓이 ‘무한으로 즐기는 명륜진사 자살쇼’라 그런가?

악몽의 내용을 생각하면… 그것도 좀 있는 것 같다.

“끄으.”

어쨌든 오늘도 나는 악몽을 꿨고. 불쾌한 신음을 한가득 흘리며, 침대에서 어기적어기적 일어났다.

“…몇 시냐.”

햇빛이 드문드문 비치는 블라인드 너머를 살피고. 반사적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2031년 11월 30일. 오후 1시 19분.

그런 문자열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도 잤네.’

어제 용산에서 드래곤 때려잡고. 집 오자마자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수아를 달래줬다.

그런 뒤엔 딱히 피곤하지도 않지만,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바로 자버렸는데…….

‘한나절을 처잘 줄은 나도 몰랐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터벅터벅, 힘없이 거실을 가로질렀다.

덜컹.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알싸한 청량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푸흐.”

물통 반쯤을 단번에 원샷 한 뒤 날숨을 뿜어냈다.

악몽으로 무겁던 머리가 한층 정돈된다. 정돈된 머리를 본격적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던가?”

글쎄. 아마 딱히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내일 있을 월미도 붕괴를 끝으로 리셋이 확정된 회차다.

그러니 오늘이 사실상 최후의 휴일인데. 하루 안에 해결될 만한 중요한 일 같은 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굳이 꼽자면… 이거.’

버스럭. 주머니를 괜히 뒤적거렸다.

묵직한 존재감의 맨들맨들한 돌멩이가 손끝으로 느껴졌다.

스킬 재머. 전생에서 계승해 온 그놈이었다.

“…이게 사실상, 유일한 서브 퀘스트(?)인데.”

이 재머를 오원태에게 분석시키는 것.

그래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추가 정보를 수집하는 것 정도?

‘현자의 눈으론 딱히 정보가 안 나왔지.’

그냥 물음표투성이였다.

주저앉은 광대의 상태창과 비슷한 느낌이다.

역시 다른 건 모르겠고. 이 ‘스킬 재머’ 역시, 던전의 비밀과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제작자인 애덤 크로스도 공인했지. ‘던전의 비밀을 엿본 자만이 흉내 내는 기술’이라고 그랬던가.

‘다만 이건… 하루 이틀로는 못 끝낼 일이라 문제고.’

던전발 아티팩트 조사는 고고학과 비슷하다고 들었다.

정확한 아이템의 성능과 본질을 분석하고, 최종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던전 생물의 검사처럼 하루 이틀이면 뚝딱,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

‘오원태의 주전공도 아니던가, 참.’

오원태는 던전 생물 연구 쪽에나 박사님이다. 그러다 보니 던전 아티팩트 조사 쪽에 힘을 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자살런 도중에 이걸 처리하기엔 무리가 있다.

“우응. 아빠아. 일어났네?”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차, 비몽사몽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이브였다. 그녀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졸린 눈을 연신 비비고 있었다.

“후아암. 뭐 하고 있어? 거기 우두커니 서서는.”

이브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물어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컵에 물을 따랐고.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냥 좀.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헤에. 생각……. 아, 고마워.”

꼴깍꼴깍. 이브가 물을 받아 쭉 들이켰다.

목이 말랐던 것인가. 마치 딸기우유처럼 한참을 마시다가, 이내 컵에서 입을 뗀다.

슬쩍, 입가를 닦은 그녀가 나를 올려다봤다.

“아빠. 오늘도 엄마 오려나?”

이브가 대뜸 그런 걸 물었다.

나는 잠깐 고민해 봤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겠지. 전에도 항상 왔으니까.”

“흐응. 몇 시쯤 오는데?”

“그때그때 약간씩 달라. 그래서 확답은 못 해주겠다.”

“그렇구나. 어쨌든 무조건 오긴 한다는 거지?”

“그렇지.”

“으응. 알았어. 그러면 됐어!”

이브는 안심한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수아가 온다는 말에 안심했다. 말인즉슨, 이브가 수아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나는 미간을 슬쩍 모았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냐, 이브.”

“으응. 저번에 있잖아? 엄마랑 약속을 했거든.”

“…약속?”

“응. 나중에 엄마가 다시 찾아오면, 나 머리 땋아주기로 했어.”

이브가 은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사라락. 그녀의 손끝에서 하얀 비단실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매일 내가 리스토레이션 스킬로 관리는 해주고 있는지라, 그녀의 머리칼은 부드러우면서도 윤기가 흘렀다.

“봐봐. 나 머리가 엄청 길잖아?”

“…그렇긴 하지.”

“응. 요즘은 가끔 땅에도 막 쓸려. 좀 불편하긴 했어, 안 그래도!”

신나서 떠벌거리는 이브.

최대한 내색을 안 하려는 게 보이지만. 수아와의 다음 만남을 상당히 기대하는 것도, 내 눈엔 훤히 보였다.

“…….”

나는 그런 이브의 모습에 입을 콱 닫았고.

그대로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빠? 왜 그래, 갑자기?”

이변을 느낀 이브가 되물을 때까지, 그 어색한 침묵은 계속되었다.

나는 그제야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얼버무렸다.

“아니. 아니다. 그냥. 좀.”

“뭘 맨날 그냥 좀이야. 표정만 봐도 그냥 좀이 아닌데?”

“…….”

“뭔데? 어디 아파, 아빠?”

굳이 꼽자면 위장이 좀 아프다.

이브가 저렇게나 기대하는 현생의 수아가, 내일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가 직접, 내 손으로. 그렇게 만들 예정이다.

‘상황도 그렇고, 기분도 그렇고… 최악이군.’

안 그래도 이브는 내 자살을 극구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살런을 강행하면? 아마 다음 생에 눈뜨자마자, 곧장 이브의 불같은 반발이 들어오겠지.

그것까진 나도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이제부터라도, 이브랑 수아가 친해지는 걸 막아야 하나?’

그런데 이브가 이렇게까지 수아와 친해지는 건 예상 밖이다.

이러면 나중에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상상 이상으로 커진다. 어쩌면 저번 가출 사태 이후로 최악의 냉전이 재발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더 큰 문제점이 하나.

친해지는 걸 막고 싶어도, 그럴 수단조차 없다는 거다.

‘뭐라고 말할 건데.’

나 어차피 곧 자살함.

그래서 지금의 수아랑은 친해져도 소용없음.

그러니까 개조또 부질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얌전히 이 몸의 자살런이나 구경하시지.

이렇게 말할 건가?

‘무슨. 장난하나.’

그걸 지금 이브에게 밝혔다간, 자살런의 시작부터 쉽지 않아진다.

틀렸다. 이브에게 수아와 거리를 두게 할 작전이 생각나지 않는다.

“뭐야. 왜 또 입을 다물어, 아빠!”

“…….”

이브는 심통이 잔뜩 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그럼에도 내가 딱히 반응이 없자, 그 화난 표정도 점점 식어간다.

“진짜 말 안 할 거야?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이브가 전에 없이 무표정하게 날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피식, 체념 어린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역시 아빠는 말이야. 아직 나를 못 믿는구나. 그렇지?”

“아니. 그건.”

“아니긴. 전에 아빠가 그랬잖아. 아빠는 여전히 나를 전혀 모르겠다면서?”

“…그건.”

“모르니까 믿지 못하는 거고. 믿지 못하니까 말을 안 해줘. 그런 거잖아?”

“…….”

“거짓말쟁이. 전에는 날 의지한다고 했으면서.”

이브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다.

나는 반쯤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했다. 그녀에게서 도망치듯이.

“아빠. 아빠는 내가… 무서운 거야?”

흠칫. 그 물음에 어깨를 크게 떨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지.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서 몇 걸음 물러난 상태였다.

그러자 오히려 이브 쪽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최소한 거기에선,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했는데.”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브의 행태를 빤히 주시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 * *

예정대로 수아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왔어요, 오빠!”

“…그래. 잘 왔다, 수아야.”

여러 일이 있었고. 앞으로 또 여러 일이 있을 예정이지만. 나는 최대한 평소와 같이 수아를 맞이했다.

“이브! 잘 있었어? 나 왔어!”

“…아, 응. 안녕, 언니.”

이브도 처진 목소리를 최대한 숨긴 채 태연함을 연기했다. 기껏 찾아와 준 수아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겠지.

성숙해진 이브의 배려심에 혀를 내두르는 한편, 그녀가 저런 선택을 하게 된 상황 자체가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은데.’

어차피 이번 생은 곧 폐기될 회차다.

내가 할 모든 행동은 곧 ‘없던 일’이 된다. 그러니까 수아고 나발이고, 인간관계가 파탄 나도 아무 상관은 없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만.’

당연히 절대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대하는 것만큼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하물며 그 대상이 강수아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건 그냥, 내 쓸데없는 고집이다.

“오빠. 오빠가 죽으면요.”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저주일지도 모른다.

아주 옛날의 언젠가. 수아가 내 머릿속에 끈질긴 저주를 심어놓았다.

“오빠가 죽어서 시간이 되돌아가면… 지금 여기 있는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 철학적인 문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537번째 오빠와 함께했던 저는… 역시 사라져 버리는 걸까요?”

꼴에 수아도 철학과라 이건가.

그녀는 죽어가는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나는 내가 죽을 때마다 강제적으로 떠올리게 됐다.

“아니면 혹시요. 오빠가 되돌아간 시간선이랑은 또 다른 시간선에서, 지금 이 세상도 계속 이어지는 거 아닐까요?”

내가 죽고 난 뒤의 세계.

멸망과 절망만이 남은, 남겨진 이들의 세계.

그런 끔찍한 세계가 실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만들었다.

“근데요. 저는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때 수아는 울고 있었다.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믿어줬고. 최종 붕괴 직전까지 함께 살아남고. 마침내는 몬스터에게 사지가 절단된 채 처참하게 널브러진 그녀가.

초점 없는 눈에서 피 섞인 눈물을 흘리며, 갈라진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의 제가 이렇게, 죽어버린다 해도요. 오빠랑 같이 살아남은 마지막 한 달이, 완전히 없었던 일이 돼버리는 건… 싫어요. 저는. 정말로요.”

절대 잊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후자의 가설을 믿고 싶다고 했다.

수아는 내가 죽고 난 뒤에도, 그 회차의 시간선이 어딘가엔 존속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 돼.”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 말엔 절대로 동의 못한다.

그래서 그때도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런 세상은… 있으면 안 된다. 수아야.”

돌아가면 그만이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 X같은 세상아. 어디 계속 그래봐라. 자살하면 그만이야.

그때까지의 나는 그런 마인드였단 말이다.

“…미안하다.”

그래서 수없이 꼴아 박고.

화나면 아무 데나 화풀이 해버리고.

심지어 수아 앞에서 보란 듯이 자살해 버렸다.

무수한 과거의 내가 일거에, 뇌리에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나만이 없는 수백 개의 거리.

그 처참한 말로가 상상돼 버렸다.

“정말, 미안하다. 수아야. 미안하다.”

미친놈처럼 사죄를 연발했었다.

비단 눈앞에서 죽어가는 수아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정말로 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시간선의 수아들. 내가 사라져 버린 세상의 수아들에게 바치는 뒤늦은 후회였다.

“미안해,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하다.”

쾅. 쾅. 콰앙.

이마가 깨지고, 엉긴 피 속으로 두개골이 드러날 때까지.

바닥에 머리를 있는 힘껏 처박았다.

“…미안하다.”

심지어 수아의 숨이 이미 끊어진 뒤에도. 나의 엽기 행각은 계속되었다.

훤히 드러난 두개골이 박살 나 기어코 내용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그래서 내 숨도 끊어질 때까지.

계속 말이다.

“오빠. 오빠!”

한참 동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어서인가.

수아가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이 양반 또 이러신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태연하고 태평한 수아의 얼굴을 한 번 봤고. 옆에서 시선을 피하는 이브도 봤다.

이브의 덥수룩했던 하얀 머리가, 어느새 정갈하게 땋여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냥. 이것저것.”

“그러니까 이것저것. 어떤 생각이요!”

“어떤 생각이냐면…….”

그래. 다시 물어올 줄 알았다.

수아도 이브도, 두루뭉술한 얼버무림은 역효과가 난다. 이미 회귀를 통해 안다.

그래서 대충이라도 말을 만들어 냈다.

“독수리 부리는 왜 노랄까.”

개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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