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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2화 (132/235)

132화

<1004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

내가 잠든 사이, 이브가 수아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고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브가 말이다.

“그렇구나. 이브한테… 다 들었다고.”

정말 궁금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차라리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봐야만 한다. 지금 열지 않으면 더 늦을지도 모른다.

결심한 나는, 천천히 물었다.

“이브가 너한테. 뭐라 그랬는데?”

직전에 이브가 나한테 보여줬던 멋쩍은 미소. 그게 어째 내내 걸렸다.

제발, 도저히 수습 불가능한 개소리만 안 해놨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 뿐이다.

“그냥 뭐, 이것저것 많이 대화했어요. 이것저것!”

돌아온 대답은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것저것’의 내용물이 궁금하단 소리인데. 노골적으로 추궁하면 의심할 것 같아서 맘 놓고 묻지도 못하겠다.

나는 유난히 푼수처럼 헤실거리는 수아에게, 살짝 돌려서 물어봤다.

“이브가 어떻게, 자기 정체라도 전부 밝혀줬나?”

“네. 당연히 그것도 말해줬죠!”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무심결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체를, 진짜로?”

“그럼요. 초면인데 자기소개는 당연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름도 이미 알고 있죠!”

“아… 자기소개. 그야, 음. 당연하지.”

이어지는 말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체를 밝혔다’라는 물음에 긍정해서 식겁했는데, 그냥 어색함도 타파할 겸 자기소개나 했다는 의미 같다.

내가 가볍게 안도하고 있던 찰나.

“그나저나 저 처음 알았어요. 오빠한테 이런 복잡한 사정이 있는 조카가 있었다니!”

별안간 수아 쪽에서 불쑥 기습해 왔다.

얼굴을 내 쪽으로 한껏 들이대고, 호기심으로 두 눈을 빛내고 있다. 직선적이고 뜨거운 시선이 심히 부담스럽다.

“어. 그래. 뭐…….”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말 안 했어요? 좀 서운한데!”

“그냥. 말해서 뭐하겠냐.”

“하긴. 오빠는 원래부터 자기 얘기 잘 안 하긴 하죠?”

“… 들어서 재밌을 만한 게 없으니까.”

고개를 슬쩍 돌리고 대충 얼버무렸다.

이브가 무슨 변명을 둘러댔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지금 내게 허락된 리액션은 이 정도였다.

그러자니 문득, 수아의 얼굴에 연민이 서리기 시작했다.

“기억 상실 같은 거라고 들었는데. 맞죠?”

“…음?”

“이브가 아까 울면서 말해줬어요. 본인이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면서요? 어디 출신인지, 부모가 누군지도 기억이 안 나는 상태라던데요?”

“아… 음.”

“자기 이름이랑, 이상하게 오빠만 간신히 알아보고. 세상천지에 오빠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면서요!”

‘기억 상실’ 따위의 아침 드라마 발언이 튀어나온 순간. 솔직히 이브에게 김치 싸대기를 후려치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어진 말을 가만히 듣자하니… 의외로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뭐. 대체로 그런… 셈이지?”

그래서 뒷부분은 애매하게 긍정했다.

놀랍게도 ‘기억 상실’만 빼면, 대부분 거짓말이 아니었으니까.

“세상에. 전부 진짜였구나!”

수아는 아찔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이브를 쳐다봤다. 천천히 이브에게 다가간다 싶더니, 이내 이브를 덥석 껴안아줬다.

“너무 힘들었겠다! 괜찮아, 이브? 막 불안하고 그러진 않아?”

“으응……? 으, 응. 나 괜찮아. 멀쩡해.”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언니가 뭐라도 도와줄 테니까. 알겠지? 응?”

“으응. 고, 고마워 언니?”

이브의 어깨를 마구 쓰다듬으며, 따스한 위로의 말들을 쏟아내는 수아.

절절한 동정심이 온몸에서 무럭무럭 솟아나고 있다. 진심으로 이브를 가엾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허, 헛숨을 내쉬었다.

‘…이걸 믿어?’

기억 상실 따위의, 최영 장군 브레이크 댄스 추는 소리를 덥석 믿는다고?

그러면 나는? 지금까지 내 말은 왜 그렇게 이 악물고 안 믿었냐. 내가 했던 수많은 고민들과 구구절절 구질구질한 변명들은 뭐가 되냐고.

‘이건 또, 어디서 온 차이지?’

어디긴. 화자 차이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밖에 없다.

‘…X발. 인생.’

내가 말하는 것과 이브가 직접 말하는 것. 거기서 수아의 신뢰도가 달라진 것이다.

현자 타임이 전에 없이 빡세게 왔다.

“…아빠. 아빠!”

문득, 이브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슬쩍 들어봤다. 이브가 수아에게 바짝 안긴 채, 나를 향해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그녀가 하는 말을 해석해 보니…….

‘나 잘했지?’

…그것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실제로 잘했다.

내가 백 마디, 천 마디 하는 것보다 결과가 훨씬 좋게 풀렸다. 대체 서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심하게 궁금해질 정도다.

“그냥 네가 회귀자 해라, 이브.”

“으엥?”

나는 지나가며 툭 던지듯 말했고. 이해 못한 이브는 순진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살짝 질투가 담긴 농담이다. 뱉어놓고 보니 좀 추했지 싶다.

‘…딸기우유나 줘야겠네.’

괜히 미안해진 나는, 속으로 그런 다짐이나 떠올렸다.

신상필벌. 내 교육 방침이다.

* * *

근래의 회귀 텀이 굉장히 짧아졌음을 실감한다.

1000회차는 4차 붕괴 후 자살. 1001회차 전생은 10차 붕괴. 그 이후 1002회차는 무려 3차에서 컷.

직전의 1003번째 전생은 심지어, 1차 붕괴도 일어나기 전에 죽어버렸다.

‘최근엔 그래도, 웬만하면 15차 붕괴까진 무조건 살아남았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욱 뼈저리게 실감된다.

이딴 게 1003번이나 루프를 반복한 회귀자? 지나가던 외계인 이브도 웃겠다.

애초에 한 번 더 돌아왔으니, 이제 1004번째구나.

“…천사(1004)인가.”

어감은 좋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회차다.

물론 이딴 미신을 진지하게 믿는 건 아니지만.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기원이다.

“응? 아빠. 나 보고 한 말이야?”

그런데 그 순간. 이브가 내 혼잣말을 듣고 반응해 왔다.

그녀가 힘 풀린 얼굴로 배시시 웃었고. 눈에 띄게 방방 뜬 기색으로 대꾸해 왔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처, 천사라니. 너무 띄워주잖아! 으흐.”

이브가 멋쩍은 듯이 온몸을 배배 꼬았다. 그리고 입은 옷들을 한참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스커트 자락을 팔랑이며, 짐짓 모델처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이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치장한 상태였다.

“근데 뭐, 나도 이 옷들 마음에는 들어! 엄마는 패션 센스가 좋네, 응!”

이브는 수아가 특별히 코디해 준 복장을 입고 있었다.

흰색 계열의 폭이 넓은 블라우스와 카디건.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 그리고 검은 스타킹까지.

내가 패션에 대해 해박한 건 아니지만. 이브 특유의 순진무구한 분위기를 한층 북돋아 주는 느낌이었다.

“으음.”

꽃단장한 이브를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봤을까. 나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약간 고심한 끝에, 하려던 말을 고이 삼켰다.

‘그냥 저대로 두는 게 맞겠지.’

‘천사인가.’라는 혼잣말을, 이브가 자기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질색했으면 모르겠는데, 본인도 저렇게 좋아 죽는다. 굳이 혼잣말이었다고 정정할 필요가 있을까?

실제로 지금 차림새가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착각하게 냅두자.

‘이놈의 혼잣말 습관.’

오히려 문제는 그쪽이다.

고친다고 결심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틈만 나면 술술 나온다. 다음에 이브한테 또 걸리면 어떤 타박을 들을지 모른다.

‘그나저나.’

나는 아까부터 이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브가 입고 있는 옷들에 시선이 박힌 것이다.

“…….”

옷들의 출처는 코디네이터인 수아 본인.

그녀가 이브만 할 때 입던 옷가지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브의 차림새는 내게도 상당히 익숙한 모습이다.

익숙하다 해야 하나. 사무치게 그리운 차림새였다.

“저건 거의… 잊고 있었는데.”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영원회귀 이전 시절.

오랜만에 그 편린을 맛봤다. 바래 가던 그 시절의 형상. 까마득한 과거의 강수아들이, 다시금 선명하게 뇌리에 떠오른다.

눈앞의 이브 위로 어린 수아가 어른거렸다.

“응? 잊고 있었다니?”

이브는 유독 내 혼잣말에 반응이 귀신같았다.

또 혼잣말을 해버렸다. 반쯤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라 뒤늦게 깨닫고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이브의 호기심은 발동해 버렸다.

“아빠. 잊고 있었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아.”

“뭘 잊었는데? 내가 뭘 떠올리게 했어? 응?”

“그냥, 좀.”

“첫사랑? 첫사랑인 거야? 아핫, 그런 거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제야 넋 놓고 있던 정신을 부여잡았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고.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과거의 수아를 흩어버렸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황급히 주워섬겼다.

“헛소리 좀 했다. 신경 쓰지 마.”

“아, 뭐야. 또 그냥 혼잣말이야?”

“그래. 미안하다.”

“아니. 미안할 건 없지만……. 좀처럼 고쳐지질 않네? 그 이상한 습관.”

“그러게 말이다.”

수아의 잔상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다시 툴툴거리는 이브가 등장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햄스터 놔주러 가야겠다.”

이상하다.

원래는 수아와 대화할 때마다 떠오르던 루틴이었는데.

저 차림으로 볼을 부풀린 이브를 본 뒤. 나도 모르게 그 생각을 떠올렸다.

* * *

그날은 옷 갈아입히기로 신난 수아와, 패션쇼로 신난 이브의 콜라보로 하루를 마감했다.

방청객으로 붙잡혀 있던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본인들이 즐거웠다면 딱히 할 말도 없고. 불만도 없었다.

천금 같은 휴일을 꼴딱 날렸음에도 관대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지금처럼 순수하게 즐거울 일 같은 건. 앞으로 절대 없으니까.’

그렇게 즐거운 시간은 용서 없이 흘러갔고. 다음 날… 최초의 게이트 붕괴일이 밝았다.

나는 이브와 함께 용산 전자 상가에 나와 있었다.

“아빠아.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이른 아침부터 주야장천 대기한 탓에, 이브가 틈만 나면 징징거렸다.

처음 몇 번은 위로도 해주고 격려도 해줬지만, 그것도 원투데이지. 슬슬 반응해 주기도 지쳤다.

“…….”

그저 침묵으로 일관. 반쯤 무시해 버렸다.

내 반응이 시들해진 것을 이브도 당연히 눈치챘다. 그녀는 고개를 팩 돌리고, 혼자 땅을 보며 꿍얼대기 시작했다.

“하아. 다리 아파. 힘들어……. 진짜 싫어. 짜증나아…….”

꿍얼꿍얼 지랄지랄.

아가리가 불평불만을 쉬지 않는다. 살아 숨 쉬는 불만제로 그 자체.

뭔가 이럴 거 같아서 이브를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차피 1차 붕괴니까, 집에서 대기나 하라고 한사코 만류했다.

‘…아득바득 쫓아온 건 너잖냐, 이브.’

자기가 꼭 붙어있어야 날 지킬 수 있다더니. 그때의 열의와 고집은 어디로 갔나.

본인이 내뱉은 말에 슬슬 책임을 질 나이가 아니냐, 이브.

“후우.”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말해 뭐 하고 생각해 뭐 하냐. 쓸데없는 언쟁으로 이어질 게 뻔해서 관뒀다.

‘뭐… 1차는 평소처럼 3분 안에 조진다 치고.’

이브의 불평에 반응이 점점 없어진 건, 비단 불평불만이 지겹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침묵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진짜 중요한 건 다음 붕괴. 2차의 랜덤성 던전부터야.’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소위 말하는 빅 픽처. 앞으로 내 영원회귀의 청사진을 그리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전생이 비록 엄청 짧게 끝났지만. 얻은 건 많았지.’

전생에서 얻은 실마리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총 여섯 개의 수수께끼 문장들. 그것이 가리키는 존재들은 던전의 비밀이나, 내가 겪는 영원회귀와 분명히 관련이 있을 거다.

그리고 그 문장 중의 일부인 ‘주저앉은 광대’와 ‘죽어버린 왕의 옥좌’.

‘그중에서 옥좌라는 건… 나였고.’

반면 애덤 크로스는, 무려 ‘히든 던전 마스터’라는 ‘주저앉은 광대’의 숙주였다.

‘주저앉은 광대’는 애덤 크로스의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폭주해서 날뛰는데. 통상적인 방법으론 절대로 쓰러뜨릴 수 없었다.

‘그 유일한 대항마도, 나였다.’

왕의 옥좌.

내가 뭔가를 해야 ‘주저앉은 광대’를 무력화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던전의 시스템이 직접 공인했다.

그러니 그놈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내 쪽에서 뭔가 ‘준비’를 해 가야 한다.

‘그리고 다른 네 문장의 주인공이 어디 있는지는… 아직까진 불명.’

사실 어디 있는지는 고사하고 정확히 뭘 뜻하는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몬스터일 수도 있고. 아이템일 수도 있고. 나나 애덤 크로스처럼 사람일 수도 있겠지.’

다만, 단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다.

당장 짚이는 곳이 하나 있었다.

“귀머거리 토끼.”

정확히 뭔지는 역시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지까지.

적어도 그건 내가 확실히 알고 있다.

“…때가 됐구만. 드디어.”

나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며 혼잣말을 했다.

이브가 지친 와중에, ‘저 새끼 또 지랄이네’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본다.

그럴 테면 그러라지. 지금은 마음껏 비웃으라 그래라.

나는 아랑곳 않고, 그녀가 못 듣게 숨죽여 중얼거렸다.

“드가자. 자살런.”

‘귀머거리 토끼’라는 아이템의 현 소유자, 던전 마스터 에티를 만날 때까지.

정확히는 그녀를 세 번 만나고, 세 번 자살시킬 때까지.

자살런을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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